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부 부내면 율목리 지역으로 밤나무가 많아 밤나무골 또는 율목리라 하였다
이곳은 부내면사무소의 소재지이기도 하였으며 개항 당시 부촌(富村)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제는 1914년 행정구역 정리 때 율목리로 계속 부르다가
1936년 제1차 인천부역확장 때 율목정(栗木町)으로 개칭하였고 해방 후 동명을 바꾸어 율목동이 되었다
인천정보산업고교 버스정류장
시점이다
인천정보산업고교(예전 인천고 자리)
1933년 인천고가 자리 잡은 곳이다
인천고는 1971년에 남구 주안동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중앙초교가 설립된다
1995년 중앙초교는 연수동으로 이전하고 인천정보산업고교가 개교한다
율목동주민센터
율목동주민센터 옆 골목 빌라촌이다
율목동에 몇 집 남지 않은 한옥이다
이 한옥도 전체적으로 수리중이다
해광사
1908년 8월 29일 준공된 일본 불교 사찰로 원래의 명칭은 화엄사이다
화엄사 본전은 1994년 해광사 대웅전을 짓기 위해 철거되었고 현재의 명부전은 원래부터 있었다
6 · 25전쟁 때는 인천을 점령한 인민군이 정치보위부를 설치하였고 인민군이 퇴각한 후 미군은 대포를 설치하기도 했다
해광사 대웅전
해광사 시왕전
6 · 25전쟁 전몰장병 유해 40~50기와 일본인 위패도 있다
시왕전 내부
6 · 25전쟁 전몰장병 유해 40~50기와 일본인 위패가 있다
해광사 계단
예전 사이다공장
가림막 뒤 왼쪽 건물이다
예전 창신조 숙소
인천항 하역노동자 조직으로 영신조 · 창신조 · 인신조가 있었다
영신조는 외국배 · 창신조는 국내선 · 인신조는 쌀 하역의 영역의 일을 하였다
*
사진을 만드는데 옆에 서있던 아주머니가 왜 사진을 찍냐고 하신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써있는 글도 좋다 하였더니, 글만 좋으면 뭐하냐고 실천도 못하면서...
헌데 대화를 끝내고 다시 사진을 만드는데 그 아주머니가 그 집으로 들어간다
지계(地界) 담(譚)
해광사 길 건너 골목 입구에 있는 비석인데 무슨 용도로 사용되었던 비석인지는 모르겠다
인천 부윤 관사
전형적인 일본풍의 건물로 1966년 새 인천시장 관사(지금 인천역사자료관)가 세워지기 전까지
인천시장관사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
일본군 무기고
인천부윤관사에서 긴담모퉁이길로 내려가는 길로 신흥초교 내 동산으로 이어져 있는 철문이 보인다
일본군이 총 · 폭탄 등 무기를 저장하기 위해 판 굴로 알려져 있다
긴담모퉁이길
신흥동에서 기독병원을 지나 경동 싸리재로 넘어가는 길이다
이름 그대로 돌담이 길게 놓여진 꼬불꼬불한 실오라기 산길이었다
1907년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던 곳에 학교와 사찰이 들어서자 구릉을 헤치고 축대를 쌓아 신작로를 만들었다
지금의 전동전환국에 주둔해 있던 일본공병대가 공사를 했다
완공 후 화수동 · 송현동 등에 살던 젊은 아낙네들이 신흥동 정미소로 출퇴근 했던 길이다
인천성산교회
월미산 전망대 · 답동성당 · 내리교회
인천성산교회 주차장에서 봤다
응봉산
답동성당 · 내리교회 사이에 있다
인천시립 율목도서관
중국인 오례당(吳禮堂)의 과수원 부지였는데 정미소를 운영하던 일본인 리키다케(力武平八)가 인수하여 자신의 주택과 별장을 지었다
광복 후 미군이 숙소로 사용하고 있던 것을 인수하여 1946년 12월 2일 구 인천지방법원청사에 있던 부립도서관을 옮겨와 시립도서관으로 개관했다
시립도서관은 2008년 10월까지 운영되다가 구월동으로 이전하고 2010년 기존의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2011년 율목도서관이 개관했다
인천광역시 율목어린이도서관
일본인 리키다케(力武平八)의 저택이었다
정원
여러 개의 석등과 석물 등이 일본식 정원의 흔적을 보여준다
신흥동 삼성아파트 · 월미산 전망대
율목도서관에서 봤다
일본인 공동묘지(지금 율목어린이공원)
율목공원에는 원래 일본인들이 9,000여 ㎡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묘지의 상당수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일본군이었다고 한다
1944년 공원으로 바뀌었다
*
이곳 할머니 말씀이 예전 공동묘지였기에 거름이 좋아서 나무를 심은지 몇 년 안되는데 쑥쑥 자란다고 하신다
