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근대역사박물관 역사는 미래가 된다는 모토로
과거 무역항으로 해상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옛 군산의 모습과 전국 최대의 근대문화자원을 전시하여
세계로 뻗어가는 국제 무역항 군산의 모습을 보여주는 박물관이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해양물류역사관 / 국제무역항 군산의 과거 · 현재 그리고 미래
해양물류역사관은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군산의 과거를 확인하고 이를 통하여 군산의 현재와 미래를 통찰하는 공간이다
국제교류의 관문 군산도
「군산」이라는 지명이 유래된 군산도(선유도)는
금강과 만경강 · 동진강 물줄기가 한데 모이는 곳에 위치하여 줄곧 해상교통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진포에서 군산으로
조선시대 군산은 태조 4년 회미현을 옥구현과 병합하여 옥구와 임피현 중심의 행정체제로 정비된다
또한 태조 6년 옥구현에 종3품 병마첨절제사가 관할하는 진이 설치될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후 세종 때에는 군산도(선유도)의 수군부대인 군산진을 옥구현 진포(군산 내항)로 이전하여
이후 진포를 군산이라 칭하고 군산도(선유도)는 고군산이라 칭하게 된다
요여(腰輿 조선 후기)
전통상례에서 장례를 지낼 때 혼백과 신주를 모시는 작은 가마로 영여 또는 영거라고도 하는데 장례시 상여 앞에 서는 가마다
고려시대 12조창
조선 초(1487)에는 진성창을 대신하여 옥구현 북면(지금 박물관 인근지역)에 군산창이 설치되었고
1500년대에는 호남의 중요한 조운창고로 거듭나게 되었다
조선시대 군산창
군산창이 호남의 중심 조창이 된 이유는 군산이 서해와 만나는 금강 하구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군산창은 옥구 · 전주 · 진안 · 장수 · 금구 · 태인 · 임실 등 7개 읍의 세금을 보관하게 되었고
7읍의 조세가 모인다는 의미인 「칠읍해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조운선과 수많은 장삿배 및 어선이 왕래하던 군산창과 군산포는 호남 최고의 항구가 되었고
상업 활동이 활발해져 근대도시로 발전하는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군산진
고려말 조선초까지 서해안 일대는 왜구의 노략질이 그치지 않았다
이에 조성왕조는 오늘날의 고군산에 수군 진을 설치하였고
이후 세종 8년(1426)에 옥구현 북면지역인 진포(오늘날의 군산)에 군산진이라는 이름으로 이전하였다
진포의 군산진은 군산진성을 갖춘 병영이었다
객주
전국 각지의 상품이 모이는 거점에서 상품을 위탁받아 팔아주거나
매매를 주선하며 창고업 · 화물수송업 · 금융업 등의 기능을 겸하였던 중간상인을 말한다
군산은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라도의 조세가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하고 객주도 많았었다
군산의 객주들은 군산창과 군산포 · 죽성리포 · 경포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고군산군도
옛날에는 군산도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그 명칭을 현 군산시에 넘겨주고
고(古) 군산이라 불리는 「고군산군도」는 유무인도서 63개가 모여있는 군산시 관광자원의 보고이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고군산(선유도)의 가구 수는 모두 600호라고 적고 있다"
선유도의 고군산진
고군산군도(선유도)는 본래 군산도라 불렀다
그런데 인조 24년(1624) 군산도에 수군 진을 설치하면서
세종 8년(1426) 옥구현 북쪽 진포에 세워진 수군부대인 군산진과 구별하고자 고군산진이라 칭하였다
주목망
나무 말뚝으로 입구를 고정시켜 물고기를 잡는 그물
*
죽방렴
물살이 드나드는 좁은 바다 물목에 대나무발 그물을 세워 물고기를 잡는 전통적인 어구
정치망
한 곳에 쳐놓고 고기떼가 걸리도록 한 그물
*
석방렴(독살)
해안가에 돌로 울타리 모양의 담장을 만든 후, 조수간만의 차로 물고기를 잡는 함정어법
어살
전통어로 방법으로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포획
