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이다
정순왕후는 여랑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단종 2년(1454)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의덕왕대비가 되었다
그러나 세조 3년(1457) 단종복위운동 실패 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었고
정순왕후는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정업원(지금의 청룡사)에서 생활하였다
단종이 1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정순왕후는 매일 정업원 뒤 산봉우리(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후 중종 16년(1521) 82세로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숙종 24년(1698) 정순왕후로 복위될 때 단종을 평생 그리워하였다 하여 사릉이라는 능호를 올렸다
사릉에는 궁과 능 등 문화재지역에 심을 나무를 기르는「전통수목 양묘장」이 있다
사릉 정문
조선왕릉 세계유산 안내석 · 매표소 · 문화관광해설사실이 있다
사릉(사적 제209호) 종합안내도
정순왕후는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죽임을 당하자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 옷만 입으면서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고 수절하였다 한다
조선왕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비
조선왕릉은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조선을 통치한 왕과 비의 무덤이다
2009년 6월, 조선 왕릉 42기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 능)과 후릉(정종 · 정인왕후 능)을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들이 거의 훼손없이 온전히 남아 있는 사례는 세계적으로 조선왕릉이 유일하다
매표소 · 해설사실
해설시간은 오전 10시 · 오후 1시 · 3시 · 입장료는 개인 1천 원이다
추석 연휴기간엔 무료다
입장권을 받는 곳이다
남양주 사릉 · 조선왕릉과 왕실계보
검표소 앞에 놓여 있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능침공간으로 가기 전에 먼저 재실로 간다
사릉 재실(齋室)
재실은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졔례를 준비하는 곳이다
평소에는 참봉 등 관리가 상주하면서 능역을 돌보았다
주요 시설로는 제실 외에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 제례업무를 주관하는 전사청 ·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 행랑채 등이 있으며 단청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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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이 열쇠로 잠겨져 있다
조선왕릉 자연생태전시관
조선왕릉은 풍수사상에 따라 자연 산림 공간에 위치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왕릉에 있는 나무나 풀을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두고
화소(火巢)나 해자(垓字)를 두어 산불이 외부에서 왕릉으로 번지는 것을 방지하는 등 숲을 엄격히 관리해 왔다
이렇듯 조선왕릉은 입지한 자연환경을 600년 동안 잘 보호하고 관리하여 자연생태계를 잘 간직하고 있는 자연학습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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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앞에 백송이 있다. 백송은 소나무이면서 하얀 껍질을 가지고 있다
어릴 때는 푸른빛이었다가 나이가 들면서 차츰 하얗게 된다
중국 북부지방이 고향이며 조선시대 베이징을 다녀오는 외교사절들이 주로 가져다 심었다
자람이 아주 늦고 옮겨심기도 어려운 귀한 나무이다
조선왕릉 자연 생태 전시관
조선왕릉 숲에서 볼수 있는 동 · 식물들을 전시하였다
모니터로 왕릉을 설명해주고, 버튼을 누르면 새소리를 듣는 장치도 있다
나무에 크낙새 · 소쩍새 · 넓적사슴벌레 등이 있다
나무 속의 구조
나무의 나이를 알 수 있는 나이테의 패턴을 이용하여 연륜연대를 측정하는데 연륜연대는 목조건물의 축조시기 등을 추정하는 자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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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나무의 표피와 단면을 보여준다
나이테로 보는 조선왕릉 조성사
1391년 조선 태조의 정비(正妃)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의 제릉부터
조선 왕조 마지막 왕릉인 제27대 순종의 유릉(裕陵)이 만들어진 1926년까지 조선왕릉의 조성사를 나이테로 보여준다
왕릉 숲의 곤충들
왕릉마다 차이는 있지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장수하늘소를 비롯하여
딱정벌레목 · 잠자리목 · 벌목 · 나비목 · 매미목 · 메뚜기목 등 140여 종 이상의 곤충이 왕릉에서 발견된다
이중에는 도움을 주는 곤충도 있고 사람, 동물, 나무에 해를 입히는 곤충도 있다
일반적으로 해를 끼치는 곤충을 해충이라고 하는데 이는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했을 때 이해관계에서 본 상대적인 호칭이지, 절대적인 해충은 없다
최근 나무로 만든 건물에 피해를 입히는 흰개미를 생각해 보면
흰개미가 보호해야 할 목조건물에는 해충이지만 생태계에서는 대표적인 분해자로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따라서 생태계의 균형을 위해 아름다운 왕릉 숲과 더불어 숲에서 살아가는 곤충을 보호해야 한다
야생화 전시 포지
약 100여 종의 야생화가 자라고 있으며 우리 꽃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야생화 전시회(5월)를 개최하고 있다
전통수목 양묘장
이곳에 있는 소나무 묘목은 태백산맥 능선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소인 준경묘와 영경묘의 낙랑장송 후손으로
숭례문 복원에 사용될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소나무로 평가받고 있다
1999년에는 사릉에서 재배된 묘목을 단종 무덤인 영월 장릉에 옮겨 심어 단종과 정순왕후의 그간 아쉬움을 풀고 애틋한 정을 나누도록 했다
이때 사용된 소나무를 「정령송(精靈松)」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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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릉에선 우리 고유의 전통수목 육성을 위한 전통수목 양묘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우량 종자의 묘목을 생산하여 궁 · 능 · 원에 분양하고 있다
작은 수목원
