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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충청수영성(오천성)

오천항(鰲川港)은 백제 때에는 중국 · 일본과 교역하던 항구로서 회이포(回伊浦)로 알려졌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당나라와의 교역 창구로 이용되었고
고려에 접어들면서 왜구의 침몰이 잦아지자 수군이 주둔할 수 있도록
천수만이 열리는 지점부터 먼 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오천성」을 쌓게 되었다
서해의 중간 지점인데다 외부가 섬으로 둘러싸여 있고 수심이 깊어 군선의 항해가 용이해 조선시대에는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
*
국내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수영 중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고 있다
충청수영은 1466년 설치됐으며, 중종 4년(1509) 수군절도사 이장생이 축성한 이후 고종 33년(1896) 근대 해군 창설로 폐영할 때까지 운영되어 왔다
성의 규모는 군선 142척 · 수군 8,414명 · 성곽 둘레 1,650m로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고 조운선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1973년 12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9호 · 2009년 8월 24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501호로 지정됐다

 

 

 

망화문(望華門)
충청수영성 서문으로 축성 당시에는 사방에 4대 성문과 소서문(小西門)이 있었다

 

 

 

 

망화문(望華門) 왼쪽 · 서쪽 성곽이다

 

 

 

 

망화문
성안에서 봤다

 

 

 

 

망화문
오른쪽 계단으로 오르면 진휼청이 보인다

 

 

 

 

진휼청(賑恤廳)
진휼청 · 장교청 · 공해관을 묶어서 「오천관아」라는 명칭으로 1991년 12월 3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제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장교청이 객사 건물이기 때문에 오천관아라는 명칭은 잘못된 것이다

 

 

 

 

진휼청
조선시대 충청수영 안에는 영보정 · 능허각 · 공해관 · 운주헌 · 비장청 등 16개의 건물이 있었는데
1895년 폐영과 함께 모두 소실되고 객사 · 공해관 삼문 · 진휼청만 남았다
진휼청은 흉년에 빈민 구제를 담당하던 곳이다

 

 

 

 

진휼청(賑恤廳) 편액

 

 

 

 

오천항
안면도 · 효자도 방향 물길이다
오천성 성곽 위에서 봤다

 

 

 

 

오천항
오천성 성곽 위에서 본 안면도 · 효자도 방향이다

 

 

 

 

보령방조제

오른쪽이 광천으로 가는 물길인데 지금은 보령방조제로 막혀 있다
오천성에서 봤다

 

 

 

 

봉사로 나라사랑
오천면 새마을협의회에서 세운 빗돌이다

 

 

 

 

소성마을의 역사비
진휼청에서 객사로 건너가는 도로 옆에 있다

 

 

 

 

충청수영객사 운수헌(運壽軒) / 지방유형문화재 제136호 · 공해관 삼문
가로공원 도로 건너편에 있다

 

 

 

 

오천성 공덕불망비군(功德不忘碑群)
객사 앞마당에 역대 충청수영절도사들의 공덕비가 있다

 

 

 

 

영세불망비군(永世不忘碑群)
오른쪽 두 번째가 「수군절도사 김공수청덕선정영세불망비」다

 

 

 

 

공해관 삼문(控海館 三門)
수군절도사가 집무하던 공해관 삼문으로 원래 객사와는 별도 건물인데 한자리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장교청(將校廳 · 객사)
수군절도사가 왕을 상징하는 전(殿)자를 새긴 패(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禮)를 올렸으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오천초등학교 자리에서 옮겨왔다

 

 

 

 

건너가 천북이다
객사에서 오천항으로 가는 길이다

 

 

 

 

진휼청
오천항으로 가며 본 뒷쪽이다

 

 

 

 

오천항 키조개
오천항은 전국 키조개 생산의 60~70%가 난다
곡식을 까불어 돌이나 쭉정이 같은 것을 골라내는 키를 닮았다고 키조개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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