*
어살(어전)
전통어로 방법으로 대나무를 날개 모양으로 해안에 둘러친 후,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포획
독립영웅관
군산의 독립운동가 74분을 기리는 공간이다
이인식 · 양일동 · 심재순 · 강문주 선생 유품
옥구농민항쟁 유공자 34인
칙령
이준영 의병장 독립의군부 참모 임명장이다
1912년 12월 이준영 장군을 종3품 통훈대부로 특별히 승진시키고 독립의군 참모관으로 명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봉균 선생의 유품과 재판기록 · 이태로 선생 신문기사
국내 항일투사 유공자 11인
1920년대 많은 애국지사들이 농민노동운동을 이끌었으며 1941년 전봉균 선생은 비밀결사단을 조직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으로 옥중 순국하였다
민족의 영웅들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애국지사들은 을미사변(1895)이후 광복때까지 수십만 명이라 한다
그 중에서 국가유공자로 포상 받은 이는 전국적으로 14,264명(2015)이고
그중 군산은 총 73명으로 전북지역(754명) · 임실(126명) 다음으로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공자묘(孔子廟) 현판
일제강점기 군산의 유지였던 모리키쿠가 자신의 집 뒷산인 월명산 중턱에 건립한 사당이다
모리키쿠는 사당과 그 옆에 보국탑을 건립하여 그의 후손이 영원히 이곳에 살면서 나라에 보국하자는 내용을 탑의 면석에 새겨넣었다
이 공자묘 석판은 사당의 현판으로 사용되었다
근대생활관
일제의 강압적 통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치열한 삶을 살았던 모습을 재현한 공간이다
*
인력거방
인력거를 끄는 인력거꾼들은 자체적인 노동조합이 있었으며 단결력이 좋아 군산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단체였는데
이들이 손님을 대기하는 정차방 즉, 차방은 군산에 두 곳이 있었다
경성고무
1932년 조선인 이만수에 의해 경성고무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경성고무는 조선인들의 자본으로 설립된 유일한 공장이었다
경성고무는 해방이후 만월표 고무신을 생산하였는데 그 고무신의 인기는 대단하였다고 한다
경성고무 형제고무신방
경성고무는 만월(滿月)표 고무신발이라는 고무신을 생산하였는데 인기는 전국 최고였다
만월표 고무신발은 공장의 출고장에서 전국으로 운송되어 각 지역의 특판장을 통해서 판매되었다
군산역에서는 경동의 서정길씨가 특판점으로 도매를 하였으며
소매점 중에서 최고의 영업을 하였던 곳은 역시 경동에서 문을 열었던 현제고무신방(방한도 · 방순주 · 방현주 형제 운영)이었다
조선주조주식회사 / 쌀의 도시 군산의 실상
군산은 양질의 쌀이 생산되고 소비계층이 두터워서 양조산업이 번창하였다
1932년 군산에는 9개의 양조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조화(朝の花 / 해방 후 백화로 상호 변경)나 향원주조 등은 해방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1년 동안의 생산 판매액을 보면
소주 20석 · 약주 619석 · 탁주 4,351석 · 일본 정종 2,565석이었다
특히 탁주의 소비가 수위를 차지하고 점점 늘어갔던 이유는 가난한 조산 사람들이 탁주를 음식 대용으로 이용했기도 했기 때문인데
양조장의 술지게미로 허기를 달래기 위해 매일 아침 십여 명이 양조장 문앞에 줄을 서는 모습이 쌀의 도시 군상의 실상이었다
조선주조 가격표
근대 군산 내항의 모습
1930년대 일본으로 수탈해가기 위해 군산 내항에 쌓아놓은 조선의 쌀가마니들
*
지게체험을 할 수 있다
군산좌
군산에 언제 처음 영화관을 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14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펴낸 「호남선」에
"군산에는 군산좌와 명치좌 두 곳의 극장이 있다"고 적고 있어 아마도 1914년 이전에 영화관이 개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 시간여행 연극공연 / 전국 박물관 최초 시대극 공연
군산좌 개장 초에는 일본 전통극인 가부키 중심의 공연을 하였으나
후에는 변사가 진행하는 활동사진인 신파극과 연극(국극 · 창극)도 교대로 상영하는 다기능 공연장이었다
