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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종주이야기

벌교버스터미널~보성군 조성면

하늘 저편에서 노란 신발을 신고 사뿐히 오시는 봄 각시를 맞으러 남해안 걷기에 나섰다

지난 성탄절 연휴에 걸었으니 약 3개월만이다

 

 

벌교버스공용터미널

제석산 아래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 지붕이 보인다

시점이다

 

 

 

 

회정리교회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 김형오 목사와 신도들의 성력으로 건립된 60평의 석조 예배당이다

소설 태백산맥에서는 서민영이 야학을 열었던 곳으로 그려진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이다

 

 

 

 

소설 태백산맥의 고장 벌교 안내도

 

 

 

 

원조 태백산맥 꼬막 맛집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 방향안내판

 

 

 

 

소화다리

1931년 6월 건립된 철근콘크리트 다리로써 원래 '부용교'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였던 그때가 소화 6년이기도 해서 누가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게 '소화다리'로 더 알려져 있다

이 다리는 여순사건의 회오리로부터 시작해서 6 · 25전쟁의 대격랑이 요동치면서 남긴 우리 민족의 비극과 상처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좌익과 우익이 밀고 밀릴 때마다 이 다리 위에서 총살형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홍교(보물 제304호)

벌교포구를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세 칸의 무지개형 돌다리다

원래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뗏목다리(筏橋)가 있었는데

조선 영조 5년(1729)에 순천 선암사의 승려인 초안과 습성 두 선사가 지금의 홍교를 건립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홍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답다

 

 

 

 

보성 벌교 홍교중수비 군

홍교가 낡고 헐어 다시 고친 내력과 참여자 등을 자세히 기록한 중수비와 단교명비이다

이곳 홍교를 단교라고도 불렀는데 큰물이 나면 다리가 끊어지고 사람의 통행이 끊어진데서 유래되었다

비문은 대부분 마모되어 1737년 · 1844년 · 1899년에 건립한 3기의 중수비만 연대가 밝혀져 있다

 

 

 

 

송광사 벌교포교당 부용사(松廣寺 筏橋布敎堂 芙蓉寺) 입구

 

 

 

 

대웅전 · 심검당

 

 

 

 

민족음악가 채동선(1901~1953) 생가

벌교에서 태여나 순천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지금의 경기고등학교인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이때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에 매료되어 1년 동안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던 중

3 · 1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가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학과와 독일 슈테르센 음악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1929년 귀국하여 4차례의 바이올린독주회를 가졌다

1932년 가곡 '고향'을 발표하였고 1937년 일제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서울 근교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주로 민요 등 민족음악 채보에 힘섰다

작품으로는 고향(그리워, 망향) · 조국 · 독립축전곡 · 개천절 · 한글날 · 3 · 1절 · 진도아리랑 · 도라지타령 등 수많은 곡이 있다

 

 

 

 

부용산 오리길 안내도

왼쪽 계단을 이용해 벌교읍을 휘감고 있는 부용산(192m)에 오를 수 있다

부용산엔 1600년대 낙안군수 임경업 장군이 축성했다는 부용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고향

정지용 작시 · 채동선 작곡이다

 

 

 

 

청년단이 있었던 곳 안내판

원래는 일본식 2층 건물이었다

아래 층은 일본인들 전용이다시피 했던 벌교 유일의 공중목욕탕이었고 2층은 창살과 처마 같은 데가 아주 섬세하게 꾸며진 건물이었다

목욕탕도 폐쇄되고 2층도 사용하지 않아 꽤 낡긴 했지만 1995년 무렵까지 그래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취없이 헐려버리고 말았다

소설에서는 2층에 염상구의 아지트인 청년단이 들어 있었다

 

 

 

 

벌교읍사무소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안내비

조정래와 태백산맥 1 · 2 · 3 · 4부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벌교 금융조합

붉은 벽돌을 바탕으로 하고 그 사이사이에 돌을 깎아 넣어

견고함과 장식적 효과를 동시에 노린 일본인들이 관공서형 건물로 즐겨 지었던 그 모습이다

 

 

 

 

남도여관(등록문화제 제132호)

판자벽에 함석지붕으로 전형적인 일본식으로 지어진 2층 건물이다

일제강점기에 소위 본정통이라고 불렸던 이 길에 이 건물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퍽 다행이다

이 건물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2012년 6월 7일 중건 개관하였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숙박업소 등으로 운영하고 있다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그 시절에도 이 건물은 여관이었고 실제 상호는 '보성여관'이었다

 

 

 

 

대천군수 양시화 송덕비

1901년 극심한 가뭄과 계속되는 흉작으로 굶주림에 시달려 아사지경에 이른 면민을 위하여

집안에 비축한 곡창을 풀어 기민들을 규휼했던 선덕을 기리기 위해 당시 면장을 비롯한 14개 이장들이 사재를 출연하여 세운 송덕비다

 

 

 

 

벌교교차로

척령삼거리부터는 2번국도 옆에 나란히 있는 마을길로 걸었다

 

 

 

 

홍암 나철 선생 기념관 건립터

왼쪽 기념관 건물에서 이동식을 했다

 

 

 

 

나철(1863~1916) 생가

대종교의 창시자이자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한 나철(나인영)이 태여나 자란 곳이다

나철은 을사늑약 소식이 알려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여러 차례 일본에 건너가 국권수호를 위한 외교활동을 벌렸다

그러나 일본과의 교섭의 한계를 느껴 1907년 비밀 결사 '자신회'를 결성하여 을사오적 처단을 주도하다 신안군 지도에 유배되었다

 

 

 

 

일지당(분향소)

나철은 단군신앙을 부흥시켜 1910년 대종교라 일컸고 국학운동과 항일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본사를 만주 화통현 청파호로 옮겨 항일투쟁의 본거지를 마련하였다

1915년 다시 국내로 돌아와 대종교 부흥운동을 지속하다 1916년 9월 12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일제 무단적 종교정책에 항거하여 자결하였다

 

 

 

 

홍암 나철 선생 유적비

선생의 항일 독립운동 정신과 홍익인간정신을 기리기 위해 고향마을 입구에 유적비를 건립하고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가선대부 해주최공득수 신도비

 

 

 

 

벌교 비발디클럽

보성요양병원 앞쪽에 있다

 

 

 

 

임씨부하동정씨효열비

남해고속도로 밑을 지나 열가재소공원에 있다

이곳 평상에서 이동식을 했다

 

 

 

 

의사장흥임공정현사적비

열가재소공원 끝 부분에 있다

 

 

 

 

녹색로

신월삼거리로 내려간다

 

 

 

 

동백나무 가로수

신월삼거리에서 조성로를 따라 걷는다

 

 

 

 

조성면사무소

 

 

 

 

조성역

 

 

 

 

연수문(延壽門)

경로당 복지관과 유도회 교육관이 함께 있다

 

 

 

 

백주원 목욕탕여관

마침점인 숙소에 도착했지만 아직 어둡지 않고 내일은 새벽에 출발할 예정이라 미리 조성면을 돌아봤다

 

 

 

 

동로현 복지센터

조성면은 백제시대 동로현, 통일신라시대에는 군령현이었다

지난 해 11월 28일 준공했다

 

 

 

 

조성파출소

이제 다시 숙소로 간다

 

 

 

 

보성 보라주가 생막걸리 얼씨구

목욕탕 여관이라 편하게 목욕탕에서 씻은 후 저녁식사와 함께했다

 

 

 

 

걸은 거리 16.5km, 소요시간 5시간 56분

총 걸은 거리 344km, 총 소요시간 108시간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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