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水原華城 사적3호)
"지금 고치지 않으면 장차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다"며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1794년(정조 18) 1월에 착공하여 2년 9개월 후인 1796년 9월에 완공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팔달문(八達門) / 보물 제402호
수원성 남문인 팔달문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수원성에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게 지어진 문으로 원래는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성벽이 있던 자리에 도로가 만들어져 있다
수원화성 4대문의 하나다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남치(南雉)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5년 수리
남치는 남포루(南砲樓)와 팔달문 서쪽 남서적대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화성에는 성벽에 8곳 ·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남치는 서쪽 경사지에 만들었기 때문에 치성의 길이가 짧고 폭도 좁다
서3치와 마찬가지로 치성 안쪽에 돌로 담을 쌓고 출입구를 냈는데 이 구조는 적대와 비슷하다
남치는 원형이 잘 남아 있다
남포루(南砲樓)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5년 누각 복원
남포루는 팔달산의 남쪽 기슭 경사지에 지은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 서포루 · 남포루 · 북동포루 ·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그 중 남포루는 규모가 가장 작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포루 내부 높이가 균일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지형에 따라 각 층의 높이가 다르다
남포루 1층은 1.7m · 2층은 1.25m로 만든 누각이 있는 3층은 높이 3m 이상을 확보하였다
남포루는 포루 중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다
서남암문 · 서남포사(西南暗門 · 西南舖舍)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5년 서남포사 복원
서남암문은 화성 서남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화성의 5곳 암문 가운데 유일하게 문 위에 군사들이 머무는 포사를 세웠다
이곳은 지형상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서 특별히 포사를 만들어 침입에 대비했다
암문에는 화공에 대비하여 오성지도 설치하였다
이름은 암문이지만 성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라 용도를 거쳐 서남각루(화양루)로 나가는 문이다
용도(甬道)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5년 복원
용도는 좁고 긴 성벽으로 둘러싸인 통로를 가리킨다
이곳은 좌우 지형이 급경사를 이루면서도 우뚝 솟아 있어 남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만약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서남암문 밖으로 좁고 긴 성벽인 용도를 만들었다
용도 중간에는 좌우에 치성을 하나씩 만들어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했다
용도 끝에는 서남각루가 자리잡고 있다
용도 서치(甬道 西雉)
서남각루(西南角樓)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5년 복원
서남각루는 화성 서남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로 「화양루(華陽樓)」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화성 축성 초기에는 서남각루를 만들 계획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곳은 남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로 만약 적에게 빼앗기면 공격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여
서남암문 바깥으로 길게 용도를 내고 그 끝에 각루를 세웠다
건물 전면은 장수가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벽돌을 깔았고, 후면은 바닥을 높이고 창문을 달아서 실내에서도 주변을 살필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 정조 21년(1797) 정월, 화성을 찾은 정조는 화양루에서 시작하여 성곽 일대를 두루 살폈다
서포루(西砲樓)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5년 누각 복원
서포루는 서암문과 서3치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러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 동2포루 · 서포루 · 북포루 ·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서포루는 서장대 쪽으로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동북포루와 형태가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포루 누각은 복원했으나 치성은 원형이 잘 남아 있다
효원의 종(孝園의 鐘)
이 종은 유서깊은 효원의 성곽도시이자 날로 발전해 가는 수원시의 드높은 기상을 나타내는 효의 상징으로서
그간 주요행사에 타종해왔던 팔달동종(유형문화재 제69호)이 300여 년 경과하여 낡았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가 작고 소리가 탁하며 울림이 없어
더 이상 타종이 어려운 한계에 이르러 1991년 11월 4일 종 주조추진위원회를 구성 그 제작을 전문가들에게 의뢰하여 1년여만에 완성하였으며
또한 온 시민에게 효행심을 심어주고 영원한 화합과 전진을 다지는 한편
선진시민상을 구현함으로서 온 시민이 한마음을 이루는 구심적 표상으로 삼고자 제작된 것으로써
우리시의 상징물인 시목(은행) · 시화(철쭉) · 시조(비둘기) 그리고 수원화성과 화홍문을 전면에 새겼으며
그 규모는 구경 2.15m · 높이 3.54m이고 총 중량이 3,300관(약 12.5톤)에 이르는 대형 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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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시 상징물은 1999년 12월 29일 시목(소나무) · 시화(진달래) · 시조(백로)로 변경되었다
