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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인천상륙작전기념관

1950년 공산세력의 불범침략으로 함락 위기에 놓인 대한민국을 UN의 깃발아래 목숨을 바쳐 자유 민주주의를 지켜낸

우방국가들의 젊은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영원히 기리고 그 뜻을 소중히 하기 위하여

6 · 25전쟁 당시 전세 역전의 결정적 계기가 된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이곳에 1984년 인천시민의 정성으로 건립되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청량산 기슭에 있다

 

 

 

 

자유수호의 탑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인천 송도

자유수호의 탑 앞에서 봤다

 

 

 

 

전시관 입구

맞은편에는 영상관이 있다

 

 

 

 

UN군 참전 상징 조형물

전시관 안내부스 앞에 있다

 

 

 

 

인천상륙작전 최초의 구상

주한미대사 보고 전문과 맥아더 장군의 전선시찰 보고문 등이 있다

 

 

 

 

인천 상륙작전

1950년 6 · 25전쟁 당시, 풍전등화와 같던 전황을 타계하기 위해 맥아더 장군이 구상한 작전이다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의 퇴로와 보급로를 차단하여 낙동강 전선에서 총 반격을 감행하여 적을 섬멸한다는 계획으로

극심한 조수 간만의 차와 협소한 수로로 말미암아 병력 · 탄환 · 보급품의 수송이 어려운 악조건을 극복하고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수도 서울을 수복하고 한반도 전세를 역전시킨 세계전사에 빛나는 작전이다

 

 

 

 

최초의 구상

맥아더 장군은 서울이 함락된 직후인 1950년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이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전선 상황을 파악하던 중 작전을 구상하게 된다

그는 미 지상군을 신속히 투입하여 남침중인 북한군의 주력을 수원 부근에서 고착시키는 한편

인천 부근 미제1기병사단을 상륙시켜 적의 배후를 공격하려는 생각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알몬드 소장(후에 주한 미10군단장)에게

"서울의 적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고 상륙지점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인천상륙작전은 시작되었다

 

 

 

 

주한 미 대사 보고 전문

1950년 6월 24일 오후 11시 47분

"... 오늘 새벽 4시 북한군 병력이 사전에 선전포고 없이 38도선을 따라 한국의 몇몇 방어 진지를 침입하였습니다

현재 38도선을 따라 몇몇 장소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맥아더 장군의 전선시찰 보고 전문이 있다

 

 

 

 

낙동강 전선의 위기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8월 4일 공격을 개시하여 한때 영산을 점령하고 기계 · 포항까지 진출하였다

최악의 전선 상황에 국군과 미군은 다부동 · 신녕 · 안강 · 포항 선으로 후퇴하여

새 방어선을 형성하고 장병들은 혈전을 거듭하며 방어진지를 사수하였다

9월 초 북한군은 5개 공격집단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부산으로 연결된 5개 지역에 격렬한 공세를 펼쳤다

이러한 공세롤 한때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여 영산 · 다부동 · 영천 · 포항이 북한군에 점령되고

대구 · 경주가 위협 받게 되면서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질 수 있는 위급한 상황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9월 10일부터는 북한군의 전투력이 고갈된 듯 공격 기세가 약화되었다

그래서 반격작전을 위한 새로운 상륙작전 계획을 발전시키게 된다

 

 

 

 

경인지역 북한군

왼쪽에 6 · 25전쟁 상황도 · 오른쪽은 맥아더 장군과의 포토존이다

 

 

 

 

경인지역의 북한군

북한군은 부산을 조기 점령하기 위하여 낙동강 전선에 집중하였으며

서울을 비롯한 후방지역에는 지역경비부대와 병참선 경비부대, 훈련이 미숙한 신편부대가 산재해 있었다

북한군은 유엔군의 상륙작전은 군산에서 실시할 것이라 판단하고 인천에는 약간의 방어부대와 해안경비대만 두었다

서울 5천 · 경기 2천 · 인천 5백의 병력이 있었다

 

 

 

 

6 · 25전쟁 상황도

1. 북한군 남침기(1950. 6. 25~ 9. 14) /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낙동강까지 밀렸다

