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역에서 동인천역까지 마음 가는대로 걸었다
우리나라와 인천의 역사적 유물이 많은 곳이다
인천역
시점이다
중화가(中華街) 패루(牌樓)
인천역 앞에 있는 제1패루다
패루는 마을 입구나 대로를 가로질러 세운 탑 모양의 중국식 전통 대문을 일컫는다
중국 웨이하이시가 기증한 세 개의 패루 중 하나다
밴댕이특화거리
인천역사거리에서 짜장면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길로
예전 인천역 뒤가 바다였기에 아직 밴댕이 식당이 많이 남아있다
제물량로
서산그물 등 어망을 파는 집들이 여럿 있다
해안성당의 십자가도 보인다
해밀턴의 제물포연초회사 안내판
인천의 담배 즉 오늘날과 같은 권련의 역사는 20세기에 들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1901년 그리스인 밴들러스가 중구 사동에 동양연초회사를 설립했다는 기록이 바로 최초의 연초공장이 되는 셈이다
이 회사는 1903년 수입 담배에 밀려 문을 닫는데 지배인이었던 미국인 해밀턴이 맥을 이어 다시 연초회사를 설립한다
이 회사는 홍도패 · 산호 · 뽀삐 등의 이름이 붙은 담배를 하루 30만 갑씩 생산했다
1910년대 담배 생산액은 정미업 다음으로 인천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하지만 1921년 조선총독부가 연초전매법을 시행하면서 인천산 담배는 자취를 감췄다
광복 후 중산학교 기숙사로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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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포스호텔 언덕 기슭에 있다
해망대산(海望臺山 올림포스호텔)
산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언덕이다. 하지만 바다에 접했기 때문에 봉화대가 있었고 바다를 향한 대완구(대포)가 있었다
개화기에는 한때 영국영사관이 설치되었고 이후 인천상륙작전 때 함포로 폐허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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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프스관광호텔은 1965년 12월 객실 43개로 개업했다
인천에서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이 호텔은 중국식 광동요리의 나이트클럽 · 24시간 지하 바
한국 명기(名技)가 특대하는 한국요리집과 기생관 등이 있었다
1967년 8월 1일 외국인 전용 카지노가 들어섰고
2003년 카지노의 대부 전낙원이 호텔을 인수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파라다이스호텔로 바꿨다
그후 다시 올림포스호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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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입국한 ‘코로나19’ 확진자가 늘면서 4월 7일 격리시설로 지정되었다
입소자 통제를 위해 경찰이 배치되어 있다
인천항 · 월미도
인천항 너머로 월미도가 보인다. 그야말로 섬으로 보인다
예전 독(dock)이 생기기 전에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이 서있는 곳까지가 바다였다
월미로
월미바다열차가 지나는 월미로 왼쪽은 바다였다
러시아영사관 · 해무청사 터
왼쪽 가림막 있는 곳까지가 뭍이었고 오른쪽 고가교가 있는 곳은 바다였다
러시아영사관 · 해무청사 터
러시아는 경성 한국주재영사관 내에 부영사관을 병설하고 인천 · 평양 · 진남포 등을 관할케 하고 있었는데
1902년 부영사관을 갑자기 인천에 이전 설치했다
제물포항을 일본이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자국의 병참기지화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1974년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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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 김중업에 의해 1957년에 세워진 해무청사는 1903년경에 설립된 러시아 영사관 건물과 나란히 바다를 보고 있었다
1992년경에 사라졌다
신명선구
인천역 뒤쪽 우회고가 사거리 왼쪽에 아직 어구를 파는 선구점이 여럿 있다
신명선구
그물 · 로프 · 부표 등이 전시되어 있다
빨간벽돌 그물집
6 · 25전쟁 이후 지금의 아트플랫폼 근처 폭격 맞은 창고 벽돌을 얻어다 지은 건물이다
대한감리교 기념탑교회
일제 대정시대(1911~1924)에 지은 건물로 원래는 객주집이었다
겉은 콘크리트 건물 같으나 실은 목조건물이다
제물량로241번길
이곳도 그물 · 로프 등을 파는 상점이 여럿 있다
인천항 선거 준공 기념비
인천항은 구한말 풍운이 감도는 1883년 1월 1일 개항하였다
1918년 10월 27일 소규모 독(dock)이 준공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이곳 앞까지 들어왔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줄기가 내처달리다 바다와 맞닿은 곳으로 우리가 말하는 제물포(濟物浦)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진리의 큰 빛 ·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들어온 곳이다
