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촌기념관(尨村記念館)
황희 선생 유적지 성역화사업의 일환으로 1999년 7월 착공하여 2000년 6월에 완공되었다
내부에는 황희 선생의 일대기를 비롯해 선생의 삶과 사상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만든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방촌기념관(尨村記念館)
방촌기념관(尨村記念館) 현판
조선의 청백리 방촌 황희
평생을 관리로 지내며 원칙과 소신, 관용과 배려를 온 몸으로 실천한 황희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청빈한 삶을 몸소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황희(黃喜) · 조선시대 최장수 청백리 정승
1362년(공민왕 12)~1452년(문종 2) · 조선 전기의 문신 · 본관은 장수 · 초명 수로(壽老) · 자 구부(懼夫) · 호 방촌(厖村)
석부(石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균비(均庇)이고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군서(黃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다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우왕 2년(1376) 음보(蔭補)로복안궁 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
1383년 사마시 ·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고 ·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이 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서 은거하다가 1394년(태조 3)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이 되었으며 세자의 스승인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이후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쳐 6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태종의 신뢰를 받았으나 1418년 세자(양녕대군) 폐출의 불가함을 강하게 주장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폐서인되어 교하(交河)와 전라도 남원에 5년간 유배되었다가, 태종의 건의로 세종에 의해 다시 복직되었다
이후 굶주림이 장기화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나가 백성의 어려움을 잘 살피고 민심을 얻었으며 동시에 세종의 신뢰를 또한 얻게 된다
이후 이조판서와 우이정 · 좌의정 겸 세자사(世子師) 등을 지냈으며, 1431년(세종 13)에 69세의 나이로 영의정이 되었다
이후 18년 동안 세종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끌다가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은퇴한 뒤에도 국가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파주 문산 반구정에서 갈매기와 같이 여생을 보내다가 향년 90세에 서거했다. 파주 탄현 금승리에 안장되었다
군등청운거(君登靑雲去) / 그대는 청운에 올라 떠나가고
여망청산귀(予望青山归) / 나는 청산을 향해 돌아가네
운산종차별(云山從此别) / 청운과 청산이 이에 갈라서니
누습벽라의( 涙湿碧罗衣) / 눈물이 벽라의를 적시는구나
*
황희 정승의 절친한 벗이자 두문동 72인 중 한 사람인 정건천이
황희가 송악산 두문동에서 내려감에 그 아쉬움을 자신의 부채에 적은 시(정건천 문집 중에서)
두문불출의 유래
고려가 망하자 그때까지 섬겨온 왕을 배반하고 새로운 왕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 고려의 신하 72명이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에 있는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모든 길을 막아 빗장을 걸어놓고(杜門)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不出)에서 유래됐다
새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유능한 신하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여러 번에 걸쳐 그들을 설득했으나 허사였다
그들 72현(賢)은 산골 마을에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면서 아무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유래됐다고 한다
*
두문동에 함께 들어간 황희도 처음에는 태조의 부름에 거절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왕조가 바뀌어도 백성은 바뀌지 않았으니 백성을 위해 일할 젊은 인재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두문동 선비들의 권유와 설득으로 산에서 내려오게 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때 황희의 나이 30세였다
조선 건국초기에는 두문동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다가
정조 7년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를 세워 고려의 충신인 두문동 72현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황희 연보
오제신후사 지수일렴자(吾儕身後事 只守一廉字) / 우리들 몸이 없어진 뒤의 일은 단지 청렴 렴(廉) 자(字) 하나를 지키는 것입니다
숭검박억사미 위치지선무(崇儉朴抑奢靡 爲治之先務) / 검소를 숭상하고 사치를 억제하는 것이 정치를 하는데 먼저 할 일입니다
황희의 업적
익성공 방촌 황희 선생 영정(翼成公尨村黃喜先生影幀)
황희의 업적 · 철저히 백성을 위하는 행정가
신뢰받을 수 있는 법치주의 · 소방서와 파출소의 설치
황희는 "임금이 백성들로부터 믿음을 얻으면 나라를 다스리기 쉽고 믿음을 잃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번 세워진 법이 고쳐지지 않고 계속 유지될 때 비로서 백성은 그 법을 믿고 안심하며 내일을 설계할 수가 있게 되어