서암문(西暗門)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5년 수리
서암문은 화성 서쪽 팔달산 꼭대기 성벽에 설치한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서암문은 성벽을 안쪽으로 90도 꺾어 들어가도록 쌓고 그 사이에 문을 내 바깥에서 알아차리기 어렵다
화공에 대비하기 위한 오성지나 적을 감시하기 위한 비예 같은 별도의 방어 시설을 두지 않고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다
서장대(西將臺)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자리 잡은 군사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지휘소로 썼다
서장대는 시야가 트여 있어 멀리 용인 석성산 봉화와 현륭원 입구까지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고 한다
서장대는 아래층은 사면 3칸 · 위층은 1칸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진 형태다
아래 층은 장수가 머물면서 군사 훈련을 지휘하고, 위층은 군사가 주변을 감시하는 용도로 썼다
정조는 서장대에서 군사 훈련인 성조(城操)를 거행했는데 1795년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위층 처마 밑에 걸린 화성장대(華城將臺)와 시문 현판은 모두 정조의 작품이다
1795년 성조가 끝난 뒤 정조는 화성장대 현판의 글씨를 직접 쓰고 만족스럽고 기쁜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화성에서 유일하게 정조가 지은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서노대(西弩臺) / 1795년(정조 19) 창건 · 1971년 복원
서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로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서노대는 화성의 서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팔달산 꼭대기에 있어 적을 감시하기에 적합하다
팔각형의 몸체가 위로 가면서 줄어드는 안정적인 형태로 안에는 흙을 채우고 겉은 벽돌을 붙였으며 여덟 방향의 모서리는 돌로 깎아 마감하였다
서포루(西砲樓)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5년 복원
서포루는 팔달산 중턱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 서포루 · 남포루 · 동북포루 ·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서포루는 경사지에 지었기 때문에 평지에 설치한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보다 규모를 작게 만들고 화포와 총을 쏘는 구멍의 숫자도 줄였다
포루는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에는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있고, 상층에는 누각이 있다
서포루 상부의 누각은 복원했으나 벽돌로 만든 하부에는 창건 당시의 모습이 일부 남아 있다
서1치(西一雉)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5년 수리
서1치는 서북각루와 서포루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성벽에 8곳 ·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치성은 보통 좌우 방어 시설과 100m 이상 거리를 두고 만들었으나, 서1치는 북서각루에서 약 55m 떨어진 지점에 있다
화서문에서 뻗은 성벽이 팔달산 정상을 향해 크게 꺾이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치성에 가깝게 설치한 것이다
서북각루(西北角樓)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5년 복원
서북각루는 화성 서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화북각루는 팔달산으로 오르는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자리 잡아 서북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 층에는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 온돌을 놓았고 위 층은 마룻바닥을 만들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면에 널빤지 문을 달고 구멍을 내서 적을 감시했다
화서문(華西門) / 보물 제403호
화서문은 화성의 서문으로 화성의 서쪽이란 뜻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서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화서문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세웠다
조선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화서문은 장안문과 팔달문에 비해 격을 낮추어 석축의 규모도 작고, 1층 문루에 팔작지붕 형태이다
창건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18세기 건축기술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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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 1796년(정조 20) 창건
서북공신돈은 화성 서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墩臺)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서북공심돈은 서북쪽 성벽이 꺾이는 위치에 설치했다
치성 위에 벽돌로 3층의 망루를 세우고 꼭대기에는 단층의 누각을 올려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했다
외벽에는 화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을 뚫어 공격 기능까지 갖추었다
북포루(北砲樓) / 1795년(정조 19) 창건 · 1975년 누각 복원
북포루는 북서포루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 동2포루 · 서포루 · 북포루 ·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북포루는 화성에서 가장 평탄하고 시야가 트인 곳에 있어서 주둔하는 군사의 수도 많고 규모도 크다. 군포루라고도 불렀다
북서포루(北西砲樓) / 1794년(정조 18) 창건 · 1975년 복원
북서포루는 장안문 서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 서포루 · 남포루 · 동북포루 ·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이 중 평탄한 곳에 지은 북서포루가 가장 높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다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는 안팎의 지붕 형태가 다르다