2. 유엔군 반격 및 북진기(1950. 9. 15~ 11. 24)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하였다

3. 중공군 침공 및 재반격기(1950. 11. 25~1951. 1. 24) / 중공군 개입과 더불어 단행된 공산군 공세에 유엔군이 평택~삼척 간을 연결하는 선까지 후퇴

재반격으로 38도선을 다시 회복하게된 중공군 침공 및 유엔군 재반격기

4. 전선교착 및 휴전(1951. 1. 25~1953. 7. 27) / 중공군의 대공세 실패로 공산군은 소련을 통해 휴전을 제의해 옴에 따라

휴전회담 진행과 더불어 쌍방이 38도선 부근에서 2년여에 걸쳐 공방전을 전개했던 교착기

 

 

 

 

1950년 8월 5일 · 9월 15일 전선 지도

 

 

 

 

계획의 발전

크로마이트작전 계획서 전시

 

 

 

 

크로마이트 작전계획 수립

1950년 7월 초 블루하트 작전계획은 전선 상황의 악화로 취소되었지만 상륙작전에 대한 맥아더 장군의 집념은 계속되었다

전황이 불리해질수록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 후방에 대한 상륙작전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어 2개월 후 크로마이트 작전 계획이 만들어진다

인천 · 군산 · 진남포 · 원산 · 주문진 등 해안지역을 상륙대상지역으로 검토하여

계획 - B (인천) · 계획 - C (군산) · 계획 - D (주문진)의 세 가지 상륙작전 계획안이 마련되었다

그 중 인천상륙과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취한다는 '계획 - B'가 채택되었다

 

 

 

 

블루하트 작전계획

최초의 구상을 실천하기 위해 합동전략기획 및 작전단(JSPOG)을 설치하여 수립된

블루하트 작전계획은 남부전선의 미 제24사단과 25사단이 정면에서 반격작전을 시행하고

이와 동시에 미 해병 1개 연대 전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상륙부대로 인천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진출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을 섬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전선 상황의 급속한 악화로 상륙부대로 계획된 미 제1기병사단이 낙동강 전선 보강을 위하여 포항에 상륙함에 따라 취소되었다

 

 

 

 

크로마이트 작전계획서

인천에 상륙한 상륙부대가 경인가도를 확보한 후 경춘가도로 진출하여 적의 병참선 및 후퇴로를 차단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UN군이 총 반격을 실시하여 적을 포위 섬멸한다

적을 기만하기 위해서 동해안과 서해안 지구에 소규모 상륙을 감행하는 동시에

우리쪽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동해안과 서해안에서 양공을 실시하기도 하였고 삼척지구에서는 양동작전을 펼친다

 

 

 

 

제7합동상륙기동부대 편성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 제7합동상륙기동부대를 구성하고 제7함대사령관 스트러블 중장을 사령관에 임명했다

이 합동상륙기동부대는 90공격기동부대 · 92공격기동부대를 포함해 임무별로 모두 7개 기동부대로 편성했다

이 제7합동기동부대는 함공모함 · 구축함 · 순향함 등

8개국 261척(미국 225 · 영국 12 · 캐나다 3 · 호주 2 · 뉴질랜드 1 · 프랑스 1 · 한국 15)의 함정과 제10군단 7만5천명으로 편성되었다

 

 

 

 

마지막 논쟁

8월 23일 동경에서의 미 합동참모본부 회의에서는 북한군 후방에 상륙하겠다는 상륙작전계획에 대하여서는 동의하였지만

상륙지역을 인천으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절대 찬성하지 않았다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과 해군참모총장 셔먼 제독 그리고 미 해병대 대표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반대의견을 제시하고 동의를 유보해 왔었다

8월 28일 미 합동참모본부 인천상륙작전 계획 승인 · 8월 30일 인천상륙작전 명령 하달 · 9월 6일 상륙작전 날짜를 9월 15일로 확정 하달

 

 

 

 