율목풀장(지금 율목어린이공원)
1972년 6월 22일 개장한 율목풀장 자리다
풀장은 1996년 폐쇄되고 이듬해 다시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문인석
공원 공사를 하던 중 땅속에서 귀와 목이 잘린 문인석 6점이 거꾸로 매장된 채 발견됐다
일제가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저지른 행위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중 3개의 문인석이다
박두성 선생 생가 터 비
맹인 점자 창안자 송암 박두병 선생 생가 터다
한국BBS연맹 인천지부
1964년 BBS경기도(인천)연맹이 조직되었다
1968년 현 율목공원 아래 경기도 청소년회관을 기공해 지금까지 인천연맹사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경아대(景雅臺)
1963년 건립된 국악회관이다
경아대(景雅臺) 현판
동정 박세림(東庭 朴世霖 1924 ~ 1975) 선생 글씨다
인천기독병원
1923년 1년간 인천에 주재했던 감리교 여선교사 코스트럽이 개설한 70여 평 부지에 일반진료소가 생겨났고
1924년에는 아동보건소, 1931년에는 인천부인병원이 개원했다
일제는 1940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선교사들이 철수하자 이곳을 접대부 검진소로 사용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미군이 접수하여 정보기관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여선교사들이 내한하면서 재환원 원칙에 따라 교회에 반환했던 것을 병원으로 사용하였다
전쟁 후 정문에는 「대한감리회인천기독병원」이라는 정식 간판 옆에 「북한피난민연합회진료소」라는 간판도 함께 걸렸었다
마포주물럭집 · 학다방
예전 중구 신포동 · 용동 · 내동 · 인현동 · 시청이 있던 시절의 관동 · 중앙동에는 한 집 건너 다방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다방이 있었다
현재 비교적 옛 시절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영업을 하고 있는 다방이다
동서대약국
인천기독병원 주변은 한 때 인천의 의료타운이라 할 만큼 십수 개의 개인 의원들이 있었다
그 덕에 약국들도 덩달아 문턱이 닳았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사람들과 인근 김포 · 강화 · 옹진 섬 주민들이 시내를 방문한 김에 약을 박스로 사가곤 했다
그 중 대표적인 약국이 동서대약국이다
마포식당
제일빌라
송암 박두병 선생 집 터
맹인들의 세종대왕 송암 박두성이 살던 곳이다
강화 교동에서 태여나 일제강점기에 한글 점자를 창안하고 시각장애인 교육에 평생을 헌신하신 분이다
근업소(勤業所 지금 유치원)
1906년 농상공부 허가 쌀 중개업체인 근업소가 문을 열었다
이 근업소 주변에는 여주 · 이천 등 전국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에 수출하는 역활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돈이 꼬이기 시작했다
쌀장사로 돈을 번 그들은 이 근처에 한옥을 지어 살면서 이 마을은 「밤나무골 새동네」로 불렸다
근업소는 1940년대 말경 폐쇄되었다
항도백화점
1954년 인천고무공업사 장범진 사장이 인천 최초의 백화점을 세웠다
당시로서는 드문 3층짜리 건물에서 진귀한 양품류만 팔았으나 잘 팔리지 않아 1년여 만에 문을 닫았다
광신제면(최초의 쫄면공장)
1960년대 말 인천에 냉면공장이 현대시장과 제물포 그리고 이곳 뿐이어서
주문이 밀려 면발을 뽑는 금형틀을 잘못 끼우는 바람에 나온 굵은 면발이 아까워 공장 옆 분식집에 주었는데
분식집 주인이 다양한 야채와 함께 고추장으로 새콤달콤하게 버무렸는데 그것이 현재의 쫄면이다
삼강설렁탕
1950년 개성에서 피난 내려와 이곳에 정착해 해장국밥을 팔기 시작했다
평양옥과 더불어 국밥류를 파는 음식점으로는 인천에서 제일 오래된 집이다
3대에 걸쳐 영업하고 있다
배다리청과물시장 버스정류장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3.8km, 소요시간 2시간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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