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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동작구 역사공원길

동작구 역사공원길은 노량진역을 시점으로

사육신공원 · 노들나루공원 · 봉양봉저정 · 용봉정근린공원 · 학도의용군현충비 · 효사정 · 흑석역을 잇는 길이다

 

 

노량진역

1899년 우리나라 최초로 철도 경인선(노량진~인천) 개통할 때 시종착역으로 개통한 역이다

1899년 9월 18일 인천역에서 진행된 경인선 개통식에 참석하는 귀빈들을 태우기 위한 열차가 도착한다

"화륜거의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연기는 하늘 높이 솟아 오르더라

차창에 앉아 밖을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움직이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1899년 9월 19일 발행된 독립신문은 시속 20km로 노량진과 인천을 달리던 열차를 보고 이와 같이 표현했다

한강철교가 완공되기 전 노량진역은 경인선의 시종착역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한 철도시발지 기념비가 역 구내에 건립되어 있다

 

 

 

 

노량진역 철도박물관

노량진역 안에 철도 관련 물품과 사진들을 전시해 놓았다

 

 

 

 

노량진역 역무실

코레일에서는 노량진역을 시작으로 노량진~제물포 간 7개역

(노량진 · 오류동 · 소사 · 부평 · 도원 · 축현 · 제물포)을 옛 모습으로 복원할 예정이라 한다

 

 

 

 

통일호(統一號)

1899년 경인선을 시작으로 한국에 철도가 개통된 이래 여러 번에 걸쳐 변화를 거듭했다

1906년 융희호(隆熙號)로 불리다가 1936년 일본에서 특급열차인 히카리호(光號)가 도입되어 부산 - 만주 구간을 운행하였다

이어 일제에 의해 아카츠키호(曉號)로 고쳐 부르다, 8 · 15광복 후 조선해방자로 고치면서 한국어 이름을 되찾았다

1955년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아 통일호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통일호라는 명칭으로는 1955년부터 2004년 3월까지 전국 65개 노선 · 636개 역에서 운행되었다

새마을호가 등장하면서 열차 등급 개정 때 '특급'에서 '급행'으로 낮추어졌고

비둘기호가 이용객이 줄고 단거리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통일호가 이를 대체하게 되었다

2000년 11월 비둘기호가 없어진 뒤에는 가장 느린 객차가 되었고, 2004년 4월 고속철도 개통과 함께 통일호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철도의 역사

1974년 8월 15일 수도권 전철 개통 사진 등 철도의 역사 사진들이 걸려 있다

 

 

 

 

노량진 수산물도매시장 육교

구)노량진수산시장 비대위가 농성중이다

 

 

 

 

노량진 수산물도매시장 육교

 

 

 

 

노량진동 안내판

노량진이란 이름은 백로가 노닐던 나루터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 지금의 용산에서 수원 방면으로 가려면 노들나루를 이용하였는데

이곳에 도성을 지키기 위하여 「노량진」이 설치되어 마을 이름을 노량진이라 부르게 되었다

 

 

 

 

노량진 컵밥거리

노량진 고시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싸고 맛난 음식을 파는 거리식당이 있다

 

 

 

 

철도시발지(鐵道始發地) 빗돌

1899년 9월 18일 철도역사의 장이 열리고 경인간 33.2㎞의 철도가 뚫린 그 날로부터 76주년

철마라 불리우던 증기시대를 거쳐 디젤기관이 철길을 누비더니 이어 전철의 막이 휘날리며 철도가 반석 위에 오른 오늘을 못내 그날의 감격을 되새기며

유서 깊은 철도 효시의 요람지 여기 한강 마루에 이 기념비를 세워 기리 새 모습의 철도를 기리리라

기단 뒷면에 휘호 국무총리 김종필 · 글 시인 서정주 · 1975년 9월 15일이라 적혀 있다

 

 

 

 

사육신공원 홍살문

사육신을 의미하는 육각형 주추의 홍살문이다

충신을 기리는 홍살문 안으로 의절사 불이문이 보인다

 

 

 

 

사육신공원 조망대

사육신공원 조망지점 안내판이 앞에 있다

 

