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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조선왕릉박물관

조선왕릉박물관은 태릉 입구에 있으며

국장 절차 · 조선 왕릉의 건설 방법 · 부장품 · 조선왕릉에 담긴 역사와 문화 · 산릉 제례를 포함한 왕릉 관리 등 상세한 사항과

왕과 왕비가 사망한 후 왕릉에 묻히기까지 국장 절차가 전시되어 있다

 

 

조선왕릉전시관

석호 · 석양 · 석마 등 석물이 앞에 있다

 

 

 

 

옛 완친왕 묘 석물 · 신도비(舊 完親王 墓 石物 · 神道碑)

조선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과 영보당 귀인 이씨의 아들 완친왕(1869~1880)의 옛 무덤에 있던 석물이다

완친왕은 고종의 첫째 아들로 1868년(고종 5)에 태어나 9세에 완화군에 봉해졌고 1880년(고종 17)에 천연두를 앓아 1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7년(융희 1)에 완친왕으로 추봉되었다

묘는 처음에 양주 남쪽 월곡(지금의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만들어졌다가 광복 후 도시화개발로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문석인은 미소를 짓고 있으며, 머리에 금관을 쓰고 조복을 입었다

장명등과 망주석은 모두 사각형 받침돌에 구름 모양의 다리가 장식되어 있다

무덤의 주인과 제작 연대가 알려진 왕실 무덤 석물의 드문 예로 형식적이고 화려한 19세기 후반 무덤 석물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

완친왕의 생애를 기록하여 무덤에 세웠던 신도비이다

묘비 제목은 「왕자 완화군 증시 효헌공 신도비(王子 完和君 贈諡 孝憲公 神道碑)」로 완화군은 왕친왕이 세상을 떠날 당시의 봉호이고, 효헌은 시호이다

전서체로 쓴 제목은 조경호의 글씨이고, 비문은 조성하가 지었으며, 글씨는 이재면이 썼다

비문에는 완화군이 사망하여 3월 9일에 왕성 동쪽 월곡에 무덤을 만들었다는 내용과

완화군이 효성스럽고 자질이 탁월했으나 일찍 죽어 왕실에서 매우 슬퍼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곳곳에 남아 있는 총탄 흔적은 한국전쟁 때 생김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왕릉전시관

 

 

 

 

세계의 왕릉

중국 · 일본 · 베트남 · 이집트의 왕릉이다

 

 

 

 

세계유산 조선왕릉

조선왕릉은 조선(1392~1897)의 왕과 왕비 그리고 대한제국(1897~1910)의 황제와 황후 73명의 무덤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모두 42기가 있는데, 이처럼 500년 넘게 이어 온 왕조의 모든 왕과 왕비의 능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이다

2009년에는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전시실로 들어가는 벽 사진이다

 

 

 

 

조선왕릉 일람표

조선 1대 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 대한제국 1대 고종부터 2대 순종까지 재세(在世) · 재위(在位)의 기간과 왕실 계보를 보여 준다

 

 

 

 

조선왕릉 무덤의 종류 / 능 · 원 · 묘

조선 왕실 인물의 무덤은 신분에 따라 이름 · 규모 · 장식하는 석물의 수가 달랐다

*

능은 왕과 왕비 · 황제와 황후의 무덤이다

파주 장릉에는 망주석 한 쌍 · 혼유석과 장명등 · 문석인과 석마 · 무석인과 석마 · 석호와 석마 각 두 쌍

정자각 · 비각(표석) · 수라간 · 수복방 · 재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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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은 왕의 친부모 · 왕세자와 왕세자빈 ·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무덤이다

휘경원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없고 석호와 석양은 각 한 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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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는 왕족과 후궁 · 폐위된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안빈묘에는 망주석 한 쌍 · 혼유석과 장명등 · 표석 · 문석인 한 쌍 · 동자석 한 쌍이 있고, 제향공간은 없다

 

 

 

 

조선왕릉 공간 구성

 

 

 

 

향합(香盒) · 향축궤(香祝櫃)

향을 담아두는 제기와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에서 사용한 향과 축문을 담는 상자이다

왕릉 제향 때 사용할 향과 축문은 향축궤에 담아 재실의 향대청에 봉안하였다가 제향 때 정자각으로 받들고 갔다

 

 

 

 

재실의 기능

재실은 왕릉 관리자인 능관이 일하는 건물로, 넓게는 제향을 준비하는 모든 공간을 뜻한다

제향을 준비하는 공간은 제향 음식을 준비하는 전사청 · 제향에 사용하는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향대청(향안청)으로 나뉘며

