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길이야기

근현대사기념관

강북구는 3 · 1운동의 발원지인 봉황각과 순국선열들의 묘역

그리고 국립 4 · 19민주묘지가 자리잡고 있는 독립정신과 민주주의의 성지이다

그 높은 뜻을 제대로 기억하고 전파하기 위해 2016년 5월  동학농민운동부터 4 · 19혁명까지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역사를 오롯이 담은 근현대사기념관이 개관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은 자유 · 평등 · 민주의 이념이 선열들의 피땀 흘려 체득하고 축적해 온 소중한 가치임을 전달하여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 · 4월혁명의 투사들이 소원했던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의 미래상임을 알리고자 한다

*

근현대사기념관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여 독립정신과 민주주의 정신을 선양하는 상설 · 기획전시관을 개설하고 있다

 

 

근현대사기념관

 

 

 

 

근현대사기념관 안내도

 

 

 

 

대한민국 헌법 전문 / 1948.7. 17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히 선거된 대표로써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A존 - 짓밟힌 산하, 일어선 민초들

개항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이 많아지자 나라 안팎의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민중이 일어섰다

동학농민군은 봉건질서를 타파하고 외세의 침입을 막아 자주적인 국가를 세우고자

보국안민 · 척왜양이의 기치 아래 전국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한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동학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고 끝내는 왕비(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후 일제는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 등을 강제로 체결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야욕을 감추지 않았다

이에 뜻있는 이들은 신분을 뛰어넘어 국권을 지키는 길에 힘을 모았다

의병은 곳곳에서 친일파와 일본군을 공격했으며, 지식인들은 애국계몽운동으로 실력을 키우고자 애썼다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국권을 빼앗긴 뒤에도 변함이 없었으며, 끈질지게 이어진 국내외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입체경 / 19세기 말~20세기 초

19세기 중반부터 서구에서는 낯선 나라의 풍경과 그들의 생활 모습을 담은 입체사진이 크게 유행하였다

이 사진을 입체경으로 보면 시점의 차이 때문에 입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시기 조선에서도 조선인의 생활상을 포착한 다채로운 입체사진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서양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조선은 이색적이라기보다 자신들의 문명과 거리가 먼 「은둔의 나라」로 묘사되고 있었다

이렇게 서양인의 촬영 대상이 된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근대화의 물결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숭례문을 지나는 열차와 땔감을 나르는 소 / 1900년대 초

여러 장의 입체경 사진 중 하나다

 

 

 

 

동학농민운동

사람은 하늘이라 모든 사람은 평등하리니

백성은 국가의 기본이다

근본이 쇠하고 흩어지게 되면 국가는 반드시 없어지는 것이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방책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제 몸만을 생각하여 나라의 돈만 없애는 일이 어찌 옳은 일이랴

- 전봉준 · 손화중 · 김개남 《창의문》 1894년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박용빈을 봉령(奉令)에 명한 임명장 / 1894

 

 

 

 

청일전쟁 기념 접시 / 1894

1894년 6월, 경복궁 점령 후 오토리(大鳥圭介) 일본공사가 조선 정부에 내정간섭을 강요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 공원의 각 나라 아이들 / 1936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 1907

헤이그 특사 파견을 이유로 고종을 퇴위시킨 일제는 강제로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통감이 한국의 법령 제정 · 고등 관리 임명 등 내정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공원의 각 나라 아이들 / 1936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만주의 랴오둥 반도를 차지하려 했으나 러시아와 프랑스 · 독일의 압력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삼국 간섭)

이후 중국은 서구 열강들이 벌인 이권 쟁탈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 그림은 이러한 국제정세를 은유한 풍자화로

일본을 서양 열강에 맞서는 정의의 사도이자 한국의 보호자로 묘사하면서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다

러시아가 손에 쥔 「만두」는 청나라 영토인 「만주」를 의미하며 풍자화의 대화는 화첩에 실린 설명을 옮긴 것이다

 

 

 

 

의병전쟁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차라리 자유민으로 죽으리라

*

메켄지 / 언제부터 전투를 했습니까?

