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길이야기

늦봄 문익환 30주기 특별전〈다시 오는 늦봄〉

근현대사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늦봄 문익환 목사의 30주기를 맞아 그의 일생을 돌아보는 특별전이 열린다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독실한 신앙인 · 독재의 폭압에 맞선 민중의 지도자 · 통일 운동의 선구자로 살았던

문익환목사가 우리에게 남긴 뜻을 되새겨 보는 소중한 자리다

 

 

근현대사기념관 기획전시실

늦봄 문익환 30주기 특별전 〈다시 오는 늦봄〉이 열리고 있다

 

 

 

 

늦봄 문익환 30주기 특별전 〈다시 오는 늦봄〉 전시를 열며

늦봄 문익환 목사의 30주기를 맞아 그의 일생을 돌아보는 특별전을 마련했습니다

문익환 목사는 일제강점기 북간도지역 민족교육의 중심지였던 명동촌에서 태어나

민족시인 윤동주와 함께 학창시절을 보내고 기독교 신앙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성직자이자 신학자로 활동하며 구약성서 번역에 공헌하였습니다

장준하의 죽음을 계기로 1976년 「3 · 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며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재야 민주인사로 변모하여

1980년대에는 신군부의 폭압에 맞서는 민중지도자로 나서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1989년에는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만나 통일의 원칙과 방식에 대해 합의한 4 · 2공동선언을 발표하여

이후 남북 정부 간 통일 논의와 민간교류의 물꼬를 텄습니다

독실한 신앙인 ·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한 재야 민주인사 · 신군부의 폭압에 맞선 민중의 지도자

분단을 뛰어넘은 통일운동의 선구자로 살았던 문익환 목사가 우리 민족과 사회에 남긴 뜻을 되새겨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북간도의 아들 / 1918~1945

1918년 6월 1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문재린과 김신묵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두만강 건너 중국 길림성 화룡현에 위치한 명동촌의 원래 지명은 비둘기바위라는 뜻의 부걸라재(鳧鴿磖子)였다

이곳에 조선인 마을을 개척한 사람들은 「간도대통령」이라 불린 독립운동가 규암 김약연을 비롯한 함경북도 회령과 종성 출신 다섯 가문이었다

1899년 김약연이 김하규 · 문치정 · 남위언과 함께 이들 네 집안의 가족과 친척 142명을 데리고 이주하였고

이듬해에는 윤재옥 일가가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명동오현(明洞五賢)이라 불린 이들은 중국인으로부터 매입한 수백 정보의 임야를 개간하고

학교와 교회를 건립하여 공동체를 건설하고 명동촌이라 이름하였다

이들은 집안 간에 혼인을 맺어 인척 관계에 있었는데, 문익환은 이들 중 문치정의 손자이자 김하규의 외손자였고

그의 친구 윤동주는 윤재옥의 증손자이자 김약연의 조카였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여 5학년 때인 1929년 친구 윤동주 · 송몽규와 함께 문예지 《새명동》을 발간하였다

1931년 명동학교를 졸업하고 가족들과 함께 용정으로 이주하여

(1932년 용정 해성소학교를 졸업하고) 송몽규 · 윤동주와 함께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35년 윤동주와 함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5년제 중학교인 평양 숭실학교로 전학하여 4학년에 편입하였다

1936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동맹 퇴학하여 윤동주와 함께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 5학년에 편입하여 1937년 졸업하였다

1938년 일본 도쿄에 있는 일본신학교에 입학하여 장준하 · 전택부 등과 교류하였다

1943년 학병지원을 거부하고 만주 봉천신학교로 옮겨갔다

1944년 박용길과 결혼하고 만보산 한인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45년 2월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재학 중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후쿠오카형무소에 투옥되어 있던 윤동주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문재린 · 김신묵

문익환 목사의 부모이다

 

 

 

 

어린시절

 

 

 

 

평양 숭실학교 시절

 

 

 

 

명동촌 수막새 · 명동촌 생가터 흙

 

 

 

 

광명중학교 졸업기념사진 · 일본신학교 성적표 · 관동신학생회 사진 · 결혼식 사진

 

 

 

 

광명중학교 졸업기념 / 1937년

 

 

 

 

동경신학대학 성적표

 

 

 

 

외할아버지 김하규 장례식 / 1942년

 

 

 

 

김약연 선생 추모비 제막식 / 1943. 4. 27

 

 

 

 

김정우 · 김중섭 학병 상행기념 / 1944. 1. 4

 

 

 

 

결혼식 / 1944년

 

 

 

 

동주야 친필원고

 

 

 