이는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되어 있는 각 시설물 자재 목록을 바탕으로 복원된 것이다
장안문(長安門)
장안문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정하지만, 조선시대 당시 임금이 한양(지금의 서울)에서부터 수원으로 오실때
가장 먼저 맞이하는 문이 북문(장안문)이었기 때문에 북문을 정문으로 정했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 측면 2칸의 다포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 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 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를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 수(隋) ·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시)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북서적대 홍이포(北西敵臺 紅夷砲)
홍이포는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때까지 사용된 유럽식 화포로 포구쪽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하여 발사하는 포구장전식 화포이며
사정거리가 700m에 달하는 위력적인 화기로써 성곽 또는 포루 등에 배치하거나 성곽 공격용으로 사용하였다
서장대(西將臺)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자리 잡은 군사 지휘소이다
장안문(長安門)
한국에서 가장 큰 성문으로 조선시대 화성의 북문으로 건립된 중층누문으로 화성의 정문이다
본래 성의 정문은 남쪽으로 삼았으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문이 장안문이어서 정문이 되었다
북동포루(北東砲樓) / 1794년(정조 18) 창건 · 1977년 복원
북동포루는 장안문 동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 서포루 · 남포루 · 동북포루 ·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다
정약용은 중국의 제도를 두루 살펴 화성의 발전된 형태의 포루를 설계했는데 그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화홍문 · 동북각루(방화수류정) · 동북포루
북수문(北水門 · 화홍문(華虹門)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수문을 통해 흘러온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모습인 화홍관창(華虹觀漲)은 화성에서 꼭 보아야 할 경치로 손꼽힌다
화홍문은 조선 현종 14년(1848)에 수문과 누각을 다시 지으면서 형태가 약간 달라졌다
1932년에는 '수원명소보전회'를 주축으로 수원주민이 힘을 모아 10년전 홍수로 무너진 누각을 다시 지었다
2016년에는 「화성성역의궤」를 근거로 창문을 복원했다
북암문(北暗門)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2년 수리
화성 북쪽에 낸 비상 출입문으로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북암문은 지형에 맞춰 좌우 성벽까지 벽돌로 둥글게 만들었다
동북각루(東北閣樓) / 1794년(정조 18) 창건 · 1934년 해체 수리
동북각루는 화성 동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용두(龍頭) 바위 위에 각루를 우뚝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했다
군사 시설이지만 아름다운 연못과 함께 있어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많이 쓰였다. 정자의 별칭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다
정조는 이를 현륭원이 있는 화산과 수원 읍치를 옮긴 땅 유천(柳川)을 가르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방화수류정에는 온돌방 한 칸이 있었다
보통 군사들의 휴식을 위해 각루 1층에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방화수류정에는 임금을 위해 2층에 온돌방을 두고 창문을 설치했다
조선 정조 21년(1797) 정월, 정조는 방화수류정에서 활쏘기를 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를 지었다
지금은 온돌방과 창문이 사라졌지만 원형의 건축물이 잘 남아 있다
동북포루(東北砲樓 · 각건대(角巾臺)
화성에는 벽돌을 사용하여 모두 5개의 포루를 만들고
3층으로서 지대 위에 혈석(대포 발사를 위해 구멍을 뚫은 돌)을 전면 2개 좌우 3개씩 놓았으며
그 위에 벽돌을 쌓았고 안쪽으로 판자를 잇대어 2층으로 구분하였다
동북포루(東北砲樓 · 각건대(角巾臺)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6년 누각 복원 · 2019년 누각 복원
북동포루는 방화수류정과 동장대 사이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5곳의 포루가 있는데 동북포루는 지붕의 모습이 조선 선비들이 쓰던 각건(角巾)이란 모자와 비슷해 보여서 각건대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동북포루는 다른 포루에는 없는 시설을 갖췄다
여장과 건물 사이를 벽돌로 채워서 벽등(甓磴)이라는 단을 만들고, 누각의 계단도 벽돌로 만들었다
지붕 양 끝에 올린 용머리 모양의 장식 기와 역시 북동포루에서만 볼 수 있다
동북포루의 특징을 살려 2019년에 다시 복원했다
북암문(北暗門)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2년 수리
문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여장을 만들었는데 반원형은 원여장 · 장방형은 비예라고 부른다
축성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동장대(東將臺) / 1795년(정조 19) 창건 · 1976년 주변 부속건물 복원
동장대는 군사 훈련을 지휘하던 곳으로 연무대(練武臺)라고도 불린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
동장대는 대지 전체를 3단으로 나누고 마당 한가운데에 장수가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도록 경사로를 만들었다
본래 전면은 개방하고 나머지 삼면은 벽이나 창문을 단 형태였으며, 가장 안쪽에 온돌방 한 칸이 있었다
건물 뒤쪽으로는 수키와로 담장을 꾸민 영롱장(玲瓏墻)이 있다
정조는 동장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려주는 호궤 행사를 베풀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던 시기인 1796년 8월 19일, 감독관과 일꾼 등 2,700여 명이 호궤에 참여했다
불랑기
연무대 뒤쪽에 있다
팔달산