각 공간은 행랑과 담장으로 구분한다

재실에서 근무하는 능관에는 주로 종9품 참봉 2명을 임명했다

조선 후기에는 때에 따라 능관 둘 중 한 자리에 종5품 영이나 종7품 직장 · 종8품 별검 등 더 높은 관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능관의 주된 임무는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침을 비롯하여 능에 딸린 산림을 지키며 빈틈없이 제향을 지내는 것이었다

이들은 능침과 삼림을 5일 간격으로 순찰하고 이상이 있으면 예조에 보고해야 했으며, 이를 어기면 문책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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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 있는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 재실은 조선왕릉 재실의 기본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왕릉의 일꾼들

조선시대 왕릉을 관리하는 능관을 돕는 일꾼으로 서원 · 청직 · 수복 · 부목 등을 두었다

수복은 매일 능침과 정자각 · 비각 · 수라간을 청소하고, 밤낮으로 정자각 뜰에서 능을 지켰다

이들은 능관에게 매일 아침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고하고 저녁에는 숙직을 보고했다

 

 

 

 

조선왕릉 제향 준소상

 

 

 

 

조선왕릉 제향 음식

왕릉제향은 정자각에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지낸다

조선 전기 왕릉의 제향은 크게 계절의 변화에 따라 지내는 사시제(네 계절의 첫날)와

속절제(정월 초하루 · 한식 · 단오 · 추석 · 동지 · 납일), 삭망제(음력 초하룻날 · 보름날)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왕릉에서 지내는 사시제를 없애고 앞서 돌아가신 왕과 왕비의 기일에 지내는 기신제를 지냈다

그 밖에 비정기적으로 왕이 선왕의 능을 방문했을 때나 능을 수리할 때와 같이 돌아가신 왕과 왕비에게 고할 일이 있으면 제향을 올렸다

왕릉 제향 음식은 고기류를 사용하지 않고, 곡류나 채소로 만든 소선(素膳)을 올리는 점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중앙 관청인 봉상시에서 떡과 과자 · 면과 탕 · 제철 과일과 술 등을 만들어 올렸다

봉상시 소속 요리사인 숙수를 각 왕릉의 제향 음식을 맡도록 지정하여, 왕릉에서 제향을 지낼 때 직접 음식을 해당 왕릉으로 가져가게 했다

왕실 제사에 사용하는 떡과 과자의 조리법은 봉상시에서 펴낸 책인 「태상지(太常誌)」에 실려 있다

 

 

 

 

조선왕릉 제향 준소상

준소상은 준소(樽所)에 놓는 상이다

준소란 제향을 지낼 때 신에게 올릴 술을 담은 항아리를 놓는 자리를 말하며, 왕릉 제향에서는 정자각의 배위청 동쪽에 둔다

왕릉에서 선왕과 왕비의 기일에 지내는 제사에서는 술잔을 세 번 올리므로 이에 맞추어 준소상에도 산뢰(山罍)라는 술항아리 3개를 둔다

산뢰에는 청주(쌀누룩 · 물로 빚어 만든 맑은 술)를 담고, 멱(羃)이라는 덮개를 덮은 후 술 뜨는 국자인 작(勺)을 올려 둔다

 

 

 

 

조선왕릉 제향 상차림

1873년에 펴낸 「태상지(太常誌)」에 나오는 왕릉에서 기일에 지내는 상차림 그림을 재현한 것이다

봉상시는 조선시대 국가의 제사에 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며

「태상지」에는 붕상시의 연혁과 하는 일, 제향 음식의 조리법과 놓는 방법 등이 나와 있다

왕릉 제향 의식은 축시(오전 1시~3시)에 시작하는데, 향을 피워 신을 부르는 삼상향, 신 앞에 술을 올리는 헌작

신에게 드리는 글인 축문을 읽는 독축이 주요 절차이다

기신제는 왕이 직접 첫 잔을 올리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대부분 신하를 보내 대신 올리게 했다

 

 

 

 

조선왕릉 제향 상차림 · 제향음식을 담는 제기(祭器)의 종류

 

 

 

 

홍살문(紅箭門)

신성한 장소를 보호하는 구실을 하며 주로 사당이나 관아 · 향교나 서원 · 왕릉 등에 세웠다

대개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두 개 위에 가로대를 놓고 화살 모양의 나무살을 가로대 위에 꽂으며 가운데에는 태극 문양과 삼지창 장식을 하였다

 

 

 

 