상륙작전을 위한 다양한 양동작전

인천상륙작전은 작전을 시행하기 전에 여러가지 기만전술을 사용함으로써 기습에 필요한 여건을 조성했다

미국 매스컴에서도 10월 이후에 반격이 개시되고 그와 동시에 인천으로 상륙작전을 할 것 같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10월 이후에 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9월 15일이라는 상륙일을 기만하고

인천으로 상륙할 것이라고 시사함으로써 "인천이 아니다"라는 인상을 주어

북한으로 하여금 "인천은 양동작전이고 주 상륙은 군산으로 할 것이다"라고 오판을 하게 만들었다

9월 14일에는 군산 해안 주변의 주민들을 철수토록 종용하는 전단을 살포하고 군산 주위 50km이내 지역에 항공폭격을 가했다

 

 

 

 

덕적도 ·  영흥도 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전초전으로 도서 거점을 확보하고 유엔 상륙기동함대의 안전항해를 위하여

한국 해군함정의 함포지원 아래 이들 함정 승무원으로 편성된 육전부대가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1950년 8월 18일 덕적도 · 8월 20일 영흥도를 탈환하였다

 

 

 

 

9월 14일까지 인천으로 집결

상륙일자가 다가오자 제7합동상륙부대는 부산 · 일본 사세보 · 고베, 요코하마에서 상륙군이 승선하기 시작하여 9월 11일부터 인천을 향해 출발했다

 

 

 

 

인천상륙작전

미 해병대 제1사단을 상륙기동부대로 하여 인천에 상륙 · 해안교두보를 확보하고 서울을 탈환한다

 

 

 

 

인천 지역의 지리적 조건

 

 

 

 

해상지원 계획

 

 

 

 

항공지원 계획

 

 

 

 

지상군 상륙계획

 

 

 

 

6 · 25전쟁시 각 군의 역활

상륙돌격부대의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육군작전

북한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대한민국 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특히 북한의 T-34전차를 파괴할 무기가 없던 국군에게 그것은 괴물 같은 존재였다

 

 

 

 

공군작전

전쟁 초기 연락기와 훈련기만 보유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수제폭탄을 만들어 공중에서 투하하는 등 지상작전을 지원하였다

이후 미국으로부터 F-51전투기 10대를 인수받아 공중 작전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해군작전

6 · 25전쟁 초기 한국 해군의 활약은 대단했다

북한의 육전대 600명을 태운 대형 수송함을 6월 26일 대한해협에서 격침시킴으로써

부산에 상륙하여 후방을 교란하려는 북한의 작전 기도를 사전에 분쇄하였다

 

 

 

 

해병작전

해병대는 6 · 25전쟁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

1950년 8월 중순에는 국군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을 통해 '귀신 잡는 해병'의 용맹성을 과시했으며

인천상륙작전 및 서울 탈환작전에서 중앙청에 최초로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제2전시관으로 올라가는 복도에

인천상륙작전의 영웅들의 사진과 약력이 붙어 있는데

맥아더 장군의 약력을 보니 1880년 미국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출생하였으며 1899년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를 입학하여 1903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30년 11월 30일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여 미국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35년 참모총장에서 퇴임하였으며 1937년 퇴역하여 예비역 대장이 되었다

1941년 제2차세계대전 당시 남태평양 지역 사령관으로 복귀하여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연합군(UN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전세를 역전시켰고 인민군을 압록강 국경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자, 그는 만주폭격과 중국연안봉쇄, 대만의 국부군(國府軍)의 사용 등을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1951년 4월 11일 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노병(老兵)은 죽지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아시아와 유럽에서는 훌륭한 군인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미국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1964년 4월 5일 워싱턴 월터육군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유엔군 참전현황

 

 

 

 

전쟁의 흐름을 바꾼 인천상륙작전

적의 허를 찌른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전쟁의 흐름을 단숨에 역전시키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디오라마

 

 

 

 

6 · 25전쟁 사진

인천상륙작전 디오라마 앞에 있다

 

 

 

 

숨어있다 투항히는 듯하다

 

 

 

 

두 손은 들었지만 편안해 보인다

 

 

 

 

적군인 듯하다

 

 