마침내 임금을 믿고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황희는 이러한 법치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문화된 법전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방대한 분량의 《경제속육전》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다
이후 황희는 이 법전에 따라 법치를 꾸준히 실행하는 한 편 불필요한 법의 개정을 금지하여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인권 존중 사상
반구정기(伴鷗亭記)
반구정은 임진강 하류에 있다. 반구정은 먼 옛날 태평 재상 황희(黃喜)의 정자이다
상국(황희를 말함)이 죽은 지 200년이 채 못 돼 정자가 헐렸고, 그 터전이 쟁기 밑에 버려진 땅이 된 지도 100년이 된다
이제 상국의 후손 황생(黃生)이 강 언덕에 집을 짓고 살면서 옛 이름을 그대로 반구정이라 했다
이는 정자의 이름을 없애지 않으려 함이니 역시 훌륭한 사람이다
상국의 사업이나 공렬은 어리석은 사람도 다 왼다
상공은 나아가 조정에 벼슬할 적에는 임금을 잘 보좌하여 정치 체제를 확립하고 모든 관료을 바로 잡았으며
훌륭하고 유능한 자를 제 직위에 있게 하여 온 국가가 걱정이 없고 백성들이 모든 업에 만족하도록 했다
물러나 강호에서 여생을 보낼 적에는 자연스럽게 구로와 같이 세상을 잊고 높은 벼슬을 뜬구름처럼 여겼으니
대장부의 일로 그 탁월함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겠다
야사(野史)가 전하는 명인(名人)의 고사에, 상국은 평생에 말과 웃음이 적으므로 사람들은 그 의 희로를 알 수 없었고
일을 당하여서는 대체에만 힘쓰고 자질구레한 것을 묻지 않았다 한다
이것이 이른바 훌륭한 상국이고 이래서 이름이 백세에 남게 된 것이다
정자는 파주 주치(州治)에서 서쪽으로 15리 되는 임진(臨津) 밑에 있는데, 썰물이 물러가고 갯벌이 드러날 때마다 갈매기들이 모여든다
강가의 잡초 우거진 벌판에는 모래밭으로 꽉 찼다. 또 9월이 오면 기러기 손님이 찾아든다. 서쪽으로 바다 어귀까지 20리이다
*
1680년(숙종 6) 5월 16일 미수 허목(眉叟 許穆 · 1595(선조 28)~1682(숙종 9)이 쓰다
서각대(犀角帶)
조선시대 관리가 허리에 두르던 무소의 뿔로 만든 띠
한국의 인물 황희 기념메달
한국조폐공사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역사 등 각 분야에서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 100인을 대상으로
2008년부터 4년 2개월 간 총 50차수에 걸쳐 매월 2종의 '한국의 인물 기념메달' 시리즈를 제조 · 출시하였다
황희 기념메달은 2010년 12월 35차수로 발매되었다
메달 앞면에는 「청백리의 표상인 조선 세종시대 명재상」 문구와 뒷면에는 청백리의 얼이 깃든 《반구정》을 조각하였다
직경 40mm의 원형 모양이며 황동으로 제작하였다
(연)인불진효, 칙백행구상, 무이위이충지본 (然)人不盡孝, 則百行俱喪, 無以爲移忠之本)
사람이 효도를 다하지 못하면 온갖 행실이 다 무너져서 충(忠)으로 옮겨 갈 바탕이 없어집니다
세종실록(1427년 10월 8일)
탈정 기복하라는 명에 황희가 사양하는 전을 올리나 이를 돌려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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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자, 만세공공지기, 불가이일시지술, 경개지야(法者, 萬世公共之器, 不可以一時之術, 輕改之也)
법이란 만세의 공공지기이니, 일시적 방법으로 가볍게 고칠 수 없습니다
태종실록(1411년 1월 13일)
정형 이하의 죄를 저화로 수속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
산호영(珊瑚纓)
갓에 다는 끈으로 29개의 산호를 꿰어 만든 길이 1m의 갓끈이다
반구정(伴鷗亭)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
1449년(세종 31) 황희가 87세의 나이로 영의정을 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여생을 보낸던 곳으로
임진강 기슭에 낙하진에 인접해 있어 원래는 낙하정(洛河亭)이라 했는데
갈매기가 많이 모여들어 '갈매기를 벗 삼는 정자(伴鷗亭)'라고 이름지어 불렀다
반구정은 황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8도 유림에 의해 보존되어 오다가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다
그 뒤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원해 오다가 1967년 크게 고치었다
또한 199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반구정과 앙지대 등을 목조건물로 개축했다
익성공 유묵(翼成公 遺墨) · 옥서진(玉書鎭) · 옥연(玉硯)
익성공 유묵은 황희 선생 동상에도 있다
*
옥으로 만든 벼루는 세종에게 하사 받은 벼루로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손을 댄 자국에 결로현상(結露現象)이 생겨 무수연(無水硯)이라고도 한다
옥서진(玉書鎭)
책장이나 종이 따위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누르는 물건
풍파존지수세간, 하사불능평거(風波存止水世間, 何事不能平法)
뭍세상의 사이에 풍파가 머물러 있는데, 무슨 일로 평평하게 하여 없앨 수 없나
*
혹무혹도, 고비욕주, 상여만만(惑舞惑蹈, 顧飛欲走, 狀如蠻蠻)
혹은 춤추고 혹은 뛰놀며, 돌아보고 날면서 달리려고 하는데, 그 모습이 비익조 같구나
황희의 일화 · 누렁소와 검정소
어느 날 황희가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을 암행하는데 한 늙은 농부가 누렁소와 검정소 두 마리와 함께 쟁기질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그 지방에서는 소 두 마리로 밭을 가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황희는 농부에게 그 고을 수령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대놓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우선 말에서 내려 길가에 앉아 농부에게 말을 붙였다
"그 두 마리 소 가운데 어느 소가 일을 더 잘 하오?"