신도비와 표석

왕릉에 세워진 비석에는 신도비와 표석이 있다

신도비에는 왕의 업적을 나열한 긴 글인 서문과 업적을 찬양하는 노래글을 새겨넣었다

신도비는 북한에 있는 환조(태조의 아버지) 정릉과 태조의 첫 번째 왕비 신의황후의 제릉을 시작으로

태조 건원릉 · 태종 헌릉 · 세종 영릉까지 조선 초기에만 만들었다

그러다가 문종의 헌릉을 만들 때부터 왕의 업적은 실록에 기록되니 신도비가 필요 없다는 주장에 따라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는 왕릉의 신도비를 대신하여 표석을 세우기 시작했다

표석 앞면에는 왕릉에 묻힌 왕이나 왕비 · 그리고 왕릉의 이름을 적고, 뒷면에는 생년월일과 재위기간 · 왕릉을 만든 날과 위치 등을 간략하게 적었다

표석은 효종의 영릉에 처음 세웠으며 영조 재위기간(1724~1776)에 가장 많이 세웠다

표석은 능 주인의 신분이 바뀌어도 추가로 만들었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1899년에 선왕들을 황제로 추존하면서 왕릉에 그 내용을 적은 표석을 추가로 세웠다

 

 

 

 

능침공간의 구성

왕과 왕비를 모신 봉분이 있는 곳인 능상과 침전인 정자각을 합쳐 능침이라고 부르며, 능상 주변만을 능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능침 공간은 3개의 단으로 나누어져 있다. 가장 윗단에는 봉분이 있다

봉분이 있는 구역의 동쪽 · 서쪽 · 북쪽 세 면을 감싸도록 곡장이라는 담장을 두른다

왕과 왕비의 관을 모신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러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는 것은 물론, 이곳에 문양을 새겨 장식하기도 한다

봉분 주위에는 나쁜 기운이 침입하는 것을 막는 의미로 호랑이와 양을 돌로 조각해 두는데 이 석양과 석호를 봉분 양쪽에 두 쌍씩 바깥쪽을 향해 놓았다

봉분 앞에는 석상(혼유석)을 놓고, 혼유석 양쪽에 망주석이라는 돌기둥 한 쌍을 세웠다

중간 단에는 각각 문석인과 석마 한 쌍을 서로 마주보게 두는데, 석마는 문석인을 따르는 모양새로 문석인 남쪽 조금 뒤에 놓았다

중간 단 중앙에는 장명등을 세웠다

마지막 단에는 무석인과 석마 한 쌍을 문석인과 같은 형식으로 세웠다

이러한 능침 공간의 구성은 고려왕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조선 1대 왕인 태조 건원릉을 만들 때 완성되어 큰 변화 없이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26대 왕 고종이 황제국임을 내세우며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에 만든 능은 석물의 종류와 배치가 황제릉 형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왕릉 동영상

 

 

 

 

2전시실

 

 

 

 

조선 왕실의 국상

빈전도감(殯殿都監)

발인 전까지 약 5개월간 왕의 시신을 모셔 놓는 곳인 빈전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기관이다

왕의 관인 재궁을 준비하고 염습과 상복 등을 준비한다. 빈전은 대여가 궁궐을 떠날 때까지만 유지된다

왕의 시신을 왕릉에 모신 뒤에는 혼전을 세워 신주를 모셔 두고 3년상이 끝나 종묘에 모실 때까지 제사를 올리는데

빈전도감이 혼전의 관리를 맡기도 하고, 시기에 따라 따로 혼전도감을 세운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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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도감(國葬都監)

장례를 총괄하며 발인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만들고 빈전에 모셨던 재궁을 왕릉으로 옮기기까지 모든 의례를 담당한다

대요와 가마 등 발인 때 필요한 운반 도구 ·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장물 · 왕릉 안에 묻을 부장품

돌아가신 왕의 행적을 살펴 올리는 이름인 시호를 새긴 책보(옥으로 만든 책과 금동으로 만든 인장), 지석 등 장례에 필요한 물품은 국장도감에서 만들었다

국장도감은 승하한 날로부터 장례 뒤 우제(선왕의 신주를 왕릉에서 모셔와서 처음 지내는 제사)가 끝날 때까지 약 5개월 동안 유지되었다

*

산릉도감(山陵都監)

돌아가신 왕을 모실 무덤인 왕릉을 조성하는 기관이다

국상이 난 후 약 5개월 동안 명당을 골라 왕릉자리를 정하고, 산릉 일대의 토목공사와 정자각 등의 건축공사를 진행하였다

또 각종 석물을 만들어 설치하고, 장례가 끝나면 왕릉 주변 환경을 정리하는 등 왕릉 조성에 필요한 모든 일을 맡았다

때문에 산릉도감은 세 도감 중 가장 많은 인원과 비용을 썼다

 

 

 

 

