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천경자 1주기 추모전〉을 보기 위해 계획한 코스다
서울시청
일제강점기인 1926년 경성부청으로 지은 4층 건축물로 지금은 「서울도서관」이다
유리 외벽을 가진 뒷 건물이 2012년 완공된 서울시청 신청사로 각 단일 유리의 꼭지점 각도가 모두 다른 비정형건물이다
시점이다
환구단 정문
나라가 기울어가던 조선 말, 고종은 조선이라는 국호를 접고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환구단 남별궁(지금 조선호텔) 자리에서 황제 즉위식을 한다
이후 환구단은 황궁우와 석고단이 세워지면서 제단의 틀을 갖춘다
하지만 일제는 천명을 내려받는다는 이곳에 일본 철도호텔을 지으면서 환구단을 대폭 축소시켰다
광복 후에는 철도호텔이 없어져 환구단이 복원될 좋은 기회도 있었지만 대기업에 불하되어 황궁우는 지금까지도 호텔의 부속품처럼 남아있다
환구단은 대한제국 시절 천제(天祭)를 지내던 곳이다
환구단 황궁우
1899년 환구단 안에 세워진 환구단의 상징물로 하늘과 땅을 잇는 도형의 팔각 3층 건물이다
황궁우에는 천신 · 지신 · 인신(태조)의 신위를 모셨다
웨스틴 조선호텔
일제가 세운 철도호텔은 철도를 이용하는 고객들의 편의를 위해 국내 최초의 국영호텔로 건립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었다
광복 후 전 이승만 대통령이 「조선호텔」로 개명하였으며 1959년 「관광호텔」로 이름을 변경하여 운영하다
1968년 건물을 완전히 허물고 1979년 외국인 투자자에 의해 「웨스틴 조선호텔」로 개명되었으며
이후 1995년 신세계가 웨스틴체인의 지분을 인수하여 운영중이다
해치
보통 해태상으로 불리는 동아시아 고대 전설 속의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의 동물」로
법의 상징과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2015년 10월 조선호텔 100년의 시작을 기념해 조선호텔 입구에 설치했다
소공동
조선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의 집이 있어 소(小) 공주(公主)골이라 불린게 기원이다
임진왜란 때는 적장의 진지가 있었고 후에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영빈관이 있었다
이 때문인지 일제강점기 이후 많은 화교들이 이 주변에 살았다
홍순언의 집터(지금 롯데호텔)
홍순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사신으로 베이징에 갔었다
그곳에서 부모를 잃고 몸을 팔던 여인을 만나 자신의 돈을 털어 그녀를 구해주었다
훗날 그녀는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의 재취 부인이 되어 홍순언에게 감사의 표시로 손수 짠 비단옷에 「보은단」이라 수놓아 주었다
또 석성은 황제를 설득해 조선에 원병을 파견하는 등 여러모로 홍순언과 조선을 도왔다
이후 홍순언은 이성계의 기록 오류를 바로잡도록 하여 그 공로로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졌고 나라에서 하사 받은 집터에 아흔아홉 칸짜리 집을 짓고 살았다
덕수궁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1593년(선조 26)부터 선조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다가
광해군이 1611년(광해 3)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붙여 주었다
그 후 광해군이 1615년(광해 7)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고 경운궁은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경운궁은 1897년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한국 근대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전성기 때의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하는 큰 궁궐이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황위에서 물러나면서 경운궁은 선 황제가 거처하는 궁으로 그 위상이 달라졌고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역시 이곳에도 정의와 청렴의 동물 해치가 있다
예부터 해치를 궁궐 앞에 세운 이유는 관원들이 궁궐을 출입할 때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여 올바른 정치를 펴게 하려는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조정의 신하들이 광화문을 드나들 때 해치의 꼬리를 쓰다듬으며 청렴의 마음을 가다듬는 관행이 있었다 한다
이곳 13층에 있는 「정동전망대」가 있다
덕수궁
인왕산 · 북악산이 보인다
