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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고양들메길2코스

고양들메길2코스는 안곡습지공원을 시점으로 고봉산 · 황룡산 둘레길을 걸으며

동족상잔의 아픔을 간직한 금강굴 · 조선 중엽의 문인인 권필의 묘 · 용강서원 · 만경사 · 영천사 등을 돌아보는 길이다

 

 

산들마을대림아파트 버스정류장

시점이다

 

 

 

 

안곡습지공원 입구 솟대

2003년 택지개발로 베어진 70년생 목련나무로 세웠다

안곡습지공원은 고봉산 아래 위치한 생태공원으로 원래는 고봉산습지로 불렸다

아파트 등을 짓는 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놓였을 때 주민들이 힘을 모아 지켜낸 습지다

고양들메길2코스 시점이자 마침점이다

 

 

 

 

고봉산 들머리 갈림길

왼쪽이 영천사 방향 ·  오른쪽이 만경사로 가는 길이다

안곡습지공원에서 하늘마을로를 따라 오르면 생태통로 터널 바로 앞에 있다

 

 

 

 

일산 동구 아파트단지

잠시 오르자 오른쪽으로 보인다

 

 

 

 

고양누리길 안내판 · 리본

 

 

 

 

한구슬과 안장왕 이야기 안내판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로 백제 땅에 살던 한구슬이라는 미녀가 고구려에서 정탐하러온 왕자와 사랑하게 되었으며

백제 관리의 수청을 거절하며 사랑을 기다린 한구슬을 고구려의 왕이 된 왕자(안장왕)이 구출하여 아름다운 사랑을 이룬다는 이야기다

 

 

 

 

고봉산 정상 철탑

고봉(高峰)이란 명칭은 삼국시대 고구려 때부터 쓰였다

이후 고려 ·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일산과 송포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어 왔다

조선 태종 때인 1413년 고양이란 이름이 처음 만들어질 당시 고봉에서 '고'자를 따고 덕양에서 '양'자를 딴 것이다

 

 

 

 

평화의 쉼터

고양동(해피밸리)전투는 1951년 1월 2일부터 1월 3일까지 일어났다

고양리를 통과하는 우군 부대의 철수로를 확보하고 적을 최대한 저지하기 위해 벌인 전투로

1차공격에는 격퇴시켰으나 2 · 3차 공격에 진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적 사살 1,053명의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도 300명의 전사자를 낳았다

 

 

 

 

만경사 · 영천사 갈림길

 

 

 

 

고양 팔현(高陽八賢) 모당 홍이상(慕堂 洪履祥 1549~1615) 선생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安東 豊山)이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선생은 문과에 급제한 후 40여 년간 청요직(淸要職)을 거친 관리로 조선 최고의 강관(講官)이란 평을 받았다

 

 

 

 

만경사

모당 홍이상 선생께서 학문을 닦고 조상을 모시던 원당(願堂)이었으나 지금은 불교 사찰로 사용되고 있다

 

 

 

 

만경사 대웅전

 

 

 

 

대웅전 내부

 

 

 

 

영천사(수연약수터) 안내판

하늘로 오르라 한다

 

 

 

 

수연약수터

오른쪽 지붕이 있는 곳인데 음용불가다

 

 

 

 

진밭

안내판이 없어 확실한 뜻은 모르겠으나 너른 계곡에 논과 밭들이 이어져 있는 곳인데

밭이 길어선지, 아님 질척해서인지 모르겠다

 

 

 

 

북한산

진밭이 택지로 바뀌는 듯하다

 

 

 

 

산불감시초소

철골조만 남았다

 

 

 

 

숲길을 걷는 빅터

 

 

 

 

철펜스

 

 

 

 

고양고봉누리길 안내도

고봉산을 돌고 황룡산으로 가는 곳이다

 

 

 

 

고봉정(高峯亭)

 

 

 

 

고봉산 날머리에서 봤다

 

 

 

 

고봉로와 개미고개 · 숯고개 안내판

고봉로는 고봉누리길에서 만나는 가장 큰 도로로 일산과 파주 봉일천 방향으로 이어진다

고봉로 도로에서 가장 높은 이곳 개미고개는 일산 · 탄현 · 성석 세 마을 분기점으로 개발이전 이 고개가 개미허리 같이 좁고 가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개미고개 서북쪽의 마을이 탄현동(炭峴) 즉 숯고개 마을인데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이 개미고개를 또 다른 이름으로 숯고개라 불렸다고 한다

황룡산과 고봉산 기슭에서 참나무를 베어 숯을 구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통한의 금정굴을 평화의 공원으로 비

황룡산 들머리에 있다

 

 

 

 

금정굴로 오르는 계단이다

 

 

 

 

금정굴 안내문

 

 

 

 

금정굴

우익 치안대 등에 의해 부역 혐의로 연행되어 경찰에 인계되어 조사를 받다가

희생자들의 주거지 인근인 이곳 금정굴로 끌려와 경찰의 조준 사격에 의해 사망하였다

 

 

 

 

금정굴 내부

그 과정에서 희생자들은 부역자 여부나 부역의 정도에 관한 적법한 조사를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굶은 상태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부역자에 대한 불법처리 금지지시를 어긴 경찰에 의해 살해 당하였다

 

 

 

 

금정굴에서 나온 유골

더구나 국가는 이 사건을 진압하고 수습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어느 정도 파악하였음에도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이 있기까지

약 60년이 지나도록 그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지 않았고 오늘에 이르도록 희생자나 그 유족들의 고통을 위자하는 등의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희생자들의 배우자 부모형제 및 자녀들이 당시 느꼈을 비통함이나

