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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2023년 6월 29일 문을 열었다
프랑스와 중국에 이어 세계 세 번째 문자 전문박물관으로, 인천에 처음으로 들어서는 국립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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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총면적 1만5650㎡에 지하 1층 · 지상 2층 규모다
지하 1층에는 상설전시실 · 지상 1층에는 기획전시실, 어린이체험실, 편의시설 · 지상 2층엔 카페테리아를 마련했다
「페이지스(Pages)」라는 이름의 이 건축물은 흰색 두루마리를 펼쳐놓은 듯한 외관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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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전시실에서는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을 주제로 문자문화를 비교문화의 시각에서 조망한 전시를 운영한다
인류 최초의 문자인 쐐기문자부터 세계 대부분 문자에 영향을 준 이집트문자 · 현재까지 사용하는 가장 오래된 문자인 한자
가장 잘 만들어진 문자로 알려진 한글에 이르기까지 문자 55종의 다양한 유물과 디지털 이미지를 만나볼 수 있다
특히 9개 언어(한국어 · 영어 · 중국어 · 일본어 · 태국어 · 베트남어 · 스페인어 · 프랑스어 · 아랍어)로 전시를 설명하고
복제 전시품을 직접 만져볼 수 있게 하는 등 문자를 재해석한 미술품을 배치해 박물관 관람의 문턱을 낮췄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MI(Museum Identity)
모우(MoW · National Museum of World Writing System의 약칭)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정문

 

 

 

 

국립세계문자박물관 1층 로비

 

 

 

 

스피커 바벨탑 / 김승영 作 2023

1500개의 스피커를 쌓아올려 인류의 문자 발명 이전 언어와 소리의 기원을 상징하는 설치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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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게는 말과 소리가 있었다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 말에 표정과 손짓을 보태 인류는 생각과 감정을 전달했다

그러나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사라졌다. 시간과 공간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말의 한계!

소통이 필요했던 인류는 그 방벽을 뛰어넘고 싶었다. 그 열망으로 만들어진 인류의 발명품이 바로 문자였다

말과 소리는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말로 전하던 생각과 감정이 모두 문자에 담겼다

문자는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불멸의 열망이 문자를 통해 기록으로 재현되었고, 인류는 문자를 통해 소통의 범위를 점점 확장할 수 있었다

인류에게 역사시대가 펼쳐졌다

 

 

 

 

라스코 동굴벽화 / 후기 구석기시대 · 유네스코 세계유산(1979)

동굴벽화와 암각화(巖刻畵)는 인류가 남긴 최초의 기록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과 생각과 소망 등을 바위나 동굴 벽에 그림으로 그렸다

지금까지 전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쇼베퐁다르크 동굴벽화 · 라스코 동굴벽화 · 알타미라 동굴벽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 울주 천전리 각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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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남긴 그림은 동물을 사냥하는 사람으로, 이 그림에는 사냥의 성공을 축하하고,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다

라스코 동굴벽화에는 주술사로 추정되는 사람이 그려져 있어 동굴벽화가 주술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동굴벽화와 암각화는 인류 삶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며, 인류의 예술과 종교생활의 시작이었다

인류의 사고력이 발달할 수록 그림은 점차 간략해져 추상적인 기호로 변화해 갔고, 이는 문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원형 배

1920년대 이라크 티그리스강에서 촬영된 전통 원형 배이다

이와 같은 원형 배는 코라클(Coracle) 또는 구파(guffa)라 불린다

이라크뿐 아니라 인도 · 베트남 등지에서도 사용되었다

 

 

 

 

원형 배 점토판 / 6.0×11.5×2.8cm · 고바빌로니아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이 점토판은 아카드어 문학작품인 「아트라하씨쓰(Atrahasis) 신화」의 일부를 담고 있다

점토판의 앞 · 뒤로 쐐기문자가 총 60줄이 기록되었다

이 점토판은  전통적인 홍수신화의 아카드어 판본으로 볼 수 있다

고대 서아시아 지역에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류가 겪어야 했던 홍수라는 재난을 소재로 삼은 신화가 전해져 내려왔다

대표적인 홍수신화로 수메르어 작품인 「지우쑤드라(Ziusudra) 신화」와 길가메시 서사시가 있다

「지우쑤드라(Ziusudra) 신화」를 아카드어로 번역한 것이 이 점토판에 기록된 「아트라하씨쓰(Atrahasis) 신화」이다

대홍수 신화는 공통적으로 신이 홍수로 인간을 멸망시키려고 하였고, 이를 알게 된 주인공이 배(방주)를 만들어 위기를 극복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노아(Noah)의 방주에도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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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아, 벽아! 갈대 벽아, 갈대 벽아! - 아트라하씨쓰여, 내말에 귀를 기울여라! - 그러면 네가 영원히 살 것이다 - 집을 부숴라! 배를 지어라!

〈원형 배 점토판〉 중에 있는 글이다

 

 

 

 

수메르 회계 점토판 · 원 쇄기문자 석판

이 점토판은 도시 움마(Umma · 오늘날 Tell Jokha)의 특정 관청에서 일 년 동안 출납(出納)한 가축 수를 수메르 쐐기문자로 기록한 장부이다

수메르인들은 가축의 출납이 발생할 때마다 크기가 작은 점토판에 그 내역을 적어서 보관하다가

일정한 기간이 지날 때마다 큰 점토판으로 옮겨 정리하였다
이 문서를 통해 고대 수메르 사회의 행정문서 작성법 및 보존 방식을 알 수 있다
이는 수메르 시대 움마 사회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문서이다
점토판을 다섯 단으로 나누고 · 줄을 그어서 정리하였다. 총 229줄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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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쇄기문자 석판