당시 군산좌는 2층 건물이었는데 실내는 의자가 없이 널찍한 다다미방이라서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군산 출신 명배우 남춘역
남춘역의 본명은 이종모로 1923년 군산에서 태여났으며 일제강점기 군산 흥남동과 선양동에서 살며 성장하였다
남춘역은 일제강점기 만주 신경의 「신태양극단」에서 활동하며 떠돌이 가수로 전전하다가 해방 후 영화 붐을 타고 배우가 된다
남춘역은 주로 조연을 맡았다
군산, 영화촬영지로 각광받다
1948년 이만홍 감독의 「끊어진 항로」를 시작으로 2014년 한동욱 감독의 「남자가 사랑할 때」까지 군산에서 촬영된 영화는 104편이 있다
로마의 휴일 포스터
오-드리 - · 헾버-ㄴ · 그레고리 - · 펙
한글 표기도 많이 변했다
임피역
1912년 군산선의 간이역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 일제는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해 가기 위하여 군산선을 건설하였는데
임피역은 호남지역에서 수확한 쌀을 군산항으로 수송하여 일본으로 반출하는 중간 간이역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재의 역사는 1910년대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1936년 개축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게되었다
2005년 둥록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되었다
임피역
기획전시실 / 항일투사가 된 축구소년
오토바이 채금석의 삶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전시를 열며
군산 출신 축구선수이자 지도자로 한국축구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채금석의 삶을 재조명하고
우리지역 축구 역사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기획전을 개최합니다
축구의 기원
기원전 2~3세기 중국의 「축국」이란 경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기원전 6~7세기경 고대 그리스에서 행해진 「하파스톤(Hapaston)」이라는 경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1863년 각 팀의 대표들이 모여 영국축구협회를 결성하고 통일된 규칙을 만들었다
유니폼 전시실
짚으로 만든 축구공(근현대)
축구가 처음 도입되던 시기 가죽공은 구하기 힘들어 새끼줄을 둥글게 엮어 사용했고 해방 이후에도 사용되었다
구한말 축구 모습 / 1906년
대한축구구락부 회원들이 서울 삼선평(오늘날 삼선교)에서 축구하는 모습이다
공설운동장 / 1969년 6월
현재 구시장이 되어버린 공설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우승을 차지한 경신학교 축구부 / 1929년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경신학교 선수들 모습이다
앞에서 두 번째가 채금석이다
성인팀도 꺾는 소년팀
경신학교에 입학한 채금석은 평생 친구이자 축구 동반자인 김용식을 만나 축구연습을 하며 실력을 쌓았다
채금석과 김용식은 경신학교 축구부 환상의 콤비를 보여주며 1928년 6월에 서울 5개 중학교 연맹축구대회 우승
조선체육회가 주최한 전조선축구대회 제9회와 10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경신학교 축구부는 중학생팀이었지만 1929년 오사카 아사히신문 주최 제3회 전조선대회에서
청년부 보성전문학교(오늘날 고려대학교)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였고
9월 일본을 대표하는 와세다대학팀을 4 : 3으로 이기는 등 「성인팀도 꺾는 경신」 · 대학팀 킬러 경신으로 불렸다
*
(2021. 10. 03)
'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웅진백제역사관 (0) | 2021.10.08 |
---|---|
서천 신성리갈대밭 (0) | 2021.10.08 |
군산구불6-1길(2) (0) | 2021.10.07 |
군산 구불6-1길(1) (0) | 2021.10.07 |
대천 친구네 (0) | 2021.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