의병 / 오늘 아침에 저 아랫마을에서 전투가 있었습니다

일본군 4명을 사살했고, 우리 측은 2명이 전사했고, 3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메켄지 /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의병 /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을 수 밖에 없겠지요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차라리 자유민으로 싸우다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한국 사람들은 누구든지 우리를 위해 파수를 봐줍니다

- 프레드릭 메켄지(영국 데일리메일 기자)와 한국 의병의 인터뷰 / Tragedy of Korea 1908

 

 

 

 

철도 파괴범으로 총살당한 의병 / 1904. 12. 2

1904년 9월 용산과 마포 사이에 가설된 일제 군용철도에 폭약 매설 군용열차를 폭파한

의병 김성삼 · 이춘근 · 안순서가 마포 도화동 산기슭에서 일본군에 학살당한 사건을 소개한 프랑스 잡지

 

 

 

 

을사늑약 문서 / 1905 · 한국병합조약 문서 / 1910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하고 대부분의 통치권을 통감에게 양여한 을사늑약 문서이다

이 조약은 정식 제목이 없고, 날인한 박제순이 고종의 위임을 받지 않았으며

조약 체결 절차인 황제의 비준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법상 효력을 가지지 못한다

*

대한제국 정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통감 데라우치가 체결한 8개조 강제병합조약 문서이다

을사늑약과 마찬가지로 전권위임장도 제대로 들어가 있지 않으며, 순종이 서명도 하지 않았다

 

 

 

 

애국계몽운동

우리가 믿고 바랄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뿐이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든지 조선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마라

- 홍범식 유서 중에서 -

 

 

 

 

강제병합

한국병합조서 / 1910. 8. 29

한국병합조약 체결에 관한 일왕의 조서이다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동양 평화 유지와 제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라고 미화하였다

*

순종황제 칙유(勅諭) / 1910. 8. 29

8월 22일 강제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을 국민에게 알리는 순종황제의 포고문이다

 

 

 

 

3 · 1운동

제국에서 민국으로

1910년 8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저항운동의 싹을 자르기 위해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만들어진 국제정세는 억눌려 있던 식민지 조선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국내외의 독립운동세력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전 민족적인 항일운동을 모색하였다

1919년 3월 1일, 드디어 만세운동의 봉화가 타올랐다

대한독립만세 ! 드디어 함성이 전국을 뒤덮었다

비록 독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3 · 1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널리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민족해방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민주공화정을 지향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시킴으로써 우리 역사에 혁명적 전환을 가져왔다

 

 

 

 

대동단결선언 / 1917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신규식 · 박은식 · 조소앙 등 14명이 작성한 선언문이다

주권재민과 민주공화정 수립을 최초로 표방하였다

 

 

 

 

찬동통지서 / 1917

대동단결선언문의 뜻을 같이하면 회신해 달라는 찬동통지서를 함께 배포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 / 1919

만주와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맞추어 조선 독립을 요구한 최초의 독립선언서이다

한민족 독립의 당위성과 무력 대일 항전을 세계에 선포하였다

 

 

 

 

2 · 8독립선언서 / 1919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재일조선인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하고 조선독립을 선포하였다

전 민족적인 궐기를 촉구한 이 선언은 국내 3 · 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 1독립선언서 / 1919

우리나라가 독립국임과 우리민족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

보성사에서 인쇄한 초판본으로 1919년 3월말 함경도 지역 만세운동 현장에서 뿌려진 독립선언서이다

뒷면에 「순사가 습득한 종이」라고 적혀 있다

 

 

 

 

만세소요사건 / 1964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 건국강령 ·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행한 여권

 

 

 

 

대한민국임시정부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중국 각지를 옮겨다니며 온갖 고난을 견뎌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하고 정당통합운동 · 민족협동전신운동을 적극 펼쳤다

*

임시의정원 이승만 탄핵 의결 · 제2대 대통령 박은식 선출 / 1925. 3. 23

 

 

 

 

