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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예산 추사기념관

예산 추사기념관은 추사 김정희선생의 드높은 서예정신과 위대한 업적을 새롭게 조명하고
후세에 남긴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보존 · 전시하여 추사 선생의 다양한 면모와 그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해 2008년에 건립되었다

추사기념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평(評)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초산(樵山) 유최진(柳最鎭 ·  1791~1869)

 

 

스승 옹방강(翁方綱 · 1733~1818)
청나라의 고증학자로 명필로도 유명하다
경학 · 금석학 · 서화에 조예가 깊었고 탁월한 감식안을 갖춰 많은 제사(題辭) · 발문으로 서화 · 비첩 등을 고증하였다
1809년~1910년 북경에서 김정희를 만나 사제 관계를 맺고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완원(阮元 · 1764~1849)
청나라의 유명한 학자 · 정치가이다
경학을 연구하였고 문자학 · 금석학 등 청나라 고증학을 집대성하는 연구와 저작을 남겼다
추사가 북경에서 만나 스승으로 모셨다. 김정희의 호 완당(阮堂)은 완원의 제자라는 의미이다

 

 

기념관 내부

 

 

추사 김정희 초상 / 이한철 · 보물 547호 · 1857년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권돈인(權敦仁)이 이한철(李漢喆)을 시켜서 그린 추사의 정본 초상이다
관복을 입은 전신 교의좌상(交椅坐像)으로 예산의 추사고택에 봉안되어 오다가 국립박물관에 기탁되었다

 

 

담계수찰첩(覃溪手札帖) / 옹방강 · 1817년 ·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완당(阮堂)에게 보내는 간찰(簡札)이다

 

 

구양수 초상(歐陽脩 肖像) / 주학년 · 1812년 · 간송미술관 소장
주학년이 그린 중국 송나라 때의 정치가 구양수(1007~1072)의 초상이다
옹방강이 추사의 생일을 기리며 주학년을 시켜 그리게 한 것이다

 

 

조눌인(曺訥人)에게 보내는 간찰(簡札) / 김정희 · 19세기 · 국립박물관 소장

 

 

시경 탁본(詩經 拓本) / 김정희 · 19세기 · 예산 화암사
추사가 옹방강에게 선물 받은 육방옹의 시경 탁본을 화암사 뒤편 병풍바위에 새겨 놓은 것이다
송나라 시기의 예서로 예부터 명작으로 이름이 높은 글씨였다

 

 

김정희 시 / 김정희 · 1836년 · 간송미술관 소장
신취미태사잠유시첩(申翠微太史暫遊詩帖)에 실린 10편의 시 가운데 추사가 지은 것이다

 

 

천축고선생댁 탁본(天竺古先生宅 拓本) / 김정희 · 19세기 · 예산 화암사
「천축국(인도)의 옛 선생님 댁」이라는 뜻으로 추사가 화암사 뒤편 병풍바위에 새겨 놓은 것이다

 

 

경주무장사아미타불조성기비 부기 탁본(慶州鍪藏寺阿彌陀佛造成記碑 附記 拓本) / 보물 125호 · 8세기 · 국립박물관 소장)
경주 무장사지에서 발견된 비석으로 추사가 1817년에 고증한 뒤 비석의 옆면에 발견 경위와 감회를 새겼다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탁본( 北漢山 新羅眞興王巡狩碑 拓本) / 국보 제3호 · 6세기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라 24대 진흥왕(534~576)이 한강 유역을 순수하고 세운 순수비이다
추사가 처음으로 진흥왕의 비석이라는 것을 밝혀 냈다

 

 

권돈인 시 / 김정희 · 1836년 · 간송미술관 소장
신취미태사잠유시첩(申翠微太史暫遊詩帖)은 취미 신재익의 전별연에서 권돈인 · 김유근 등이 지은 전별시를 추사가 적은 시첩이다
그 중 권돈인이 지은 시이다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탁본( 北漢山 新羅眞興王巡狩碑 拓本) / 국보 제3호 · 6세기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높이 154cm · 너비 69cm
북한산 순수비는 신라 24대 진흥왕(534~576)이 553~554년 백제를 물리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568년 이후에 세웠다
도선국사나 무학대사비로 잘못 알려져 왔다
그러나 김정희에 의해 순수비로 확인되고 《삼국사기》 등의 기록과 대조되면서 비문 68자가 판독되었다
비석 왼쪽에 김정희가 다녀간 사실을 새겨 놓았다
*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은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北漢山 新羅眞興王巡狩碑)

