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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창덕궁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 왕궁이다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지만 이후 임금들이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탄 후에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되지 않고 1610년(광해 2)에 창덕궁이 재건된다
그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되었다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왕가의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경희궁이나 경운궁 등 다른 궁궐의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과 경계없이 사용하였으며 두 궁궐을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또 남쪽에는 국가의 사당인 종묘가, 북쪽에는 왕실의 정원인 후원이 붙어 있어서 조선왕조 최대의 공간을 형성했다
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과 재건을 거치면서 많은 변형을 가져왔고
1991년 12월 6일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 되었다

돈화문(敦化門 · 보물 제383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 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정문에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다

 

 

금천교(錦川橋 · 보물 제1762호)
예로부터 궁궐을 조성할 때에는 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당수를 건너게 하였다
이 물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경계 역활을 하므로 금천이라고 하며 창덕궁의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돈화문 동쪽 궐 밖으로 빠져 나간다
태종 11년(1411) 금천에 다리를 놓았는데 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르는 개울에 놓인 다리라 하여 금천교라 했다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다

 

 

진선문(進善門)
금천교를 지나면 진선문이 있다
이 문에는 신문고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경국대전에는 「원통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자는 소장을 내되, 그래도 억울하면 신문고를 두두려라」라고 신문고 치는 절차를 밝혀 놓았다
일반 백성들이 이러한 절차를 다 밟기도 어렵거니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돈화문을 통과하여 신문고를 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두두리기 힘들었을 신문고를 포기하고 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어려움을 호소하는 백성들이 많아 조정의 골치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인정문(仁政門) · 숙장문(肅章門)
진선문을 들어와서 봤다

 

 

인정문(仁政門 · 보물 제813호)
태종 5년(1405) 창덕궁의 창건 때 지어진 정전(正殿)에 이르는 출입문으로
효종 · 현종 · 숙종 · 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 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인정전(仁政殿) / 국보 제225호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왕의 즉위식 · 신하들의 하례 ·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이 펼쳐져 있고, 뒤편에는 뒷산인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인정전(仁政殿) / 국보 제225호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다

 

 

인정전 내부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전등 · 커튼 · 유리창문 등과 함께 1908년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문(仁政門)
남산 서울타워가 보인다
인정전에서 봤다

 

 

향실(香室)
향실은 궁의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축문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인정전 서쪽 행랑에 있다

 

 

선정문(宣政門) · 희정당( 熙政堂) / 보물 제815호

 

 

선정전(宣政殿) / 보물 제814호
선정문에서 복도각을 통하면 선정전에 이른다
선정전은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세조 7년(1461)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을 비서실 · 부속실로 이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혼전(魂殿)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선정문(宣政門) 현판

 

 

선정전(宣政殿) 내부

 

 

선정전 뒷마당

 

 

희정당(熙政堂) / 보물 제815호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이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 편전인 선정전이 좁고 종종 국장을 위한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인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동궐도에 그려진 원래의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이 모습과 완전히 다르고, 원래의 강녕전과도 다르다
재건된 희정당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 · 유리창문 ·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선평문(宣平門)
대조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대조전(大造殿) / 보물 제816호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 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1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다
이건하면서 창덕궁의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했는데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 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했다
원래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 주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다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며 왕실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대조전(大造殿) 편액

 

 

대조전 · 경훈각 연결채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 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景薰閣)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경훈각(景薰閣) 현판

 

 

청향각(淸香閣)
대조전 뒤뜰에 있는 건물이다

 

 

청향각(淸香閣) 편액

 

 

대조전 뒤쪽 문
가정당으로 가는 문이다

 

 

대조전 굴뚝
붉은 색과 검은 색 벽돌을 사용하였으며 쌍학과 사슴 문양이 있다
대조전 뒤뜰 화계에 있다

 

 

앙현문(仰賢門)
성정각 출입문이다

 

 

성정각(誠正閣)
세자의 교육장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내의원으로 쓰기도 했다
성정각은 단층이지만 동쪽에 직각으로 꺾인 2층의 누(樓)가 붙어 있어 독특한 모습이다
누각에는 희우루(喜雨樓) · 보춘정(報春亭)이라는 편액들이 걸려 있다
보춘정의 편액이 걸려 있는 방향이다

 

 

희우루(喜雨樓)
희우루의 편액이 걸려 있는 방향이다

 

 

집희(緝熙)
성정각 뒤편에 있는 관물헌(觀物軒)은 왕이 자주 머물면서 독서와 접견을 했던 곳으로 현재는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남아 있다
현재 성정각과 낙선재 사이, 후원으로 넘어가는 넓은 길은
원래 높은 월대 위에 당당하게 자리한 중희당(重熙堂)이 있었던 곳으로 이 일대가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東宮)이었다

