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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대흥동헌 및 아문 · 화령옹주태실

예산 대흥동헌 · 아문(禮山 大興東軒 · 衙門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조선시대 대흥군의 현청(縣廳)으로서 《여지도서(輿地圖書)》 대흥군 공해조에 의하면

객사(客舍)에는 정청(正廳) 3칸 · 동대청(東大廳) 12칸 · 은사청(恩思廳) 14칸 · 서헌방(西軒房) 16칸 · 하마대(下馬臺) 4칸

아사(衙舍)에는 구 동헌(舊東軒) 9칸 · 신 동헌(新東軒) 16칸 · 남상방(南上房) 4칸

북상방(北上房) 5칸 · 대청(大廳) 6칸 · 초당(草堂) · 행랑(行廊) 7칸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동헌과 아문만 남아 있다

예산군에 남아 있는 유일한 관아 건물로 역사적 · 건축학적 가치가 있다

 

 

임성아문(任衙門)

아문은 대흥동헌으로 들어서는 문이다

솟을대문 형태로 임성아문(任衙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임성(任城)은 통일신라 때 대흥지역을 부르던 명칭이다

 

 

 

 

임성아문(任衙門) 현판

 

 

 

 

예산 대흥동헌(禮山 大興東軒)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역대 군수들이 집무를 보던 정청으로 정면 6칸 ·  측면 2칸 ·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이다

중앙에 정청인 대청이 있고, 좌우에 온돌방이 있다

전면으로 툇마루가 이어져 있고, 북쪽에는 2칸 규모의 대청이 있다

4벌대로 높게 쌓은 장대석 기단 위에 전면에는 방형의 초석을, 후면으로는 덤벙주초석을 혼합하여 놓았다

*

대흥동헌 상량문에 영락(永樂) 5년(1407년)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 태종 7년에 창건되었고

강희(康熙) 42년(1703)에 중수 기록이 있어 조선 숙종 때 대흥이 군으로 승격할 때 중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 대흥면사무소로 개조하여 사용되다가, 1979년 해체복원 정비되었다

 

 

 

 

산 넘어 남촌에는 드라마 촬영지

작은 연못과 주변 한옥 및 장독대로 여느 시골 한옥에 들어선 것 같은 정겨운 풍경을 그려주어

《산 넘어 남촌에는》에서 종가집으로 촬영되기도 했다

 

 

 

 

느티나무

화령옹주 태실(胎室) · 흥선대원군 척화비(斥和碑)가 옆에 있다

 

 

 

 

화령옹주 태실(和寧翁主胎室) · 흥선대원군 척화비(斥和碑)

태실은 왕세자나 왕손 · 대군 · 공주 · 옹주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명산에 탯줄을 보관했던 곳이며 왕가에서는 이를 법으로 정했다

이 태실은 조선 21대 영조대왕의 11녀 화령옹주의 태실로 화령옹주는 영조와 숙의 문씨 소생으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인 김한신의 조카 며느리가 된다

정조 즉위 직후 어머니 숙의 문씨의 죄와 연좌되어 대신들이 화령옹주를 한성 밖으로 쫓아내

평민으로 강등시킬 것을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정조는 화령옹주가 너무 어려 죄가 없다고 윤허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로부터 태실은 왕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태실을 파괴하는 것은 곧 왕가의 상징물을 파괴시킨다는 의미였다

화령옹주 태실은 일제시대 에 이왕직이 친일파를 시켜 파괴시켰으며 안에 있던 도자기는 일본인이 가져갔다

현재 예산군에는 현종 · 헌종 · 화령옹주 · 숙종의 3남 연령군 등 4개의 태봉이 있다

 

 

 

 

화령옹주 태실(和寧翁主胎室) · 태실비(胎室碑)

癸酉 三月 初二日 戌時 生 翁主 阿只氏 乾隆 十八年 五月 十三日 辰時 葬

(계유 삼월 초이일 술시 생 옹주 아지씨 태실 건융 18년 5월 13일 진시 장)

화령옹주(1752년 · 영조 28 ~ 1821년 · 순조 21)

 

 

 

 

흥선대원군 척화비(斥和碑)

척화비는 두 차례의 양요(병인양요 프랑스 · 신미양요 미국) 이후

당시 왕이었던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척화교서를 내려 전국 각지에 세우게 한 비석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을 때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의하는 것이오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내가 이를 자손만대에 경계토록 하기 위해, 병인년에 글을 짓고, 신미년에 비를 세우노라"

병인작 신미립이라는 글귀에서 두 차례의 양요가 척화비 건립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흥선대원군은 서양세력과의 대결에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본격적인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펴게된다

서양 세력과의 통상을 철저히 거부함으로써 외세의 침략을 막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낸 척화비 건립은

반외세 자주운동으로 해석되어 민족의 자주권을 지켰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무조건적인 서양 세력과의 통상 거부로 인해 조선이 국제 정세 흐름에 둔감해져서

근대화가 정체되거나 지연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외세의 침략을 막지 못했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화령옹주 태실(和寧翁主胎室) · 흥선대원군 척화비(斥和碑)

 

 

 

 

대흥동헌 이야기 지도

(2022. 6. 6)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7.3km, 소요시간 3시간 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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