이 문서는 사람의 이름과 물품 수량을 기록한 목록이다
물품의 출납을 기록한 장부로 보이지만, 물품의 정보와 등장인물의 관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앞면은 위 · 아래 두 단으로 나누어 물품의 수량과 행정 관리인 「갈눈엔(gal-nun-en)」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뒷면에는 물품의 합계와 손 모양의 기호 그리고 갈눈엔의 이름을 적었다. 그가 받은 물품의 총합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사용된 문자는 원 쐐기문자로, 쐐기 형태가 확립되기 이전의 그림문자 단계이다

그림문자 외에 겉모습과 상관없이 개념을 나타내는 어표도 함께 사용되었다

숫자는 반원형 기호로 표기하였다. 반원형 기호는 수량을 나타낼 경우 숫자 60을 의미하고, 도량형일 경우 이쿠(IKU)로 읽힌다

이와 같은 초기 숫자 기호는 쐐기문자가 확립된 이후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이 문서를 점토판이 아닌 석회석에 새긴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이 석판은 쐐기 형태가 확립되기 이전 그림에 가까웠던 문자 단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구데아의 점토 못

라가시의 왕 구데아(Gudea · 재위 / 기원전 2144~기원전 2124)가

닌기르쑤(Ningirsu)신의 신전 에닌누(Eninnu)를 건설하고, 신께 바치면서 기록한 글을 적은 점토 못이다
못 머리부터 꼬리 쪽으로 신을 찬양하는 문장을 수메르어 쐐기문자 10행으로 기록하였다

 

 

 

 

구데아 좌상

라가시의 왕 구데아(Gudea · 재위 / 기원전 2144~기원전 2124)가 에닌누(Eninnu) 신전 건립 후 닌기르쑤(Ningirsu)신에게 바친 조각상이다 
이 조각상은 짙은 녹색 섬록암으로 만들었는데, 머리 부분은 훼손되어 사라졌다
구데아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무릎 위에 에닌누 신전의 평면도가 그려진 서판이 놓여 있고, 오른쪽에 눈금이 그려진 자와 첨필도 조각되어 있다
왕의 헌정문은 팔 · 어깨 · 가슴 · 발을 제외한 인물상 전면에 수메르어 쐐기문자로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닌기르쑤 신전 건립 후 구데아가 조각상을 설치한 뒤 정기적으로 제물을 바쳤다는 말이다
또한 구데아가 왕위에 등극한 과정과 구데아가 이룬 평화로운 세상 그리고 에닌누 신전 건립에 대한 찬양이 담겨있다
구데아는 왕위에 오른 후 대규모 신전 건축 사업을 진행하고, 자신의 형상을 닮은 조각상들을 제작하여 신전에 설치하였다
지금까지 발견된 구데아 조각상은 모두 26개이며, 석회석이나 동석 · 설화석고 등을 사용하였다

교역이 발전한 뒤에는 섬록암을 수입하여 사용하였다

 

 

 

 

함무라비 법전

바빌로니아(바빌리)의 여섯 번째 군주인 함무라비(재위 / 기원전 1792~기원전 1750 추정)가 반포한 법률 문서이다 
검은 섬록암 상부에 함무라비가 태양신 샤마쉬(Shamash)로 부터 왕권을 상징하는 「재는 줄」과 「재는 막대기」를 받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석비 앞 · 뒤로 새겨진 쐐기문자 명문은 함무라비의 업적을 찬양하는 서문과 282개 법조문

그리고 왕의 복을 빌면서 후대인들을 훈계하며 경고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함무라비가 왕위에 올랐을 때 바빌로니아는 소국에 불과했으나

북동부 변방지역부터 점차 세력을 넒혀 나가 최종적으로 북부 앗슈르(Ashur)와 서부의 마리(Mari)를 지배하는 왕국을 세우게 된다
함무라비는 지지세력에게 보상하기 위해 「그 땅 위에 정의를 확립하였다」는 명분으로, 백성들의 빚을 탕감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런 관습은 그의 후계자들에게도 이어졌고, 고대 서아시아 문화 속에 정의롭고 관대한 지배자를 상징하는 징표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함무라비 법전은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을 법률로 규정하는 자가 정의로운 지도자라는 서아시아의 전통을 계승한 유물이라 평가할 수 있으며
현존하는 고대 법률문서들 중 가장 방대한 내용의 규정을 보존하여 고바빌로니아 사회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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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무라비 왕이 반포한 법전으로, 성인 남성의 키가 훌쩍 넘는 크기의 석비이다

맨 위에는 의자에 앉은 태양신 샤미쉬(Shamash)가 함무라비에게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하사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석비의 앞 · 뒤에는 쇄기문자로 282개의 법 조항이 새겨져 있다

 

 

 

 

비쏘툰산

고대의 주요 도시인 바빌론과 엑바타나(Ecbatana, 오늘날 Hamadan)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이 명문은 두 도시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페르시아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명문의 내용은 다리우스왕의 이름과 그의 조상들을 소개하며 시작한다

다리우스는 메대 왕족의 가우마타(Gaumata) 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열아홉 차례 전투를 치렀다

그는 아후라마즈다(Ahura Mazda, 우리미즈다)신의 은총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비쏘툰 명문

명문의 상부 중앙에 새겨진 부조는 명문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다리우스왕은 한 손에는 활을 들고, 한 발로 적을 밟고 서 있다. 그의 앞으로 반란군 아홉 명이 밧줄에 묶인 채 줄지어 있다

그들 위로 날개 달린 아후라마즈다가 공중에서 지켜보고 있다

명문의 해독은 19세기 영국인 헨리 롤린슨(Henry Rawlinson 1810~1895)에 의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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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쏘툰 명문」은 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 1세(DariusI· 기원전 522~ 기원전 486)가 반란군에게 승리한 후 비쏘툰산에 새긴 다국어(多國語) 기념비이다

