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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한국중앙박물관 기증관 기증2실

한국중앙박물관 기증관 기증 2실 / 문화유산 지킴이와 기증

우리나라는 20세기 들어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큰 혼란을 겪으면서 많은 문화유산이 훼손되고 국외로 빠져나갔다

이러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잃어버릴 뻔한 문화유산을 수집하며 지켜낸 분들이 계셨다

대대손손 정성스레 간직하던 문중의 보물을 보전하고, 국외로 나간 문화유산을 되찾기 위해 애쓴 분들도 계셨다

이처럼 문화유산을 몸소 지켜낸 많은 분들의 노력은 기증으로 이어져 그 소중한 뜻이 박물관에서 더욱 나고 있다

 

 

불감 · 관음보살 / 고려 말 조선 초 14~15세기 · 금동, 은도금

이 불감과 보살상은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전시된 기록이 있으나 이후 일본으로 유출되어 공개되지 않다가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회 젊은 친구들」이 되찾아 박물관에 기증했다

불감은 불상과 함께 제작하여 사찰 이외의 장소에서 예불할 때 사용하거나, 탑을 세우면서 안에 봉안하기도 한다

이 불감의 윗 부분은 지붕형태가 아닌 납작한 모양으로, 윗면에 고리 2개가 달려 있다

문 안쪽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새겼고, 내부 정면에는 본존불과 협시보살이 제자와 팔부중에 둘러싸인 장면을 표현하였다

관음보살상은 연꽃이 맞붙은 형태의 대좌 · 한쪽 다리를 세운 윤왕자(輪王座)의 자세 · 원반형 귀걸이 등에서

중국 원 · 명대 불상의 영향을 받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제작된 불상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이 불감과 불상은 하나의 세트로 제작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양식이 유사한 점에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월관음도 / 고려 14세기 · 비단에 색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는 전 세계에 46점 정도만 남아 있고, 그 가운데 5점만이 국내 사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콜마홀딩스 윤동한 회장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월관음도가 없다는 것을 알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할 목적으로 일본에 유출되었던 수월관음도를 구입하여 국가에 기증하였다

윤동한 회장의 기증은 국가가 아닌 개인이 국외 소재 중요 문화유산을 환수하여 기증했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높다

*

수월관음도는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이 머무는 보타락가산을 방문하여 지혜를 구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700여 년의 세월을 견뎌내며 일부 손상된 부분이 있으나, 관음보살과 선재동자의 전체 모습이 원형에 가깝게 잘 유지되어 있다

관음보살은 바위 위에 앉아 있고, 선재동자는 왼쪽 아래에 손을 모아 합장한 채 관음보살을 바라보고 있다

부드러운 선묘로 표현한 관음보살의 자비로운 얼굴과 선재동자의 천진한 표정은 이 수월관음도의 백미이다

 

 

 

 

장화(政和) 8년이 새겨진 향로 / 고려 1118년

이 향로는 삼족(三足)이 달린 몸체와 몸체를 엎어놓은 형태의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다

뚜껑에 연기 배출 구멍이 투각되어 있고, 다리 위쪽은 도철문(饕餮文)이 표현되어 있다

몸체 바닥에는 정화8년(1118 · 예종 13)에 제작했다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부처 / 조선 후기 ·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며, 가부좌한 다리 위로 두 손을 내린 독특한 손갖춤을 하고 있다

바닥의 둥근 복장(腹藏) 구멍에서 「금강경」과 「대불정수능엄신주」 일부가 나왔다

 

 

 

 

관음보살 / 고려 말 조선 초 14~15세기 · 금동

미국인 퍼트리샤 슈밋이 기증한 불상이다. 기증자의 남편 챨스 슈밋은 한국전쟁 참전 군인이었다

그는 철원 부근에서 만난 한 스님의 부탁으로 관음보살상을 맡아 보관해오다 미국으로 가져갔고

죽음을 앞두고 한국으로 돌려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불상은 부처가 새겨진 보관을 쓴 관음보살로, 가부좌한 자세에 양손은 포개어 아래로 내려 선정인의 손갖춤을 하고 있다

