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은 1860년 4월 5일 창도된 이래 다시 개벽의 새세상으로 가는 길을 민중에게 제시하고 그 실현을 노력해 왔다
그중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는 물론 동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끼쳤으며
세계사적 혁명으로서 우리나라의 자랑이자 길이 빛날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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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관련 역사적 자료와 동학의 창도에서부터 수난 과정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 교단의 발전과 문명개화 운동과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새 세상을 여는 사람들(부제 동학인물도 · 소래 박홍규 작품)
인물 안내
앞줄 정중앙 수운 최제우
정중앙 우측 최시형 · 손병희 · 박인호 · 손천민
정중앙 좌측 손화중 · 전봉준 · 김덕명 · 이방언 · 김개남
뒷줄 중앙 이소사 등 무명 동학혁명군
1층 전시실
수운 최제우 대신사 존영
1933년 고희동 화백이 그린 수운 최제우 선생 초상화
1909년 김은호 화백이 그린 초상화와 1893년 일본 「일일조일신문」에 게재한 초상화를 참고했다고 전한다
신사 해월 최시형 상
천도교 제2세 교조 신사 해월 최시형은 동학혁명을 주도하시다
포덕 39(1898)년 4월 5일(음) 원주 송골에서 관헌에 피체되어 동년 6월 2일 향년 72세로 경성감옥에서 순도(殉道)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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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좌상은 순도 직전의 최후 모습으로서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하여 고(故) 종법사 김창업의 특성(特誠)으로 세우다
포덕 136(1995)년 11월 10일
대인접물
사람을 대우하고 사물을 다루는 방법으로, 동학에서 가르치는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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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한울(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 같이 하라
내 제군들을 보니 스스로 잘난 체하는 자가 많으니 한심한 일이요
도(道)에서 이탈되는 사람도 이래서 슬픈 일이로다
나도 또한 이런 마음이 있느니라
이런 마음이 생기면 생길 수 있으나
이런 마음을 감히 내지 않는 것은 한울님을 내 마음에 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동학의 창도와 수운대선사 · 동학 장도의 시대적 배경
19세기 후반 서양 세력의 침투와 조선 사회의 내재적 위기 속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 ·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세우며 등장했다
당시의 유교는 성리학적 명분주의에 빠져 변화하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불교 역시 조선시대 500여 년 간 정책적으로 탄압받아왔으므로 새로운 사회를 주도할 자체의 역량이 부족했다
또한 서양의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사회에 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당시 서학의 침투에 대항하는 한편, 새로운 이상세계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등장한 것이 동학이었다
1860년 4월 5일(음) 경주 용담에서 수운 대신사(水雲 大神師)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창도하였다
수운 대신사는 종교체험 중에 한울님으로부터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가르침과
시천주(侍天主)의 진리를 담은 글(呪文)과 그림(靈府)를 받았다
룡담유사
백산대회 · 황토현전투 · 황룡전투
동학혁명군 백산봉기
고부기포와 무장기포
포고문 · 격문
동학혁명의 좌절과 계승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산발적인 전투에도 불구하고 전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동학군의 씨를 말리고 발본색원하는 전원 살육작전"을 전개한 일본군의 만행으로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학살되거나 지하로 숨어들어 후일을 도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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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등 지도자 사형
1894년 12월 전봉준이 순창 피로리에서 체포되었고
손화중 · 김덕명 · 최경선 · 성두한 등도 잇따라 체포되어 서울에서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당했다
김개남은 전주에서 참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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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서울에서 재판정에 출정하는 전봉준, 다리가 부러져 걸음을 걷지 못하였다
손화중 · 전봉준 · 손병희
전시실
귀국하는 의암 성사와 환영나온 천도교 교인들
동학정신 천도교로 이어지다
3 · 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천도교인 대표(총 15명) 중 7명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대접주 출신이다
또 전국의 3 · 1운동 지도자 중에는 동학 접주가 다수 포함되었다
소파 방정환과 어린이운동
소년 소녀잡지 어린이
동학농민운동의 계승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안내지도
3 · 1혁명 100주년 기념 특별전시
동학,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다
동학농민혁명, 새 세상을 만들다
천도교청년회 창립과 신문화운동
신간회 참여와 무인멸왜기도
후천개벽도 목판화 / 박홍규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