같은 내용이 고대 페르시아어 · 엘람어 · 아카드어 총 세 가지 언어로 되어 있어 쐐기문자 해독에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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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후라마즈다의 은혜로 그들은 나의 종이 되었다

내가 기록한 것이니 이 조각을 파괴하지 말고 그대가 사는 동안 이것들을 보존하여라

 

 

 

 

드레스덴 문서
유럽 침략 이전의 마야에 대해 알 수 있는 세 개의 문서 중 하나로, 아코디언 형태로 접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드레스덴 문서 · 마드리드 문서 · 파리 문서로 각각 불리는 이 문서들은 소장처를 따라 명명되었는데

후고 전기(900~1492)에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 멕시코 총독이던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1485~1547)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이던 카를 5세(Karl Ⅴ 재위 1516~1556)에게 바치려 가져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드레스덴 문서

책 대부분이 여러 가지 색깔로 그려진 화려한 그림책이었으므로

당시 신대륙이라 불리는 곳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유럽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주로 종교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마야의 신관들이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한 일종의 기도서와 같은 역할을 하거나 과학적인 기록을 적어 놓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종교적인 행사를 준비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

39장의 종이에 78쪽이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을 크게 7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세라비트 엘카딤 스핑크스

이 스핑크스는 원시나이문자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유물이자 최초로 발견된 유물이다
인류 최초의 알파벳이 쓰인 유물로서 그 가치가 높다
1905년 페트리(W. M. F. Petrei) 경이 시나이반도의 세라비트 엘카딤(Serābîṭ el-Khâdim)에 위치한 하토르(Hathor) 신전에서 발견하였다
11년 후인 1916년 가디너(Alan H. Gardiner)는 이 스핑크스 왼쪽 옆면의 마지막 글자인 "LBˁLT"를 "바알라트님에게"(또는 "여주인님에게")로 제안하였다
그는 이 새로운 문자를 원시나이문자라고 불렀고, 지금까지 그의 가설이 폭넓게 수용된다
스핑크스 오른쪽 옆면의 마지막 글자는 소실되었고

원시나이문자의 특성상 몇몇 글자는 판독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정확하게 읽고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스핑크스 오른쪽 어깨에 쓰인 고대 이집트 성각문자(hieroglyph)는

"터키석의 여주인, 사랑스러운 하토르"이므로, 이 스핑크스를 하토르 여신으로 비정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 왕실은 시나이반도의 구리 광산과 터키석 광산을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관리하였다
세라비트 엘카딤은 두 광산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곳에서 고대 이집트 중왕국 시대 셈족 계열의 광산 노동자들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셈족 노동자들은 이 하토르 신전을 찾아와 이집트 글자를 퍽 단순화시킨 글자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염원을 기록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예하우밀크 비석
비블로스(Byblos)의 왕 예하우밀크(Yehawmilk 재위 ?~?)가 바알 여신(Ba'alat)을 위한 신전을 지을 때 세운 비석이다
비블로스 비석으로도 알려져 있다. 비문은 고대 페니키아문자로 적혀있다
글자의 모양이나 문맥으로 미루어 비블로스의 비석 가운데 후대의 것으로 분류된다
1869년 농부가 나무를 심던 중에 우연히 비석을 발견하였는데

이후 근처 신전이 발굴되고 60년 후 프랑스 고고학자 모리스 뒤넝(Maurice Dunand 1898~1987)이

비석의 오른쪽 아래 깨진 부분(현재 베이루트 박물관 소장)도 발굴하여 본문을 완전히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비석 뒷면이 거칠게 마감되어있는 이유는 이 비석을 본문에서 언급하는 신전 문(portico)에 고정했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기원전 1천년대 후반기에 페르시아는 신바빌로니아와 이집트를 모두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삼아 명실공히 고대 근동 세계를 통일한 대제국을 이루었다
지중해 동편의 항구도시 비블로스의 정치 · 문화 · 종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주변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페르시아 시대에도 마찬가지여서 이 비석 상단의 모티프를 설명해준다
본문에서는 비블로스의 옛 이름인 「구발(gbl)」이 사용되었다. 비석 상단의 그림에 중요 인물들이 등장한다
왼쪽에는 구발(비블로스)의 바알 여신이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예하우밀크왕이 제물을 올리고 있다

또한 맨 위에는 본문에서 언급하는 날개 달린 태양이 있다
태양과 예하우밀크왕은 페르시아 양식으로, 구발의 바알 여신은 이집트의 하토르 여신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본문에서 언급하는 구발의 임금 예하우밀크(JḤWMLK)의 이름은 밀크 신께서 살아있게 해주소서란 뜻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과 같이 나를 살아있게 해주소서(9행)라고 기도한다
그의 아버지 야히루바알(JHRBˁL)의 의미는 논쟁 중이고, 그의 할아버지 오리밀크(ˀRMLK)는 밀크 신은 나의 빛이시다는 뜻이다

 

 

 

 

대리석 유골함 항아리

이 유골함은 로마 상류층의 장례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다
그리스도교 양식의 장례 문화가 도입된 로마 제정시대(기원전 27~기원후 476) 중기에서 말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아내인 루크레티아 이아누아리아(Lucretia Ianuaria)가 죽은 남편인 루크레티우스 헤르마디온(Lucretio Hermadion)을 위해 제작했다
유골함의 양쪽에 서 있는 어린 신은 잠이 든 사랑의 신 쿠피도(Cupido Dormiens)를 표현한다
양 어깨에 달린 날개와 한 손에 아래에 새겨져 있는 사랑의 화살들을 담고 있는 화살통을 통해 알 수 있다
쿠피도 신은 금 화살과 납 화살을 사용한다. 금 화살은 사랑을 불 지피고, 납 화살은 사랑을 꺼트린다
사랑을 불 지필 수도 사랑을 꺼트릴 수도 없는 정도로 깊게 잠이 든 쿠피도의 모습은 더는 사랑을 나눌 수 없는 남편을 표현한다
유골함에 사용된 글씨체는 로마의 비문과 주요 관청이나 기념물 및 기념비에 사용된 대문자 세련체(Capitalis Elegans)