입가에 옅은 미소에서 관음보살의 자비심이 느껴지는 듯하다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 한국문화유산기금으로 되찾은 우리 문화유산

미국 스미소니언자연사박물관은 총 93점의 우리 문화유산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그 중심에는 스미소니언자연사박물관 큐레이터 조창수(1925~2009)와 한국문화유산기금이 있었다

조창수 선생은 미국인이 소장하고 있던 우리나라 문화유산이 경매될 처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소장자를 찾아가 설득하는 한편 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재미교포 모금운동을 벌렸다

우리 문화유산을 되찾고자 한마음이 된 이들의 노력으로 명성황후 · 고종 · 순종 어보와

철인왕후 옥책 · 순종 국책 등 구한말 궁중 문화유산을 포함한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

자수 화초길상문 병풍 / 조선 1880년대 · 비단에 수

고종이 의료 선교사이자 제중원 원장을 역임한 미국인 존 윌리엄 헤론(1856~1978)에게 하사한 자수병풍이다

그의 자녀인 제시 엘리자베스 캐롤(1888~1978)이 부친의 유지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붉은 비단에 수놓은 미릿병풍으로, 각 폭에 열여섯 글자의 축원문과 초화무늬를 번갈아 배치하였다

매화 · 모란 · 패랭이 · 수선화 · 금낭화 등 다양한 화초가 등장하며 화분의 모양을 서로 다르게 표현하여 화려함을 더하였다

축원문은 왕실의 융성과 태평성대의 도래를 꿈꾸는 내용이다

 

 

 

 

철종비 철인왕후 추존존호 옥팩 / 대한제국 1908년 · 대리석

철인왕후(1837~1878)에게 장황후(章皇后)의 시호를 올리는 책문이 수록된 옥책이다

1908년 순종황제는 조선 제25대 왕 철종의 존호를 장황재(章皇帝)로 높이면서 왕비 철인왕후도 장황후로 정했다

 

 

 

 

명성황후 옥보 / 1921년 · 옥

1921년 3월 9일 명성황후(1851~1895)에게 「제휘열목(齊徽烈穆)」이라는 존호를 더하면서 올린 옥보이다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보(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侯寶)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효자 · 원성 · 정화 · 합천 · 홍공 · 성덕은 1872년 · 1888년 · 1890년 · 1892년 · 1900년 · 1901년에 받은 존호이며, 명성은 1897년에 올린 시호이다

태황후는 1907년에 올린 황후의 호칭이다

 

 

 

 

순종 왕세자책봉 교명 / 조선 1875년 · 비단의 먹

1875년 고종(재위 1863~1907)이 척(拓 훗날 순종)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내린 교명이다

비단 두루마리에 글이 적혀 있으며 처음과 말미에는 각각 용 두 마리가 그려져 있고

문서 마지막에는 어보(御寶)가 찍혀 있다

 

 

 

 

안중근 글씨 / 대한제국 1910년 · 종이에 먹

안중근(1879~1910)이 뤼순(旅順) 감옥에서 쓴 글씨이다

"재주가 서투른 목수는 아름드리나무나 진기한 나무를 잘 다루지 못한다(庸工難用 連抱奇材)는 뜻으로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인재를 기용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글씨는 순국하기 직전인 1910년 3월 경에 쓴 것으로 약지가 잘린 안중근의 왼손바닥 도장이 찍혀 있다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쓴 유묵들은 1972년에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다

대부분 검찰관 ·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인데, 그 글씨 중 하나로 1966년에 일본인 니시가와 다마노스케가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관안(官案) / 조선 19세기 · 종이에 먹

일본인 세이 아키히로가 기증한 관안으로, 관청의 직함과 관원들의 명단을 수록한 책자이다

여기에는 전의감(典醫監) · 내의원(內醫院) · 외국으로 약을 구하러 가는 사신 등 주로 왕의 건강과 직접 관련된 관원의 명단이 앞뒷면에 수록되어 있다

직함만 나와 있을 뿐 이름은 없어, 만들어두고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 때 작성된 것으로, 당시 궁궐과 관청의 조직 및 운영 등을 알려준다

 

 

 

 

농상공부 직원 명단을 적은 소책자 / 조선 19세기 말 · 종이에 먹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인 스킵 컬리가 기증한 재한제국 농상공부 직원 명단을 적은 소책자이다