 

 

어린아이

 

 

 

 

중앙청

 

 

 

 

부상 당한 팔을 치료한다

 

 

 

 

전차부대

 

 

 

 

맥아더 장군 상

서울 수복 사진이 있다

 

 

 

 

서울 수복작전

9월 19일  인천에 상륙하여 해안 교두보 확보에 성공한 미 제10군단은 미 제1해병사단에 서울 공격 명령을 하달

김포지구의 제5해병연대는 즉시 그곳에서 적절한 도착지점을 선정하여 한강 도하를 준비하고

제1해병연대는 영등포 이남지역에 대한 작전 책임을 미 제7사단에 인계 후 한강 선으로 진출하여 도하준비를 서두르도록 명령하였다

 

 

 

 

맥아더 장군 상

선글라스 · 기념액자 · 책자 · 콘파이프 등이 있다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세계대전 시 '노르망디상륙작전'을 방불케 하는 작전으로써

그 규모에 있어사도 타에 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장 어려운 조건의 인천에 작전을 감행하여 공산치하의 수도 서울을 수복하고

낙동강 전선에 몰려있던 북한군을 독 안의 쥐로 만들어 전세를 크게 역전시켜 총 반격작전의 발판을 만들었다

 

 

 

 

인천상륙작전 과정

1950. 6. 29 맥아더 장군 한강변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구상

1950. 9. 15 미 제5해병연대 3대대 월미도(녹색해안) 상륙 

1950. 9. 28 한 · 미 해병대 서울 완전수복                      

 

 

 

 

인천상륙작전 참가 한국해군 함장

 

 

 

 

인천상륙작전 관련 유물

 

 

 

 

인천상륙작전 지도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크로마이트'가 개시되고 적색해안으로 미 해병 5연대가 상륙정을 타고 돌격을 개시했다

높은 방벽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야 했으나 포화로 인해

그 누구도 먼저 사다리에 오르려 하지 않아 난항을 격고 있을 즈음 한 용기 있는 청년이 사다리에 올랐다

그 청년의 이름은 제1해병사단(증강) 제5연대 제1대대 A중대 소대장  '발도메로 로페즈'

그가 담당한 상륙구역은 적의 사격 벙커로부터 가해온 사격 때문에 기세가 껶인 상태였다

적의 자동화기 사격에 몸을 노출 시킨 채 수류탄을 투척하려던 순간

오른쪽 어께와 가슴에 피격당한 로페즈 중위는 뒤로 쓰러지며 그 치명적인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곧 몸의 방향을 돌린 그는 수류탄을 다시 집어 적에게 투척하기 위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부상의 고통과 과다출혈로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어서 수류탄을 투척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을 강하게 쥘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소대원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기 보다는 자신을 희생하기로 선택했다

부상당한 팔을 크게 휘둘러 수류탄을 배 밑에 깔고 폭발의 충격을 모두 자신의 몸으로 흡수했던 것이다

*

'용기있는 죽움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 스크립스 하워드 종군기자 '제리 소프'의 글이다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가 사다리에 오르는 사진이다

그가 죽기 불과 몇 분 전에 찍힌 사진이다

 

 

 

 

1950년 8월 18일과 20일에 덕적도와 영흥도 탈환

1950년 9월14일까지 제7합동상륙기동부대 인천으로 집결

 

 

 

 

6 · 25전쟁 발발 당시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 및 경제력 비교

남한이 병력은 절반 · 항공기 10분의 1 · 전차는 없었다

 

 

 

 

군번 없는 용사 · 학도의용군

학도의용군은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스스로 참전하여 펜 대신 총을 들고 싸운 학생이다

학도의용군은 1950년 6월 29일 수원에 모인 200여 명의 학생들이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으로 조직된 비상학도대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참전한 학생들은 전투요원 5만여 명 · 후방요원 20만 명 등 총 30만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7천여 명은 군번과 계급도 없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1951년 2월 28일 학도의용군이 해산된 이후, 일부 학도병은 정식으로 입대하여 계속 전선을 지켰다

 

 

 

 

중공군은 왜 전쟁에 개입했을까?