 

 

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 탁본(黃草嶺 新羅眞興王巡狩碑 拓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10호 · 신라시대 · 함흥역사박물관 소장 · 높이 115cm · 너비 48cm
황초령 순수비는 신라 24대 진흥왕(534~576)이 고구려 남쪽 변경을 정복하고 순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568년에 세운 비석이다
진흥왕의 순수비 중 가장 먼저 발견된 비로, 16세기 실학자들의 저서에 언급되고 있으나 19세기 무렵 망실되었다
1832년에 권돈인이 김정희의 부탁으로 재발견하였고 김정희가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
원래 함경남도 장진군의 황초령 정상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1853년 함경도 관찰사 윤정현이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고개 남쪽의 함주군 진흥리로 옮겨 비각을 세웠다
현재는 북한의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문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5자 씩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은 왕이 지방을 순수한 사실과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의지가 기록되어 있으며 수행한 사람들의 관직과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다

 

 

경학(經學) · 고증학(考據學) · 금석학(金石學)
경학은 유교의 경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망실된 유교 경전을 복원하기 위해 시작된 경학은 각 시대의 경향에 걸맞은 형태로 계속 변화하였다
당 · 송 시대에는 불교 · 도교 등과 경쟁하면서 유교 경전을 해석 · 연구하였으며 명 · 청 시대에는 양명학 · 고증학으로 발전하였다
*
고증학은 유교 경전을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경학의 한 분야이다
문헌적인 고증을 통하여 문자 · 음운 · 훈고를 연구하고 이를 토대로 경전을 정비하고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추사 김정희가 본격적으로 고증학을 받아들여 일가를 이루었다
*
금석학은 고증학의 한 분야로 금석문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청동기 · 철기 · 비석 등에 새겨진 명문을 연구하고 문자를 판독하였다
이를 통해서 고전의 내용을 복원하고 옛 서체를 발굴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추사와 불교
집안의 원찰로 화암사(華巖寺)를 가지고 있던 추사는 일찍부터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화암사의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불학(佛學)에 관심을 가졌고 연경에 갔을 때는 400여 권의 불경과 불상을 가져와 마곡사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불교에 깊은 조예를 쌓은 추사는 백파(白波)와 선(禪)에 대해 논쟁을 벌여 그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였다
*
특히 추사와 초의선사가 나눈 40년 동안의 우정은 잘 알려져 있다
초의는 추사에게 소치 허련을 제자로 삼도록 하였으며 제주도의 유배지로 찾아와 6개월 동안 머물며 위로하기도 하였다
추사의 불교를 학문의 대상뿐 아니라 신앙으로 삼아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말년에는 봉은사(奉恩寺)에 기거하면서 선지식(善知識)의 대접을 받기도 했다

 

 

명선(茗禪)
추사의 그림과 글씨를 말할 때 선(禪)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추사의 이 작품은 명(茗 · 아주 거친 잎으로 만든 차)과 선(禪)의 두 글자를 통해 차와 선이 둘이 아닌 경지를 보여준다
제찬(題贊)의 내용처럼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글씨는 선에 대한 추사의 깊은 이해와 함께 속세에서 벗어난 추사의 마음이 담겨 있다
*
명선의 두 글자는 예서이지만 꾸밈이나 억지가 없어 자연스럽고 거침없는 힘찬 기운이 돋보인다
서법과 격식이 분명하면서도 격식을 넘어서는 탈속과 자유분방의 멋이 가득하다
"초의가 손수 만든 차를 보내왔는데 몽정(蒙頂)이나 노아(露芽) 같은 명품 못지않다
이 글로 그에 보답한다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 · 후한 때의 예서체 비석)의 필의를 본따 쓴 것이다

 

 