대한민국임시정부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

민주적 토론이 활발했던 제6회 임시의정원회의 / 1919년 9월 4일

여운형 · 신익희 · 안창호 · 장봉 · 윤현진 등이 대한민국 임시헌장 개정안 검토하였다

 

 

 

 

나라 안의 민족운동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조선물산장려와 궐기문 / 1923 · 6.10만세운동 격문 / 1926 · 광주학생항일운동 / 1929

 

 

 

 

조선 형평사 취지문 / 1923 · 근우회 행동강령 / 1927 · 소작인의 노래

 

 

 

 

의열투쟁

완전한 독립과 자유가 올 때까지 싸우자

*

윤봉길 선서문 / 1932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적진으로 비밀 공작을 떠나기 전에 임무 완수를 다짐하는 한국광복군 대원

 

 

 

 

의열단 공약 10조

*

의열단원들은 마치 특별한 신도처럼 생활하였고 수영 · 테니스 그 밖의 운동을 통해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매일같이 저격 연습도 하였다

이 젊은이들은 독서도 하였고, 쾌활함을 유지하기 위해 오락도 하였다. 그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이 기묘하게 혼합됐다

언제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생명이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기막히게 멋진 친구들이었다

스포티한 멋진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결벽할 정도로 말쑥하게 차려 입었다

님 웨일즈 〈아리랑 7장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

*

7가살 · 5파괴할 목표가 있다

 

 

 

 

한인애국단 입단 선언문 / 이봉창

나는 적성으로서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일제)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

중국 100만 대군도 이루지 못한 일을 조선의 청년이 해냈다

- 중국 국민당 장제스 총통의 소감 -

 

 

 

 

나라 밖의 독립운동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자!

3 · 1운동 이후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전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대표적인 항일무장투쟁 기지였던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한 수천의 전사들을 비롯한 독립군들은

기필코 조국을 되찾게다는 신념으로 영웅적인 투쟁을 벌여나갔다

독립투사들은 봉오동 · 청산리 전투 등에서 빛나는 승리를 쟁취하였으며

이후 한국광복군 · 조선의용군 · 동북항일연군 등의 일원이 되어 일본제국주의 군대와 맞서 싸워나갔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에는 한국광복군이 직접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국내에 있던 조선건국동맹도 해외 독립운동 단체와 연결하여 독립전쟁을 계획하였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우리민족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치열한 독립투쟁을 일제 강점 35년 내내 줄기차게 이어갔다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광복군 제3지대 2구대에서 활동하던 문웅명(일명 문수열) 대원이 1945년 2월경 동료대원 이정수로부터 태극기를 선물받은 태극기이다

그런데 1946년 1월 문웅명이 다른 부대로 옮기게 되자 이를 아쉬워한 동료 대원들이 이 태극기 여백에 가득 서명을 해주었다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염원하는 글귀와 서명이 빼곡히 적혀 있다

약 70여 명의 서명자 중에는 제17대 광복회장 김국주 · 제18대 광복회장 김영일이 포함되어 있다

이 태극기는 1986년 8월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다

당시 태극기 제작기법 및 형태를 알 수 있는 유물이다. 독립기념관이 소유 및 관리한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환국기념 서명포 / 1945. 11

조국 광복을 맞이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기 전에 감회를 적은 서명포이다

 

 

 

 

독립군 기지 건설

저 강 건너에 기필코 되찾을 조국이 있다

신흥무관학교 교가 · 압록강행진곡 등이 있다

 

 

 

 

조선혁명선언 / 1923

신채호가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과 방략을 제시하기 위해 만든 선언서이다

 

 

 

 

광복 / 1941년 3월호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에서 발행한 잡지이다

편집 주임은 김광 · 지복영 · 오광심 · 조순영 등 여자 광복군들이 원고작성과 번역을 맡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문 / 1941. 12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즉각 대일 선전포고를 발포했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국제적인 활동을 폈다

 

 

 

 

한국광복군 복장 / 1940년대

 

 

 

 

B존 - 영상실

이곳에서 사용되는 영상은 일제강점기부터 8 ∙ 15해방을 맞은 아버지와 아들이 시대의 흐름을 직접 겪은 뒤

체험 속에서 깨달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넘어 해방을 맞은 한반도는 독립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열망으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분단과 6 · 25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치유하기 힘든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B존 - 영상실

독립운동가들이 소원하고 4 · 19 혁명의 투사들이 가꾸고자 했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동학농민운동 의병전쟁 3·1운동 독립전쟁으로 연면히 이어지며 쌓여온 자주 독립 · 민주 · 평등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그런 나라는 아니었을까?

