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부평구의 중앙 서쪽에 위치하는 법정동으로 서구 가좌동과의 경계에 원적산(165m)이 있다
구한말 부평군 마장면 산곡리(山谷里)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부천군 부내면 산곡리가 되었다
그 후 1940년 4월 1일 인천부역 2차 확장 때 인천부에 편입되자 인천부윤(人川府尹) 나가이데라오(永井照雄)는
인천 전 지역의 리(里) · 동(洞)을 모두 왜식으로 고쳤는데 이 때 산곡리는 하구바쬬(白馬町)라 개칭하였다
이 하구바죠가 해방이 되자 우리말로 백마정이라 했는데 그 정(町)이 장(場)으로 변음되어 「백마장」이라 불려지게 된 것이다
다만 한말에 마장면은 청천동을 중심으로 효성동까지 토지 무성한 벌판으로 마장뜰이라 불러 왔는데
마장은 목장으로 세종실록에 의하면 경기도에만 26개소의 마장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당시 이전의 국영목장이기에 마장면이란 행정면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희망천입구 버스정류장
시점이다
원통이고개
인천지하철 동수역에서 부평삼거리역에 이르는 길로 인천상륙작전 후 첫 대규모 교전이 일어난 곳이다
인천 상륙 3일째인 9월 17일 아침 6시경, 북한군 보병부대와 인민군 전차 6대는 경인국도를 따라 부평쪽에서 인천 방향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 위 산속에 있는 미 해병대 진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전차 위에서 식사를 하거나 떠들고 웃으며 행군했다
북한군 마지막 전차가 원통이고개를 직각으로 굽은 큰 길을 꺾어 돌려고 하는 순간
미군의 공격으로 전차는 전부 파괴되고 인민군 보병 250명 가운데 200명이 사살되었다
호명사
일제시대 때에 창건된 절로 원통이고개에서 동수역 방향 왼쪽에 있다
인천성동학교
청각 및 언어장애 교육기관으로 1955년 정규순 선생에 의해 설립되었다
유치원과정(0세부터) · 초등학교 · 중 · 고등학교 과정이 개설되어 있다
부평2동 줄사택(미쓰비시 사택)
지금의 부평2동 일대를 「홍중(히로나까)사택」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 부평공원 자리에 홍중(弘中)이란 군수공장이 있었고 종업원 사택이 부평2동에 수십 채 있었기에 그렇게 불렀다
이후 히로나까 공장이 미쓰비시(三菱)로 바뀌면서 사택 이름도 미쓰비시 사택 혹은 삼릉사택으로 바뀌었다
부평2동 줄사택(미쓰비시 사택)
천사요양보호센터
부평2동 줄사택(미쓰비시 사택)
87채의 사택이 줄처럼 늘어서 있는 모양 때문에 흔히 미씨비시 줄사택으로 불렸다
부평2동 줄사택지역 새뜰마을 모임방
남부고가교
오른쪽 부평역 · 왼쪽에 일제강점기 군수공장이 있었던 부평공원이 있다
부평공원
일제 강점기 미쓰비시(三菱)로 바뀐 홍중(弘中)이란 군수공장이 있었던 자리다
그후 1997년 말까지 육군80정비부대가 주둔하였던 터다
1970, 80년대만 해도 전철을 타고 지나가면 거대한 군 막사들과 탱크 등이 목격되었던 곳이다
남부고가교 오른쪽으로 부평역으로 가는 철길이 있다
남부고가교를 내려서면 왼쪽 애스컴 · 오른쪽 다다구미가 있었다
애스컴(ASCOM24)
1939년 설립된 일본육군조병창(造兵廠)이 있었고
일본 항복 후 미 24군단 예하부대 제24군수지원사령부(약칭 애스컴)이 있었던 곳이다
애스컴(ASCOM24)
1939년 일제는 부평벌에 일본육군조병창(造兵廠)을 건설했다
부평 조병창의 월간 생산량은 소총 4천 정 · 총검 2만 정 · 소총탄환 70만 발 · 포탄 3만 발 · 군도 2천 자루 · 차량 200량 등에 달했다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이곳에서는 선박 250척 · 무전기 200조 · 심지어 잠수정가지 만들어 냈다
당시 이곳에는 수천 명을 헤아리는 군인과 군속들이 종사했다
1945년 일본 항복 후 미 24군단 예하부대 제24군수지원사령부(약칭 애스컴)이 접수했다
철길을 따라 걷다보니 콘크리트굄목에 숫자가 써있다
'50 · 10 · 08' 무슨 숫자일까?