 

 

 

한강철교

사육신공원 조망대에서 봤다

 

 

 

 

63빌딩 방향

 

 

 

 

한강방어선 노량진 전투지 안내판

6 · 25전쟁 발발 직후 국군 제7사단이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잇는 노량진 일대에서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지연시키며 전투를 벌인 곳이다

1950년 6월 28일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국군은 한강교량을 폭파해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시간을 벌고자 했다

6월 30일 북한군의 침투로 제7사단은 수도고지(노량진 수원지 일대)에서 북한군과 백병전을 벌이고

7월 1일 39고지(사육신묘)와 월파정(수산시장)에서 공방전을 펼치는 등 한강방어선 전투의 최일선에서 싸웠다

당시 노량진 전투지에서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고 후대에 알리고자 한다

 

 

 

 

사육신역사관

단종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전시관이다

*

일요일 · 월요일 휴관이다

 

 

 

 

의절사(義節祠)

조선 제6대 왕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에 반대해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은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 김문기 등의 일곱 충신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의절사에서는 이들 7명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10월 9일 추모제향을 올린다

*

조선시대에는 노들섬이 있던 백사장에 배를 만들던 조선소가 있었다

조선소 인근에는 역적이나 중죄를 지은 죄인을 참수하는 형장이 있었다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다 실패한 사육신도 이곳에서 참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도비각(神道碑閣)

 

 

 

 

하위지 · 성삼문 · 유성원의 묘

 

 

 

 

하씨지묘(河氏之墓 · 하위지)

성삼문 · 유응부 · 이개 · 하위지 등과 이미 옥중에서 죽은 박팽년과 집에서 자결한 유성원의 시신도 거열(車裂) 당했다

 

 

 

 

이개지묘(李氏之墓 · 이개)

이개 · 유응부 · 박팽년 묘이다

 

 

 

 

김씨지묘(金氏之墓 · 김문기)

원래 이곳에는 박팽년 · 성삼문 · 유응부 · 이개의 무덤만 있었으나

그후 하위지 · 유성원의 가묘를 조성하고 그 후 김문기의 가묘도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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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8년 사육신묘를 성역화하기 얼마 전

김문기의 후손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유응부가 아니라 김문기가 사육신의 한 사람이라는 진정을 냈다

그 근거는 「세종실록」에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성삼문 등 다섯 사람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었다

한 달 이상 고심하던 국사편찬위원회는 기존의 사육신묘에 김문기의 가묘(假墓)를 추가하는 것으로 결정을 했다

「김문기의 행적을 인정하고 현창하되, 사육신은 그대로이다」라는 어쩡쩡한 결론과 함께

그러나 이 문제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찬반양론이 벌어졌으며 신문 지상에 논설이 게재되어 논란을 만들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김문기의 18대 후손이었기에 국사편찬위원회가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가 인정하는 사육신에는 김문기는 제외된다

 

 

 

 

노량진1동

 

 

 

 

주추석 아래 경사면에는 문인석 두 구가 있다

한 구는 허리춤까지 땅에 묻힌 것으로 보아 꽤나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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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지묘 · 유씨지묘 · 이씨지묘 · 성씨지묘라는 표석이 있는 네 개의 묘 뒤에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사육신의 충절을 추모하여 숙종이 이곳에 민절서원을 세우고 정조는 비석을 세웠다

세조 당대는 물론 오랫동안 사육신묘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그러다 이수광은 「지붕유설」에서 사람들이 전하는 말을 빌려 노량진에 성삼문 · 박팽년 · 유응부 3인의 묘가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후 1650 ~ 1670년 사이에 박팽년의 후손 박숭고의 노력으로 육신묘가 국가의 인정을 받았다

그렇지만 유성원 · 하위지의 묘는 이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어 정비하지는 못했다

1950년대까지는 무덤과 비석 등이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다가 1972년 성삼문 · 박팽년 · 유응부 · 이개의 4기 묘가 서울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되고

1977~1978년 정화 사업 때 하위지와 유성원 그리고 1978년 이후 김문기 가묘도 추봉되었다

 

 

 

 