혹은 대문자 기념비체(Capitalis Monumentalis)이다
이 글씨체는 글자의 모양이 전체적으로 네모난 모양을 띠고 있기에, 대문자 네모체(Capitalis Quadrata)로 불리기도 한다
기념물이나 비문에 새기는 글씨체로, 제작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화려하고 웅장한 스타일을 자랑한다

 

 

 

 

콥트어 오스트라카

오스트라카란 깨진 토기 조각인 도편(陶片) 혹은 작은 석회암 조각인 석편(石片)을 의미하는 오스트라콘의 복수형이다
오스트라콘은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서기관들이 간단한 문장을 적거나 화가들이 연습 삼아 습작을 그리는 데 자주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공문서나 소장용 문서를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던 파피루스가 상대적으로 비싸고 입수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간단한 메모나 짧은 서신 등은 주로 오스트라콘에 기록되었다.
4점의 오스트라카는 고대 이집트의 아메네모페트란 인물이 이집트 테베에 조성한 분묘에서 발견되었다
아메네모페트는 신왕국 시대 제18 왕조의 아멘호테프 2세(Amenhotep II · 재위 기원전 1427~기원전 1400) 치세에 총리대신으로 활동했던 인물인데

그의 분묘는 매장지로 사용되지 않고 콥트교 수사들의 은신처로 이용되었다
이 오스트라카 역시 콥트교 수사 프란제(프란게 frange/Frange)와 이 지역에서 생활했던 수사들이 남긴 것들로, 작성된 내용은 대부분 편지글이다
이들 중에서 가장 명확히 판별할 수 있는 문자 유물은 프란제가 보낸 서신이다
이 서신에서 그는 영위하고 있는 금욕적인 생활의 이모저모를 설명하는 한편, 다양한 물품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다
프란제가 빈 단지와 함께 서신을 티시에에게 보내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과거 사용된 적이 없는 신왕국 시대의 귀족 분묘에서 종교적 수행을 하며 매우 소박한 음식을 먹었다는 점

엄격한 수행 생활로 인해 현재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메샤 비석

모압(약 기원전 13세기~기원전 400년)의 왕인 메샤(Mesha 재위. ?~?)가 「케리호(QRḤH)신전」의 완공을 기념하여 세운 비이다
모압왕국은 고대 이스라엘의 이웃 왕국이다 
1868년 요르단 디반(Dhiban)에서 발견됐다

발견 당시 비석을 차지하기 위한 열강들의 경쟁으로 부족 내부에서 불안과 갈등이 심화되자

소유자였던 베두인(Bedouin) 족장은 비석을 파괴해버렸다
이로 인해 전체 명문의 3분의 1 이상이 소실됐으나 이후 1873년 루브르박물관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비석의 앞면에는 고대 북서셈어 계열의 모압어가 페니키아문자로 새겨져 있다
메샤왕이 이스라엘의 아합(Ahab 기원전 871~기원전 851)과 겨루어 승리했다는 내용이다
메샤 비석은 고대 근동학 및 성서고고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이는 모압왕국의 역사와 언어를 보여주는 유일한 유물로서 가치를 지닌다

 

 

 

 

파나무와 1세의 하다드

삼알왕국의 왕인 파나무와 1세(Panamuwa I · 재위 ?~?)가 고대 근동의 대표적 풍우신(風雨神)인 하다드(Hadad)에게 바치기 위해 만든 신상이다
파나무와 1세는 대략 8세기 초반기를 다스리던 임금으로, 이 신상은 그의 재위 직후인 기원전 75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물이 귀한 고대 근동지역에서 비와 바람을 다스리는 풍우신은 기원전 2천년대부터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았고

특히 전쟁을 연상시키는 비바람 · 천둥 · 번개 등을 부렸기에 정치적으로도 무척 중요한 존재로 여겨졌다
실제로 파나무와는 신상에서 최고신 엘(ˀEl) · 불과 역병의 신 레셰프(Rešep) · 태양신 샤마쉬(Šamaš) 등을 언급하지만 하다드를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다
파나무와 1세는 하다드 상의 건립을 통해 자신의 지위와 정당성을 과시하고자 한 듯하다 
1890년 독일 발굴팀이 진치를리(Zincirli) 북쪽 7km에서 삼알왕국의 공동묘지와 이 신상을 찾았다
본래 4m가 족히 넘는 크기로 추정되나, 크게 훼손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본문 일부가 누락되어 완전한 해독에 어려움이 있다

 

 

 

 

코덱스 시나이티쿠

언셜체(Uncialis)를 사용하여 양피지에 필사된 그리스어 성서로, 구약성서 대부분과 신약성서 전부를 담고 있다
원래는 구약성서도 전부를 담고 있었으나 부분적으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단어와 단어를 떼어 쓰지 않고 계속 이어서 쓰는 이어쓰기(scriptio continua) 방식으로 필사되었다
현재 영국도서관(British Library) · 라이프치히대학교 도서관 · 성 카타리나 수도원(Saint Catherine's Monastery)