애스컴(ASCOM24) GATE 12
부평구청 앞 복개천 공영주차장이다
신트리공원 백마상
이곳에서 잠시 휴식하며 이동식을 했다
신트리공원 축구장
부평 유아원축구대회가 열리고 있다
굴포천
부평구청역 앞이다
부평수출산업공업단지
1969년에 준공된 부평수출공업단지에 50개 업체가 입주하였다
이후 새나라자동차 · 신진자동차를 거쳐 대우자동차와 같은 큰 공장들이 자리를 잡았다
멀리 계양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인천부평경찰서
부평우체국 우편물류센터
백마장사거리
조선 때 말을 먹이던 곳으로 마장 또는 백마장으로 불렸다
또는 일제 때 지명인 하구바쬬(白馬町)가 해방이 되자 우리말로 백마정이라 했는데
그 정(町)이 장(場)으로 변음되어 백마장이라 불려지게 된 것이다
두 개의 설로 논란이 있다
골목길
회락춘
백마장에서 자장면을 판지 60년이 된 중국집이다
백마장 인근에는 한 때 중국인들이 밭 농사와 음식점을 경영하며 많이 거주한 곳이다
골목길
조선주택영단 거리
일제는 일본육군조병창과 조선베아링 등 군수기지에서 일할 노동자들을 위해 1941년 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해 다섯 가지의 표준형 주택을 설계했다
이 중 15~20평 규모의 갑 형과 을 형은 일본인을 위한 단독주택이었고, 6~10평 병 형 이하는 한국인을 위한 집단주택이었다
조선주택영단
집단주택은 말이 주택이지 수용소와 다름 없었다
산곡동 주택은 벽돌로 지은 신사택과 블록으로 지은 구사택으로 구분된다
창문 대문 등이 규격화된 집단주택이 10여 개의 골목에 걸쳐있다
백마극장(지금 왕대박할인마트)
원적산
원적산 · 철마산 생태통로가 있는 길이다
산곡중학교
대강당에선 장애인가족한마당이 열리고 있다
미추홀부대
지금은 이전하고 빈 곳이다. 철마산이 뒤에 있다
화랑로 들머리로 애스컴과 연결된 철로가 있다
화랑농장
일제가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조병창을 만들 때 이곳에 거주하던 스무 남짓 가구의 원주민들을 내쫓으며 사라진 마을이었다
1952년 무의탁 상이군인들이 양계를 하며 개척을 했고 한미재단의 건축 자재 원조와 미 8057부대의 지원으로
1955년 3월에 상이용사들을 위해 115㎡(35평) 대지에 57㎡(18평) 건평의 주택 120동 정도가 세워졌다
나중에는 서울 중량천 철거민들이 옮겨오는 등 또 다른 이주민들이 정착했다
부광고등학교
121미군후송병원(지금 현대아파트 3단지)
부평 신촌(부평3동)
미군부대 영향으로 기지촌 문화가 가장 먼저 자리 잡았던 곳이다
1970년대 초까지 미군기지 정문 앞 대로 변에는 클럽들이 즐비했고 대로 변 뒤쪽에는 양공주라고 불리던 여성들이 거주하던 셋방이 몰려 있었다
신촌 길 건너 현대아파트 버스정류장이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2.1km, 소요시간 4시간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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