천부교(天父敎)

1917년 11월 22일 평안북도 덕천 출생의 박태선(朴泰善)에 의해 창설된 종교이다

교회 탑에 십자가 대신 비둘기 형상이 있어 일명 「비둘기교회」라고도 한다

 

 

 

 

느티나무

흔히 느티나무는 장수와 마을공동체를 대표하는 수목으로 알려져 있다

이 느티나무는 개발에 의해 수명이 다할뻔한 것을 이식하여 새로운 터전에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모진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고 우뚝 서 있는 이 나무는 「래미안 트윈파크」의 정자목으로 소중히 가꿔야할 나무이다

 

 

 

 

느티나무

오랜 세월을 견디느라 큰 구멍이 뚫려 속이 비었다

 

 

 

 

동작구 역사공원길

동작충효길이기도 하다

 

 

 

 

노들나루공원 야외무대

「노량진 정수장 터 비」가 앞에 있다

 

 

 

 

노량진 정수장 터(1910~2001) 빗돌

예전 노량진 정수장이 있던 자리로 배수지가 철거된 뒤 노들나루공원으로 바뀌었다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

한강방어선 전투는 6 · 25전쟁 초기 서울이 함락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시흥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김홍일 소장) 예하 3개 혼성사단 및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한강 남쪽 및 김포지역에 방어선을 형성하여

북한군 제1군단 예하 보병 4개 사단 및 전차 1개 여단의 한강 도하를 6일간이나 저지시킨 전투이다

이 전투는 서울이 함락되고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한강방어선을 6일간이나 지탱해

전쟁 초기 남진을 계속하려던 북한군의 남침계획에 커다란 차질을 주었다

나아가 미 지상군이 참전할 시간적 여유를 제공함은 물론이고 이후 국군 재편성과 한미연합작전을 가능케 함으로써

북한군에게 새로운 전쟁을 강요한 6 · 25전쟁사에서 성공적인 작전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노량진지구에서 방어 중인 국군

*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 뒤편에 있다

 

 

 

 

한강철교와 끊어진 한강대교

 

 

 

 

노량진 사고 희생자 추모비

올림픽대로 상수도관 이동화공사 중 2013. 7. 15 터널 침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신 고인들의 넋을 위로하며

다시는 이런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다짐하고 기억하기 위해 여기에 추모비를 세우다

영령들이시여 평안하소서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호

이 정자는 정조 때 배다리(舟橋)로 한강을 건너는 전후에 휴식하던 주정소(晝停所)였다

 정조는 효심이 지극하여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가 있는 수원 화산(華山)의 현륭원(顯隆園)을 자주 찾았다

그 때마다 노들강(지금의 한강)에 배다리를 가설하여 건넜는데

시간이 걸렸으므로 잠시 어가(御駕)를 머물게 하고 쉴 자리가 필요하여 이 정자를 지었다 한다

축조연대는 1789년(정조 13) 이후로 보고 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일명 주정소(晝停所)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정문과 누정 등 두세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용양봉저정만 남아 있다

 

 

 

 

노량주교도섭도(용양봉저정 모습) · 정선의 동작진(銅雀津)

 

 

 

 

1795년 정조의 화성행행 〈반차도〉

원래 두루마리 형태였는데, 서울대학교 한영우 교수의 고증에 의해 새로 채색 제작된 것이다

1,700여 명의 인물과 근 800필의 말을 담은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지휘하에 김득신 · 이인문 · 장한종 · 이명규 등 진경시대의 쟁쟁한 화원들의 공동작품이다

 

 

 

 

정조대왕 능행길 · 1975년 화성행차 일정

 

 

 

 

용양봉저정 역사공원 조성 / 2017~2022

용양봉저정 · 용봉정공원 · 사육신공원을 연계한 역사공원 조성사업이다

 

 

 

 

한강수사자조혼비(漢江水死者弔魂碑)

뒷면에 소화4년 6월건 용산기자단 유지(昭和四年六月建 龍山記者團遺志)라 새겨져 있다

*

1929년 용산기자단(용산경찰서 · 철도국 출입기자)한강 익사자를 위해 건립한 위령비다

 