 

 

집희(緝熙) 현판
동궁 일대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중희당은 1891년(고종 28)에 없어졌고
중희당과 연결된 칠분서(七分序) · 6각 누각인 삼삼와(三三窩) · 승화루(承華樓) 등이 남아 있다
이들은 서로 복도로 연결하여 서고와 도서실로 사용하였다

 

 

조화어약(調和御藥) · 보호성궁(保護聖躬)
조화어약은 임금이 드시는 약을 조제한다는 의미고 보호성궁은 임금의 몸을 보호한다는 의미이다

 

 

내각(內閣)
관청 대부분 궐 바깥에 있었지만,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 안에 세운 관청이 궐내각사다
인정전 서쪽 지역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 옥당(홍문관) ·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 봉모당 · 대유재 · 소유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규장각 · 대유재 · 소유재는 단순한 도서관으로 기능이 변했다가
그나마도 소장 도서들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기면서 규장각과 봉모당 등 모든 전각들이 헐리고 도로와 잔디밭으로 변해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2000~2004년에 걸쳐 복원되었다

 

 

내각(內閣) 현판

 

 

규장각(奎章閣)
규장각은 다른 이름으로 내각(內閣) 또는 이문원(摛文院)이라고도 했다
정조 즉위 초에 역대 왕들의 시문과 글씨를 보관하는 왕실 자료실로 지었다
처음에는 후원에 2층 누각으로 지었으나 너무 후미져서 불편하여 1781년(정조 5)에 이곳으로 옮겼다
왕권확립, 개혁정치, 문예부흥을 표방한 정조가 특별한 의지와 관심을 쏟은 곳이기에 청사 중에서 가장 넓은 옛 도총부 건물을 차지했다
규장각의 실무자는 문예와 학식이 뛰어난 서얼 출신들을 주로 임명하여 관직의 길을 열어 주었다
서얼 출신으로 박제가 · 이덕무 같은 뛰어난 실학자들이 여기서 배출되었다

 

 

운한문(雲漢門)
규장각 뒤편 역대 선왕들의 유품을 보관하는 봉모당(奉謨堂)으로 드나드는 문이다
운한(雲漢)은 은하수라는 의미로 「임금의 아름다운 덕」 또는 「제왕의 필묵」이라는 뜻도 같이 포함하고 있다

 

 

검서청(檢書廳)
규장각의 부속 건물로 출판될 서적의 교정과 서사를 맡았던 실무관원인 검서관을 위한 집무공간이다
금천이 내려다 보이는 누마루가 오른쪽에 있다

 

 

검서청(檢書廳) 편액

 

 

책고(冊庫)
규장각 소장 서적들을 보관하던 곳이다

 

 

책고(冊庫)

 

 

금천(禁川)

 

 

억석루(憶昔樓)
내의원에 속하는 약방(藥房)에 소속된 건물이다
정조(正祖) 때 저술된 작가미상의 한경지략(漢京識略)이란 책의 내용에 따르면
영조가 중국의 시조 중 하나로 추앙받는 신농씨(神農氏)의 위판(位版)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내의원에 명하면서 입심억석(入審憶昔)이라는 글귀를 써주었다고 한다

 

 

억석루(憶昔樓) 현판
유천(攸川) 이동익(李東益) 글씨를 철제(鐵齊) 오옥진(吳玉鎭)이 각(刻)한 것이다
억석(憶昔)이란 「옛날을 생각한다」는 의미로서 한경지략의 내용으로 미루어
최초로 약을 만든 신농씨를 생각하며 내의원에서도 이와 같은 자세를 가지라는 의도가 담겨있다

 

 

만복문(萬福門)
억석루와 약방을 연결하는 문이다

 

 

약방(藥房)
조선시대 때 왕의 약을 조제하던 관서 내의원은 태종 때 왕실의 내용약을 맡은 기관인 내약방을
1443년(세종 25) 6월 이조에 계청하여 독립관제로서의 내의원을 설치하였다
관인 16인을 두고 3품은 제거 · 6품 이하는 별좌 · 참외는 조교라 하였다

 

 

선원전(璿源殿)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태조 이하 영조 · 정조 등 여러 임금의 어진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새 선원전을 후원 깊숙한 곳에 건립하여
제사 기능을 옮기면서 선원전은 빈 곳이 되었고, 부속 건물들은 2005년에 복원했다

 

 