농상공부 대신인 이종건을 비롯하여 철도국과 우체사의 각 지국(支局) · 사(司) 등의 명칭을 기록하였고, 직원 명단은 다른 종이에 써서 붙였다

농산공부 대신 이종건 · 농상공부 협판 이근호의 재임기간을 통해 1899년(광무 3) 12월부터 1900년(광무 4) 1월 경에 작성된 것을 알 수 있다

 

 

 

 

평산신씨세보(平山申氏世譜) / 조선 1780년 · 종이에 먹

문중에서 지킨 문화유산

가보(家寶)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귀중한 보물이라는 뜻이다

보물은 개인뿐만 아니라 집안의 역사와 문화까지 담고 있다

문중(門中)을 중심으로 가문의 역사를 대대손손 이어 나가기 위해 가보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키려 했고

그러한 정성 덕분에 많은 문화유산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선대에 공부하던 책 · 조정에서 내린 교지 · 무덤에서 나온 도자기와 명기 등 종류도 다양하고, 각자가 품고 있는 이야기도 다르다

가문의 여러 사람들이 뜻을 모아 지킨 문중의 문화유산을 만난다

*

평산신씨의 가계(家系)를 모은 책으로, 1780년(정조 4)에 간행되었다

병자보(丙子譜 1636년) · 임오보(壬午譜 1702년)에 이은 평산신씨의 세 번째 족보이다

 

 

 

 

평산신씨계보(平山申氏系譜) / 조선 1873년 · 종이에 먹

평산신씨의 가문의 족보로 1873년(정조 4)에 간행되었다. 26권 15책의 완질본이다

1책에는 서문 · 발문 · 범례 · 서발 · 사적 · 묘도(墓圖) · 계보를 수록하였다

서문은 조선 후기에 활약한 무관 신헌(1810~1884)이 작성했다

2책에는 언행록 · 산도(山圖) · 범례 · 희공파(僖公派) 계보 · 3~4책은 밀직공파(密直公派) · 6책은 봉상윤공파(奉常尹公派)

장합공파(掌合公派) · 현령공파(縣令公派) · 7~15책은 문희공파(文僖公派) 계보로 구성하였다

 

 

 

 

윤상정 산 송소장(尹相定山訟訴狀) / 조선 1860년 · 종이에 먹

1860년(철종 11) 윤상정이 은진성주(恩津城主)에게 올린 문서로 선산의 소송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은진성주의 처분이 앞뒷면에 적혀 있다

 

 

 

 

윤상정 교지 / 조선 1874년 · 종이에 먹

1874년(고종 11) 5월 2일 윤상정(1827~1875)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하는 교지이다

윤상정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1852년(철종 3) 무과 병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라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윤상은 성적호구장 / 조선 1787년 · 종이에 먹

1789년 함평현에서 해제면 외익매리에 거주하던 윤상은에게 발급한 준호구(准戶口)이다

가선대부 윤상은과 처 이씨의 4대조(부(父 · 조(祖) · 증조(曾祖) · 외조(外祖) 등이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다

문서 왼편에 관인(官印) · 검인(檢印) 및 행현감(行縣監)의 수결이 있다

 

 

 

 

백자 청화 숙인 해평윤씨 묘지(白磁靑畵海平尹氏墓誌) / 조선 1749년

묘지의 주인공은 인천부사 이성곤(1655~1726)의 처 숙인 해평윤씨이다

묘지명에 의하면 숙인 해평윤씨는 윤두수의 5세손으로 16세에 이성곤과 혼인했다

1716년(숙종 42)에 세상을 떠난 후에 황해도 금천군 도리촌에 이성곤의 묘와 합장했다

이성곤의 묘지는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예조입안(禮曹立案) / 조선 1853년 · 종이에 먹

병자호란 때 순절한 상주 이언진을 정려(旌閭)하는 내용의 입안이다

상주 유생들이 임금에게 직접 상언(上言)을 올려 이언진을 포상할 것을 요청하엿다

이에 대해 예조에서 이언진을 증직하고 충신 정려를 세워주며 아울러 자손들에게 부역을 감해주는 혜택을 내린다는 내용이다

첫 줄에 문서 제목이 있고, 마지막에는 판서의 수결과 이 문서를 작성한 예조의 관직명이 있다

 