 

 

 

경기민요 「노들강변 」악보 · 노들나루(鷺梁津) 안내판

노량진은 한강 남안, 지금의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사이 강변에 있던 나루터로

옛부터 수양버들이 울창하여 노들나루라 하였고 백로가 노닐어 노량진이라고도 하였다

이 나루는 한양에서 시흥 · 수원 방면을 거쳐 충청 · 전라를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에 있어 조선시대에는 군대가 주둔하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이곳은 나루로서뿐만 아니라 석벽 위에 아담한 봉우리 밑으로 강물이 교교히 흐르고 절경이 펼쳐져

전국의 명인들이 누정을 짓고 감회어린 시구절을 읊었으며 「노들강변 」이란 민요도 널리 전승되었다

노들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鷺梁院)이란 여관이 있어 도성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쉬었다 갔으며

나루의 북쪽 강변에는 새남터라 불리는 넓은 백사장이 있어 일찍이 사형장으로 이용되었다

이는 행인의 왕래가 많았던 이곳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처형과정을 보임으로써 경계심을 갖도록 한 조치였다

조선 후기 정조 때는 수원 사도세자의 묘소로 향하는 길목인 노들나루에 국왕의 행차를 위한 배다리를 놓았으며

이를 위하여 주교사(舟橋司)라는 전담 관청을 설치하였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고 다음 해엔 한강철교가 건설된데 이어 인도교가 준공되면서 나루터로써의 기능이 상실되어 갔으며

지금은 1999년 서울시에서 세운 「노량진 나루터 표석 」이 옛 정취를 지켜주고 있다

 

 

 

 

심훈문학길

심훈은 경기도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 검은돌집(현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서 1901년 태여났다

소설 〈상록수〉 · 시 〈고향이 그리워도〉 ·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직접 원작 · 각색 · 주연 · 감독한 영화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3 · 1운동에 참여하여 투옥과 함께 퇴학당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수학하다가 1923년 귀국했다

*

심훈문학길은 용양봉저정 앞 한강변에서 효사정으로 이어지는 길에 있다

 

 

 

 

심훈의 글

필경 · 오오, 조선의 남아여! · 상록수 ·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 첫눈 · 조선의 영웅 등이 있다

 

 

 

 

심훈의 탄생과 성장 / 1901~1918 · 3 · 1운동 참여와 수감 / 1919 · 좌절과 극복 / 1920~1924 · 문학인 그리고 영화인 / 1925~1927

영화저널가 그리고 희망의 빛 / 1928~1931 · 당진, 농촌에서 희망을 찾다 / 1932~1936

*

심훈의 탄생과 성장 / 1901~1918

본명 심대섭(沈大燮)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 소설가 · 시인 · 언론인 · 영화인으로

1926년 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을 연재할 때부터 쓰기 시작한 필명이 훈(熏)이다

*

심대섭의 성장 이야기

일본인 선생의 모욕적 언사에 반항하기 위해 수학 시험에 백지를 냄으로써 과목낙제로 유급 당함

당시 급우로 외사촌인 동요작곡가 윤극영과 교육자 조재호 · 박열과 박헌영이 있다

 

 

 

 

학도의용군 현충비

민족의 비극이었던 6 · 25전쟁이 발발하자 30여만 명의 학생들은 조국을 구해야한다는 일념으로

학업을 중단한 채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그 중 5만여 명은 직접 총을 들고 전투에 참가하였다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학도의용군들은 당시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전투에 배치되어 용감하게 싸웠으며

특히 1950년 8월 11일 포항지구 전투에 71명이 3사단에 배속되었으며 그 중 48명의 학도의용병들은 후방의 지원이 끊긴 채

대규모 병력인 적의 파상 공세를 4차례에 걸쳐 막아내며 장렬하게 싸우다 꽃다운 청춘을 조국의 제단에 바쳤다

이 비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산화하신 학도의용군들의 높은 뜻을 되새기고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추진위원회가 학도호국단 및 관계자들의 협조를 얻어 1955년 6월 25일 건립하였으며