러시아국립도서관(National Library of Russia) 네 곳의 도서관에서 나누어 소장하고 있으며, 영국 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양이 제일 많다
언셜체는 4세기에서 8세기까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성서와 기독교와 관련된 문헌(성경 주석서 등)을 필사할 때 사용된 대표적 서체다
이 서체는 대문자체인데 소문자체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서체로 라틴문자 서체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코덱스 시나이티쿠스는 비록 일부가 소실되기는 했지만,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전체를 담고 있는 네 개 밖에 안되는 언셜체 코덱스 중 하나이다
나머지 세 개는 코덱스 바티카누스(Codex Vaticanus) · 코덱스 알렉산드리누스(Codex Alexandrinus) · 코덱스 에프라이미(Codex Ephraemi)이다
이 네 개의 코덱스 중에서 코덱스 시나이티쿠스에 있는 신약성서는 현존하는 그리스어 신약성서 판본 중 제일 오래된 것이다
또한 텍스트에는 상당히 많은 양의 수정작업과 주석이 달려있어서, 성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킬라무와 석비
9세기경 삼알왕국을 다스리던 킬라무와(Kilamuwa 재위 840~835 / 815~810)의 업적을 알리는 기념비이다
1902년 독일 발굴팀(Die Deutsche Orient-Comité)이 튀르키예 진치를리(Zincirli) 회위크(Höyük)의 왕궁 유적(Vorhalle J 1)에서 이를 발견하였다 
석비 상부 왼쪽에 조각된 킬라무와 부조는 왼손에 수련을 들고, 오른손으로 상징물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 부조는 아시리아 양식과 삼알 고유의 양식이 공존한다
석비의 명문은 고대 아람문자로 총 16행이 새겨졌으며, 가운데 굵은 선을 기준으로 위 · 아래로 나뉜다
윗부분(1~8행)은 킬라무와가 아시리아제국의 힘을 빌려 다누나(Danuna) 사람들을 물리쳤음을 알린다
아랫부분(9~16행)은 킬라무와의 자비로움을 찬양하고, 후대에 대한 당부를 남겼다
맺음말에 등장하는 「바알(BaꜤal)」은 고대 근동에서 숭배했던 풍우신(風雨神) 신앙을 보여준다
이 석비는 기원전 1천 년대 전반 시리아 · 팔레스티나(Syria-Palestina) 지역의 역사 및 종교적 정보를 담은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엘레판틴 파피루스

엘레판틴섬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Samaria) 총독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寫本)이다

엘레판틴섬은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Cambyses Ⅱ 재위 기원전 530~기원전 522) 시기 유대인 용병 부대가 운영된 곳이다

편지는 앞면에 17행 · 뒷면에 13행이 아람문자로 쓰여 있다

유대인들이 다리우스 14년(기원전 410 또는 409)에 무너진 야후(Yahu) 신전의 재건(再建)을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다

고대부터 엘레판틴섬의 거주민들은 크눔(Khnum)신을 섬겼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야후 신전은 크눔 신전과의 경계 다툼 즉,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무너진 것으로 추정된다

유대인이 유대인에게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 편지를 보냈다는 점은 페르시아제국 시기 아람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또한 이 편지는 엘레판틴의 유대인 공동체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서도 동등한 권위를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문서는 엘레판틴 문서들 중에서도 역사적 가치가 높다

 

 

 

 

말의 책

말을 색상에 따라 분류하고, 말에 대한 관리 지침을 담고 있다

말의 책은 수의사 살리호트라(Salihotra)가 작성한 산스크리트어 작품이 원본이다

이 책은 무굴제국 샤자한(Sha-h Jaha-n 재위 1627~1658) 시기

압드 알라 칸 바하두르 피루즈 장(Abd Allah Khan Bahadur Firuz Jang)의 번역본의 필사본이다

본문에 그려진 총 8개의 말 그림은 시크교 예술가 키산 싱(Kishan Singh, 1899~1929)이 그린 것이다

이 책은 여러 번역본이 존재한다. 이는 전쟁에서 말이 핵심적인 수단이었던 무굴제국에서 이 책이 지침서로서 매우 인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15세기 이후 페르시아 문화권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된 나스타을리크체(Nastaliq script)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어제증정청문감(御製增訂淸文鑑)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시기에 편찬된 부류(部類) 사전인 《어제증정청문감》은

청나라 강희제(姜熙齊) 시기에 편찬된 어제청문감(Han i araha manju gisun i buleku bithe 御製淸文鑑)(1708년에 서문 작성)에

내용을 더하고 수정한(增訂) 것으로, 크게 바뀐 것은 다음과 같다

(1) 만주문 옆에 한문 대역어를 병기하여 만주어-한어(滿漢) 사전으로 바꾸었다(뜻풀이는 여전히 만주문으로만 제시)

(2) 어제청문감과 마찬가지로 만주어로 뜻풀이를 달아 놓았으나, 경사(經史)로부터의 인용 어구는 삭제하였다

(3) 『어제청문감』에 비해 6,700여 개의 새로운 만주어 어휘를 추가하였는데

여기에 포함된 것은 『어제청문감』의 한어 음차 차용어를 만주어 번역 차용어로 옮긴 것과 새로운 제도 및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제정된 문화어 등이다
청나라에서 편찬된 만주어 사전은 황제(한 汗)의 명으로 정서법과 표준말의 규범을 보이기 위하여 편찬된 사전과

민간에서 편찬한 사전을 통틀어 지금까지 보고된 것만 모두 24종이나 된다

어제청문감 서문에서 볼 수 있듯이, 청나라의 지배 계층이었던 만주족이 『어제청문감』 등의 규범 사전을 편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수적으로 문화적으로 우세한 한어 및 한족 문화의 영향으로 사라져가는 자신들의 말과 글을 정비하여