정동전망대에서 봤다
서울시립미술관
천경자 1주기 추모전 · 백남준 10주기 추모전이 열린다
천경자 1주기 추모전
먼저 관람한 뒤 잠시 쉬다 1시 도슨트 시간에 다시 한 번 봤다
맞은 편에 아카이브 전시장이 있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 · 종이에 채색 · 43.5×36 )
천경자의 트레이트 마크인 꽃 · 여인 · 뱀이 한 화면에 모두 나오는 대표작
22살 때의 결혼과 첫 딸을 낳았던 과거의 경험을 슬프고 우울한 기억으로서 회상하는 작품으로 전시장 첫 작품으로 전시되어 있다
*
전시장 그림은 촬영금지라 동영상 모니터 화면을 촬영했다
백남준 10주기 추모전
백남준 ∞ 플럭서스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타계 10주기를 맞아 SEMA가 마련한 추모전이다
이 전시는 백남준의 예술적 동지이자 1960년대의 해프닝 예술운동인 플럭서스가 그의 예술적 모태가 되었다는 견지에서 플럭서스를 함께 조명한다
백남준 전시장 내부
배재학당 동관(培材學堂 東館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6호 / 지금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북감리교 선교사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1858~1902)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이다
고종 황제는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1984년 2월 배재중고등학교가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한 후
2008년 7월 다양한 근대 유물들과 함께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하늘기둥 / 홍성경 作
기독교 정신과 신교육의 이상적 접목을 이룬 배움의 전당이란 주제하에 7일간의 천지창조를 의미하는 7개의 십자가가 작품의 전체적 구성이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앞 마당에 있다
평안교회
수렛골 표지석
서소문동 서북쪽 전 배재고교 자리와 이화여고 부지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수렛골 또는 차동(車洞)이라고 불렀다
이 마을에 숙박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들이 많이 모여든 데서 연유했다
소덕문 터(西小門址) 빗돌
소덕문은 한양 4소문 중 하나로 한양도성 축조와 함께 1396년 건립되었다
1738년(영조 14) 소덕문의 이름을 고치라 명하였고 1744년(영조 20) 8월 문루가 완성되자 소의문으로 개칭하였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다
중앙일보사 앞쪽에 있다
시위병영 터(侍衛兵營址)
조선 후기에 임금의 호위를 위하여 조직된 시위대의 제1연대 제1대대가 주둔하던 곳이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전투부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1907년 8월 일제 강요에 의해 해산되었다
시위대의 해산은 군인들의 항일시위투쟁이 벌어진 계기가 되었다
KB국민은행 서소문지점 앞에 있다
빌딩 옥상에 한옥이 있어 사진을 만들었다
서소문로에 있다
강서면옥 냉면
냉면으로 점심을 했다
태평관 터(太平館址) 안내판
태평관은 조선 초부터 임진왜란 때까지 명나라 사신이 묵던 곳이다
이곳 앞 큰길 이름 「태평로」는 태평관에서 유래되었다
선혜청 별청 터(지금 신한은행 본사)
조선시대 조달청 격인 선혜청의 별청이 있던 자리다
대한제국군 서울시가 전투지
1907년 대한제국 군인들이 일제의 강제적인 군대 해산에 항거했던 곳이다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데 이어 1907년 8월 1일 군대마저도 강제 해산시켰다
이에 항거하여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자 시위대 군인들이 무장하고 뛰쳐 나왔다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도 호응하여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시위대는 숭례문 성벽 위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일본군에 완강히 저항하였다
그러나 전력에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병영을 점령당하였다
일본군에 밀린 군인들은 각지로 흩어져 의병진에 합류함으로써 의병 전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대문초등학교 옛터 빗돌
1915년 설립된 남대문공립심상소학교가 있던 곳으로 1946년 서울남대문국민학교가 개교되어 1970년까지 국가의 동량을 길러낸 배움의 터다