상단에 추모비명과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학도의용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학도의용군 현충비(學徒義勇軍 顯忠碑)

단기4288년 6월 25일 건립(서기 1955년)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  빗돌

심훈 상 아래 쪽에 있다

 

 

 

 

심훈 상

효사정 아랫쪽에 있다

 

 

 

 

동작구 출생 문학가 심훈 · 인생 전반부 · 중반부 · 후반부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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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구 출생 문학가 심훈 안내판

심훈은 경기도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 검은돌집(현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서 1901년 태여났다

또한 그는 인생의 상당부분을 이곳 흑석동에서 살았다

심훈이 태여난 곳은 천주교 흑석동성당 자리로 흑석동성당에는 「심훈생가 터」표석이 있다

1930년 3 · 1만세운동 11주년을 기념해서 지은 항일 저항문학인 시집〈그날이 오면〉에는 고향 흑석리를 그리워하는 시 〈고향이 그리워도〉가 실려있다

 

 

 

 

동작구 전경

동작구는 1980년 4월 1일 관악구에서 분리되어 서울특별시 17번째 구로 탄생됐다

그 명칭은 동재기나루(銅雀津)에서 유래했으며 유구한 한강과 역사를 함께 했다

한반도의 중부지역을 흐르는 한강은 겨례의 젖줄이며, 아득한 옛날부터 역사와 문화의 원천이었다

특히 땅이 비옥하고 자연 경관이 수려한 한강 하류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터전이 되었다

물산이 풍부한 국토의 중심지로, 중국과의 교통 요충지로 민족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이촌동 방향

 

 

 

 

효사정기(孝思亭記)

 

 

 

 

김수온의 시

亭在滄江欲盡頭 (정재창강욕진두) / 정자는 푸른 강 끝나려는 곳에 있네

野情漠漠更休休 (야정막막갱휴휴) / 들 풍경 아득하며 더욱더욱 아름답고

靑春邱龍臨長道 (청춘구룡임장도) / 푸른 봄 구룡은 긴 길에 임했고

紫關煙霞接上流 (자관연하접상류) / 붉은 대궐 연하는 상류에 닿았구나

喬木半遮祠戶 (교목반차사호) / 높은 나무는 반쯤 사당(사祠堂)을 가리워서

暗閑雲時鎖洞門幽 (암한운시쇄동문유) / 어둡고 한가한 구름은 때로 골 어귀를 잠겨 그윽하다

遲公出沐來投晩 (지공출목래투만) / 공사(公事)에 휴가 내노라 늦게 오면

擧酒吾當太白浮 (거주오당태백부) / 술을 내어 큰 잔으로 먹으리라

*

정인지의 시

思亭高枕大江頭 (사정고침대강두) / 사정이 높이 큰 강 위에 임했는데

孝子慈孫自匹休 (효자자손자필휴) / 효성스러운 아들 착한 손자 갖추어 아름답다

世德已知山共重 (세덕이지산공증) / 세덕은 이미 산같이 무겁고

家聲長與水同流 (가성장여수동류) / 가성은 길이 물과 함께 흐른다

春風搖樣松楸老 (춘풍요양송추노) / 봄바람이 살랑거리는데 개오동나무 늙었고

秋日淒淸洞壑谷 (추일처청동학곡) / 가을날이 쌀쌀하니 골짜기가 그윽하다

俯仰情懷誰識得 (부앙정회수식득) / 굽어보고 쳐다보는 정회를 누가 알아주리

時看北門闕瑞煙浮 (시간북문궐서연부) / 때때로 북궐을 보니 서기 띤 연기가 떴네

 

 

 

 

효사정기(孝思亭記)

효사정이란 이름을 지은 강석덕의 아들 강희맹은 효사정기를 남겼는데

이 기문(記文)은 〈신증동국여지승람〉 10권 금천현 누정로에 기록이 되어있다

따라서 여러 자료와 시문을 참고하여 효사정이 있던 터를 찾았으나 주변 환경의 변화로 찾지 못하고 옛 터와 가까운 자리를 택해 정자를 세웠다

조선 초기의 학자와 문신들인 정인지 · 신숙주 · 김수온 · 서거정 등도  효사정과 관련된 시문을 남겼다

 

