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중앙박물관 기증관은 문화재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공유하고자
평생에 걸쳐 수집한 문화재를 기증해 주신 분들의 뜻이 담겨 있는 공간으로
한국의 다양한 고미술품과 세계 각지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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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관이 재개관을 기념해 세한도를 5월 5일까지 특별 공개한다는 뉴스를 듣고 찾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
기증관 사유의 방
한국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며 세계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을 전시한 공간이다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과 함께 특별한 사유의 여정을 경험할 수 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 / 국보 제78호(왼쪽) · 83호(오른쪽)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여느 문화재들과 달리 이 두 불상은 「사유의 방」이라는 전시관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두 불상 모두 위대한 걸작이지만 굳이 우열을 논하자면 83호가 평가가 조금 높은 편이다
화려함의 정도는 78호가 앞서지만 옷 주름이나 손가락 등의 세밀한 표현기법과 사실성 · 입체성의 기준에 있어 83호가 더 훌륭하다고 평가받으며
도무지 국적을 종잡을 수 없는 78호와 달리 83호는 신라로 의견이 모아진 상태라 연구에도 용이하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 / 국보 제78호(왼쪽) · 제83호(오른쪽)
국보 제78호 · 제83호에 지정된 이 두 불상은 삼국이 한창 싸우던 시기인 6~7세기 만들어진 유물로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운 고대 불교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힌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 /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반가부좌를 틀고 현세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한 상념에 잠긴(思惟) 미륵보살을 표현한 형태의 불상을 가리키는 유물명이다
반가(半跏)는 본디 땅바닥에 앉아서 하는 반가부좌(半跏趺坐)의 줄임말이지만
여기서는 의자에 앉아 오른발을 왼 무릎에 얹은 자세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 / 국보 제83호
일제강점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입수 기록에는
"1912년 당시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이 일본인 골동품상에게 2600원(지금 돈 약 4억 7천만원)을 주고 구입했다"라고 적혔다
이 작품이 출토된 지역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으며
옛 백제지역(충청도 지역)의 사람들과 옛 신라지역(경상도 지역)의 사람들은 서로 자기 고장의 유물임을 주장하며 다툰다
출토지가 불분명하게된 이유는 이 불상이 체계적인 발굴조사 과정을 통해 발굴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도굴꾼들이 찾아낸 장물이었기 때문이다
도굴꾼들의 우두머리인 가지야마 요시히데는 이 불상의 출토지에 대해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1912년에 83호 불상을 사들인 이왕가 박물관의 일본인 관장은 "경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짐작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널리 알린 세키노 타다시는
1933년 발표한 논문에서 경주시 남쪽 오릉 부근 폐사지에서 출토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학자인 이네다 하루미즈는 1915년 발표한 논문에서 1910년 충청도 벽촌에서 발굴되었다고 주장하는 등
불상의 출토지에 대한 주장이 엇갈린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 / 국보 제83호(왼쪽) · 제78호(오른쪽)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 / 국보 제83호(왼쪽) · 제78호(오른쪽)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 / 국보 제78호(왼쪽) · 제83호(오른쪽)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 국보 제78호
일본인 골동품상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에게 바쳤던 것을 총독이 조선총독부 박물관(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신라 제작설이 가장 우세한 편이긴 하지만 백제와 고구려 제작설도 상당히 심도 있게 거론되고 있다
특히 신라 제작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경상북도 봉화군의 석조 반가사유상의 하반신 옷주름이 판박이다
기증1실
애국가 악보 / 한국 광복 이후(1946년)
백화 청자 산수무늬 접시 / 중국 명
통영식 소반 / 한국 광복 이후
「연년익수만수무강」이 쓰여진 팔각항아리 / 조선
읫단 왼쪽 항아리이다
백자 청화 모란무늬 단지 / 조선
백자 청화 용무늬 병 / 조선
복숭아모양 표주박 / 조선 후기
백자 청화 복숭아모양 잔 / 조선 · 백자 청화 복숭아모양 연적 / 조선
아자 엉커스 작 구성 / 미국 1956년
나전 칠 바둑판 · 바둑알 / 일제강점
옥으로 만든 작은 공예품 등이 있다
옥으로 만든 작은 공예품 / 조선
옥으로 만든 연꽃잎모양 필세 / 한국
흑칠 양각 소나무무늬 계량배 / 조선
오채 구름 용무늬 작은 향로 / 중국 명 · 세발솥 / 중국
조롱박모양 병 / 고려
청지 상감 구름 학무늬 조롱박모양 병 / 고려
오리모양 그릇 / 원삼국
죽제 지통 / 조선 후기 · 죽제 수통 / 조선 후기
청자 상감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 / 고려
두 귀 달린 채문 항아리 / 신석기
묘연연화경 권3 / 조선(1463년)
유장열 作 정물 / 광복 이후
백자 찻잔과 접시 / 한국
