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5~8m · 전체 길이 18.627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정책에 의해, 해방 이후에는 도시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파괴 행위가 지속되어
1970년대까지 전체 18.6km 가운데 6.7km · 도성의 약 36%가 완전히 사라졌다
*
한양도성을 3번에 나눠 사진을 만들며 걸었더니 총 길이 34.3km · 소요시간 17시간 32분 걸렸다
3 · 1독립운동기념터(세브란스병원) 빗돌
1919년 3 · 1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 논의하던 곳이다
서울역이 시점이다
숭례문(崇禮門) / 국보 제1호
조선 태조 5년(1396)에 최초로 축조되었고 1398년 2월 중건되었다
이 문은 조선시대 한성 도성의 정문으로 4대문 가운데 남쪽에 위치하므로,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1448년에도 크게 고쳐지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남대문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양측에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1908년 도로를 내기 위하여 헐어 내고 성문만 섬처럼 따로 떨어져 있었으나
2006년 복원 공사를 마치고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되었으나
2008년 화재로 문루 1층이 약 10% · 2층이 약 90%가 소실되었다가 2013년 복구되었다
숭례문(崇禮門) 현판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로 전하는데 다른 도성문과 다르게 횡액(橫額)이 아니라 종액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오행사상에 따른 것으로 예(禮)자는 오행의 화(火)에 해당하는 글자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에 따라 세워서 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양의 조산(朝山)인 한강 건너의 관악산이 오행의 화산에 해당되어
그 불기운이 도성을 범접하게 되므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워 맞불로 도성을 보호하고자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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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0일 방화로 인한 화재로 인해 편액의 손실을 우려해
숭례문으로부터 분리하는 과정에서 현판이 추락하여 그 충격으로 일부 목재편에 탈락, 결실, 및 균열이 발생되었다
또한 현판의 테두리목도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고 일부 결실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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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을 통해 정확하다고 밝혀진 지덕사 소장 탁본을 토대로 기존의 변형된 글씨(崇자와 禮자의 일부)를 보다 원형에 가깝게 살려냈다
테두리목은 연결부위가 심하게 파손된 관계로 다시 걸었을 때의 위험에 대비하여 완전히 교체했다
남산육교
서울에서 처음으로 시설된 고가차도다
남산서울타워
도동삼거리에서 남산공원으로 올랐다
힐튼호텔
한양도성으로 이어지는 인왕산이 오른쪽으로 보인다
센트레빌아스테리움서울
한양도성 밖이다
백범광장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 · 1868, 12, 3 ~ 1953, 4, 17)
성재 이시영 선생은 백사 이항복의 10대 직계손으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셨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당시, 형 건영ㆍ석영ㆍ 철영ㆍ 회영, 동생 호영과 함께 6형제가 전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명문가 출신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신 분이시다
남산공원 백범광장에 있다
백범 김구(白凡 金九 · 1876. 8. 29 ~ 1949. 6. 26)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을 거쳐 국무위원과 주석을 지냈다
이후 갈라진 민족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고자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하고 좌우합작의 이념적 통합을 이루었다
해방 이후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그는 반탁운동을 맹렬히 전개했고 완전 자주독립노선을 주장했으나
1949년 6월 경교장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와룡매(臥龍梅) ·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빗돌
와룡매는 임진왜란 당시 창덕궁에 자라고 있던 나무를 일본으로 가져간 모목(母木)의 후계목으로
일본이 한국침략에 대한 사죄의 뜻을 담아 400여 년 만에 환국한 뜻 깊은 매화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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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리사의 견위수명은 안중근의사 유묵(보물 569-6호)으로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에서 1910년 3월 26일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휘호한 유묵이다
견리사의 견위수명은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치라」는 뜻이다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2013~14년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성벽 유적을 전시하고 있다
이 유적은 한양도성 남산 구간의 일부로 그동안 멸실된 줄로만 알았던 성벽 구간이다