 

 

 

상서(上書) / 조선 1832년 · 종이에 먹

1832년(순조 32)에 개국공신 오사충(吳思忠 1327~1406)의 후손들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사당을 초계현에서 무장현으로 옮겨 고쳐 지으면서 충훈부에 올린 상서이다

문서 끝에는 충훈부 책임자의 처분이 쓰여 있다

 

 

 

 

오시복 교지 / 조선 1692년 · 종이에 먹

1692년(숙종 18) 6월 3일 오시복(1637~1716)을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 동지경연사로 임명하는 교지이다

오시복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숙종 때 이조참판 · 개성유수를 거쳐 강릉부사 · 호조판서를 지냈다

 

 

 

 

상서(上書) / 조선 1806년 · 종이에 먹

진사 이흥숙을 비롯한 충청도 유림들이 1806년(순조 6) 12월 충청도 예산에 살았던 김수오란 사람이 죽은 후

그의 효행을 나라에서 정려해 줄 것을 청하며 올린 상서이다

문서의 여백에는 이 상서를 보고받은 충청도관찰사가 정려를 위한 조사를 할 것이라는 내용의 처분과 수결이 있다

 

 

 

 

권경로 교지 / 조선 1457년 · 종이에 먹

1457년(세조 3) 9월 19일 권경로를 의흥위후부사(義興衛後部司直)으로 임명하는 임명장이다

붉은 색 글자에 사각 도장의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문서로서 의미가 크다

 

 

 

 

조서경 무과급제 왕지(趙瑞卿武科紅牌) / 조선 1435년 · 종이에 먹

1435년(세종 17) 4월에 왕이 조서경에게 성적과 등급 · 이름을 길고하여 내린 무과급제를 증명하는 홍패왕지이다

「왕지(王旨)」라는 문구로 시작하여 모두 6행에 걸쳐 초서로 썼고

마지막 행에는 문서를 발급한 연월일과 「국왕신보(國王信寶)」라는 국새를 찍었다

왕지는 1442년(세종 24)에 교지로 명칭이 바뀌면서 국새도 바뀐다

이 홍패는 조선 전기 관제 및 과거제도를 연구하고 국새 사용의 변천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희발 시호교지 / 조선 1872년 · 종이에 먹

이희발(1768~1849)에게 「희정공(僖靖公)」의 시호를 내리는 교지이다

이희발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자는 우문(又文) · 호는 운곡(雲谷)이다

1795년(정조 19)에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있으면서 군사력 강화에 힘썼고 언로(言路) 개방도 주장하였다

1849년에 형조판서에 올랐으나 병환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황해도 관찰사 부임 / 조선 1580년 · 비단에 색 · 작가 미상

해평윤씨 종가에 전해진 그림으로 1571년(선조 4) 오음 윤두수가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던 날의 광경을 묘사하였다

아랫 부분에는 관찰사 부임 행렬이 있고, 그림 상단의 제목은 윤두수의 동생 윤근수(1537~1616)가 썼고

그림 오른 편에는 1581년 윤두수가 지은 시가 적혀 있다

이 그림은 16세기 황해도 감영 및 관찰사 부임 행렬의 전모를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윤두수가 쓴 편지 / 조선 16세기 · 비단에 색

윤두수가 쓴 편지를 모은 것이다

햅쌀과 산마를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 · 아들에게 보내는 안부 · 정철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글이다

제일 오른쪽은 윤두수의 9대손이 윤두수의 생몰년 · 관직 등의 일생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이항복 호성공신 초상 / 조선 18세기 중반 · 비단에 색

이항복의 49세 때 모습으로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교서와 함께 받은 초상화를 후대에 옮겨 그린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초상화는 후손들이 귀하게 보존하다가 낡으면 이를 옮겨 그리는 전통이 있다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단령(團領)을 입은 관복 차림으로 흉배의 공작 문양과 서대(犀帶 코뿔소 뿔 장식 허리띠)는 문관 1품의 지위를 나타낸다

