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문화관은 전통생활문화전시관 · 궁중문화전시관 · 기획전시실을 운영하여
국내외 관광객에게 다양한 한국문화의 체험 기회를 제공하여 우리 문화를 널리 알리고자 조성하였다
월미공원 입구 왼쪽 언덕에 있다
월미문화관
전통생활문화전시관
조선시대 한 인간의 출생 · 교육 · 혼례 · 상례 · 제례까지 전시되어 있다
돌상
백설기는 신성한 백색무구한 음식이고 수수팥떡은 빨간색이 액을 물리친다는 토속적인 믿음에서 비롯된 풍습이다
아이가 10세가 될 때까지 생일마다 수수팥떡을 해주어야 액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관례 · 계례 · 사부학당
남 · 녀의 성인식과 조선시대 관립교육기관이 설명되어 있다
인천 교육기관 교동향교 / 인천유형문화재 제28호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 화개산 북쪽에 지었으나 조선 영조 17년(1741)에 조호신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66년 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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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실천 정신에 따라 백성을 교화할 목적으로 지방에 건립한 관립 교육기관이다
인천지역에는 인천 · 부평 · 강화 · 교동에 설치 운영되었다
혼례 상차림
100세까지 건강하세요
월미공원 조성
기획전시실이다
월미도
군사요충지에서 시민의 품으로
월미도 지명의 유래
흔히 달꼬리를 닮았다 하여 월미도(月尾島)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얼다(어르다)의 얼과 물(水)을 뜻하는 미가 합쳐져
물이 섞이는(어르는 · 휘감아 도는) 섬이라는 얼미도라는 이름이 붙었고, 한자로 음차하면서 월미도가 되었다
월미행궁이 지어지다
병자호란 때 미처 강화도로 피난할 틈도 없이 몽골 기마병이 길목을 막아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야만 했던 뼈아픈 경험을 겪은 조정은 강화도로 가는 제2의 피난길을 개척했다
서울 - 영등포 - 인천도호부 - 월미도 - 영종도 - 강화도의 경로였다
수난의 시대
1866년 프랑스는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에 항의하기 위해 조선에 군함을 파견했다
조선 공략에 나선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세력들은 조선 침략의 발판으로 제물포를 강제로 개항시켰다
이후 월미도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조선 제일의 유원지 월미도
일본의 조선통치가 본격화되던 1918년 무렵 인천부는 월미도를 풍치지구로 지정하고
월미산 중턱에 회주 도로를 뚫어 공원을 조성, 월미산 곳곳에 벚나무와 아까시나무 등을 심고 가꾸었다
또한 북성지구에서 월미도 사이에 길이 1km인 왕복 2차선 제방둑길을 축조해 육지와 연결하였다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
1945년 8 · 15해방 직후 월미도는 군사지대로 징발돼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최대의 군사작전이었던 인천상륙작전의 첫 목표지점으로 월미도가 선택돼 집중포화를 맞음으로써
월미도는 가장 큰 상처를 겪은 섬이 되었다
전쟁 이후 월미도 한가운데 위치한 월미산에는 미군부대가 주둔하였다
시민의 품으로
전후복구기를 거치면서 월미도 해안 매립사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돼 주거지와 횟집거리가 들어섰고
1988년에는 문화의 거리로 정비돼 수도권의 해양관광지로 다시 각광을 받기도 했다
2001년 10월 13일 50여 년간 군부대가 주둔했던 월미산을 인천시가 매입 후 월미공원을 조성하여 개방했다
인천시민의 추억 월미도
치국평천하의 공간
궁중문화전시관이다
궁중문화전시관
어른과 어린아이들이 궁중 옷으로 갈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왕의 경연
왕의 하루 일과
아침 5시 기상 · 오후 11시 취침이다
수라상
수라라는 말은 고려 원종 때 전해진 몽골어로 음식을 뜻하는 「슐라」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 차례에 걸쳐 받았으며 아침 수라는 10시경 · 저녁 수라는 오후 5시경에 들었다
내명부 품계
궁중음악
궁중을 중심으로 발전한 음악으로 제례 · 연향 · 조회 · 군례악 등 다양한 궁중행사에 사용되었던 음악으로
음악 스타일로 나누면 아악 · 향악 · 당악으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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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