유엔참전국 9 · 28수복 국제마라톤대회 출발점 빗돌
1959년 9월 28일 제1회 9 · 28수복 국제마라톤대회가 열렸다
6 · 25전쟁 참전국 중 미국 · 호주 등 7명의 외국인 선수가 참가해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대회라 할 수 있다
해안동로터리를 출발해 서울 중앙청 앞 결승점을 통과하는 경주였다
인천 도로원표
주문진 284km · 동해시 309km · 간성 237km / 1994년 세웠다
올림포스호텔
코로나19 격리시설로 출입금지다
첫 선교수녀 도착지 기념비
살트르 성 바오르 수녀회 한국 창립 120주년을 맞아 첫 선교 수녀들이 도착한 장소에 2007년 7월 22일 기념비를 세웠다
이 비에 의하면 4명의 수녀가 1888년 7월 22일 제물포항에 도착해 처음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제물량로
해안성당이 오른쪽에 보인다
제물진두 순교성지
이승훈 베드로의 외가집안이 치명한 순교터로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10명의 순교자를 기리는 곳이다
인화문(仁華門) 패루(牌樓)
패루는 중국의 기념비적인 문형의 건축으로 패방(牌坊)이라고도 한다
충신이나 절부 · 효자 등의 현창시설로 시작되어 기념비 건축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주간(柱間)의 수에 따라 한간패루 · 삼간패루 · 오간패루 등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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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화교역사관이 보인다
한중문화관
한 · 중 간 문화 · 예술 교류 및 지역 예술 활동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개관했다
인천화교역사관이 옆에 있다
서성(書聖) 왕희지(307~365) 상
한자의 서체는 전서 · 예서 · 초서 · 해서 · 행서순으로 완성되었는데, 이중 행서는 초서를 읽기 쉽고 해서를 바르게 쓸 수 있도록 절충하여 만든 서체다
이를 집대성한 인물이 서성으로 존경받는 동진시대의 왕희지다
그는 행서를 완성하고, 해서와 초서를 실용서체에서 예술서체로 승화시켰다
또한 그는 동진 서법을 완성했다
인천 해관(海關)터
인천역 자리에 있던 임시 부두에 가건물을 짓고 업무를 시작하였다
항구 시설이 준공되자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서성 왕희지 상 옆이다
개항장 지게꾼 상
인천아트플랫폼 공연장(대한통운 창고) 앞에 있다
"1883년 제물포항이 개항되면서 인천개항장은 서구 문물 유입의 길목인 동시에 활발한 상업 활동이 이루어지던 국제무역항이 되었다
본 조형물은 근대 사진자료를 기초로 하여 개항장 일대에서 화물 선적 작업을 하던 지게꾼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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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봉산 인천자유공원 석정루 아래 1883년 설정된 일본조계와 1884년 마련된 청국조계와의 경계계단이 있다
계단 왼쪽이 차이나타운 · 오른쪽이 일본조계지다
개항장 역사 시계탑
"시계탑은 개항장의 역사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시계와 탑은 그 형식에서 애꿏게도 이 자리에 와 있을 뿐이다
아니다. 굳이 시계탑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여기가 바로 개항장의 역사를 몸서리치게 간직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계와 탑이 필요했다
개항장의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역사에 대한 무지를 깨우는 장소다. 역사에 대한 왜곡을 반성케 하는 장소다
역사를 역사로 바라보게 하는 장소다. 시계는 역사의 단면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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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아트플랫폼 입구에 있다
인천아트플랫 폼 · 붉은 벽돌 쌀창고 바닥 동판
인천아트플랫폼이 위치한 인천 중구 해안동 일대는 1883년 개항 이후 건립된 건축문화재 및 1930~40년대에 지어진 건축물이 잘 보존된 구역으로
당시의 근대건축기술 및 역사적 기록을 지니고 있어 건축조형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인천아트플랫폼은 구 일본우선주식회사(등록문화재 제248호)를 비롯한 근대 개항기 건물과 1930~40년대에 건축물을 리모델링하여
창작스튜디오 · 공방 · 자료관 · 전시장 · 공연장 등 총 13개 동의 규모로 조성되었다
인천아트플랫폼은 이러한 도시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최대한 살려 문화적으로 재활용하자는 시민들의 뜻과 인천시의 의지가 합쳐져 탄생하였다
인천아트플랫폼을 중심으로 이곳 개항장 일대는 거대한 스트리트 뮤지엄으로 확장되어나갈 예정이며