 

동주야 / 문익환

 

 

 

 

연애편지 / 문익환

동그란 안경이 위에 있다

 

 

 

 

연애편지 / 박용길

 

 

 

 

하나님 말씀에 충실한 신학자 / 1945~1976 · 시대의 어둠을 밝힌 민중의 지도자 / 1976~1989

 

 

 

 

하나님 말씀에 충실한 신학자 / 1945~1976

1945년 만주 신경 중앙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1946년 신경에서 걸어서 신의주 · 사리원 · 개성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다

아버지 문재린이 목회 활동을 하고 있던 김천으로 내려가 김천 배영중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였다

1946년 9월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 전신)에 편입하여 스승인 김재준을 만났다

이듬해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구미교회 · 을지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48년 1월 김관석 · 문동환 · 지동식 · 홍태현 · 장하구 · 장준하 · 전택부 등 젊은 개신교 지식인들과 함께

초교파적 신앙 운동단체인 복음동지회를 결성하였다

1949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1950년 6 · 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에 자원하여

일본 도쿄의 유엔군사령부에 근무하며 정전회담 통역을 맡았다

전쟁이 끝난 1954년 8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1955년부터 한빛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한신대학교 · 연세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강의하였다

1965년에는 미국 유니언신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였다

1968년 시작된 개신교와 천주교의 성서 공동번역사업에 책임위원으로 참가해 8년간 일하였다

성경 구약의 40%를 차지하는 시를 이해하기 위해 틈틈이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73년 첫 시집 《새삼스런 하루》를 발간하면서 자신의 호를 늦봄이라 지었다

 

 

 

 

조선신학교 졸업증명서

 

 

 

 

조선신학교 졸업앨범

 

 

 

 

복음동지회 성서번역위원회 제1회 회의록 / 1957. 5. 13

 

 

 

 

프린스턴 유학시절 · 한신대 교수 시절

 

 

 

 

프린스턴신학대학 학위증

 

 

 

 

한신대 교수 시절 · 한빛교회 시절

 

 

 

 

공동성서 번역 시절

 

 

 

 

시대의 어둠을 밝힌 민중의 지도자 / 1976~1989

성서 번역에 몰두하고 있던 1975년 8월 17일 학창시절 동갑내기 후배인 장준하의 의문사 소식을 들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느님 말씀에 충실한 신학자였던 문익환은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재야 민주인사로 변모하였다

군사 쿠테타로 집권한 일본군 출신 대통령 박정희에 맞서다 희생된 광복군 출신 재야 지도자 장준하를 대신하여 반유신 투쟁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1976년 3 · 1절을 앞두고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한 3 · 1운동에 종교인들이 앞장섰던 역사를 상기하며

유신체제를 반민주적 폭압 통치를 비판하는 3 · 1민주구국선언을 자청하였다

기독교 재야 원로 함석헌과 상의하고 동생 문동환을 비롯한 기독인 해직 교수들이 중심이 된 갈릴리교회 구성원들과 논의를 하다

여기에 윤보선 · 김대중 · 정일형 등 전 · 현직 야당 정치인들이 동참하였다

선언문은 김승훈 · 함세웅 등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의 협조를 받아 명동성당 3 · 1절 기념미사에서 이우정 교수가 낭독하였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 · 윤보선 · 김대중 등과 함께 정부전복 · 민중봉기선동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1977년 12월 31일 전주교도소에서 형집행정지로 22개월 간의 첫 번째 감옥 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제9대 대통령 선출을 하루 앞둔 1978년 7월 5일에 윤보선 · 함석헌 등과 함께

재야 세력을 결집하여 민주주의국민연합을 결성하고 12개 단체 102명의 서명을 받은 민주국민선언을 발표하였다

이후 민주주의국민연합은 각종 선언 · 단식 등 활동을 통해 양심법 석방 · 유신헌법 철폐

박정희 정권 퇴진 등을 주장하며 유신체제에 대한 전면 투쟁에 나섰다

이로 인해 총선거를 얼마 앞둔 10월 13일 석방 10개월 만에 형집행정지가 취소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1979년 유신체제의 정점에 있던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학살되는 10 · 26사태가 일어난 후

12월 8일 형집행정지 14개월 간의 두 번째 감옥 생활을 마치고 출옥하였다

 

 

 

 

장준하 영정사진

 

 

 

 

문익환 목사가 장준하를 추모하는 서신

 

 

 

 

3 · 1민주구국선언 인쇄본

 

 

 

 

석방하라! 민족의 양심들 포스터

 

 

 

 

수인번호 모음

한국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문익환 · 박용길 편지

 