조선 왕실의 국상

조선에서는 국왕부터 서민까지 모두가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상을 치렀다

국상 역시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이를 슬퍼하며 시신을 능에 모시고

신주를 만들어 왕실 사당인 종묘에 모시는 등의 모든 절차를 치르는데 약 27개월이 걸린다

 

 

 

 

조선왕릉의 부장품

부장품이란 무덤 안에 시신과 함께 묻는 물건을 말한다

조선왕릉에도 왕이나 왕비의 관(재궁)을 모시고 나서 흙으로 메우기 전에 다양한 부장품을 함께 넣었다

부장품의 종류에는 돌아가신 분을 위로하고자 예물로 올리는 옥(증옥)과 비단(증백), 애도의 글을 옥에 새겨 만든 책, 생전에 착용했던 옷과 장신구인 복완

그리고 사후 공간을 위해 평소의 생활을 나타내는 물건을 작게 남든 명기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생전에 짓고 읽었던 책과 붓 · 벼루 등의 문방사우를 넣기도 했다

 

 

 

 

조선왕릉의 부장품

 

 

 

 

정조 발인 행렬 중 부장품을 운반하는 가마 행렬

 

 

 

 

조선왕릉에 대한 기록들

조선왕릉을 짓고 관리하는 일에 대해서는 상세한 문헌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왕릉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의궤로 남겼고, 완성된 왕릉을 관리하는 일에 대해서는 능지(陵誌)를 참고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 덕분에 조선왕릉은 긴 세월 동안 고유의 형태를 유지하며 보전될 수 있었고

현재의 우리들이 발굴조사 없이도 왕릉의 내부 구조와 조성 방법을 알 수 있다

왕릉이 완성된 뒤의 모습은 왕릉 관리자인 능관이 작성한 능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능지는 왕릉마다 작성했다

왕릉의 연혁, 건물의 종류와 위치, 관리 인원수, 재산내역 등 각 왕릉의 실태와 산림보호 방법, 능역 청소 및 제향절차 등의 관리지침을 능지에 상세히 적어

뒤이어 임명된 능관이 이를 참조하여 각 왕릉을 유지하고 보전할 수 있게 하였다

 

 

 

 

조선왕릉 조성 과정

왕릉을 만들 때는 먼저 산릉도감을 꾸린 뒤, 산릉도감의 관원이 풍수를 아는 지관을 데리고 왕릉을 만들기 좋은 자리를 찾아다니는 일부터 시작한다

다음 왕이 여러 후보지 가운데 가장 좋은 곳을 골라 능지로 삼기를 허락하면

산릉도감에서 능역 사방에 경계를 표시하고 그곳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뒤 공사를 시작한다

왕릉공사는 왕의 관을 능으로 모시는 발인 날에 맞춰 약 5개월 동안 진행하며

발인이 끝나 왕의 관을 능에 모시고 나면 이튿날 산릉도감에서 마지막으로 능침을 살피고 왕릉 공사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면서 끝이 난다

왕릉 공사가 끝나면 산릉도감에서 다른 관청과 주고받은 문서와 각 작업장에서 작성한 일지를 모아

「산릉도감의궤」를 펴내 후대에 왕릉 조성에 참고할 수 있게 하였다

 

 

 

 

조선왕릉의 보존과 관리

조선시대에는 왕릉마다 관원을 파견하여 철저하게 관리하도록 하였다

왕릉에 파견된 관원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왕릉 제향의 준수와 능역 보존, 그리고 산림보호였다

이들은 제향일이 다가오면 물품을 정비하고 능역을 청결히 하는 일에 더욱 신경 써야 했으며 모든 절차를 숙지하고 빈틈없이 제향을 진행해야 했다

또한 왕릉의 모든 공간을 왕릉을 만들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도록 관리해야 했다

능상과 정자각, 비각은 5일 간격으로 살폈으며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수시로 살펴 수리가 필요할 경우 즉시 예조에 보고했다

왕릉을 수리하면 당시 능관의 이름을 장부에 적고 4년 안에 탈이 나면 이들에게 책임을 물어 수리를 다하도록 본보기로 삼았다

조선 후기 인구가 늘고 온돌이 널리 퍼지면서 땔감으로 쓸 나무를 베어가는 일이 심해졌다

이에 정조는 1798년 명을 내려 모든 능 · 원 · 묘에 정기적으로 나무를 심고 예조에 보고하도록 법을 정했다

이에 따라 능관은 해마다 3월과 10월에 소나무 심은 수와 도토리 심은 밀도를 보고했다

 

 

 

 

헌릉지(獻陵誌) / 대한제국

 

 

 

 