지란병분(芝蘭並芬) / 김정희 · 19세기 · 간송미술관 소장
지초(芝草)와 난초(蘭草)가 함께한다는 뜻으로 조희룡 · 이하응 · 권돈인의 제발이 적혀 있다

 

 

임한경명 발문(臨韓鏡銘 跋文) / 김정희 · 19세기 · 국립박물관 소장
한나라의 동경 명문을 연습한 《임한경명》의 발문이다

 

 

임한경명(臨韓鏡銘) / 김정희 · 19세기 · 국립박물관 소장
추사가 한나라 시기 동경(銅鏡)에 새겨진 글씨를 연습한 글이다
한나라 예서를 독자적인 필치로 재해석하고 있다

 

 

증청람란(贈晴嵐蘭) / 김정희 · 19세기 · 국립박물관 소장
추사가 청람(晴嵐) 김시인(金蓍仁)의 연행 길에 선물로 그려준 난이다

 

 

염화취실(斂華就實) 《난맹첩(蘭盟帖)》 / 김정희 · 19세기 · 국립박물관 소장
추사의 난맹첩 상권 아홉째 폭에 실린 난으로 꽃을 거두고 열매를 맺은 난을 그린 것이다

 

 

인천안목(人天眼目) 《난맹첩 · 蘭盟帖》 / 김정희 · 19세기 · 국립박물관 소장
人天眼目 吉祥如意(인천안목 길상여의) / 사람과 하늘이 살펴주어, 뜻과 같이 잘 되어지다

 

 

계산무진(谿山無盡) / 김정희 · 19세기 · 국립박물관 소장
계곡과 산은 끝이 없구나라는 뜻으로 계산 김수근(金洙根)에게 써준 글이다

 

 

서원교필결후(書圓嶠筆訣後) / 김정희 · 19세기 · 국립박물관 소장
추사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원교필결(圓嶠筆訣)을 비판하면서 지은 글이다
원교의 서법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다

 

 

고사소요(高士逍遙) / 김정희 · 19세기 · 국립박물관 소장
추사의 문인화 중 인물이 그려진 유일한 그림이다
뜻 높은 선비가 사색에 잠긴 채 오솔길을 거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산수(山水) 《난맹첩 · 蘭盟帖》 / 김정희 · 19세기 · 국립박물관 소장

 

 

세외선향(世外仙香) / 김정희 · 19세기 · 국립박물관 소장
추사의 난맹첩 11면에 실린 난으로 지초와 난초를 함께 그리는 《지란병분도》의 형식으로 그린 것이다

 

 

소림모정(疎林茅亭) / 김정희 · 19세기 · 국립박물관 소장
산과 강이 어우러진 강안의 성긴 숲 속에 자리한 띠풀 지붕의 정자를 그린 것이다

 

 

적설만산(積雪滿山) 《난맹첩 · 蘭盟帖》 / 김정희 · 19세기 · 국립박물관 소장
추사의 난맹첩 상권 첫 폭에 실린 난으로 겨울의 눈보라를 견뎌내고 피어난 난화를 그린 것이다

 

 

춘농로중(春濃露重) 《난맹첩 · 蘭盟帖》 / 김정희 · 19세기 · 국립박물관 소장
추사의 난맹첩 상권 둘째 폭에 실린 난으로 초봄에 피어난 혜초(蕙草)를 그린 것이다

 

 

묵소거사자찬(默笑居士自讚) / 김정희 · 보물 제1685호 · 19세기 · 국립박물관 소장
묵소거사자찬은 황산 김유근이 자찬한 것을 절친한 벗이었던 추사가 써준 것이다
묵소거사는 김유근이 실어증에 걸렸을 때 지은 호로 침묵을 지켜야 할 때 침묵을 지키고 웃어야 할 때 웃는다는 뜻이다
추사의 해서 중 규범이 될만한 대표작이다

 

 