대한상공회의소 · 서울상공회의소
숭례문 · 롯데손해보험 · 트릴론 빌딩
남지 터(南池址)
연산군 때부터 중종 때까지 정치에 관여했던 조선시대 최고의 간신 김안로가 죽자
성난 군중이 김안로의 집을 부수고 그 터를 못으로 만들었는데 그 못이 남지다
남대문 밖 남지(南池) · 동대문 밖 동지(東池) · 서대문 밖 서지(西池)가 있었다
숭례문 YTN 타워
「YOUR TRUE NETWORK」를 캐치프레이즈로 하는 YTN이 있는 빌딩이다
24시간 뉴스 전문 방송으로 채널도 24번이다
강희맹 집터(지금 순화문화공원)
세조 때 형조판서였던 강희맹은 판결이 밝고 사리가 깊어 당시 옥이 텅텅 빌 정도로 인자하기로 유명했다
그 못지않게 부인 안씨의 명성도 대단했는데 연산군이 아기였을 때 얻은 중병을 치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에 훗날 연산군은 이 집에 있던 노송에 정3품의 품작을 내려 그녀의 공덕을 기렸다 한다
그로 인해 강희맹의 집은 「대부송 집」이라 불렀다. 순화문화공원으로 바뀐 지금도 소나무가 많다
팔홍문 터(八紅門址)
조선시대 이지남(1529~1577)과 그 아들 등 3대에 걸쳐 8명이 충신 · 효자 · 열녀가 된 것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에서 세워준 8개의 문이다
염천교(塩川橋)
이곳에 화약을 제조하는 염초청(焰硝廳)이 있었다고 해서 염초청다리라고 하였고
한자명으로는 염청교(焰廳橋) 혹은 염초청교(焰硝廳橋)라고 썼는데, 음이 변하여 염천교가 되었다
서소문역사공원 순교성지
서소문 밖 네거리로 불렸던 서소문 순교성지는 새남터와 더불어 조선시대 공식 처형장이었다
이곳은 신유박해를 포함하여 기해박해 · 병인박해를 거치며 수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이 가운데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비롯하여 기해박해 순교자 41위와 병인박해 순교자 3위가 1984년 성인반열에 오르셨으며
신유박해 순교자 25위 · 1819년 순교자 2위가 복자로 선포되었다
서소문역사공원 공사 가림막에 있는 글이다
천주교 중림동 약현성당
중림동 약현성당은 본래 1887년 수렛골(지금 순화동)에서 한옥공소로 출발하였다
종약산 · 약현이란 이름은 당시 이곳에 약초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며 설립 당시 순교자 처형지였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지가 내려다보는 언덕에 지었다
또 약현에는 조선시대 3대 현모(賢母)였던 약봉 서성의 어머니가 홀로 아이들을 키운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앞을 못 보는 자신을 받아들여준 남편을 평생 고마워하며 밥을 만들어 팔면서 아들을 키웠다
그녀가 만든 밥은 약현에서 만들어졌다 하여 약밥으로도 불린다 한다
고산자 김정호 약현에 살다
글을 보니 봉래동 · 중림동 · 만리동에 살았었다
염천교 수제화거리
피혁과 구두점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빌딩
서울역 교차로다
서울스퀘어 · 서울역 고가도로
1977년 완공된 대우그룹 빌딩이었다
예전 서울역사를 나오면 처음 보게되던 건물이라 서울의 이미지를 심어준 건물이다
이 건물은 김수근이 설계했는데 이 건물에서 쓰는 전력 사용량이 제주도 전체 전력 사용량보다 많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외국 자본에 넘어가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 앞 사람 다리만 그려져 있는 고가도로는 낡아 철거해야 할 서울역 고가도로를 리모델링해 사람이 다니는 공중 보행길로 재탄생 시키는 중이다
왈우 강우규 의사
조선에 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를 제거하기 위해 서울역에서 나오는 그의 마차에 폭탄을 던져 마차 안에 떨어졌으나 불발탄이었다
이후 은신생활 하던 중 한국인 앞잡이의 고발로 붙잡혀
다음 해 서대문형무소에서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은 있는데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라는
사형집행 직전에 유언을 남기고 순국하셨다
예전 서울역사(사적 제284호)
대한제국기인 1900년, 서대문과 인천의 제물포를 연결하는 경인철도의 남대문역사로 처음 건설되었으며
1925년 르네상스 풍의 절충주의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
복합 문화공간인 「문화역사서울284」로 바뀌었다
지금은 전시 준비중이라라는 안내글만 보이고 문은 닫혀있다
새로만든 서울역사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9.3km, 소요시간 6시간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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