정조가 서유린에게 내린 왕명을 적은 현판 / 1798년 국립고궁박물관

 

 

 

 

영조가 명릉을 참배하고 지은 글을  새긴 현판 / 1758년 국립고궁박물관

 

 

 

 

헌릉 관인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 초기에는 왕릉에서 삭망제(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제사)와 사시제(계절마다 지내는 제사)를 지내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왕릉의 수가 늘어나자 제향을 감당하기 어려워 점차 횟수를 줄였다

왕릉 제향은 17세기 인조와 효종 대에 점차 간소화되어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등에 지내는 기신제만 지내게 되었다

대한제국 2대 황제 순종은 1908년 왕릉에서 절향 1회와 기신제만 지내도록 제도를 정비했고

이에 따라 일제강점기에도 조선 왕실의 업무를 맡아 했던 기관인 이왕직에서 왕릉 제향을 이어 갔다

광복 이후에는 혼란한 상황 속에 왕릉 제향이 중지되었다가 점차 각 능의 봉향회가 꾸려져 왕릉 제향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현재 각 능에서는 능에 모신 왕과 왕비의 기일에 맞춰 기신제를 지내는 전통을 잇고 있으며

이러한 점이 바로 조선 왕릉이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 인정받는 이유이다

 

 

 

 

강명달 광릉 참봉 임명장 / 1762년

 

 

 

 

조선왕릉 문석인과 무석인의 변화

조선왕릉을 만들 때는 왕과 왕비를 모신 봉분 주위에 다양한 석물을 만들어 세웠다

그 중에서도 왕을 보좌하는 문관과 무관을 조각한 문석인과 무석인은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

왕릉에 두 쌍씩 배치한 문석인과 무석인은 조선왕릉을 만들어 왔던 500여 년 동안 크기와 형태가 다양하게 변했다

문석인의 크기를 「국조오례의」에서는 8척 3촌(약 2.5m)까지 커지기도 했다

조선 중기에는 적어도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크기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8세기 전반이 되면 6척(약 1.8m)도 채 안될 만큼 작아지는데, 이러한 현상은 숙종의 영향으로 추정한다

숙종은 많은 능을 만들면서 크기도 작고 생김새도 단순한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석물이 보기에 가장 좋다며 후릉의 제도를 따르도록 지시했다

영조도 1744년 숙종의 능인 명릉을 고칠 때 숙종이 정한 규정에 따라 후릉을 모범으로 삼으라고 명하여 석물의 크기가 작아졌다

그런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현륭원(후에 융릉)을 만들 때

이전 왕릉들보다 규모를 키우고 석물도 섬세하게 조각함으로써 문석인의 크기가 다시 8척에 가깝게 커졌다

이 크기가 19세기에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20세기 초 조선을 이은 대한제국 시기의 황제릉인 홍릉과 유릉에는 3m가 넘는 문석인과 무석인이 제작되었다

 

 

 

 

태릉과 강릉의 역사와 공간

태릉은 조선 11대 왕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의 능이고, 강릉은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이자 조선 13대 왕인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이다

1565년 태릉이 조성된 후, 1567년 명종의 강릉을 태릉 동쪽에 모시면서 가까운 곳에 두 왕릉이 놓이게 되었다

태릉과 강릉의 능역은 광복 이후 현대 도시개발 과정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특히 1966년 6월 능역 내에 국가대표 운동선수 및 일선 지도자의 합숙훈련을 위한 시설인 태릉선수촌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태릉선수촌은 수영장, 스케이트장 등 각종 훈련시설과 기숙사를 갖춘 국립 종합스포츠훈련센터로서

올림픽 등 국제경기대회에서 우리나라가 좋은 성적을 올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태릉과 강릉의 본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철거 이전이 예정되어 있다

 

 

 

 

명종과 인순왕후의 강릉

조선 13대 왕 명종(1534~1567 · 재위 1545~1567)과 인순왕후 심씨(1532~1575)의 능이다

명종은 11대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로, 이복형인 12대 왕 인종이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1545년 12살에 왕위를 이었다

인순왕후는 1542년(중종 37) 명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경원대군 시절에 혼례를 올렸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되었다

1551년(명종 6) 순회세자(1551~1563)를 낳았으나 세자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 명종의 대를 잇지 못하게 되자

하성군(14대 왕 선조)을 양아들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였다

1567년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3년상을 마치고 며칠 뒤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문정왕후의 태릉 동쪽 언덕에 능을 만들어 모셨다

조선 전기 의례서 「국조오례의」를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갖춰 만들었으며

이후 1575년 인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명종 옆에 나란히 봉분을 만들어 모시고 두 능을 합쳐 강릉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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