총 길이 약 189m의 한양도성 유적은 태조(14세기) · 세종(15세기) · 숙종 이후(18~19세기)에 쌓았던 부분들이
하나의 성벽을 이루고 있어 시기별 축성 양식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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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하얀 원은 성벽을 쌓을 때 임시로 나무 기둥을 막았던 구멍의 흔적이고 성돌 윗 부분은 남산 분수대를 만들 때 쌓은 돌이다
한양도성 축성에 사용된 구조물 흔적
성벽을 쌓을 때 임시로 나무 기둥을 박았던 구멍의 흔적으로 지름은 15~40cm 정도이며, 깊이는 최대 55cm이다
이 구멍들은 2~3개씩 짝을 이루며 성벽과 나란히 발견되는 것이 특징이다
일부 구멍에서는 나무 기둥의 밑동도 남아 있었다
남산 한양도성유적에서는 총 137개의 기둥 구멍이 발견되었는데 구멍 흔적의 보호를 위해 모두 보존 처리하였다
일부는 관람객들이 볼 수 있도록 노출하고, 나머지는 모래를 채워 다시 땅속에 묻었다
윗 사진의 하얀 원으로 표시된 곳이다
남산 분수대 수문
예전 분수대를 만들 때, 한양도성 성돌을 빼내고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양도성의 구조
한양도성의 뒷채움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남산 자락의 성벽은 경사지를 활용하여 한쪽에만 성돌을 쌓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를 편축성이라 한다
면석으로 외벽을 쌓고 · 성벽의 안쪽과 자연 지형 · 토축 사이를 흙과 잡석으로 채웠는데 · 이를 뒤채움이라 한다
면석은 사각뿔모양으로 뒤뿌리를 길게 빼고, 그 사이사이로 잡석을 넣어 성벽과 지형이 단단하게 맞물리도록 하였다
성벽은 땅속에 묻혀 상부의 면석을 받쳐주는 기저부 · 땅위로 성돌이 켜켜이 쌓여 있는 체성 · 맨 위쪽의 여장으로 구성된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은 1단의 지대석과 3단의 면석이다
조선 신궁 배전 터(朝鮮 神宮 拜殿址)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조선 신궁 건물 15개 동 중의 하나인 배전의 기초 구조물이다
조선 신궁은 일제가 세운 신사로, 배전은 일반인들이 참배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곳이다
1920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5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산 자락에 쌓았던 한양도성의 성벽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배전의 기초는 2013년 남산을 발굴 조사할 당시에 발견되었으며 현재까지 유일하게 조선 신궁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배전은 가로 18.9m · 세로 14.9m 크기의 콘크리트 기초 위에 16개의 기둥이 세워진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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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 파란 원 형태는 남산 분수대다
방공호
축대 오른쪽 철문이 있는 곳이다
방공호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방공호 입구다
1937년 11월 17일 일본칙령 제661호 방공법 조선시행령에 따라 서울 곳곳에 방공호가 만들어졌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경희궁 옆에 있는 방공호이다
그 밖에 삼청동 일대 주택가에서도 여러 개가 발견되었다
방공호의 내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10평 정도의 방이 있다
방에서 또 다른 방향으로 긴 통로가 나 있는데 중간 지점부터 내부는 붕괴되어 있다
이곳에 쌓여 있는 돌들은 2013~14년 발굴과정에서 발견되었다
가장 왼쪽은 일제강점기 조선 신궁을 조성했을 때 사용된 축대돌(견치석)로 추정된다
가운데 계단석과 확돌, 용도와 출처가 불분명한 돌 등으로 추정된다
가장 오른쪽은 조선시대 성돌로 추정된다
내자육백척(柰字六百尺)
한양도성의 60번째 구간으로, 구간의 길이가 600척(약 180m)이라는 의미다
1396년 한양도성을 처음 쌓을 때 전체 성벽을 600척씩 97개 구간으로 나누어 관리했다
각 구간은 천자문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다
한양도성의 북쪽 백악산 정상에서 천(天) 자 구간이 시작되어 시계방향으로 돌아 97번째 조(弔) 자 구간으로 끝난다
남산 자락에서 발견된 내(奈) 자는 천자문의 60번째 글자로, 이곳은 600척 길이의 내 자 구간이 끝나는 지점이다
내자육백척(柰字六百尺) 각자성석(刻字城石) 모형
새겨진 글자의 형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글자에 색을 입혀 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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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한양도성에 남아 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 축성 책임 관리와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한양도성 남산 구간
남산 분수대
광복 이후 조선 신궁이 없어진 자리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들어섰다가 4 · 19혁명으로 철거되고 1960년대 말 남산식물원과 분수대가 자리 잡았다
둘레 20m의 분수대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컸으며 나들이 장소로 사랑받았다
2006년 「남산 제모습 가꾸기사업」으로 식물원은 철거되었으나 분수대 광장은 발굴 전까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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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을 따라 있는 하얀 선이 예전 성곽이 있던 자리다
오른쪽 인왕산 성곽도 하얀 선으로 보인다
한양도성 남산 구간
잠두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박조(朴祖 · 박정희 전 대통령) 때 쌓은 구간이다