 

 

 

 

시대의 마감 · 민주의 마중

해방을 맞은 한반도는 독립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열망으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분단과 6 · 25전쟁은 우리민족에게 치유하기 힘든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독립운동가들이 소원하고 4 · 19혁명의 투사들이 가꾸고자 했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동학농민운동 · 의병전쟁 · 3.1운동 · 독립전쟁으로 연면히 이어지며 쌓아온

자주 · 독립 · 민주 · 평등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그런 나라는 아니었을까?

 

 

 

 

세계의 거화 / 이설주 1945. 9. 10

 

 

 

 

활판과 석판이 몸부림친다

신문이 쏟아지고 잡지가 밀린다. 삐라가 깔리고 포스터가 덮인다

쓰는 대로 글이 되고 박히는 대로 책이 된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였고, 붓이 있어도 글을 못씀은 40년동안 통한이 뼈에 사무쳤거든, 자유를 얻은 바에야 무엇을 꺼릴 것인가?

 

 

 

 

조선의 비극 / F.A맥켄지 · 황중엽 역 1946

개항 전후부터 1907년까지 조선의 실상을 기록한 Tragedy of Korea(1908)를 번역한 책이다

 

 

 

 

조선동포에게 고함 / 월추산인 1945

포스담선언 · 카이로공동선언 내용과 일본 정부의 반응, 독립운동가들의 연설과 담화를 담았다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 안재홍 1945

 

 

 

 

여운형선생투쟁사 / 이만규 1947

 

 

 

 

여운형살해사건진상기 / 김섭 1948

 

 

 

 

김구주석최근언론집 / 엄항섭 1948

 

 

 

 

C존 - 우리가 사는 나라, 민주공화국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드디어 항복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한 결과이자 불굴의 독립투쟁이 낳은 소중한 결실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는 등 자발적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여는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하면서 이념적 갈등의 골은 깊어져 갔다

통일국가 수립의 열망이 드높았지만 한반도에는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고 말았다

뒤어어 일어난 6 · 25전쟁은 전 민족에게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긴 채 분단체제를 고착시켰다

매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하여 민주국가를 재건한 대한민국은 자유 · 평등 · 만주의 가치를 제헌헌법에 담았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를 등용하고 이를 기반으로 장기집권을 꾀하였다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헌법을 거듭 개정하였고, 부정선거를 자행하며 독재권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부패하고 불의한 정권에 맞서 학생과 시민들은 앞장서 민주주의 수호를 외쳤다

더 나아가 과거청산 · 서민경제회복 · 평화통일 실현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분출시켰다

· 19혁명은 민주주의의 새벽을 연 의미 깊은 첫 걸음이자 기나긴 민주화의 여정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해방공간

국가재건을 향한 열망

 

 

 

 

과거 정권의 모체 대한 국민대표 민주이원 성립 / 조선일보 1946. 2. 15

대한민국임시정부 측 인사가 중심이 된 비상국민회의 최고 정무위원을 개편한 조직으로군정사령관의 자문기구였다

좌익계열을 제외하고 이승만 · 김구를 비롯해 김도연 · 김창숙 · 여운형 등 민족지도자 28명이 망라되었다

뒤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1946. 12)으로 이어진다

 

 

 

 

좌우합작위원회 기념사진 / 1947. 10. 6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좌우대립이 심해지나 김규식 · 여운형 · 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남북 단일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모색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관보 제1호 / 1948. 9. 1

대한민국 제헌헌법 전문이 실려 있다

 

 

 

 