제주도 유배기와 만년기
1819년 대과에 급제한 이래 출세가도를 달리던 추사는 183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탈관직 당하고 부친 김노경도 유배되었다
이후 다시 관직에 올랐으나 1840년 윤상도의 옥사가 다시 문제가 되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귀양살이 속에서 추사는 더욱 더 학문에 힘쓰고 서예와 그림에 몰두했다
복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호젓한 유배지에서 추사의 학문과 서예 · 그림은 더욱 그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또한 귀양살이의 고통과 슬픔은 추사의 예술로 승화되어 청경고아(淸勁高雅 · 맑고 굳세며 고상하고 아담함)하고
삼엄졸박(森嚴拙樸 · 무섭도록 엄숙하며 서툴고 순박함)한 경지에 이르렀다
*
1848년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나온 추사는 1851년에 다시 권돈인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풀려났다
추사는 벼슬을 버리고 아버지의 묘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였다
그림을 그리고 후학을 지도하면서 불교에 심취해 한가로운 생활을 보내던 추사는 1856년 71세 나이로 서거하였다

 

 

추사의 학문
추사는 박제가에게 처음 학문을 배우면서 북학(北學)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24세 때 북경에서 옹방강 · 완원을 만나 많은 가르침을 받은 추사는 북학, 즉 청나라의 학문에 몰두하였다
특히 청나라의 경학은 고증학이라 하여 옹방강 · 완원 등을 중심으로 고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추사는 이러한 청나라 고증학을 깊이 습득하였고 마침내 1816년 《실사구시설 · 實事求是說》로 정리하였다
실사구시설은 옹방강과 완원의 고증학을 추사의 입장에서 종합 정리한 새로운 경제관의 제시였다
이는 곧 당시 청나라 고증학 연구의 성과를 총정리한 것이라고도 볼수 있는 것이었다
추사는 실사구시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한서 · 漢書》 하간헌왕전에 말하기를, '실제 있는 일에서 올바른 이치를 찾는다(實事求是)고 하였는데
이 말은 곧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긴요한 길을 가리키는 것이다
학문을 하는데 있어 실제 있지도 않은 것으로써 일을 삼아서 다만 속이 텅비고 엉성한 잔꾀로 방법을 삼는다거나
그 올바른 이치를 찾지 않고서 다만 먼저 잘못 얻어 들은 말로써 주장을 삼는다면 그것은 성현의 길이 있어 어긋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추사 제주도 유배지

 

 

완당선생해천일립도(阮堂先生海天一笠) / 허련 · 19세기 · 디아모레뮤지움 소장
허련이 제주도에 유배 중이었던 스승 추사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추사를 처연하면서도 탈속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의 모본은 송나라 소동파가 해남도에서 유배하던 시절 갑자기 비가 와서 삿갓에 도롱이를 쓰고 나막신을 신은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해남도(海南島)에서 유배되었던 소동파(蘇東坡)나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스승의 처지가 유사하다고 여긴 허련이 《동파입국도》를 번안하여 그린 것이다

 

 

세한도(歲寒圖) / 김정희 · 국보180호 · 19세기 · 국립박물관 소장
제자 이상적의 변치 않는 절의를 추위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와 측백나무에 빗대 그린 그림이다

 

 

봉은사 판전 현판(奉恩寺板殿懸板) / 김정희 ·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83호 · 1856년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의 판전(板殿)에 걸려 있는 현판으로 추사가 서거 3일 전에 남긴 절필이다

 

 

간찰(簡札) / 김정희 · 19세기 · 명지대박물관 소장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갈 때 집으로 보낸 편지이다

 

 

적거유허비(謫居遺墟碑)
추사가 유배생활을 했던 유배지에 세워진 비석이다

 

 

추사기념관 내부

 

 

서예사
서예(書藝)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예술 분야이다
상형문자인 한자가 가지는 회화성과 유교문화가 가지는 문자 숭상이 결합되어 문자의 표현에서 회화적 추상성을 요구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
갑골문자로부터 시작된 한자는 전서 · 예서 · 초서 · 해서 · 행서 등 다양하게 변화했으며
지 · 필 · 묵의 발명과 개량을 통해 운필(運筆)의 다양성이 가능해지면서 많은 서예가들이 탄생했다
왕희지 · 구양순 · 김정희 등의 명필은 자신의 이름이 붙은 서체를 후세에 전하기도 했다

 

 