연무대에서 봤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6년 복원
동북공신돈은 화성 동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墩臺)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동북공심돈은 성벽 안쪽에 설치했다
외벽에는 밖을 감시하고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을 곳곳에 뚫었다
동북공심돈은 3층으로 이루어진 원통형의 벽돌 건물로서 출입문에서 통로를 따라 방글빙글 올라가면 꼭대기 망루에 이르는 구조다
이 모습을 빗대서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정조 21년(1797) 정월, 채제공은 동북공심돈을 올라가 본 뒤 "층계가 구불구불하게 나 있어 기이하고도 교묘하다"며 감탄했다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절반 이상 무너졌는데 1976년에 복원해 모습을 찾았다
연무대(練武臺)
동북노대(東北弩臺)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6년 수리
동북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이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동북노대는 별도의 높다란 대를 만들지 않고 성벽에서 돌출시켜 만들었지만 주변이 평탄해서 시야가 확보되었다
동북노대와 좌우 성벽이 만나는 지점을 살짝 좁혀 쌓았는데 「화성성역의궤」에서는 그 모양을 「벌의 허리」와 같다고 표현했다
창룡문(蒼龍門) · 동1포루(東一砲樓)
창룡문(蒼龍門) / 1795년(정조 19) 창건 · 한국전쟁 때 문루 파괴 · 1976년 문루 복원
창룡문은 수원 화성의 동문이다. 창(蒼)은 푸른 색을 가리키므로 「동쪽 방향을 지키는 신령한 청룡」을 상징한다
창룡문은 바깥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돌출된 좌우 성벽이 자연스럽게 성문을 보호하는 치성 역할을 한다
문 안쪽의 넓은 공터는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였다
조선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 단계 낮춘 형태이다
장안문과 팔달문이 2층 문루에 우진각 지붕인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1층 문루에 팔작지붕이다
옹성은 서울의 흥인지문처럼 한쪽 모서리를 열어둔 형태다
창룡문 옹성 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석공 우두머리 이름을 새긴 실명판이 잘 남아 있다
한국전쟁 때 문루가 파괴되어 1976년에 복원했다
동1포루(東一砲樓)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9년 복원
동1포루는 창룡문 남쪽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 동2포루 · 서포루 · 북포루 ·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동1포루는 지형이 평탄하고 조망이 트인 곳에 있어서 적의 움직임을 잘 살필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
치성을 길게 내밀었으며, 다른 포루와 달리 기둥 사이에 벽을 치지 않고 사방을 개방했다
동포루(東砲樓)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9년 복원
동포루는 동1치와 동2치 사이에 지은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 서포루 · 남포루 · 북동포루 ·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보통 평지에서는 규모를 키우고 경사지에서는 규모를 줄였다
「화성성역의궤」에는 균일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지형과 주변 여건에 따라 규모와 각 층의 높이를 달리 만든 것이다
동포루는 산상 동성구간에서 비교적 평평한 곳에 있지만 주변 성벽이 높지 않아 작게 만들었다
남포루와 마찬가지로 2층은 낮고 누각이 있는 3층은 높이 3m 이상을 확보했다
봉돈(烽墩)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1년 수리
봉돈은 봉화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내는 시설이다
보통 봉화대는 높고 인적이 드문 곳에 두었으나 화성에서는 시야가 트인 동쪽에 설치해 화성행궁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봉돈은 화두(火竇) 다섯 개가 있다
평소에는 남쪽 끝에 있는 화두 한 곳에만 연기를 올리고, 상황에 따라 연기의 숫자를 증가시켜 전쟁 시에는 다섯 곳 모두 연기를 피웠다
동2포루(東二砲樓)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9년 복원
동2포루는 봉돈 남쪽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 동2포루 · 서포루 · 북포루 ·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동2포루는 동1포루와 마찬가지로 사방이 개방된 구조이다
측면 3칸인 동1포루에 비해 치성이 짧아서 측면 2칸의 건물로 만들어졌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동1포루의 모습만 실려 있다
동3치(東三雉)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9년 수리
동3치는 동2포루(東二砲樓)와 동남각루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에 8곳 ·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동3치는 치성 가운데 폭이 가장 넓고 길이가 짧다
성 바깥이 급하게 경사를 이루고 있어 치성의 길이는 짧게 만들고, 주변을 멀리 살피기 위해 전면 폭을 넓게 확보한 것이다
다른 치에는 현안을 한 줄만 내었지만 동3치는 폭이 넓어서 현안을 두 줄 설치했다
동남각루(東南閣樓)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9년 복원 · 2016년 해체 수리
동남각루는 화성 남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동남각루는 남수문에서 동쪽으로 솟아오른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풍수에서 안산(案山)에 해당하는데, 봉우리가 일(一)자 모양처럼 평평하여 일자문성(一字文星)이라고 불렀다
서북각루와 같은 구조로 아래층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는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을 만들었다
사면에 짐승 얼굴과 태극무늬를 그린 널빤지 문을 달고 활 쏘는 구멍을 냈다
수원천
남문시장 아치
팔달문이 가운데로 보인다
남창교(南昌橋) / 수원시향토유적 제16호 빗돌
팔달문 근처 백병원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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