그것은 과거의 역사를 보존하되 현재적으로 재해석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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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벽돌 쌀창고는 인천 최초의 현대적 창고영업의 시작으로 한국 최초 · 인천 최고 100선 중 하나다
구 인천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국가등록문화재 제248호)
인천 개항 초기부터 해운과 물류수송을 담당하였던 상선회사 사옥이다
1883년 미쯔비시우편회사 부산지점 인천출장소로 시작하여 1885년 공동운송회사와 합병된 후 1886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다
이 건물은 1888년 건립되었는데, 초기에는 붉은 벽돌 건물의 사옥과 사택 · 창고 등이 같이 세워졌다
건물의 건립 연도는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목에 기재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우리나라 해운 및 유통산업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과 러시아의 제물포해전이 있었던 1904년 당시에는 일본병참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항만 관련회사의 업무용 건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인천아트플랫폼 사무실로 활용되고 있다
대불호텔전시관과 중구 생활사전시관(1960~1970년대)
인천 일본인 조계지에 위치했던 한국 최초의 서양식호텔 대불호텔이 철거 40년 만에 호텔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그 옆에는 1960~1970년대 인천의 생활사를 알려주는 전시관도 함께 개관했다
차이나타운 아치
차이나타운으로 들어간다
한중원(韓中園)
중국 전통의상을 입은 마네킹이 서있는 한중원은 면적은 좁지만 중국 4대정원 중 졸정원(拙庭園)과 유원(留園)의 시설양식을 주제로 조성한 쉼터다
해안성당
1960년 당시 이곳 차이나타운에는 4천여 명의 중국 화교가 거주하고 있었고 소수의 화교 가톨릭신자들은 답동성당을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 화교 신자들의 언어 소통과 민족 이질감으로 화교들을 위한 성당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에 미국 메리놀회에서 1960년 7월 17일 화교를 위한 선린성당을 설립하고
중국 만주에서 사목 경험이 있고, 중국어에 능통한 고요셉(맥코막) 신부를 초대 신부로 임명하게 된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초대 신부의 노력으로 1966년 6월 9일 완공되었다
차이나타운로
사철나무와 담쟁이덩굴이 덮은 건물은 매매 펼침막이 걸려 있다
짜장면박물관으로 탈바꿈한 공화춘(등록문화제 제246호)
1908년 무렵 중국 산동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지은 중정형 중국식건물로 외부는 벽돌로 마감하고 내부는 다양한 문양과 붉은색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처음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이용되었으나 중화요리가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부터는 음식점 공간이 확대되어
대형 연회장을 갖춘 유명한 중국음식점으로 1980년대까지 그 명성을 날렸다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건물을 매입한 후 건물을 보수하고 내부에 전시공간을 마련하여 2012년부터 「짜장면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경극(京劇 Peking Opera)
베이징(北京)에서 발전하였다 하여 경극이라고 하며 서피(西皮) · 이황(二黃) 2가지의 곡조를 기초로 하므로 피황희(皮黃戱)라고도 한다
14세기부터 널리 성행했던 중국 전통가극인 곤곡(崑曲)의 요소가 가미되어 만들어졌다
풍미(豊美)
짜장면의 원조는 「공화춘」이지만 문을 닫었다 근래에 다시 열었고 영업을 계속한 집으로 가장 오래된 중국집은 「풍미」이다
현대크리닝 · 대창반점
짜짱면집에 포위된 세탁소다. 건물은 120여 년쯤 된 건물이고 세탁업을 한지는 50여 년이 되었다
그 옆으로 「응답하라1988」에 나온 대창반점도 있다
공화춘(共和春)
1908년 무렵 중국 산동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지은 중정형 중국식 건물로 처음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었으나
중화요리가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부터는 음식점 공간이 확대되어 대형 연회장을 갖춘 유명한 중국음식점으로 1980년대까지 그 명성을 날렸다
그후 짜장면박물관 터에서 이곳으로 이전해 재개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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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관(淸館)
선창가 그림에서 빠질 수 없는 풍경이 주점과 색시집이다
섬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 때문에 주변 숙박업소는 늘 성업이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집은 차이나타운의 황해여관이다. 지금의 청관자리다