그러자 농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황희의 옷소매를 끌고 밭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황희는 뜸금없는 농부의 태도에 어리둥절했지만 무슨 곡절이 있겠거니 하고 농부를 따라갔다
밭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이르자, 농부는 황희의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런 놈은 일도 곧잘 하고 시키는 대로 말도 고분고분 잘 듣는데, 검은 놈은 꾀가 많아 다루기가 힘들답니다"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줄 알고 따라온 황희는 어이가 없어 다시 물었다
"아니 노인장, 그게 무슨 비밀이라도 된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말씀하시오?"
그러자 농부는 이렇게 답했다. "짐승이라도 서로 비교되는 것을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황희는 그 말을 듣고 되물었다. "그럼 저 미련한 소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다는 말이오?"
그러자 농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령 저놈들이 아무 것도 모른다손 치더라도 매사 경솔하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저놈들은 '이랴' 하면 가고, '워!' 하면 멈추며, '이리!' 하면 오른쪽으로, 저리!' 하면 왼쪽으로 갈 줄 아는데
어찌 저놈들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만일 아까 저놈들 근처에서 이 얘기를 했다면 다 들었을 것 아닙니까? 농사를 애써 도와주는 저놈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소이다."
*
농부의 말을 들은 황희는 숙연한 마음으로 스스로 반성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미물을 대할 때도 이러해야 하거늘 하물며 사람은 어떠하겠소?
노인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가 경박함을 면치 못할 뻔했소, 앞으로 노인의 말을 약으로 삼아 주의하리다."
황희는 이 일을 가슴 깊이 새겼다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 · 억울한 자백
종도 역시 하늘이 낸 사람
김종서 길들이기
황희 관련 유적
1. 방촌영당 · 2. 황희 신도비 · 황희 묘역 · 4. 광한루 · 5. 소공대 · 6. 옥동서원 · 7. 화산서원 · 8. 화계서원
황희 병풍
황희 병풍
함경도와 평안도에 여진족이 침범할 때 모든 신료들은 달래자고 했으나 황희는 단호했다
세종도 황희의 의견을 따랐다. 그래서 여진족을 함경도에서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세종은 그런 황희를 항상 곁에 두고자 했다
황희가 부친상과 모친상 때도 항상 황희를 부르니 왕명으로 인해 상제를 다 치르지 못하고 입조했다
세종은 이러한 황희를 파격으로 승진시켰다
1426년 이조판서에서 우이정 · 1427년 우이정에서 좌의정 · 1413년 영의정 이후 18년을 영의정으로 지냈다
삼척 소공대비(三陟 召公臺碑)
삼척 감영의 남쪽 70리에 와현(瓦峴)이 있다. 그 고개 위에 돌무더기가 있는데 소공대(召公臺)라 한다
그 소공대 위에 놓여 있는 비로 대개 옛날 황익성(黃翼成이 주절(駐節)하던 곳이다
*
조선 세종 5년(1423) 이곳 일대에는 대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거의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구하고자 황희 선생을 강원도 관찰사로 파견하였고
이곳으로 부임해 온 황희는 정성을 다해 이들을 도와 마침내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백성들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당시 황희가 가끔 쉬곤 하던 와현(瓦峴) 고개에 돌을 모아 단을 쌓고 ‘소공대’라 이름하여 그의 공적을 기리고자 하였다
정덕(正德) 11년 병자년(중종 11년 · 1516) 5월에 세웠다. 61년 뒤인 정축년(선조 10 · 1577)에 비석이 바람에 무너져 부서졌다
이듬해 무인년(1578)에 익성공의 정식이 삼척부사가 되어 마음속 깊이 사모하여 비석을 중건하고
그 길로 나에게 글로 써 줄 것을 부탁하였으니 곧 만력 6년(1578) 8월이다
정자에서 외손 봉헌대부 여송군 (奉憲大夫 礪城君) 송인(宋寅)이 쓰다
조선시대 청백리
청백리(淸白吏)는 청백탁이(淸白卓異) 즉 청렴함이 뛰어난 이상적인 관료를 말한다
청백리 자격은 법전에 명문화된 기록이 쉽게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통일된 기준을 찾을 수 없지만
조선시대 선발된 청백리의 선발 사유를 보면 '청백', '근검' '경효' '후적' '인의' 등의 품행이 제시되어 있어
관리로서 선정을 베풂은 물론 도덕적으로도 존경받는 성품을 지녀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청백리 선발은 조선 전기에는 의정부와 이조, 후기에는 비변사와 이조에서 2품 이상 관료가 생존하거나 사망한 인물을 대상으로 2인씩 추천하게 하고
추천자를 육조판서가 심사한 뒤 왕의 재가를 얻어 확정하였다
조선시대를 통해 청백리에 녹선된 수는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218명
경종 · 정조 · 순조대가 제외된 「청선고(淸選考)」에는 186명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는 모두 200명 내외의 청백리가 선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백리의 대표적인 예인 세종대의 황희와 맹사성 · 성종대의 허종 등은
오랫동안 고위관리로 역임하면서도 초라한 집에서 궁핍한 일생을 보낸 인물로 조선시대 청백리의 표상으로 칭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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