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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최용신기념관

상록수공원에 위치한 최용신 기념관은
일제시대 농촌계몽운동가이자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최용신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최용신은 1931년부터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당시 화성군 샘골)에 「샘골학원」을 세우고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에 전념하다 26세에 요절한 애국지사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최용신이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설립한 루씨유아원과 천곡교회 · 최용신 묘소 등이 향토유적 제18호로 관리되고 있다

 

 

최용신 이야기 속을 거닐다(이끎)
상록수역에서 기념관으로 걷다보면 4기(만남 · 이끔 · 향함 · 안김)의 최용신 거리 조형물을 만나게 된다

 

 

 

 

최용신기념관
2층처럼 보이지만 뒤에서 보면 지하층과 지상층이다

 

 

 

 

최용신(崔容信 1909, 8, 12~1935, 1, 23)
1928년 함남 원산의 루씨여고보(樓氏女高普)를 졸업하고 협성여자신학교(協成女子神學校)에 재학하면서
조선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는 생각에서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9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회 때 협성학생기독교청년회의 대표로 본격적인 YWCA의 농촌계몽사업에 참가하였다
1929년에는 황해도 수안(遂安)과 강원도 포항에 파견되어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1931년 10월 YWCA 파견교사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샘골(泉谷)에 파견되었다
그는 예배당을 빌려 한글 · 산술 · 재봉 · 수예 · 가사 · 노래공부 · 성경공부 등의 학습을 시작하였다
헌신적 노력이 현지 주민의 이해를 얻어내 어려운 중에도 학원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YWCA와 현지 유지의 기금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32년 5월 정식으로 강습소 인가를 받았으며 동년 8월에는 천곡학원(泉谷學院) 건축발기회를 조직하고
그곳 유지와 YWCA의 보조로 학원 건축을 시작하여 1933년 1월 15일 낙성식을 하였다
그러나 1934년부터 YWCA의 보조금이 끊어지고 학원의 운영이 어려워지자 다방 면의 노력을 강구하던 중 지나친 과로로 사망하게 되었다
그의 농촌을 살리기 위한 눈물겨운 행적은 심훈(沈熏)의 소설 「상록수(常綠樹)」에서 실제화 되어 농촌운동의 귀감이 되었다
*
최용신기념관 입구 벽에 붙어 있다

 

 

 

 

제1전시공간

 

 

 

 

최용신 선생의 일생
제1전시공간 왼쪽 벽에 있다

 

 

 

 

샘골강습소를 도운 사람들 / 1934년 이후
제1전시공간 오른쪽 벽에 있다

 

 

 

 

샘골강습소 축소모형
제1전시공간 입구 가운데에 있다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樓氏女子高等普通學校) · 협성여자신학교(協成女子神學校)
1928년 함남 원산의 루씨여고보를 졸업하고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
1903년에 설립된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는 원산을 대표하는 여성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고
협성여자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는 1928년 최용신의 입학 당시 여성만의 교육기관이였으나
1929년 남녀신학교 임시 통합 운영계획에 따라 운영되다가 1931년 공식적인 남녀공학으로 통합되었다
스승인 황애덕은 3 · 1혁명 당시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룬 애국자였다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
최영신은 샘골활동을 농촌운동의 도화선으로 만들기 위해서 지식과 구상이 필요했다
1934년 3월 최용신은 도일하여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청강생으로 입학하였다
유학 중 교내 잡지 「푸른하늘」에 투고한 「나의 소감」에는 부녀자 · 어린이 · 농민 등 사회적인 약자를 위해 살고자 하는 희망찬 계획을 썼다
그러나 유학 중 걸린 각기병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귀국 후 샘골로 돌아와 농촌계몽운동의 실천에 몸과 마음을 바쳤다

 

 

 

 

제2전시공간
등잔 ·· 인두 ·· 자 그리고 무궁화로 그린 지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
샘골강습소 벽면에는 최용신 선생님이 학창시절에 놓은 무궁화 자수가 걸려있었고 샘골 아이들은 무궁화로 만든 배지를 모자에 달고 다녔다고 한다

 

 

 

 