삼국시대 · 통일신라 · 고려 · 조선과
중국의 상(商) ·  진(秦) · 한 · 위 · 진 남북조 · 당 · 송 · 원 · 명 · 청의 글씨가 전시되어 있다

 

 

문수원중수비편(文殊院重數碑片) / 1130년 · 동국대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강원도 청평사에 은거한 진락공 이자현의 행적이 기록된 비석으로 고려시대 명필 탄연이 쓴 것이다
탄연(坦然)은 고려 중기의 승려이자 서예가로 고려 최고의 글씨로 칭송받았다

 

 

이위정기 탁본(以威亭記 拓本) / 김정희 · 19세기 · 서울 예술의 전당 소장
추사가 남한산성 이위정(以威亭)의 현판으로 쓴 글씨이다
현재 소실되어 탁본으로만 남아 있다

 

 

경주무장사아미타불조성기비부기탁본(慶州鍪藏寺阿彌陀佛造成記碑附記拓本) / 보물125호 · 8세기 · 국립중앙박물관소장
경주 무장사에서 발견된 비석으로 추사가 1817년에 발견하여 고증한 뒤 비석 옆면에 발견된 경위와 감회를 새겼다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비편(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碑片) / 1130년 · 동국대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청평사에 은거한 진락공 이자현의 행적이 기록된 비석이다
고려시대의 명필 탄연(坦然)의 서체로 쓰여 있다

 

 

석봉서법(石峯書法) / 한호 · 16세기 ·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조선 중기 서예가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를 탁본해서 만든 서첩이다

 

 

석봉천자문(石峯千字文) / 한호 · 고려대학교 · 중앙도서관 소장

 

 

추사의 서예 개관
추사의 가문은 명필을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했다
이러한 전통 아래 학예에 대한 기초 수련을 거치면서 추사는 서예에 대한 천재성을 발휘하였다
그의 서도가 본궤도에 오른 것은 연경에서 옹방강 · 완원의 가르침을 받은 후부터였다
추사는 옹방강의 서체를 비롯하여 조맹부 · 소동파 · 안진경 등의 서체, 한 · 위 시대의 예서체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서체를 익혔다
그리고 이들 서체를 밑바탕으로 해서 독창적인 길을 창출한 것이 바로 청경고아(淸勁高雅 · 맑고 굳세며 고상하고 아담함)하고
삼엄졸박(森嚴拙樸 · 무섭도록 엄숙하며 서툴고 순박함)한 추사체(秋史體)이다
추사체는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평생동안 수많은 서체와 서예 이론을 익히고 끊임없이 단련하여 타고난 천품으로 서예에 구현한 것이다

 

 

추사의 수업기 · 학예연찬기 · 완성기

 

 

수업기(출생~30대 초반)
명필로 유명한 가문에서 태어난 추사의 예술적 천재성은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시고 끊임없이 수련하며 싹텄다
연경에서 서도의 새로운 경지를 접한 추사는 서예에 대한 남다른 포부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부친에게 보내는 편지
월성위 집안 양자로 들어간 추사가 8세 때 생부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쓴 편지이다
8세의 나이답지 않은 글씨에서 명필의 싹을 엿볼 수 있다

 

 

학예연찬기(30대 중반~50대 후반)
고도의 수련을 거쳐 추사는 연경의 최신 학설을 뛰어넘어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었다
강직한 성품을 바탕으로 이미 30대 후반에 추사체의 골격을 이룩했던 추사는 이전 시대의 명필 원교와 기연으로 얽힌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55세 때 제주도에 유배되면서 추사의 서예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완성기(60대 초반~말년)
9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단칸방에 갇혀 보낸 인고의 생활은 추사체로 결실을 맺었다
2번에 걸친 귀양생활을 통해 권력욕을 버리고 학예와 불교에 심취한 추사는 세속에서 벗어나 소박하고 꾸밈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절친한 벗이었던 초의선사에게 써주었던 작품들이 많이 남아 있어 추사체의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의순(意恂 · 1786~1866 · 초의선사(艸衣禪師)
조선 후기의 승려로 선 사상을 정립하고 다선일미 사상을 통한 깨달음을 주장하였다
추사와는 평생의 벗이 되었는데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교환한 수십 통의 편지는 추사 서예의 꾸밈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침계(梣溪) / 김정희 · 19세기 · 간송미술관 소장
침계 윤정현에게 써준 당호이다
한나라 예서로 쓰고자 하였으나 맞는 글자가 없어 북조(北朝)의 금석문의 필의를 따라 해서와 예서를 섞어 썼다