관보 제1호 / 1948. 9. 1

「제1호 옆에 대한민국 30년 9월 1일 대한민국정부공보처 발행」이라 써있다

*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첫 번째 펴낸 관보 제1호에서 대한민국 1948년 9월 1일을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 써놓았다

다시 말해 1919년이 대한민국이 시작된 ‘대한민국 1년이다

 

 

 

 

UN조선위원단보고서 / 임명삼 역 1949

제3차 UN총회에 보고된 UN조선위원단의 대한민국정부 수립과정에 대한 보고서이다

이로써 대한민국정부가 UN의 정식 승인 받게 되었다

 

 

 

 

민주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으로부터 나온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국회의장단과 헌법기초의원들

1948년 5월 총선으로 구성된 제헌 국회는 헌법을 만들기 위한 기초의원 30인을 선출하고 위원장으로 서상일을 임명하였다

 

 

 

 

한국판 뉘른베르크 / 주간서울 1949. 4. 4

제헌국회가 1948년 9월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열린 첫 특별재판부 공판 보도

표적인 친일파 노덕술 · 김연수 · 최린 · 이풍한 등 피고들의 궤변과 공판정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전후 사회상

전쟁의 폐허에도 삶은 이어지고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6 · 25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약 3년 1개월여 간 지속되었다

이 전쟁은 세계 독립국가의 약 70%에 달하는 66개국이 파병과 물자 지원 등 직간접적으로 참가한 국제전쟁이었다

· 25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당시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500만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수많은 이산가족과 전쟁고아, 미망인이 발생했다

산업시설 기반이 파괴되어 막대한 경제적 손실도 입었다

전쟁 이후 남북 간에 적대감정이 깊어져 분단이 고착화되고 군사 대결 상태가 지속되었다

전쟁은 남북 간 화해와 협력,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웠으며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제22회 어린이 날 기념식

전쟁 중에도 거행된 어린이 날 기념식 사진이다

 

 

 

 

제1회 지방회의 선거 입후보자 벽보를 보고 있는 유권자들 / 1952. 4. 25

이승만 대통령은 6 · 25전쟁 중에도 지방의회 선거를 치러 정치 기반을 확보하려했다

시 의원 378명 · 읍 의원 1,115명 · 면 의의원 16,051명이 당선되었다

 

 

 

 

독재체제의 강화

독재, 장기집권을 꾀하다

 

 

 

 

부통령 후보 지명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 담화문 / 1956. 3. 28

1956년 제7차 자유당 임시전당대회에서 정 · 부통령 지명에 관해 이승만 대통령의 견해를 밝힌 담화문이다

선거에 나서지않겠다는 부통령 함태영을 대신하여 다음 적임자로 이기붕을 추천하고 있다

 

 

 

 

제3대 대통령 포스터 / 1956년

못살겠다! · 갈아보자!

전국의 민심은 이미 각하에게 이탈되었나니 이탈된 민심을 회수하려면 각하께서 절세의 대용단을 발휘하시라

대통령의 권위로써 자유당 총재의 직권으로써 민의 조작의 주동체인 자유당을 해산시키는 동시에

이번 부정선거를 일체 무효로 선언함으로써 재선거를 실행함이 각하가 대통령 3선에 취임한 후 급선무이며

민심을 돌리는 유일무이한 방법임을 주저치 않고 단언하는 바이다

- 대통령 3선 취임에 일언을 진함 / 김창숙 1956 - 

 

 

 

 

제3대 정부통령 선거

국민들이 직접선거로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했다

대통령 이승만 · 부통령 장면

 

 

 

 

 4 · 19혁명

세계가 주목한 4 · 19혁명

 

 

 

 

만세! 민권은 이겼다 / 조선일보 1960. 4. 26

'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한산둘레길 3구간(흰구름길)  (1) 2024.01.13
늦봄 문익환 30주기 특별전〈다시 오는 늦봄〉  (0) 2024.01.13
은이성지 김대건기념관  (0) 2024.01.12
은이성지  (0) 2024.01.12
은이성지 김가항성당  (0) 2024.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