규범을 정하고 문화어로 만들어서 오래도록 보존하려는 것이었다

청나라의 몰락 이후 만주어는 절멸에 가까운 언어가 되었지만

사전의 편찬에 국력을 기울여서 자신들의 말과 문화를 지키려고 했던 만주인들의 노력은 지금도 되새길 만하다

 

 

 

 

 

초학필독(初學必讀)

이 책은 한어-만주어(漢滿) 대역 유별(類別) 사전이다

1890년(광서 光緖 16) 청나라 경도(京都) 취진당(聚珍當)에서 목판본 6권 6책으로 간행하였다

초학필독은 그 내용이 대부분 어제증정청문감에서 가져온 것이 확실한데

표제어 수가 훨씬 줄어든 데다가 만주어 뜻풀이 부분이 제외되었으므로 만주어 연구의 측면에서 그 가치가 현저히 적다

한편 자모(字母) 순으로 배열한 음서(音序) 사전인 〈청문휘서(淸文彙書)〉(1724)와 청문보휘(淸文補彙)(1786)

이 둘을 합한 청문총휘(淸文總彙)(1897)가 청나라 말기까지 꾸준히 사용되었는데

부류(部類) 사전인 『초학필독』에 비해 이들 사전이 만주어를 공부하면서 난해 어구를 검색하는 데 있어서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초학필독은 6권 6책으로 이루어져 그 규모가 단촐하고, 필수적인 어휘만을 포함하고 있어서

처음 만주어를 배우는 이가 유별로 만주어 어휘를 익히기에는 상당히 편리하였을 것임은 틀림이 없다

 

 

 

 

쿠란
이슬람교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경전이다. 이는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전해진 알라의 계시를 집대성한 책이다

신의 말씀이 아랍어로 계시되었기에, 쿠란은 아랍어와 아랍문자의 확산과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쿠란은 맘루크왕조(Mamluk Dynasty 1250~1517) 시기 이집트 또는 시리아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은 각각 맘루크와 오스만(Osman) 양식으로 장식되었다

「절(節 Aya)」을 표시한 장미꽃 모양의 로제트(Rosette)는 일카니드(Ilkhanid) 쿠란의 특징이다

장(章 surah) 제목의 금채(金彩) 장식은 다마스쿠스(Damascus) 쿠란에서 주로 보인다

뒷면의 와크프(waqf) 표시는 이 책이 기부금으로 제작되었음을 암시하는데

정교한 문체와 그 장식을 통해 왕실에서 고용한 필경사가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쿠란은 나스크체(Naskh) · 술루스체(thuluth) · 무학카크체(muhaqqaq)와 같이 다양한 서체들이 사용되어 주목된다

무슬림들은 신의 말씀이 담긴 쿠란의 필사를 중요한 종교적 행위로 여겼다

이러한 필사의 전통은 오랫동안 지속되며 아랍 서체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야제디 석주
야자꾸마(Yazakumar)가 그의 아버지 짠싯따(Kyansittha 재위 1084~1112/13)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문이다

석주의 4면에 버마어 · 쀼어 · 몬어 · 팔리어 총 4가지 언어로 기술되었다

기록에 사용된 문자는 버마문자 · 쀼문자 · 몬문자이다. 이를 통해 당시 여러 언어군의 종족들이 공존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1112년 야자꾸마는 아버지 짠싯따왕이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영주로 있던 북부 친(Chin)에서 바간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과거 생모 땀불라의 유품과 토지를 정리하고 짠싯따의 쾌유를 비는 마음을 담은 금불상을 제작하여 바친다

하지만 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과 그의 치적을 담은 기념비를 세웠다

비문의 완성연대는 미얀마력 475년이다. 
이 기록은 최초의 버마어 표기이자 바간왕조의 역사 · 문화 · 종교적인 내용을 함께 연구를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미야제디 비문의 버마문자는 안정적인 몬문자 표기와는 달리 불안정한 형태이다

같은 단어라도 표기의 통일성이 없고 오타들이 그대로 기록되었다

또한 동일한 뜻의 조사 형태도 일부는 몬문자로, 일부는 버마문자로 표기된 점을 통해

몬문자를 거쳐 버마문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람캄행왕 비문
타이문자로 새겨진 최초의 비문이다

람캄행은 수코타이왕조의 3대 왕으로, 1283년에 타이문자를 만들어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비문은 돌기둥의 4면에 새겨져 있다. 1면의 1행부터 18행의 첫 단어까지는 왕실의 이력을 기록하고 있다

1면 18행부터 4면 11행의 다섯 번째 단어까지는 당시의 정치와 경제 · 사회와 법제도 · 문화와 풍습 · 종교와 신앙에 대한 서술이다

이 부분에 람캄행왕이 타이문자를 만들어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나머지 부분은 람캄행왕의 위업을 칭송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에 불교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어버이의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온정주의적 국왕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기록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타이에서 13세기의 역사 기술은 몇 안 되는 비문에 의존하고 있다

수코타이 역사를 「비문 속의 역사」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비문은 문자형이 뚜렷하게 남아있고, 수코타이왕조의 상황을 다방면에서 다루고 있어 타이 역사 연구에 가장 중요한 사료로 꼽힌다

 

 

 

 

팔천송반야경 패엽경(八千頌般若經 貝葉經)
팔천 개의 게송(偈頌 Ghaṭa)으로 이루어진 반야경이다

이 경전은 초기 대승불전 중 하나이며, 반야부(般若部) 경전 중 가장 빠르게 성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와 공(空)의 개념 · 보살의 자격 등『반야경』으로서 갖추어야 할 내용을 완비(完備)하고 있으며

네팔에서는 대승불전의 「구법(九法, nava-dharma)」 중 하나로 꼽힌다
이 필사본은 야자수 잎에 필사되었으며, 12세기 중반 이후 인도 북동부의 비하르(Bihar)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전이 총 몇 장으로 구성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중 일부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Los Anseles County Museum of art)에 소장되어 있다