만다복(萬多福)
차이나타운에서 특색 있는 하얀짜장으로 유명해진 집이다
항상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 중국집이다
의선당(義善堂)
1893년 이전에 세워진 중국 절이다
총 3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당 좌측에 거주공간이 있으며
길가에 위치한 건물은 한때 중국무술도장으로도 사용했고 현재는 중국물품을 판매하는 상점이다
의선당(義善堂)
의를 지키고 착하게 살도록 하는 교훈을 주는 곳으로 개항 후, 중국 산동성을 중심으로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건너 온 중국인들이
이국땅에서 잘 적응하고 살도록 하기 위한 화교들의 교화기관이 필요하였고 이국땅에서 단합하며 살아가는 화교들의 끈기와 생명력이 담겨 있는 문구다
해방 이후 점차 쇠퇴해지고 1970년대 화교사회의 위축과 함께 거의 폐쇄되었고 무당파 팔괘장 전수도장으로 80년대 운영되었다
이후 거의 문을 열지 못하다가 화교들의 모금과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2006년 5월 대대적인 수리 후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정청에는 관음상(觀音像)을 중심으로 흙으로 만든 5개의 상이 모셔져 있다
섬세한 솜씨로 만들어진 토상(土像)은 청나라 말기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꽃등 길
동화마을로 가는 길이다
삼국지 벽화 · 초한지벽화거리
삼국지는 중국 4대기서의 하나로 전세계인에게 사랑받는 불후의 고전이다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조조 · 손권 · 유비 세 사람의 영웅담은
의리와 배신 · 파괴와 건설 · 사랑과 미움의 서사시로서 동서고금 남녀노소에 큰 감명을 주어왔다
초한지는 중국 진나라 말부터 한나라 건국까지의 역사를 소재로 삼은 이야기이다
송림교회 한국 최초 선교 기념비
한국 최초 선교를 기념하는 공원으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흉상과 중앙에 성령의 불길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있다
기상대 슈퍼
기상대 정문 앞 느티나무엔 항상 사람들이 많다
예전 인천지방해양안전심판원
선박은 다른 운송기관에 비하여 그 사고나 피해의 성격이 특수하기 때문에 선박의 운행 등으로 발생되는
해양사고에 대한 조사 및 심판에 관한 사항을 해양안전심판원에 맡겨 해양사고의 원인을 밝히고 해양안전의 확보를 도모하고 있다
*
도화동 정부인천합동청사로 이주했다
인천기상대
1899년 인천 · 원산 · 진남포 등 해관에 기상관측소가 설치된 5년 후인 1904년 우리나라 최초로 일기예보를 알리는 인천기상관측소가 설치되었다
중구청 뒷길에 있던 스이쯔여관에서 임시 기상사무실을 개설하고 기상관측을 시작했다
이어 1905년 1월 1일 대한제국 황실 재산이던 응봉산 정상 지금의 위치에 인천관측소를 신축해 이전했다
"하늘을 친구처럼, 국민을 하늘처럼" 기상대 슬로건이다
파울 바우만 주택(자유유치원)
1906년경 독일 상인 파울 바우만의 주택이 있던 곳이다
산 끝자락 가파른 곳에 있어 바다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라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을 두 번이나 지낸 사이토 마고토의 별장으로 사용되다
인천상륙작전 때 건물의 일부가 파괴되었고 1955년 완전히 철거되었다
총독 '사이토'는 1919년 8월 13일 조선에 부임하러 온 날 당시 경성역에서 나운규 열사의 저격을 받았다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앞 무대
코로나19로 자유공원 전체가 출입금지다
자유공원로
홍예문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제물포고 · 인일여자고등학교
자유공원로를 내려가다 봤다
홍예문 옆 망루
예전 밤 12시 통행금지 때 또 가끔 등화관제 훈련 때 싸이렌을 울렸다 한다
어린이헌장비
로타리클럽 백봉규 송덕비와 식수기념비가 옆에 있다
인천학도의용대호국기념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아군은 거듭되는 후퇴로 낙동강이 최후의 전선이 되었다
1950년 9월 15일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자 우리 학도들은 의용대를 조직 강화하여 치안 유지에 힘쓰던 중
승전을 눈앞에 두었던 전선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나라가 또다시 위기에 처하자
1950년 12월 18일 남녀대원 3,000여 명은 축현초등학교에 집결, 출정식을 갖고 마산까지 남하하여
1950년 1월 5일 600여 명은 해병대로 1,300여 명은 1월 10일 부산에서 육군으로 자원입대하였다
그후 수많은 전투에서 200여 명의 전사자와 많은 부상자가 조국에 젊음을 바쳤다
우리는 그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넋을 추모하고자 여기에 기념탑을 세운다
동국빌리지(구 오례당 주택 터)
각국조례지 계단과 인천제일교회 건물이다
신포로35번길
크라운볼링센터로 가는 길이다
크라운 볼링센터
원래 미군 댄스홀이였던 곳을 1968년 볼링장으로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서너번째로 일찍 건립된 볼링장이다
초연다구박물관
차를 끓여 마시는데 필요한 도구인 다구를 주제로 한 박물관이다
예전 이천전기 사옥
이천전기 사옥으로 사용되었던 일본식 가옥을 술집으로 만들었다
나무 전봇대