음영을 넣어 얼굴을 입체적으로 그림 수첩은 초상화를 옮겨 그린 18세기의 화풍이 가미된 것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보여준다

 

 

 

 

이항복이 쓴 제례에 대한 글 / 조선 17세기 · 종이에 먹

중국 고대의 예학(禮學)을 집성한 「예기(禮記)」에서 제사에 관련된 글을 뽑아 쓴 것이다

이항복 만년의 글씨로, 글씨의 골격이 뚜렸하면서도 날렵한 서풍이 돋보인다

이항복은 옛 경전에서 뽑은 글을 병풍으로 만들어 후손들이 평소에 익히도록 하였는데

이 서첩은 이항복의 9대손 이유원(1814~1888)이 병풍에서 글씨를 오려 꾸민 것으로 추정된다

 

 

 

 

이항복이 쓴 천자문 / 조선 1607년 · 종이에 먹

이항복이 여섯 살 손자 시중(時中 1602~1657)을 위해 쓴 천자문으로, 붓으로 쓴 천자문 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해서로 한 글자씩 공들여 쓴 글씨는 골격이 굳세고 획이 날렵하다

한자 아래에 한글로 쓴 음과 뜻은 누가 쓴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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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뒷장에는 손자에게 당부하는 말을 썼다

丁未首夏, 書與孫兒時中. 五十老人, 揮汗忍苦, 毋擲牝以孤是意(정미수하, 서흥손아시중. 오십노인, 휘한인고, 모척빈이고시의)

정미년(1607) 4월에 손자 시중에게 써준다

오십 먹은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뤄서 이 노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거라

 

 

 

 

이항복을 호성공신으로 삼는 교서 / 조선 1604년 · 종이에 먹 · 한호 씀

임진왜란 때 선조(재위 1567~1608)를 의주까지 모신 공로를 기려 이항복을 호성공신 1등으로 삼는다는 국왕의 문서이다

글씨는 당대의 명필 한호가 썼다

선조의 피란 때 이항복은 도승지로서 국왕을 호위하였고 명의 지원병 요청을 주장했다

 

 

 

 

윤사신 부부 무덤 출토품 / 조선 16세기 · 백자항아리(白磁壺) · 백자발(白磁鉢)

파평윤씨 교리공 종회는 의정부시 신곡동에 있던 묘역을 연천군 노곡리로 옮기는 과정에서

16세기손인 교리공(校理公) 윤돈 · 효성공(孝成公) 윤인경(1476~1548)

윤인경의 손자로 21세손인 판관공(判官公) 윤사신(?~1569) 부부의 묘에서 출토된 부장품들을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 가운데 윤사신 부부의 묘에서는 묘지(墓誌) · 백자와 함께 다양한 형태의 명기(名器)가 발견되었다

인물과 말 · 여러 가지 그릇 모양의 명기는 16세기 명기의 전형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예로서

당시 부장 문화와 도자 명기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윤사신 부부 무덤 출토품 / 조선 16세기 · 인물과 말 명기(名器)

 

 

 

 

윤사신 부부 무덤 출토품 / 조선 16세기 · 백자 철화 숙인양씨 묘지(白磁鐵畵淑人梁氏墓誌)

 

 

 

 

류정량과 정휘옹주 합장묘 출토 명기 / 조선 17세기

전주류씨 춘호공파 종친회는 전주류씨 5대봉군묘를 이장하면서 수습한 명기들을 기증하였다

명기는 유영경(1550~1608) · 우열 · 유정량(1591~1663) · 유심(1608~1667)의 4대 묘에서 나온 것으로

조선 중기 명문가의 장례 풍속과 문화를 부여준다

 

 

 

 

강희안 무덤 출토품 / 조선 15세기

조선 초의 유학자이자 문인화가인 강희안(1418~1465)의 무덤에서 나온 구슬과 은수저이다

강희안의 모덤은 1987년 경기도 장단군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되어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의 진주강씨 문량공파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은녕군 무덤 출토품 / 조선 1454년 · 분청사기 항아리 · 접시 · 숫가락 · 젓가락