필사본의 중심에는 남성의 보살신이 그려져 있다

파란색의 피부와 세 개의 눈, 그리고 여섯 개의 팔을 가진 이 보살신은

죽은 이의 시신 위에서 춤을 추고 어둠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적색의 광환光環에 둘러싸여 있다

또한 보살신 양쪽으로 사각형 안에 연꽃잎이 그려진 그림이 있는데, 이는 구멍에서 시야를 돌리게 하기 위한 장식으로 보인다.
필사본의 문자는 싯다마트리카문자 계열의 초기 네팔문자(Early-Nepali script)로 판단된다

필사본 뒷면의 문자 표기 방식은 앞면과 다르게 나타난다. 글자를 지우고 다시 쓴 흔적도 보인다

이와 같은 현상은 기록보다 말로 전달하는 문화인 인도의 구전(口傳) 전통에 기인한다

이러한 이유로 엄격하고 표준화된 표기법 외에도 일상적인 표기 습관을 필사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판차락사 패엽경(다섯 수호여신 패엽경) · 바가바드 - 기타 주석 · 사원 회계에 관한 패엽문서

 

 

 

 

판차락사 패엽경(다섯 수호여신 패엽경)

『판차락사』는 불전(佛典)에서 다라니(陀羅尼, Dhāraṇī)로 분류되며, 「다섯의 수호 여신(보살)」을 뜻한다

다라니경은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주술(주문)을 담고 있는데, 이는 재앙을 막거나,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본 경전의 대표적 개념인 「수호」 역시 여러 주문을 통해 표현된다

붓다의 말씀이 다섯 여신을 통해 전해진다는 『판차락사』는 다섯 경전으로 구성된다

이 필사본은 대수구다라니경(大隨求陀羅尼經) · 불설수호대천국토경(佛說守護大千國土經) · 공작왕주경(孔雀王呪經)

대한림성난라다라니경(大寒林聖難拏陀羅尼經) · 불설대호명대다라니경(佛說大護明大陀羅尼經)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필사본은 총 121장으로, 100번째 장이 빠져있는 점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이다

일부 장은 다시쓰기 · 교정 흔적 등이 보인다

사본 전체에 잎들을 엮기 위한 두 개의 구멍이 있고, 각 다라니의 첫 번째 장 중앙에 여신상이 그려졌다

위 · 아래 나무 덮개에는 각각 여신 5위와 자이나불(Jaina佛) 5위가 그려졌다

 

 

 

 

바가바드 - 기타 주석

이 필사본은 힌두교의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의 주석서 일부이다

산스크리트어와 데바나가리문자로 필사된 이 주석서 필사본은 총 17매인데, 본문을 가운데에 쓰고 주석은 그 아래와 윗부분에 배치했다

각 폴리오 뒷면 왼쪽 상부에는 경전의 약칭(略稱)을 적었고, 그 아래에 쪽수를 매겼다

양 끝단의 붉은 구획선 바깥에는 경전의 약칭(略稱)과 쪽수 또는 오탈자를 적었다

바가바드-기타는 인도의 2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 제6권 「비슈마파르반」에 수록되어 전해진다

주인공 아르주나(Arjuna)가 그의 사촌들과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번민에 빠지게 되고

이러한 고민을 그의 친구이자 조언자인 크리슈나(Krishna)와 나누는 철학적 대화이다

크리슈나는 힌두교의 신 비슈누의 화신(化神)으로, 이 대화 내용은 힌두 고유의 여러 철학 사상들을 보여준다

바가바드-기타는 가장 대중적인 힌두교 경전이기 때문에 많은 주석서가 존재한다

이 필사본은 대략 6백 년 전의 사상가 슈리다라 스와미(Śrīdhara Swāmī)가 작성한 주석을 데바나가리문자로 필사한 것이다
본문은 바가바드기타 2장 아드야야(adhyaya)의 2번째 게송(偈頌)부터 시작한다

2장은 삶과 자아 · 죽음에 대한 대화가 제시된다

특히, 자아에 대한 관점은 힌두 철학인 베단타(Vedānta) 등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사원 회계에 관한 패엽문서

이 문서는 인도 남부 타밀지역의 사원(혹은 특정 집안)에서 기록한 회계 장부의 일부로 추정된다

이 패엽문서는 비교적 폭이 좁은 야자나무 잎 앞 · 뒷면에 기록되었으며, 총 24매가 남아있다

나뭇잎을 철필로 긁은 후 잉크를 먹인 흔적으로 추정할 때, 비교적 최근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패엽을 묶기 위한 철공(綴孔)은 왼쪽에 하나만 존재하며, 획일적으로 매끈하게 뚫었다

한 문장을 좌측에서 우측까지 쭉 써내려가는 패엽경과 달리, 이 문서는 패엽의 각 면을 네 개의 문단으로 나눠서 내용을 기록하였다

패엽 중간 부분과 양끝의 폭이 다르기 때문에 좌 · 우측 끝부분의 텍스트는 대부분 4줄로 기록하게 되고, 중간의 텍스트들은 6줄이나 5줄로 기록했다

이 문서는 타밀문자로 기록되었지만, 각 글자를 떨어트려 쓰는 일반적인 타밀어의 서법과 달리

글자들을 서로 연결하여 마치 영어의 필기체처럼 글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와 같이 4등분된 텍스트 구성과 필기체처럼 연결된 기록 방식은 다른 패엽 사본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선견율비바사소에 대한 복주서

율장 주석서에 대한 복주서를 버마어로 대역한 것이다

대역이란 팔리어 한 단어 한 단어를 버마어로 번역한 것이다

제작 연도는 마지막 장에 미얀마력 삭카라자 1259년 음력 12월 하현의 1일에 썼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오전 10시에 마쳤다고 한다