이천전기 사옥 골목에 있는 키 작은 전봇대지만 현역이다
구 인천감리서 터 표지석
한진 SKY TOWER 아파트 자리에 1883년 개항 직후 통상 업무를 담당하는 인천감리서가 생겼고
나중에 인천부(인천시청) 역활에다 개항장 재판소와 학교까지 들어섰다
1895년 관립외국어학교가 감리서 안에서 개교했는데 이 학교가 후일 인천고다
옛 인천감리서 터 사진 / 건립 1883년 · 멸실 1927년
인천개항장 재판소에는 22살의 청년 김구가 「치하포사건」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복역하던 중 탈출한 일화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성당인 내동교회는 1891년 9월 30일 축성되었으나
6 · 25동란시 소실하여 이곳에 옮겨 1955년 8월 28일 정초식을 갖고 1956년 6월 23일 준공되었다
지금 교회 자리는 랜디스가 세운 성누가병원으로 1902년 6개월간 러시아 영사관으로 사용되었고
1904년 제물포해전 당시 일본적십자병원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1955년에는 중학교 교사로 이용하였다
제물포 웨슬리예배당 · 내리교회
제물포 웨슬리예배당
내리교회 제2대 담임목사였던 조지 헤버 존스와 내리교인들이 1900년 6월 건축을 시작하여
1901년 12월 25일 성탄절 아침에 약 1천명이 첫 예배를 드린 최초의 서구식 개신교 예배당이다
웨슬리 예배당은 아펜젤러가 1891년 내동 29번지에 세운 10평 정도의 한옥예배소를 허물고 신축한 건물이다
한옥예배소가 멸실되고 웨슬리예배당 공사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에는 한옥예배소에서 얻은 폐자재를 활용하여 우각동( 창령동)에 있던 선교사 주택을
약 20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에스베리예배당이라는 이름으로 1900년 8월 26일 증축하여 임시로 사용했다
이토록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예배당을 1955년에 허물고야 말았다
이에 모든 내리교인들과 뜻있는 인천시민들이 애석하게 여기다가 인천광역시의 지원으로 꼭 111년 만인 2012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미주 한인 선교 100주년 기념비
내리교회(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빗돌이 있다
아펜젤러목사 · 김기범목사 · 존스목사
아펜젤러목사가 인천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였다
조선의 불안한 정국으로 일본으로 되돌아갔다가 6월 20일 재입국했다
안골(지금의 내동)에 숙소를 정하고 상경 시기를 관망하면서 목회를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7월 7일 마침 일본 나가사키에서 배로 부친 풍금이 도착하자 아펜젤러는 1시간여 동안 연주를 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울려 퍼진 최초의 감리교회 찬송이었다
*
1901년 5월 14일 한국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김기범목사
*
1888년 5월 14일 20세로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딘 존스목사는
1911년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빼어난 한국어 실력으로 제2대 담임목사직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인천내동교회 한국최초 · 인천최고 100선
현재 한국 최초 교회는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목사가 세운 정동장로교회(현 새문안교회)로 알려져 있지만
1922년 발간한 인천내리교회역사에는 내리교회가 2년 앞선 1885년 처음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 대한천일은행 지점(현 우리은행)
대한천일은행은 구한말 대한제국 관료층과 상업자본가들이 주체가 되어 설립한 민족은행이다
현재 우리은행(상업은행→한빛은행→우리은행)의 전신으로 1899년(광무3) 1월에 설립했다
우리은행 인천지점은 1899년 5월 10일 개점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지점이다
예전 삼화고속 정류소 터
1970년 2월 23일 운행을 시작한 인천~서울간 고속버스 정류장이었다
예전 종로2가 사거리에서 출발하는 삼화고속버스를 타고 몇 번인가 온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부터 택시회사가 있던 곳이다
동인천역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할 때는 청과물시장에 「축현역」이 생겼다
1926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역명이 상인천역, 다시 1955년 동인천역으로 개명했고 1957년에 역사를 새로 준공한 후
1989년 오랫동안 정들었던 역사를 허물고 민자 역사를 지으면서 인천백화점이 자리했다
인천백화점이 운영난에 문을 닫고 「엔조이쇼핑」이 다시 재기를 노렸으나 다시 문을 닫고 지금은 새로 리모델링 중이다
마침점인 동인천역으로 가는 지하도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거리 7.2km, 소요시간 5시간 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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