잠두봉 포토아일랜드(북측 지점)
계양산 · 힐튼호텔
오른쪽으로 돌면서 봤다
안산 · 인왕산
인왕산 · 백악산
그 뒤로 북한산 · 도봉산이 있다
북한산 · 도봉산 · 수락산
수락산 · 불암산
망우산 · 아차산
남산서울타워
63스퀘어 · 파크원
63스퀘어 · 파크원 · 센트레빌아스테리움서울
사랑의 열쇠
남산(목멱산) 봉수대 / 서울시 기념물 제14호
세종 5년(1423)에 설치되어 1895년까지 500여 년 간 존속하였다
현재의 봉수대는 1993년에 추정 복원한 것이다
남산 팔각정(예전 국사당 터 · 國師堂址)
조선 태조 4년 12월, 남산 산신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작 · 목멱신사를 세워 국사당이라 불러오다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사람들이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1925년 종로구 무악동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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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우남정을 지었다가 1960년 4 · 19의거 때 철폐되었다
1968년 11월 11일 다시 팔각정이 건립되었다
북한산
앞쪽 인왕산 · 백악산 뒤로 북한산 · 도봉산이 있다
*
왼쪽 인왕산 · 백악산 · 낙산은 남산과 함께 한양도성의 내사산이다
수락산 · 불암산
천마산 · 백봉산 · 망우산 · 아차산
사랑의 열쇠
관악산 · 삼성산 · 계양산
앞쪽엔 반환된 미군기지와 용산공원이 있다
관악산
팔봉과 육봉능선이 마치 불꽃처럼 보인다
남산 통신탑
전망대
망우산 · 아차산
서울신라호텔 · 국립극장이 앞에 있다
왼쪽은 출입통제구역이고 · 오른쪽은 국립극장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한양도성은 왼쪽으로 이어지나 출입통제지역이라 뒷쪽 데크 계단으로 내려가야 한다
남산서울타워
한양도성 순성길 안내판
한양도성을 데크 계단으로 넘어간다
국립극장 · 서울신라호텔 · 반얀트리클럽 앤 스파 서울
데크 계단 조망대에서 봤다
반얀트리클럽 앤 스파 서울
천마산 · 백봉산
롯데월드타워가 오른쪽에 있다
국립극장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한양도성 각자성석(刻字城石)
도청 감관 조정원 오택 윤상후 편수 안이토리 기축 팔월 일
(都厅 監官 趙廷元, 吳澤, 尹商厚 邊首 安二土里 己丑 八月 日)
숙종 35년(1709) 8월 도성 개축 임시 책임자인 조정원 · 오택 · 윤상후가 함께 공사를 감독했으며
전문 석수 안이토리가 공사에 참여했다는 내용이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반얀트리클럽 앤 스파 서울
관악산 · 그랜드하얏트서울
성곽마루 정자
남산의 소나무 숲과 이어지는 성벽들이 보인다
청량리 롯데캐슬건설현장
가운데 가장 높이 솟은 건물이다
서울신라호텔
흥해시면(興海始面) 각자성석(刻字城石)
경상도의 흥해군(지금 포항시 흥애읍) 백성들이 공사한 구간의 시점을 표시한 것이다
세종 때는 성벽을 쌓은 지방의 이름을 새겨 두었다가 성벽이 무너지면 서울로 올라와 다시 쌓게 했다
십삼수음시(十三受音始) 각자성석(刻字城石)
조선 태조부터 세종 때에 도성을 쌓을 때 공사 구간을 이두식으로 수음(받음 또는 쉼)이라고 불렀는데
이 각자성석은 13번째 공사 구간임을 뜻한다
장충체육관 부근이다
천주교 신당동성당
한양도성
주택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
광희문(光熙門)
1396년(태조 5)에 도성을 쌓을 때 창건되었으며, 1711년(숙종 37)에 고쳐 쌓았다
1719년에 석축 위에 문루를 짓고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석축으로 된 기단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에 복원할 때 홍예석축을 해체하여 남쪽으로 15m 옮겼고
문루 12평을 새로 지었으며, 주변의 2백평을 녹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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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소의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를 내보내는 문이였다
수구문(水口門) ·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한다
예전 동대문운동장 조명탑
운동장이 폐쇄되면서 5개 중 2개의 조명탑을 남겨 놓았다
이간수문(二間水門)
조선 초부터 남산의 개울물(남소문동천)을 도성 밖으로 흘러보냈던 시설이다
2칸의 반원형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간수문이라 부른다
이간수문은 배수시설 외에도 성곽의 일부로서 방어기능도 있었는데 수문군으로 하여금 이곳을 지키게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운동장의 건립으로 파괴된 채 오랜 기간 땅속에 묻혀 있었으나
2009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립을 추진하면서 발굴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
물가름을 용이하게 하는 배머리 모양의 물가름석과 적을 막기 위한 목책이 있다
참고로 오간수문은 이간수문보다 더 컸다고 한다
동대문운동장 기념관
동대문운동장은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당시 일본의 세자였던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건축되어
2007년 철거되기 전까지 경성운동장에서 서울운동장 ·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내부에 있는 동대문운동장 검색기에서는 동대문운동장의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주요 경기장면을 이미지 동영상 · 신문기사 등으로 검색할 수 있다
오간수문(五間水門)
원래 청계천 오간수교 밑에는 이간수문처럼 오간수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왼쪽에 오간수문 모형만 있다
흥인지문(興仁之門 · 동대문)
흥인지문 오른쪽으로 한양도성 낙산 구간이 시작된다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0.74km, 소요시간 5시간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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