선원전(璿源殿)
9칸 몸채 앞 좌우로 진설청과 내찰당을 덧붙였고 재실인 양지당을 앞쪽에 설치해 제사 의례에 사용했다
선원전 영역 뒤편에 있는 의풍각은 일제강점기에 신축한 것으로, 제사용 그릇과 도구 등을 보관하는 창고였다

 

 

영의사(永依舍)
영원히 어재실(御齋室)에 의지한다(永依)는 뜻의 영의사는  임금이 선원전(璿源殿)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머무는 재실(齋室)이다
선원전과는 등을 돌리고 있는 형태다

 

 

양지당(養志堂)
임금이 선원전에 제사하기 전날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며 머물던 어재실(御齋室)이다
또한 선원전을 수리할 경우 어진(御眞)이나 어서(御書)를 궤에 담아 임시로 보관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양지당(養志堂) 편액
양지(養志)는 엄숙하고 고상한 뜻을 기른다는 의미로
유천(攸川) 이동익(李東益) 글씨를 철제(鐵齊) 오옥진(吳玉鎭)이 각(刻)했다

 

 

인정전 외행각(外行閣)
인정전 외행각 마당은 서쪽 진선문 쪽이 넓고 동쪽 숙정문 쪽이 좁은 사다리꼴이다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이 마당이 반듯하지 못하다 하여 박자청을 하옥시킨 일도 있었다
그러나 숙장문 바로 뒤에 산맥이 있어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사다리꼴로 만든 것이었다
고려 말 내시 출신이었던 박자청은 조선 개국 후에 궁궐 문을 굳게 지킨 일로 태조의 눈에 들어 왕을 경호하다가 창덕궁의 건축 감독을 맡게 되었다
창덕궁뿐 아니라 제릉 · 건원릉 · 경복궁 수리 · 청계천 준설 · 경희루, 무악이궁 · 현릉 등의 공사를 훌륭하게 수행하였고
이후 공조판서 · 우군도총제부판사의 지위까지 올랐다
*
마당에 호위청 · 상서원 · 정청 등 여러 관청들을 두었다

 

 

상서원(尙瑞院) 현판
옥새를 비롯하여 임금의 명령을 상징하는 각종 물건들을 관리하던 관청이다
절월(節鉞) · 병부(兵符) · 순패(巡牌) · 마패(馬牌) 등을 관리하였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 맞은 편 행각에 호위청과 나란히 있는데, 현재 현판과 기둥만 있다
조선을 개국한 해에 상서사(尙瑞司)란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세조 12년(1466)에 상서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호위청(扈衛廳) 현판
창덕궁 진선문과 숙장문 사이의 남쪽 행각에 있으며 현재는 현판과 기둥만 있다
호위청 맞은편에는 인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이 있다
호위청은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들이 국왕 호위를 명목으로 창설한 부대로
자신들의 군사적 세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호위청에는 대장 1명 · 별장 3명이 근무했으며 군관 350명을 거느렸다고 한다
호위별장 1명이 호위군관 30명을 이끌고 경비업무에 투입되었다

 

 

정청(政廳)
이조와 병조에 속한 사무용 건물로 정청은 정무를 보는 관청이란 의미다
현재는 현판과 기둥만 있다

 

 

정청(政廳) 현판

 

 

금천교(錦川橋 · 보물 제1762호)
예로부터 궁궐을 조성할 때에는 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당수를 건너게 하였다
이 물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경계 역활을 하므로 금천(禁川)이라고 한다

 

 

내병조(內兵曹)
궁궐 안에 있는 병조란 뜻이다
내병조에서는 대궐 안 각 문의 열쇠를 관리하고 임금이 탄 가마를 선도하며, 시위나 의장 때 질서를 바로 잡는 일을 맡았다
내병조는 1999년 복원되었으며, 현재 내병조는 창덕궁 관리소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내병조(內兵曹) 현판

 

 

단봉문(丹鳳門)

 

 

창덕궁 회화나무 군 / 천연기념물 제472호
돈화문 안마당 좌우에 자라는 회화나무가 모두 천연기념물이다
나무는 높이 15~16m · 가슴 높이 줄기 둘레 2~3m · 나이는 약 300~400년에 이른다
이곳의 회화나무는 1830년 무렵의 창덕궁 그림(동궐도 · 東闕圖)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린 창덕궁을 다시 지을 때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돈화문 주변은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공간으로
이곳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궁궐 정문 안쪽에 괴목(회화나무 · 느티나무)을 심고 그 아래에서 삼공(三公)이 나랏일을 논했다」는 중국고사에 의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궁궐 이외에 학덕 높은 선비들이 사는 마을에 흔히 심었다. 그래서 학자나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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