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의 큰 스승이자 양심적인 지도자였던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1886~1947)의 삶을 올바로 알리고 뜻을 널리 선양하고자 2011년 11월 27일 개관하였다
몽양 여운형 생가
몽양기념관이 아래에 있다
몽양기념관(夢陽紀念館)
여운형 생가가 위에 있다
입장료 천 원이다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연보
유년시절 에피소드 · 광동학교 설립 · 국채보상운동 · 노비해방 · 기독교활동 안내판
어머니 이씨가 치마폭에 태양을 받는 태몽을 꾸었다 하여 훗날 몽양(夢陽)이라 호를 지었다 한다
몽양 상 포토존
몽양은 태여날 때부터 강건한 편이어서 어머니가 위독할 때는
고향인 묘곡에서 약 36km나 되는 서울 광교까지 단숨에 달려갔다가 한약을 지어 당일로 되돌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공립 인성소학교 교장 시절 김인옥 학생에게 준 졸업증서
여운형은 시국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없이 의(義) 하나만으로 의병활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연못에 가서 고기를 탐내는 것은 물러가서 그물을 뜨는 것만 같이 못하다〉는 옛말을 좇아 청년들을 계몽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사랑방에 인근 청년들을 모아놓고 지리 · 역사 · 산술 등 이른바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1907년 고향 마을 양평에 〈광동학교〉를 설립하였다
1919년 11월 27일 오후3시 도쿄제국호텔 연설
3 · 1운동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그 배후 핵심인물인 몽양을 회유하기 위해 같은 해 11월 도쿄로 불러 들인다
하지만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밝힌 몽양 여운영의 웅변을 듣고 감동한 일본사람들의 박수갈채가 끊이질 않았다 한다
몽양의 수인과 수형기록표
여운형 선생에 대한 판결문
스포츠맨으로써의 여운영선생 근영(48세)
평소 스포츠를 통해 청년들의 전투정신을 고취 · 독립운동을 도모하려했던 몽양은
1934년 출간된 「현대철봉운동법」에 철봉훈련으로 단련된 자신의 맨몸을 공개했다
「장래의 조선은 청년의 조선이다」며 청년들의 기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몽양은
권세나 돈이 있는 사람은 두렵지 않아도 청년들을 보면 두려웠다고 한다
혹시 자신이 나쁜 본이라도 보일까 조심했던 것이다
영상관
좌우합작위원회 기념촬영
미소공동위원회
그 외 많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조선건국동맹 성명서
여운형 투쟁사 / 1946년
장례식 만장
1947년 8월 3일, 최초의 인민장으로 치러진 여운형선생의 만장이다
장례식 만장
약 100여 장의 만장이 전해진다
몽양의 피격지점 약도 · 서거 당시 입고 있던 피 묻은 옷
약도 위에 있는 것은 옷에서 나온 수첩과 은단이다
건국훈장 1급
자기 세력의 증식보다는 대의를 앞세웠던 몽양
그래서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고 결국 몰락해 이제야 복권되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졸업반 학생들과 함께한 사진 / 1936년도
몽양 여운형선생 생가 비문
몽양 여운형선생 생가
생가 안채
몽양 가족사진
생가 마루에 걸려있다
방에 앉아 면도하고 있는 몽양의 모습이 보인다
□형 가옥의 바같채
디딜방아
영회암(永懷庵)
방 위에 편액이 붙어있다
몽양 어록길
신원역으로 가는 길로 몽양 생가만 방문하는 사람에겐 신원역이 입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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