「제(祭)」명 백자 청화 제기 접시 / 조선
주흑칠 원반 / 조선
다듬이돌과 방망이 / 조선
오리모양 그릇 / 신라
뚜껑 있는 손잡이 바리 / 가야
기마신장상 / 일제강점
기마인물상 / 일제강점
동자상 / 일제강점
동자상 / 일제강점
한글이 있는 찻잔 / 일본 에도
청자 상감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 / 고려
청자 상감 모란무늬 병 / 고려
청자 음각 양각 연꽃잎무늬 주전자 / 고려
주칠궤 / 일제강점 · 사자모양 손잡이도장 / 한국 · 명례궁도장 / 조선
청자 철채 퇴화 풀잎무늬 장고 / 고려
동의보감 / 조선
호랑이 다리모양 소반 / 일제강점
김환기 作 돌 / 광복 이후(1949년 이전)
백자 동채 두꺼비모양 연적 / 조선 · 백자 청채 개구리모양 연적 / 조선
백자 청화 해태모양 연적 / 조선 · 백자 청화 철화 수탉모양 연적 / 조선
금동 여래입상 / 통일신라 · 동제 여래입상 / 통일신라
왼쪽 단에 있는 입상이다
금동여래입상 / 통일신라
금동 약사여래입상 / 통일신라
청자 상감 연꽃 국화무늬 매병 / 고려 · 청자 음각 연꽃 넝쿨무늬 긴목 병 / 고려
책상 / 일제강점
백자 철화 용무늬 항아리 / 조선
화로모양 그릇 받침 / 가야
기증관 휴게실
기증관 영상실
손기정 손기정 기증 투구실로 가는 곳이다
손기정 기증 투구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36년 베를린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당시 사람들은 올림픽 종목 가운데 마라톤을 가장 주목했다
8월 9일 열린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는 2시간 29분 19초 2라는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함께 참가했던 남승룡(1912~2001) 선수도 동메달을 따면서 마라톤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동시에 따는 기록도 함께 세웠다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더욱 잊을 수 없게 만든 사건은
국내 신문이 우승 소식을 전하며 사진 속 선수복의 일장기를 지워비린 일이었다
먼저 「조선중앙일보」가 1936년 8월 13일 자 기사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했다
며칠 뒤 「동아일보」는 8월 25일 자에 손기정 선수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완전히 지운 사진을 실었다
이 기사 때문에 두 신문은 강제로 폐간되거나 휴간되었다
이 일은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불리며 1930년대 항일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올림픽 마라톤 우승과 3위라는 쾌거를 국민들에게 선물한 두 사람은 광복 후인 1947년 보스톤마라톤대회에도 참가했다
손기정 선수는 감독으로, 남승룡 선수는 코치이자 선수로 활약하여 서윤복(1923~2017) 선수가 우승하도록 이끌었다
이는 대한민국 국적으로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당당히 이룩한 첫 우승이었다
손기정 기증 투구
1936년 7월 27일 그리스의 「이 브라디니(ⅠVradyni)신문사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 우승자에게 그리스 청동투구를 주겠다는 기사를 냈다
이 투구는 1875년 독일 고고학자 에른스트 쿠르티우스(Ernst Cutius 1814~1896)가 이끄는 조사단이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발굴한 것으로, 이후 브라디니 신문사가 투구를 갖게 되었다
투구 안쪽에는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의 우승자에게」라는 글귀를 새겨 놓아
마라톤 경기의 우승자가 곧 투구의 주인임을 밝혔다
손기정 기증 투구
투구는 마라톤경기의 우승자였던 손기정 선생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아마추어 선수에게 메달 이외에 어떠한 선물이나 기념품도 공식적으로 줄 수 없다」는 규정을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손기정 선생도 투구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결국 투구는 독일 국가올림픽위원회(NOC)의 관리 하에 베를린에 남았고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베를린에 있는 샤를로텐부르크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손기정 기증 투구
손기정 선생은 우연히 투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나 그 보관처를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76년 재독 교포 노수웅 씨의 노력으로 투구의 소재를 알게 된 손기정 선생은 투구를 되찾고자 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실로 198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손기정 선생에게 투구가 헌정되었다
이듬해 정부는 50년 만에 돌아온 투구의 역사적 가치를 인전하여 보물로 지정했다
손기정 기증 투구 안쪽 글씨
손기정 선생이 투구를 되돌려받는 과정에서 마음속에 깊이 품고 있던 생각은 보다 많은 국민이 투구를 볼 수 있도록 국가에 기증하는 일이었다
이 투구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는 생각을 한순간도 놓지 않았던 손기정 선생은
1987년 투구를 독립기념관에 위탁했다가 199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투구는 이곳 박물관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투구를 기증 문화재실에 전시했다
2002년에는 기증관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독립적인 전시공간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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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 안쪽에는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의 우승자에게」라는 글귀를 새겨 놓아
마라톤 경기의 우승자가 곧 투구의 주인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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