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나들길은 우리나라 역사의 집약체이며 생생한 역사의 현장인 이 땅에
선조가 심어놓은 학문과 역사의 지혜를 마음으로 새기고 몸으로 느끼며 걷는 도보여행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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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돈대길」로 불리는 강화나들길2코스는 외국과의 충돌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돈대와
조선 말 병인양요 · 신미양요에 이르는 민족의 자긍심과 국난극복의 의지가 서린 강화도 전적지를 살펴보는 길이다
코스는 A · B · C코스로 나누어 놓았는데 총거리 17km · 소요시간 5시간 50분이다
강화 광성보 안해루(按海樓)
병자호란으로 강화도가 처참하게 함락된 후 체계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조선 효종 9년(1658) 강화해협 주위에 설치한 12개의 진과 보 중의 하나로 화도돈대 · 오두돈대 · 광성돈대를 관할하였다
무역통상을 요구하며 미국함대가 침범한 사건인 신미양요(1871) 때 미국 군대와 사투를 벌여 이재연 등 모든 군인이 전사하였다
이 때 문의 누각과 성이 파괴되었던 것을 1976년에 새롭게 복원하였다
광성돈대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 중 하나로서 숙종 5년(1679) 함경도 · 황해도 · 강원도의 승군 8천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 만에 완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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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는 「홍이포」라고도 하는데 사정거리가 700m정도로 포알은 화약의 폭발 힘으로 날아가지만 폭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력은 약했다
쉽게 말하면 쇠구슬이 날아가는 것이다. 가운데 있는 소포는 사정거리가 300m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대포는 조준이 안되지만 소포는 조준이 된다. 오른쪽 것은 불랑기로 프랑스군이 쓰던 것이다
불랑기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화승포로 작지만 무게가 38kg이나 된다
쌍충비각 · 무명용사비로 오르는 길이다
쌍충비각 · 무명용사비
우측 쌍충비각는 어재연(1823~1871), 어재순과 59명의 순절을 기리는 비가 있다
신미양요로 350명의 전사자를 내었던 아픔의 현장이다. 매년 음력 4월 20일이면 숨진 호국영령들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제물로 꼭 까만 돼지를 잡는다고 한다
한 번은 흰 돼지를 잡으려고 했는데 흰 돼지가 저절로 죽고 잡으려던 사람 꿈에 꼭 까만 돼지를 잡으라는 계시가 있었다고 한다
흰 돼지는 서양 사람 색깔이니 제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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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무명용사비가 왼쪽에 있다
진무중군 어재연 · 유학 어재순 순절비
광성파수순절비 본영천총 김현경 · 본진별장 박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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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충비각 안에 있다
신미 순의총
조선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광성보 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한 무명 용사들의 무덤이다
어재연, 어재순 형제는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알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최후의 한 명까지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며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았으니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했던 우리 민족의 호국정신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광성보 손돌목돈대(사적 제227호)
조선 숙종5년(1679)에 축조된 돈대로 덕진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으며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
돈대 넓이는 778㎡에 성곽 길이가 108m이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광성보 손돌목돈대 안내판에 있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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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우리의 선조께선 서양 총에 맞서 방탄복으로 솜옷을 한 여름에 껴입고 싸우셨다 한다
광성보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강화해협을 지키던 천연 요새로서 손돌목돈대에 속해 있는 외곽 초소겸 포대이다
고종 8년(1871) 포대가 설치되면서 정비된 곳으로 1977년 강화전적지 정화보수사업을 하면서 용두돈대라 부르게 되었다
병인 신미양요 때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며 1977년 성벽을 복원하면서 강화전적지 정화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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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옆 용두돈대는 바닷가까지 일직선으로 돈대를 쌓아 다른 돈대들 형식과는 다른 모습이다
초지대교 방향이다
손돌목
강화해협 건너 손돌 묘가 있다
손돌 묘
고려시대 뱃사공 손돌의 무덤이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시대 몽골군이 침입하여 고종이 강화도로 피난갈 때 이 지역의 물길을 잘 알던 뱃사공 손돌의 안내로 강을 건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찬 물살에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왕은 손돌이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여서도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일러준 뒤 참수되었다
바가지를 따라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한 왕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충직한 손돌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후히 장사를 지내 주었다
그 때부터 이 좁은 물길의 이름을 「손돌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해마다 손돌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에 불어오는 추운 바람을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한이 서린 바람이라 하여 「손돌의 바람」이라 부르고
이때의 추위를 「손돌이 추위」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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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곳에는 손돌을 모시던 사당이 있어 제를 올렸으나 일제강점기에 사당이 헐리고 제사도 중단되었다
그후 1970년에 주민들이 손돌 묘를 세우고 다시 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1989년부터는 김포문화원의 주관으로 손돌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에 진혼제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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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6. 16 사진)
손돌목
광성보 앞 바다 물살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빠른 곳이라고 한다
땅끝에서 듣기엔 울돌목 다음이 사재울이라 했는데...