중국의 모택동은 6 · 25전쟁 발발 이전 회담에서 "미군이 참전하면 북한을 지원하겠다"고 한 약속대로 김일성의 요청으로 6 · 25전쟁에 참전하였다

중국은 북한 공산정권을 계속 유지시킴으로써 한 · 중 국경선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여 자국의 안전보장을 유지하는 한편

북한을 지원함으로써 소련으로부터 경제 및 군사원조를 획득하고 동북아시아에서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할 목적도 있었다

 

 

 

 

중공군 개입과 새로운 전쟁

1950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은 건국 1주년을 맞이하여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하면 좌시하디 않겠다고 했다

모택동은 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하고 맥아더가 북한에 최후통첩을 하던 날, 미국을 격렬한 어조로 비난하였다

모택동은 10월 4일에 공산당 중앙정치국 회의를 개최하였고 북한에 군사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참전을 결정했다

대규모 중공군으로부터 기습을 당한 국군과 유엔군은 통일을 눈앞에 둔채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

중공군은 6 · 25전쟁 당시 전투장비의 열세함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 특유의 인해전술로 국군과 유엔군을 공격하였다

이 전술은 주로 야간전투 시 후방으로 침투하여 함성 · 나팔 · 북 · 꽹과리 등으로

상대방에게 불안감을 주면서 공격 방향을 기만한 다음 전혀 다른 방향에서 대병력으로 물밀듯이 공격하는 전법이다

이 인해전술로 국군과 유엔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중공군 역시 수많은 병력이 희생되었다

 

 

 

 

6 · 25전쟁이 남긴 이야기

 

 

 

 

북한군 전투명령 1호

1950년 6월 22일 북한군 제4사단에서 발행한 전투명령 제1호다

 

 

 

 

UN한국위원단 보고 전문

발신일 · 1950년 6월 26일 오후 10시 6분

6월 25일에 발발한 전쟁에 앞서 벌어진 배경 사건들을 요약 정리하여 보낸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6 · 25전쟁 당시 발행된 신문 기사들

 

 

 

 

해병 3 · 4기 대원 서명 태극기(복제)

 

 

 

 

재일동포 의용군 무사귀환 기원 서명기

재일교포 강대윤씨가 자원입대하여 6 · 25전쟁에 참전키로 하자 일본인 이웃 주민들이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서명을 하여 강대윤씨에게 전달한 것이다

(영문 및 노란 글씨는 미 제3사단 근무 당시 전우들이 서명한 것임)

 

 

 

 

2대 UN군 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1952년 5월) · 6 · 25전쟁 당시 영웅메달을 수여받은 군병사(1951년 7월)

LIFE 잡지 표지 사진이다

 

 

 

 

망각된 고지에서

"그리운 사람아 금년의 크리스마스를 그대에게 맏끼노라" 전투중에도 병사들은 시화전을 열었다

 

 

 

 

군번없는 용사, 학도의용군

 

 

 

 

휴전회담과 정전협정 체결

1951년 7월 10일에 시작된 휴전회담은 군사분계선 설치 군사정전위원회 구성 · 포로송환 등

공산군 측의 명분 없는 반대로 인해 2년이나 지체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휴전협정 조인문

63. 제12항을 제외한 본 정전협정의 일체규정은 1953년 7월 27일 22:00시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1953년 7월 27일 10:00시에 한국 판문점에서 영문 · 한국문 · 중국문으로써 작성한다

이 세가지 글의 각 협정 본문은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

*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미국 육군 대장 마크 더블유. 클락크

·

참석자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 수석대표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

국제연합군 대표단 수석대표 미국 육군 중장 윌리엄. 케이 해리슨

 

 

 

 

전쟁의 결과와 교훈

끝나지 않은 전쟁,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전쟁

"원자력 전쟁에서는 승자가 없다. 있는 것은 패자뿐이다" 슈바이처

 "전쟁이란 왕들의 거래이다" 드라이든

·

전쟁이란 결국 최고 권력자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국민이 권력자를 통제하지 못하는 한 언제고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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