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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충주 관아공원

충청도는 충주시와 청주시에서 첫 자를 딴 이름이다
충주시는 충청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기에 도(道)의 명칭을 정의하는 첫머리에 충(忠) 자가 위치한다
*
관아공원은 그 행정의 중심인 옛 관아가 있던 곳이다

충청감영문(忠淸監營門)
관아 정문이다

 

 

충청감영문(忠淸監營門)
1996년 건립되었다

 

 

충청감영문(忠淸監營門) 현판

 

 

중원루(中原樓)
충청감영문 안쪽이다

 

 

중원루(中原樓) 현판
충청감영문 안쪽 현판이다

 

 

을미의병과 충주성전투 · 충주읍성 · 충주읍성 안내판

 

 

축성사적비(築城事蹟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
충주읍성 1869년 2월부터 개축하기 시작하여 10개월 만인 11월에 준공하였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한 표지로 세운 비다

 

 

축성사적비(築城事蹟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
빗돌에는 축성 연대와 크기 · 문루의 크기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신미년(고종 8년 1871) 3월 충주목사 조병로가 축성하였으며 성의 둘레 3,950척 · 두께 25척 · 높이 20척 · 치첩은 415간(間)에
경천문(敬天門 북문) · 봉아문(鳳阿門 남문) · 조양문(朝陽門 동문) · 휘금문(輝金門 서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군수서후회보애민선정비(郡守徐候晦輔愛民善政碑)
대한제국에서 충주군수로 지내다가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후에도 조선총독부 충주군수로 근무했다
1912년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7년에는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어 2년 뒤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
친일반민족행위 명단에 포함되었다

 

 

느티나무 보호수(품격 도나무)
나무 높이 22~25m · 둘레 610~950cm · 나이 510년 · 지정일자 1983. 1. 7

 

 

느티나무 보호수
가로등과 사람이 나무 크기를 짐작케 한다

 

 

순교자 현양비
천주교 박해가 있을 때마다 충주 부근의 천주교우들이 충주 동헌에 잡혀와 심문을 받았으므로
이곳에 서린 순교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비다
충주에서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장소는 봉방동 무학당 주변(지금의 충주우체국 신축부지)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는 이기연 · 이부춘 · 이석중 부자 · 권아기련 등 많은 사람이 순교한 사실이 확인된다

 

 

청녕헌(淸寧軒)
산고수청각 · 제금당이 옆에 있다

 

 

청녕헌(淸寧軒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6호)
충주목사가 집정하던 동헌으로 1870년(고종 7년) 8월 화재로 소실되어
같은 해 충주목사 조병로가 남산에 있는 창룡사 건물 일부를 옮겨와 세운 건물이다

 

 

청녕헌(淸寧軒)
건물의 규모는 정면 7칸 · 측면 4칸의 겹치마 팔작기와지붕이다
1895년(고종 32) 충주부 관찰사가 사용하였고, 이듬해 충청북도 관찰사의 집무실이 되었다
청녕이라는 이름은 노자의 도덕경에서 따온 것으로 「맑고 편안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청녕헌(淸寧軒)
1908년(순조 2) 5월 25일 도청이 청주로 이전되면서 충주군수의 정청으로 이용되었다
한말 의병전쟁 때에는 호좌의병장 의암 유인석의 군대가 충주성을 점령하여 한때 위세를 떨쳤던 곳이다

 

 

청녕헌(淸寧軒) 현판

 

 

청녕헌에서 충주목사가 집정하는 모형이다

 

 

청녕헌(淸寧軒)
제금당 · 충청감영문 · 보호수가 보인다

 

 

예성별관(蘂城別館)
충주읍성은 1277년(충렬왕 3) 처음 세워졌다
둘레 680보 규모 석성으로 신방석(信枋石)에 화려한 연꽃무늬를 · 자방에 태극무늬를 새겼다
충주의 또 다른 이름인 예성(蘂城)이 여기에서 왔다

 

 

예성별관(蘂城別館) 현판

 

 

느티나무

 

 

사령청(지금 관아골식당)
장교청(將校廳)의 하부기관으로 사령(使令)들의 집무실이다
사령은 중앙과 지방관청에서 심부름 등의 일을 맡고 군관 · 포교 밑에서 죄인에게 곤장을 치는 등 여러 일을 하였다
*
예성별관 바로 앞이다

 

 

제금당(製錦堂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7호)
동헌 동쪽에 위치한 금당은 왕실과 관련된 인물이 왔을 때 머물던 별관으로 단청이 화려하다
규모는 정면 7칸 · 측면 3칸이며 · 겹처마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제금당(製錦堂)
1870년 화재로 불탔던 것을 같은 해 다시 지은 건물이다

 

 

제금당(製錦堂) 현판

 

 

제금당(淸寧軒)
출입문인 내삼문은 1871년(고종 8)에 솟을 대문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예성별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어 제금당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협문
관아에서 충주 문화회관으로 통하는 문이다
산고수청각 옆에 있다

 

 

산고수청각(山高水淸閣)
청령헌 · 제금당과 함께 화재로 불탔던 것을 1870년 다시 지은 건물이다
제금당에 중앙의 관리가 머무를 때, 산고수청각은 수직청으로써 지금의 비서실 같은 용도로 사용하였다

 

 

산고수청각(山高水淸閣)
동헌인 청녕헌이 충주의 진산인 대림산을 향하여 남서향하고 있는데 별관인 제금당과 산고수청각은 정남향을 하고 있다
이는 청녕헌은 지방관이 사용하는 아사(衙舍)이기 때문이나 제금당과 산고수청각은 왕부(王府)의 건물이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충청감영문루 건립공사 빗돌
관아를 지을 때 사용되었던 댓돌 · 주춧돌 등의 석재들이다

 

 

비석 지붕돌
벤치 뒤에 놓여 있다

 

 

경무청(지금의 충주예총회관)
1894년 갑오개혁 때 신설된 관청으로 좌포청과 우포청을 합쳐 경무청이라 하였다
각 지방장관이 경무청을 두고 경무관과 총순을 두어 경찰 임무를 담당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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