부래도(덕포나루)
「통진읍지」 기록에 의하면 현의 남쪽 23리 지점에 위치한 항무이도(項無耳島)는 둘레가 4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부래도에 대한 설명에 해당한다
강화와 통진의 사이를 흐르는 염하(鹽河)를 따라 한강물에 떠내려 왔다고 하여 「부래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병인양요(1866)에 양헌수 장군이 덕포진에서 염하를 도하할 때 강화의 광성진으로 상륙하는 전초 기지로 사용했으며 섬 안의 산에는 성터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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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포는 염하 부래도 안쪽에 있던 포구로 「지덕(地德)이 좋아 선박과 사람이 모여든다」는 뜻이라고도 하고 가파른 언덕이 있는 포구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광성포대
조선 후기 강화도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된 방어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국방강화책으로 숙종은 강화도내에 내성 · 외성 · 12진보 · 54돈대 등을 축조하여 요새화를 이루었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화력을 증가시키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함에 따라
고종 11년(1874) 용진진 · 광성진 · 덕진진 · 초지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호를 개방함에 따라 파괴되었던 것을 2004년 발굴조사를 실시 유적이 확인되어 복원정비하였다
2코스 숲길 안내판
초지진까지 5km 남은 지점이다
초지대교가 보인다
왼쪽 부래도 · 오른쪽 손돌 묘가 있는 덕포진 돈대 터다
바닷가 둑을 걷다 돌아 봤다
벚나무 길
오리들이 노는 바위가 보인다
2코스는 대부분 평탄한 바닷가 둑길이라 부담없이 걷기 좋고 바닷물이 들면 해안 바위길을 걷는 재미가 있다
덕진진 공조루(사적 제226호)
조선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충지로 원래는 수영에 속한 진이었다
덕진돈대 · 남장포대 등이 모두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었다
돈대와 포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설치했다
19세기 후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외세와 맞서 싸운 장소이며
신미양요 때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 해병대에 의하여 점령을 당한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때 덕진진은 파괴되어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만 남아 있었으나 1977년 돈대와 성곽을 보수하고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를 복원했다
덕진동(德津洞) / 화남 고재형
덕진진 앞쪽 해안가에 경비를 서고 있는 해군장교 1명과 수병 5명의 사진이다
남장포대
덕진진에 소속된 포대로 강화의 8개 포대 중 하나다
대포 10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덕진돈대와 함께 미국 아세아함대와 맹렬한 포격전을 전개했던 곳이다
성첩과 시설물은 이때 모두 파괴되었는데 1977년 다시 복원하였다
덕진돈대
덕진진에 소속된 2개 돈대 중 하나이다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 중간에 위하여 강화수로의 가장 중요한 요새지이기도 하다
신미양요(1872) 당시 미국함대와 48시간 동안 치열할 포격전을 전개하였는데 이 때 파괴되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경고비(警告碑)
조선 고종 4년(1867)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강화 덕진첨사기 건립한 것으로 개화기에 외국 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겠다는 척화의 의지를 담고 있는 비다
비의 크기는 높이 147cm · 너비 54.5cm · 두께 28cm로 정면에는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라고 각인되어 있다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기에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일종의 바닷가 척화비다
초지대교
삼동암천
덕진진과 월곶진 사이 수로를 돌아간다
삼동암천 줄배
삼동암천을 돌아가기 제법 멀다
초지대교
대명포구 김포함상공원이 보인다
마니산
정족산 뒤로 보인다
초지대교 · 등대
초지진(사적 제 225호)
조선 효종 7년(1656)에 안산에 있던 초지량영을 강화로 옮겨 진으로 승격시켰다
신미양요(1871) 때 미국 해병 450명이 20척의 작은 배로 상륙을 감행하여 초지진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화력의 열세로 결국 점령당했고, 군기고와 화약 창고 등 군사 시설이 모두 파괴되었다
1875년에는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면서 일시적으로 복구되었던 초지진 포대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돈대와 터의 기초만 남아 폐허가 되었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다
현재 타원형의 돈대에는 포좌 3개 · 총좌 100여 개 · 실제 조선시대 말기에 사용하던 대포가 1문 전시되어 있다
초지진 소나무
1656년(효종7) 강화유수 홍중보가 초지진을 설치할 때 선비의 기상과 지조를 상징하기 위해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초지돈대는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 측의 함포공격으로 일부 파괴되었고 1875년 일본 운요호사건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이 두 나무에는 격전 중 날아온 포탄 파편에 의한 상처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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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높이 12m · 둘레 2.8m · 나이 400년 · 지정일자 2015년
초지진 성벽 포탄 흔적
하얀 점선 안이다
초지진 2-C 종점
강화나들길 2코스를 마치고 버스를 타러 간다
초지대교 버스정류장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9.2km, 소요시간 7시간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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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나들길 2-A · B · C코스를 이어 걸었기에 GPS 사진이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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