 

 

 

효사정(孝思亭)

효사정은 조선 초 우의정 노한(盧閈)의 정자이다

노한(1376~1443)은 교하노씨(交河盧氏) 13세손으로 자(字)는 유린(有隣) · 호(號)는 효사정(孝思亭) · 시호(諡號)는 공숙공(恭肅公)이다

16세 때 출사하여 33세에 한성부윤 · 1433년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에 올라 백성을 안위하는데 공헌하였다

1439년(세종 21) 어머니 개성왕씨대부인(開城王氏大夫人)의 상을 당하여 선영에 예장하고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3년간을 시묘하고도 서러워서 그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그 자리에 별장을 지어 일생을 살면서 등을 밝혀 추모하고 자신도 이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

묘지 북쪽 깎아지른 듯 한 언덕위에 정자를 세우고 때때로 올라 어머니를 생각하고

북쪽 개성의 아버지 묘소를 바라보며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였다

효사정은 효도의 상징으로 유명하였으며 한강을 끼고 있는 정자 중 경관이 제일 좋은 곳으로 칭송되었다

그 후에도 손자 노사신과 정인지 · 신숙주 · 김수온 · 서거정 · 중국 사신 채수 · 기순 등이  효사정의 정취를 시로 읊었다

오늘날 효사정은 조선 성종 대에 헐린 것을 1993년 7월 복원한 것으로

효사정(孝思亭) 현판글씨는 공숙공 노한의 17대손인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친필이다

 

 

 

 

효사정(孝思亭)

효사정이란 이름은 노한과 동서지간이었던 호조참판 강석덕이 지었으며

정면 3칸 · 측면 2칸 · 넓이 46.98㎡에 5량집으로 난간을 두르고 팔작지붕을 얹은 형태로써

일제 때 한강신사가 있던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효사정(孝思亭) 현판

공숙공 노한의 17대손인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친필이다

 

 

 

 

효사정기(孝思亭記)

들어열개문 사이에 있다

 

 

 

 

동작대교 · 래미안 첼리투스아파트 · 올림픽대로가 보인다

 

 

 

 

흑석동성당(명수대성당)

심훈 생가 터 빗돌이 입구에 있다

 

 

 

 

흑석동성당(명수대성당) 유물전시관

 

 

 

 

심훈 생가 터 빗돌

심훈(沈熏 · 1901~0936)은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일제시대에 활동했던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영화인이었다

그는 3 · 1운동에 참여하여 투옥과 함께 퇴학당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수학하다가 1923년 귀국했다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 · 영화 〈먼동이 틀 때〉 · 시 〈그날이 오면〉 · 소설 〈상록수〉 등의 작품을 남겼다

*

동작구 역사공원길 마침점인 흑석역으로 나가면 되나 재개발되는 흑석동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흑석동(黑石洞)

흑석동이란 동명은 흑석동주민센터 남쪽 일대에서 나오는 돌의 빛이 검은 색을 띠므로

검은돌(黑石) 마을이라 한 데서 유래되었다

*

서달산 · 범바위 · 명수대 · 할떡거리 · 재강굴산 등의 이야기가 있다

 

 

 

 

KB국민은행 건물

 

 

 

 

서달로8가길

마을 전체가 흑석9재개발촉진지구로 노란  「공가」 스티커가 붙어 있다

 

 

 

 

아직 장사를 하는 상점들이 간혹 있다

 

 

 

 

흑석리버파크자이아파트 앞이다

 

 

 

 

한성이발관

아직 영업을 하는 곳이다

 

 

 

 

흑석시장

 

 

 

 

전주이씨덕천군파완성군종회(全州李氏德泉君派莞城君宗會)

조석견과 완성군 묘역을 찾아 왔는데 늦은 시간이라선지 문이 잠겼다

 

 

 

 

팥카페 순자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

 

 

 

 

엉터리생고기

 

 

 

 

흑석역 3번출구

마침점이다

 

 

 

 

역사공원길 안내판

 

 

 

 

걸은 거리 12.3km · 소요시간 7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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