 

 

 

문호근 기록 옥중 단식기 · 문성근 기록 면회록

 

 

 

 

빼앗긴 서울의 봄 / 1980~1987 · 이한열 열사여! / 1987~1989

 

 

 

 

빼앗긴 서울의 봄 / 1980~1987

1979년 12 · 12군사반란으로 군부 내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동시에 정당 및 정치 활동 금지 · 국회 폐쇄 등의 조치를 내리는

5 · 17쿠테타를 일으키면서 정치인 · 재야인사 · 학생운동 지도부를 불법적으로 대거 구금하였다

이때 「사회혼란 조성 및 학생 · 노조의 소요 배후조정」 혐의로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되어 출옥한 지 5개월만에 또다시 구속되었다

5 · 18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집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7월 4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발표하고

관련자 24명을 내란음모 · 국가보안법 · 반공법 · 외국환관리법 및 계엄포고령 위반 등의 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

8월 14일 재판이 시작되어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에서 김대중 사형을 비롯해서 12명에게 10년 이상의 중형을 확정했다

이때 15년형을 선고받고 육군교도소 · 공주교도소를 거쳐 안양교도소에서

2년 7개월여 간 세 번째 감옥 생활을 한 후 1982년 12월 24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3 · 1민주구국선언의 모태가 되었던 갈릴리교회 목사를 맡아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으로 고난받는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면서 다시 재야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84년 7월 전두환의 방일계획을 발표하자 「일본 재침략저지 민족운동대회」를 개최하여 경제안보협력을 핑계로

한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일본과의 밀착관계를 유지하려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적 반대 투쟁에 앞장섰다

이를 계기로 전두환 정권 반대 투쟁의 전면에 나서서 그 전까지 고립 · 분산적으로 투쟁해오던 민주화운동 세력의 통합에 구심점 역할을 맡았다

먼저 1984년 10월 계훈제 · 백기완 · 장기표 등 재야 민주인사들을 중심으로 민주통일국민회의(약칭 국민회의)를 결성하여 의장에 취임하였다

1985년 3월에는 국민회의를 청년 · 노동자 · 농민 · 언론 등 각 부문운동 단체들의 협의체로 조직된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통합하여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을 결성하였다

67세의 나이에 민통련 의장에 선출되어 열정적 헌신과 넓은 포용력을 발휘하는 민중의 지도자로 군사독재 종식을 위한 투쟁을 이끌어갔다

1985년 11월 민통련 산하에 민주헌법쟁취위원회를 구성하고 2 · 12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부상한 신민당과

김영삼 · 김대중을 중심으로 재야 정치인들이 모인 민주화추진협의회와 연대하여 개헌 투쟁에 나섰다

이에 호응하여 각계의 시국선언과 서명운동이 이어지고 지방에서는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지부 결성대회에

많은 시민 · 학생들이 모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특히 1986년 5월 3일 인천에서 예정되었던 대회에는 5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시위가 벌어져 경찰과 격렬한 충돌이 발생하였다

민통련 간부를 비롯한 대회 관련자들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진 가운데

5월 20일 서울대에서 강연하는 도중 맞은 편 옥상에서 학생이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선동죄로 경찰의 지명수배를 당하자 다음날 자진 출두하여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네 번째 투옥되었다

 

 

 

 

경향신문 / 1980. 7. 4

김대중 등 37명 내란음모 혐의

 

 

 

 

김대중 등 37명 내란음모 사건 재판

 

 

 

 

긴급 민주 선언 / 1983. 5. 31

 

 

 

 

갈릴리교회 양심수를 위한 양심수 가족의 모임

 

 

 

 

민주통일국민회의 · 민중민주운동협의회 시절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추모와 학살 원흉 규탄 단식농성 · 민주헌법쟁취위원회

 

 

 

 

이한열 열사여! / 1987~1989

네 번째 감옥 생활을 하고 있던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 사망사건이 발생하고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이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고 대통령을 간선제를 유지하는 「4 · 13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민통련은 5월 27일 야당인 통일민주당과 함께 각 사회운동단체 · 종교계 · 학생운동 조직과 연합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하여 범국민적 반독재투쟁을 전개하였다

민정당이 간선제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를 지명한 6월 10일에 전국 18개 도시에서 청년 · 학생들과 일반시민이 합세하여

「호헌철폐 · 독재타도」를 외치며 민주헌법 쟁취와 미국의 내정간섭 반대를 주장하는 「6 · 10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6월 민주항쟁은 전국에서 연인원 4~5백만 명이 참가하여 3주일 동안 거리집회 · 시위 · 농성을 이어갔다