조선도별현세지도 경기도(朝鮮道別現勢地圖 京畿道)
일제시대 당시 경기도의 지역의 인구 · 경제활동 · 남녀비율 · 연령 등의 각종 통계자료들이 지도와 함께 나와 있다
왼편의 몸이 길쭉하고 빨간 안대를 한 사람은 문맹률을 뜻한다
남자는 약 40% · 여자는 4분의 3인 · 75%가 문맹이었다

 

 

 

 

제3전시공간
1930년대 샘골 · 샘골강습소 운영 · 어린이 잔치 · 샘골강습소 증축 등의 안내문이 있다

 

 

 

 

1930년대 샘골

 

 

 

 

샘골강습소 증축

 

 

 

 

농촌계몽운동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1
식민지 수탈에 의해 피폐된 농촌사회의 부흥을 위해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이다
1929년 조선여자청년회연합회 총회 때 협성학교기독교청년회의 대표로 본격적인 농촌계몽사업에 참가하였다
1929년에는 황해도 수안과 강원도 포항에 파견되어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2
1931년 10월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사리 샘골에 도착해 한글 · 산술 · 재봉 · 수예 · 가사 · 노래공부 · 성경공부 등의 학습을 시작하였다
1932년 5월 정식으로 학습소 인가를 받았으며 8월에는 천곡학원 건축발기회를 조직하고 학원 건축을 시작하여

1933년 1월 15일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제4전시공간
심훈의 「상록수」 초판본(1936년) · 영화 「상록수」
새로운 농사지식 · 최용신양의 생애 · 새 역사를 위하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수원군하의 선각자 무산아동의 자모 최용신 · 심훈의 「직녀성」 기사가 있다

 

 

 

 

심훈의 연재소설 「상록수」 1회

 

 

 

 

심훈의 「상록수」 초판본(1936년) · 영화 「상록수」

 

 

 

 

천곡강습소 제2회졸업기념 1935. 3. 20

 

 

 

 

옛날의 천곡을 추억하면서

 

 

 

 

최용신과 샘곡강습소 아이들

 

 

 

 

함께한 사람들

최한익(최용신 제자) · 홍찬의(최용신과 함께 활동)

 

 

 

 

김교신 일기
...참으로 산자는 단 하루를 살았어도 영생한 것이다

 

 

 

 

영원한 샘
...겸손과 헌신적인 노력은 점차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 · ·

샘골 주민들은 최용신의 삶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자신감을 회복하였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늘 푸른 나무
최용신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안산을 중심으로 애국심을 심어주는 교육운동을 했다

 

 

 

 

샘골(泉谷)강습소 교가
독립군가 음에 최용신 선생이 작사한 교가
어린아이들이 오면 한 번 불러야 간다시며
군인처럼 씩씩하게 부르시는 문화해설사님

 

 

 

 

영상실

 

 

 

 

최용신 선생 유훈 비 · 심훈 문학기념비
최용신기념관 앞마당에 있다

 

 

 

 

최용신기념관
성탄절에 찍은 샘골학원 사진이 벽에 걸려있다

 

 

 

 

심훈의 문학기념비
그녀가 숨지던 해 영화인이자 시인이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역활을 담당했던 한 작가가 한 달음에 달려와 그 소식을 세상에 알렸다
그가 바로 「상록수」를 세상에 알린 항일 지식인「심훈」이다

 

 

 

 

최용신 선생의 4가지 유훈 빗돌

 

 

 

 

샘골강습소 주춧돌 · 최용신 나무
1933년 1월 샘골강습소 낙성식 기념 사진

 

 

 

 

샘골강습소 주춧돌 · 최용신 나무
최용신 선생님이 샘골강습소를 세울 당시 심은 향나무 5그루와
1933년 최용신 선생이 샘골 주민과 건립한 샘골강습소의 주춧돌 20개 중 15기가 보존되고 있다
뒤에 보이는 교회가 최용신이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설립한 「천곡교회」다

 

 

 

 

최용신과 약혼자 김학준의 묘
최용신이 어려서 약혼을 하였으나 계몽운동에 전념하고자 10년 후 결혼하자고 약속하였는데
약속을 얼마 남기지 않고 각기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 후 김학준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였으나, 최용신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최용신의 묘
학교가 잘 보이고 종소리가 들리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일리공동묘지(지금 일동 818번지 일원)에 묻혔다가 그곳이 개발되는 바람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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