우리 고유의 전통 나무 및 들꽃 160여 종이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인 창덕궁 향나무(제194호) · 서울 삼청동의 등나무(제254호)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제59호) · 용문사 은행나무(제30호) 등의 후손들이 자라고 있다
이제 제향공간으로 간다
사릉
지금은 정문에서 일직선 상에 있지만 예전 분들 말씀으론 여느 왕릉과 같이 진입공간이 왼쪽이었다고 한다
제향공간
조선왕릉의 능침은 기본적으로 도래솔이 둘러싸고 있는데
사릉의 소나무들은 단종의 능인 영월 장릉 쪽을 향해 고개 숙여 자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향 · 어로(香 · 御路)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로 박석을 깔아 놓았다
왼쪽에 약간 높은 길은 제향 때 향을 들고 가는 길이라 하여 향로(香路)라고 하며 오른쪽 약간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로(御路)라고 한다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넘어지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걸으며 선왕의 대한 존경을 표하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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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향 · 어로는 정자각까지 이어지지 않고 중간에 중단되어 땅 속에 묻혀 있다고 한다
배위(拜位)
헌관이 제례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곳으로 이곳에서 절을 4배한다
판위(版位)라고도 한다
정자각 · 비각
정자각(丁字閣)
제사를 모시는 건물로 제향공간의 중심적 건축물이다
정청과 배위청으로 나뉘어지며 두 개가 합쳐진 모양이 정(丁)자 모양이라 하여 정자각이라 하는데
이곳은 배위청이 짧아 건물 전체 모습이 정사각형의 느낌을 준다
예감(禮鑑)
제례가 끝난 뒤 제물을 묻거나 지방을 태우는 곳으로 망료위라고도 하는데
이곳 예감은 특이하게 조각된 뚜껑이 특징인데 원래 예감의 뚜껑은 나무로 만들었지만 이곳은 석재로 만들어 현재까지 전한다
하지만 이 석재 뚜껑이 원래 것인지는 전문가들도 모른다고 한다
수라간
정자각 양편으로 공사 준비로 땅을 파놓은 곳이 있다
수복방 · 수라간 터다
비각(碑閣)
비석이나 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를 세워둔 곳이다
조선국 정순왕후 사릉 신도비(朝鮮國定順王后思陵)
단종왕비 정순왕후 사릉 비문
정순왕후 송씨의 일생이 간략하게 써있다
정자각 신계(神階)
제수진설도 · 기신제 안내도
정청에는 뒤로 보이는 제상과 관세상 · 향상 · 망료상 · 축상 · 준상 · 가자 등이 놓여 있다
신교(神橋) · 신로(神路)
정자각 뒤에서 능상으로 향하는 왕의 혼을 위한 길이다
능침공간
조선시대 모든 능역에는 사가의 무덤을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사릉에는 사가의 무덤 11기가 남아 있다
중종은 정순왕후가 사망하자 단종 때부터 7대의 왕을 거친 그녀를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돌아갈 당시 왕후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능을 조성할 처지가 아니므로 단종의 누이 경혜 공주가 출가한 집안에서 장례를 주도하였다
해주 정씨 가족묘역 안에 안장하고 제사를 지내 아직도 시가의 무덤이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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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침공간은 출입 허가를 받아야 한다
사릉 곡장
1521년(중종 16) 정순왕후 대군부인묘로 조성하여 안장하였고 1698년(숙종 24) 단종이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로 복위 되어 능호를 사릉으로 하였다
사릉 앞에 있던 해주 정씨 묘 2기만 옮기고, 다른 묘들은 석물만 땅 속에 묻게 하였으나 왕권이 약해지는 조선 후기 석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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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장은 능상을 보호하기 위해 삼면으로 둘러놓은 담장이다
능침(봉분)
대군부인 예로 장사 지낸 뒤 왕후 능으로 추봉되었으므로 다른 능에 비해 단출하다
병풍석 · 난간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장명등
숙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장릉(단종)에 있는 장명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초의 사각 장명등이다
이때부터 석물들도 작아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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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의 장생 발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운다
혼유석
혼령이 노니는 곳이라는 뜻이고, 무덤 앞의 상석을 괴는 돌을 북 모양 같다 하여 고석(鼓石)이라 한다
문인석
장명등 좌우에 있으며 언제든지 왕명에 복종한다는 뜻에서 양손으로 홀을 쥐고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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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석은 생략되었고 문인석 크기도 작다
석마(石馬)
말의 형상을 조각한 돌로 문인석 한 발 뒤에 서있다
망주석(望柱石)
봉분 좌우측에 각 1주씩 세우는 기둥으로 상부에 세호가 조각되어 있다
오른쪽 것은 위를 향하고, 왼쪽 것은 땅으로 내려온다
석양(石羊)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봉분 주위에 배치하는 돌로 만든 양이다
석호(石虎)
능을 수호한다는 의미로 봉분 주위에 배치하는 돌로 만든 호랑이다
진건소나무회와 영월단결회 자매결연 기념식수
강원도 영월 장릉 앞에는 사릉에서 가져다 심은 소나무 「정령송(精靈松)」이 있다
이 정령송은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절하고 슬픈 사연으로 인해 두 영혼을 합치자는 뜻으로 옮겨심은 소나무다
한 때 장릉과 사릉을 한 곳으로 합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지방자치단체 간의 이해가 엇갈려 무산되었다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鄭眉壽) 묘갈 · 정국공신 해평부원군 신도비
정미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의 외숙모인 정순왕후 송씨의 시양자가 되기를 자처해 그녀를 극진히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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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통제구역으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
유일하게 사릉 주위에는 사가의 무덤 11기가 남아 있다
그 중 한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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