결국, 국민의 요구에 굴복한 전두환 정권은 「6 · 29선언」을 발표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함께 김대중 사면 복권과 시국사범 석방을 비롯한 민주화조치를 약속하였다

이에 따라 7월 8일 형집행정지로 1년 2개월간의 네 번째 감옥 생활을 마치고 진주교도소에서 출옥하였다

석방된 다음 날 6월 민주항쟁에서 경찰이 발사한 최류탄에 희생된 이한열의 장례식에 참가하여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스러져간 26명의 열사의 이름을 처절한 목소리로 호명하였다

7, 8월 전국적으로 노동운동이 전개되자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다가오는 12월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 군사독재를 종식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민통련을 중심으로 김대중과 김영삼 두 후보를 단일화하기 위한 노력을 거듭하였으나 무산되고

두 후보에 대한 정책 질의를 거쳐 김대중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양 김의 분열과 극심한 영호남 지역감정 속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결국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군사정권을 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선거 후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사건」 등 각종 선거부정에 항의하는 범국민규탄대회를 개최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1988년 1월 7일 단식을 끝내면서 야당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이루어 내지 못하고 민주정권 수립에 실패한 데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88년 6월 민통련 의장에 재추대되어 「민주화 투쟁은 하나」라는 대전제 하에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펼쳐나갔다

 

 

 

 

분단을 뛰어넘은 통일의 선구자 / 1989~1994

1988년 여름 전국대학생대표협의회 소속 학생들이 추진한 남북학생회담이

노태우 정부에 원천 봉쇄되어 무산되는 것을 지켜보고 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해 방북을 결심하였다

1989년 북한의 김일성이 신년사를 통해서 남한의 각 당 대표와 김수환 · 문익환 · 백기완을 평양에 초청한다는 메시지를 받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6 · 25전쟁 당시 일본 도쿄의 유엔군사령부에서 함께 근무했던 정경모와 국회부의장 김녹영의 비서실장이었던 유원호가 그의 결심을 도왔다

평민당 부총재로 있던 동생 문동환을 통해 김대중과 만나서 논의하고

그해 1월 상임고문으로 추대된 전국민족민주연합 간부진에게도 방북 계획을 알렸다

3월 20일 유원호와 함께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도쿄에 도착하여 정경모와 합류하고, 베이징을 경유하여 25일 평양에 도착하여 도착성명을 발표하였다

3월 27일, 4월 1일 김일성과 두 차례 만나 통일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표단과 협의한 후 그 결과를 4 · 2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10일간의 방북 일정을 마치고 4월 3일 평양을 출발하여 베이징과 도쿄를 거쳐 13일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도착 직후 기내에서 안기부로 연행되어 국가보안법상 「지령수수 · 잠입탈출죄 · 회합통신 및 금품수수죄 · 찬양고무죄」로 

7년형을 선고받고 다섯 번째 감옥 생활을 하였다

1990년 10월 20일 형집행정지로 19개월만에 전주교도소에서 출옥하였다

1991년 1월 23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약칭 범민련) 남측본부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삼당합당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노태우 정부가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이에 반대하는 시위와 집회를 폭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대학생 강경대 · 김귀정 열사의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이로 인해 6월 6일 형집행정지가 취소되어 73세의 고령에 여섯 번째 감옥 생활을 시작하였다

1993년 3월 6일에 1년 9개월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이후 통일을 위한 준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새로운 통일운동체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제4차 범민족대회를 전후하여 민간과 정부가 함께하는 국민운동으로서 모든 통일운동단체를 하나로 결집하기 위한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을 구상하였다

새로운 통일운동단체를 결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중 1994년 1월 18일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김일성과의 만남

 

 

 

 

남북연석회의 초청장 / 1989년

 

 

 

 

4 · 2공동선언문 · 4 · 2공동선언문 서명 사진

 

 

 

 

4 · 2공동선언문

김일성 주석과 만나 통일의 원칙과 방식에 대해 합의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고문 문익환 ·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의 공동성명이다

 

 

 

 

문익환 조선우표

 

 

 

 

항소이유서

 

 

 

 

문익환 구속

 

 

 

 

문익환 석방

 

 

 

 

마지막 편지

 

 

 

 

통일 염원 45년 새봄에 / 늦봄 문익환

'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  (0) 2024.01.21
북한산둘레길 3구간(흰구름길)  (1) 2024.01.13
근현대사기념관  (0) 2024.01.13
은이성지 김대건기념관  (0) 2024.01.12
은이성지  (0) 2024.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