그 후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었을 사회적 편견과 경제적 어려움 등 때문에 겪었을 정신적 고통이 상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 2012년 8월 23일 서울고등법원 판결문 중에서 -

 

 

 

 

금정굴 출토물 1 - 죽인자의 것 / 금정굴 출토물 2 - 희생자의 것

 

 

 

 

탄현공원

 

 

 

 

황룡산(134.5m)

고봉산과 함께 고봉누리길의 주요산으로 고양시와 파주시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산 정상에서는 고양 · 파주 · 양주 · 김포 · 강화 · 개성 등이 조망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한다

지금은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 일반인의 출입은 통제되고 있다

 

 

 

 

용강서원 방향안내판

 

 

 

 

고봉산

 

 

 

 

농수로 밑을 지난다

 

 

 

 

용강서원(龍江書院)

고려 말 충신이며 몽고군을 물리친 충정공 박서(朴犀)와 조선 태종 때 충신인 충민공 박순(朴淳)

숙종 · 영조대의 문신인 경헌공 조상경(趙尙絅)을 제향하고 있다

제향일은 봄에 음력 3월 16일, 가을에는 음력 9월 16일에 지내고 있다

 

 

 

 

용강서원(龍江書院)

홍살문 · 묘정비 · 삼문 · 사당 · 고직사 등의 건조물이 남아 있다

용강서원중건묘정비(龍江書院重建廟庭碑)가 옆에 있다

 

 

 

 

용강서원(龍江書院) 사당(祠堂)

 

 

 

  

황룡산에서 나와 권필 묘로 가는 천변길이다

 

 

 

 

권필(權韠) 묘

권필은 조선중기 문인으로서 선조 2년(1569)에 출생하여 광해군 4년(1612)에 사망하였다

송강 정철의 문인(門人)으로 문명(文名)이 높았으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시주(詩酒)로 낙을 삼고 가난하게 살기를 원했는데

문신들의 추천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강화부(江華府)에 갔을 때 많은 유생이 몰려오자 이들을 가르쳤고

이정구(李廷龜)가 대문장가로 알려진 명나라 사신 고준천(顧天俊)을 접반하게 되어 문사를 널리 엄선할 때 재야인사로 뽑힐 정도로 문명(文名)을 떨쳤다

저서로 「석주집(石洲集)」이 있다

 

 

 

 

석주 권필 선생 묘갈명( 石洲 權韠先生 墓碣銘)

선생의 시는 제가(諸家)의 절찬을 받아, 시를 아는 사람은 국조(國朝)의 으뜸으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선생의 시는 시상이 아름답고 정경(情境)의 여운이 뛰어나 읽을 수록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감동이 있다

현실을 풍자한 시들은 예리하고 서늘하여 선비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광해 4년 유명한 궁유시(宮柳詩)로 인해 귀향길에서 세상을 뜨니 이 소식을 듣고 도하원근(都下遠近)이 모두 기운을 잃었다 한다

이윽고 인조가 즉위하자 선생은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로 추증되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고 1719년 비석을 세웠다. 비석 보존을 위해 1982년 10월 10일 비각을 세웠다

 

 

 

 

황룡산에서 다시 고봉산으로 오르다 이동식을 하는 빅터

 

 

 

 

고봉산(208m)

고봉산은 일산 · 벽제지역을 대표하는 주산이다

일명 테미산 · 성산(城山)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고봉이란 이름은 고구려 시대부터 사용되었다

고봉산은 일산지역의 최고봉으로 역사 · 문화 · 지리적으로 중심에 있어 이 일대의 중산(中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산 정상에는 조선시대에 사용된 고봉봉수가 있으나 지금은 군사시설지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은 자유롭지 못하다

 

 

 

 

영천사

 

 

 

 

일산 · 송포지역

고봉산 영천사에서는 일산과 송포지역은 물론 한강과 김포 일대까지 바라 볼 수 있다

산 아래 아파트단지는 중산마을이며 뒤편으로는 원 일산 · 일산신도시 · 송포들판과 대화마을 · 자유로 · 한강으로 이어진다

특히 시야가 좋으면 강화도 마니산도 조망이 가능하여 고봉산의 중요성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일산 · 송포지역

개발 이전, 이 지역은 일산 송포평야의 황금들판을 볼 수 있는 곡창지대로 노을과 함께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1990년대 초 일산신도시 개발을 시작으로 대규모 개발이 이루어져 오늘날과 같은 대도시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틈새바위

계란형의 바위가 절반으로 쪼개져 틈이 있다하여 틈새바위라 불리는데

작은 틈새로 돌을 던져 소나무를 맞히지 않고 틈새로 들어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고봉산 등산로 안내판

 

 

 

 

이무기바위

고봉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위치한 작은 바위다

바위의 정면과 오른쪽에서 보면 이무기의 눈과 입 등 그 모습이 뚜렸하게 보인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봉산을 지키는 여러 바위가 있는데 이중 남서쪽은 이 이무기바위가 담당한다고 한다

용이 못되어 하늘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는 앞으로 1천 년 동안 공덕을 쌓으면 용이 된다고 한다

고봉산 일대에는 이곳 이무기바위 이외에도 붙임바위 · 장사바위 · 두꺼비바위 · 벼락바위 등 여러 바위가 곳곳에 남아 있다

 

 

 

 

헬기장

개발 전 이곳 헬기장에서는 중산마을 주민들이 모여 마을 안녕 · 질병예방 등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안곡습지공원 옆에 있는 공원을 지난다

 

 

 

 

고봉산

안곡습지공원에서 봤다

 

 

 

 

산들마을대림아파트 버스정류장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5.5km, 소요시간 7시간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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