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우암 송시열 유적
화양서원지 · 만동묘 주변에는 송시열 선생과 관련된 암서재 · 하마비 · 읍궁암 · 묘소 및 신도비 외에
암서재 주변의 암벽에 많은 애각 사적이 산재해 있어 송시열 선생의 북벌애국사상과 민족자존정신이 깃든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 성리학의 중심지로서 일제에 의하여 철저하게 왜곡 파괴되었던 곳이다
괴산 송시열 유적 안내도
양추문(陽秋門)
만동묘로 들어가는 삼문이다
양추문(陽秋門) 편액
존사청(尊祀廳) · 풍천재(風泉齋)
양추문 오른쪽 건물이다
존사청(尊祀廳) 편액
풍천재(風泉齋)
풍천재(風泉齋) 편액
증반청(蒸飯廳)
양추문 왼쪽 건물이다
증반청(蒸飯廳) 편액
화양서원 송자사(宋子祠) · 승삼문(承三門)
우암의 영정을 모시고 매년 3월과 9월에 제향을 올리는 본전이다
2002~2004년까지 남아있는 초석 위에 복원하였다
증반청 옆에 있다
승삼문(承三門) 편액
송자사 삼문 편액이다
송자사(宋子祠)
우암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본전이다
증반청 옆에 있다
증반청(蒸飯廳) · 풍천재(風泉齋) · 존사청(尊祀廳)
송자사 옆에서 봤다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 충청북도 시도기념물 제25호)
조선에 원군을 파병한 명나라의 신종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묘정비로 양추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다
성공문
만동묘로 들어가는 삼문이다
만동묘(萬東廟 충청북도 기념물 제 25호)
우암의 유지를 받든 권상하 등이 1704년(숙종 30)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병한 명나라의 신종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기 위해 건립했다
1747년(영조 23)에는 예조에서 90명이 윤번으로 사당을 지키게 하고, 묘정비를 세웠다
1809년(순조 9)에는 기존 사당을 헐고 다시 짓도록하였다
이후 1865년(고종 2) 지방과 편액을 대보단으로 옮기고 만동묘를 철폐하였다가 1874년 최익현 등의 상소로 부활되었다
1908년 일본통감부에 의해 다시 철폐되고, 1917년 제사를 금지하였다
1937년 제사를 지내는 유림을 구속하고 위패와 제구를 불사르고 묘정비를 징으로 쪼아 훼손하였다
1942년에는 건물을 불사르고 묘정비를 땅에 묻어버리고, 1943년 완전 철거하였다
광복 후 매몰되었던 묘정비를 찾아 1978년 10월 27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1982년 유적을 발굴조사하고, 1991년 풍천재를 복원하였고
2002~2005년까지 발굴된 유구 위에 만동묘 · 성공문 · 양추문 · 묘정비각 · 존사청 · 증반청을 복원하였다
양추문
만동묘 삼문 앞에서 봤다
암서재(巖棲齋)
우암 송시열이 만년에 벼슬을 그만둔 후 화양동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후학들을 가르치던 서실이다
도립공원인 화양동 계곡의 절벽 큰 암반위에 정면 4칸 · 측면 2칸으로 세웠는데
주위에는 노송이 울창하고 밑으로는 맑은 물이 감돌며 층암절벽이 더할 수 없는 경치이다
암서재 앞에 일각문이 세워져 있고 1986년에 보수하였다
화양구곡 중 제3곡 읍궁암(泣弓岩)
우암 송시열 선생이 조선 17대 왕 효종께서 돌아가신 것을 슬퍼하여
매일 새벽마다 한양을 향하여 엎드려 통곡하였다 하여 읍궁암이라 부른다
괴산 화양서원 묘정비
서원 앞에 세워 서원의 건립 취지와 그 서원의 주인 · 모시는 인물에 대한 문장 등을 기록해 두는 것으로 숙종 42년(1716)에 세운 것이다
비문은 윤봉구가 지었으며 안진경의 글자를 모아 만들었다
서원이 철폐되면서 이 비도 땅에 묻히게 되었던 것을 광복 이후에 묘정비를 찾아 다시 세웠다
화양서원은 조선 숙종 22년(1696)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창건되던 해에 사액되었으며, 숙종 42년(1716) 어필로 현판을 달았다
전국의 사액서원 중에서도 가장 이름 있고 위세가 당당한 서원이었으나 많은 논란 속에 철종 9년(1858)에 복주촌이 폐쇄되고, 고종 7년(1870) 훼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