 

 

김정희 인장 / 보물 547호 · 19세기 · 예산 김정희 종가 소장

 

 

수정염주(水晶念珠) / 보물 547호 · 19세기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적 / 보물 547호 · 19세기 · 예산 김정희 종가 소장

 

 

책력(冊曆) / 보물 547호 · 19세기 · 예산 김정희 종가 소장

 

 

청련시경(靑蓮詩境) ·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청련시경(靑蓮詩境) / 김정희 · 19세기 · 추사고택 소장
김정희의 글씨를 목판에 각한 대형 현판이다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 전통방식으로 두 개의 나무판을 상하로 이어 붙여서 제작하였다
글자는 양각으로 새겼으며 제작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보전하고 김정희가 만년에 직접 쓴 글씨이다
청련(靑蓮)은 당나라의 시인 이백의 호를 의미하고 시경(詩境)은 시를 지을 만큼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장소를 가르키는데
이처럼 청련과 시경이 결합되어 이백(李白)이 시를 지을만한 뛰어난 장소를 의미했을 것으로 보인다
만년 추사체사 무르익은 시절의 글씨란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으며
화암사 시경(암각문) · 수덕사 군역성보관 · 시경루(현판) · 추사고택 청련시경(현판)이 예산군에 남게된 것 또한 특별한 의의가 있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 ·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딸 손자
아무리 높은 벼슬을 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해도 가족끼리 모여서 소박한 음식으로 즐기는 재미에 비할 수 없다
*
춘풍대아능용물 (春風大雅能容物) · 추수문장불염진(秋水文章不染塵)
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하고 · 가을 물 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
(김정희 / 19세기 / 간송미술관 소장)

 

 

무량수각 현판(无量壽閣懸板) / 김정희 · 1846년 · 수덕사 근역성보관소장
추사가 제주도 유배 시절에 예산 화암사 무량수각의 현판으로 쓴 것이다

 

 

추사 김정희 유품

 

 

추사 김정희 간찰(簡札) / 김정희 · 예산군 추사고택 소장
내용으로 보아 제주도 유배기에 추사 김정희가 본가에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이다
전송 과정과 다양한 물품을 보내줄 것으로 요청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요청 물품에 비연호(코담배병)는 청나라에서 수입해 온 것으로 추사 김정희가 담배를 즐겼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매죽헌(梅竹軒)
영조가 사위인 월성위 김한신(月城尉 金漢藎 · 1720~1758)에게 하사한 현판으로 서울 월성위궁 사랑채에 걸려 있던 현판이다
매죽은 매화와 대나무로 변치 않는 절의를 상징한다
후대에 월성위궁에서 거주하던 추사 김정희 가문이 향저 예산으로 내려오면서 매죽헌 현판을 가지고 내려온 것이다

 

 

추사 김정희 고택 사랑방

 

 

비록 9999분에 이르렀다 하여도 그 나머지 1분을 원만하게 성취하기가 가장 어렵다
9999분은 거의 다 가능하겠지만, 이 1분은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또 사람의 힘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
내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되지만 나는 70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추사의 작품 및 추사 주변 인물 작품 소개
초의에게 보내는 편지 · 추사가 친척에게 쓴 편지 · 시골집 벽에 쓰다 등이 있다

 

 

주변 인물 작품
이하응이 쓴 편지 · 권돈인이 쓴 편지 · 주학년이 쓴 편지 등이 있다

 

 

기념품점

 

 

족자 가격 2만원

 

 

부채 7천원 · 부채받침대 3천원
머그컵 7천원 · 낙관 찻잔 12,000원
명함첩 12,000원 · 거울 12,000원

 

 

세한도붓통 25만원 · 목공예붓통 4만원 · 책갈피(목재) 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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