전주이씨 온녕군파 종중은 서울 성북구 미아동에 있던 온녕군(1398~1453 태종의 일곱째 왕자)의 묘소를

고양시 대자동으로 이장하면서 나온 석곽과 부장품을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부장품은 석곽의 규모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비해 간소하여 동제수저 1벌과 분청사기 항아리 2점 · 접시 2점이다

석곽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백자 청화 해안군 묘지(白磁靑畵海安君墓誌) / 조선 1573년

전주이씨 해안군 종중은 고양시 선유동 해안군(1511~1573 중종의 둘째 왕자) 부부 묘를 벌초하면서

해안군과 부인 신씨 묘지를 발견하여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묘지는 청화안료로 해안군의 행적 · 가계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청자 상감 국화무늬 항아리 / 고려 13세기

일제강점기에 하와이로 망명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원순(李元淳 1893~1993) 선생은

국내외에서 수집한 도자기 · 석기 등의 문화유산 40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선생은 미국 생활 중 지인들로부터 우리 문화유산을 팔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국인의 손에 넘어갈 것을 걱정하여

자신의 형편도 어려웠지만 개의치 않고 여러 번에 나누어서 직접 구입하였다

이원순 선생이 수집하여 소중히 보관하던 문화유산은 1979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을 순회한《한국미술오천년전》을 계기로 모두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던 그의 마음은 광복 이후에 우리 문화유산을 되찾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청자 상감 모란 넝쿨무늬 합 / 고려 13세기

 

 

 

 

청자 접시 / 고려 12세기

 

 

 

 

청자 상감 국화무늬 접시 / 고려 13~14세기

 

 

 

 

청자 음각 연꽃무늬 병 / 고려 12세기

 

 

 

 

청자 주자 / 고려 12세기

 

 

 

 

청자 양각 연잎무늬 대접 / 고려 12세기 · 분청사기 인화 국화무늬 대접 / 조선 15세기

 

 

 

 

백자 청화 풀꽃무늬 유병 / 조선 19세기

 

 

 

 

화각함 / 조선 19세기

소뿔을 얇게 펴서 만든 각지(角紙)에 그림을 그린 후 나무로 만든 함 표면에 붙여 장식한 화각함이다

화각기법으로 제작된 목가구들은 소재 자체가 희귀하고 가공이 까다로워 주로 왕실이나 상류층이 사용했다

이 화각함은 바닥을 제외한 모든 면에 봉황 · 학 · 호랑이 · 사슴 · 거북 · 두꺼비 · 불로초 · 구름 등

불로장생을 뜻하는 상서로운 상징들로 가득차 있으며, 옆면에는 앉아 있는 여성이 표현되어 있다

각지 사이 이음새에는 동물 뼈를 가늘게 깎아 끼워 넣어 완성도를 높였다

 

 

 

 

나전 칠 경전 상사 / 고려 후기

대장경 등의 불교 경전을 보관하는 상자이다

나무로 형태를 만들어 옻칠한 후 표면을 자개와 금속으로 장식하였다

모서리를 살짝 깎은 형태의 뚜껑과 빼곡한 무늬 · 금속으로 만든 경첩과 양옆의 손잡이 등 고려시대 경함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나전을 얇게 깐 뒤 작은 조각으로 잘라 섬세하고도 자유자재로 구성한 무늬에서 고려 장인의 뛰어난 솜씨가 느껴진다

 

 

 

 

나전 칠 연꽃 넝쿨무늬 상자 / 조선 16세기 중반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젊은 경영인들의 모임인 「국립중앙박물관회 젊은친구들」이 국외 경매에서 구입하여 기증한 것으로

16세기 나전칠기 공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상자는 뚜껑이 몸체를 완전히 덮는 형태로, 경첩이나 자물쇠 등 금속장식으로 뚜껑과 몸체를 고정하는

고려시대 나전함과 구분되는 조선시대 나전함의 특징을 보여준다

자연스러운 짙은 갈색 바탕 위에 무지갯빛 자개로 연꽃과 넝쿨을 표현했다

연꽃을 감싸는 넝쿨은 자개를 얆게 끊어 무늬를 새겨 넣었다

연꽃과 넝쿨 사이에는 잎사귀와 동그란 칠보무늬를 배치하여 화려함을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