미얀마 삭카라자 연도는 가깝게 잡으면 1897년 오래된 것으로 계산하면 1337년까지 올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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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박가 패엽경

이 패엽경은 총 121매의 폴리오(polio)로 구성되었으며, 앞·뒷면에 약 10줄씩 기록되었다

이는 야자나무 잎을 종이처럼 재단한 다음 날카로운 철필로 긁어 내용을 적은 전형적인 패엽경의 모습을 보여준다

「패엽」이라는 말은 본래 잎(葉)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빠뜨라(pattra)를 음사한 것이다.
이 패엽경은 불교 수행자들의 계율(戒律)을 담고 있는 율장(律藏) 가운데 『마하박가』의 후반부를 담고 있다. 
후반부는 짧고 간단한 사례들을 통하여 출가가 가능한 상황과 규정들에 대해 설명한다

사용된 언어는 팔리어이고, 문자는 스리랑카의 싱할라문자이다

싱할라문자는 근본적으로 북인도의 브라흐미문자에서 파생되었지만

초기 남인도 브라흐미문자의 변형인 그란타(Grantha)문자에서 더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 필사본은 패엽경의 물리적 형태 및 제작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흔적이 잘 남아있다

폴리오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철끈을 넣을 수 있는 철공(綴孔)이 있는데, 그 주위로 사각형의 여유공간을 두었다

이는 철끈의 움직임에 따라 철공이 훼손되더라도 경전 내용이 보존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패엽경 측면은 섬유가 뜯어져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철다리미 등으로 태운 것으로 보인다

패엽경에 사용된 서체는 「백조체(Haṃsalipi)」로 한 장의 잎 위에 매우 작고 정교하게 적혀있다

 

 

 

 

티베트 팔천송반야경(八千頌般若經)

팔천송반야경은 「팔천의 게송으로 이루어진 반야경」이란 의미이다

반야경이란 지혜의 완성을 의미하는 반야바라밀다를 선양한다는 뜻을 지닌 대승경전으로

「팔천송반야경」은 반야경 가운데서도 가장 일찍 만들어진 경전이다

이「팔천송반야경」은 한문 경전에서는 소품 계통의 「반야경」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후 이만오천송, 십만송 등의 반야경 즉 한역의 대품 계통 경전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이 「팔천송반야경」은 이후 만들어진 모든 반야경의 원초적인 형태를 띄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승 보살의 가장 중요한 실천 덕목인 반야바라밀다의 지혜와 실천을 강조하는 「팔천송반야경」은

기원 전후 소품 계통의 반야경으로 중국에 전해지고 티베트에는 8세기 불교 초전기에 번역되고 소개된다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

세종(재위 1418~1450)이 백성들을 위해 직접 창제한 문자 〈훈민정음(한글)〉의 사용 방법 등을 한문으로 해설한 책이다

세종은 훈민정음(한글) 28자를 1443년에 창제하였고 이 문자에 대한 자세한 풀이와 보기를 담은 책 『훈민정음』을 1446년에 펴냈다

이 책은 문자에 대한 해설과 용례가 있어서 특별히 《훈민정음 해례본》이라 부른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총 33장으로, 문자 「훈민정음」을 만든 배경과 목적 · 창제 원리 등이 자세히 기술되었다

내용 구성은 세종이 쓴 어제서문(御製序文)예의(例義)」 · 신하들이 쓴 해례(解例) · 제자해(制字解) ·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 종성해(終聲解) · 합자해(合字解) · 용자례(用字例)정인지 서문(序文)으로 되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오랜 세월 동안 보이지 않다가 1940년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었으며

그 책을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이 사들여 지금은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문자 창제에 관한 분명한 기록을 책으로 남겨 전한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유일하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국내외에서 그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삼국유사
고려 시대 승려 일연(一然 1206~1289)이 1281년에 편찬한 역사서이다

특히 삼국유사에는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해 우리말을 기록한 향가(鄕歌) 14수가 전한다

향가에서 동사나 명사 등의 어휘는 한자의 음이나 뜻을 이용해 표기하고, 조사와 어미 같은 문법 요소는 한자의 음을 써서 표기하였다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의 승려 월명사(月明師)가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10구체 향가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예시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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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內 秋察 早/隱 風/未 (※ '/'로 어휘부와 문법 형태부를 구별한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한자의 음을 이용해 어휘 요소 '於內(어조사 어+안 내: 어느)'를 기록하거나

한자의 뜻과 음을 이용해 어휘 요소 '秋察(가을 추+살필 찰: 가을)', '早隱(이를 조+숨길 은: 이른)'을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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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호리 출토 붓과 손칼

창원 다호리(茶戶里) 유적에서 발굴된 기원전 1세기 붓과 손칼이다

붓과 손칼은 목간과 같은 나무에 글자를 쓸 때 필요한 문방구이다

붓은 먹을 묻혀 글을 쓰는 도구이고, 손칼은 나무를 깎아서 쓴 글을 지우는 도구이다.
경상남도 창원 다호리 유적은 편평한 구릉에 조성된 원삼국 시대 전기의 대표적 집단 매장 묘역이다

이 가운데 1호 무덤에서는 칠기와 철기 등 주변 다른 유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물이 매장되어 있었다

칠기는 검은 칠을 주로 하였다. 또한 금속 · 토기뿐만 아니라 부채 자루 · 칼집 · 화살통 등 각종 도기에 두루 칠을 활용하였다

이는 중국 한나라 칠기와는 차이를 보이는 독창적 칠기 문화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붓과 손칼이 발견된 것이다

낙랑을 제외하고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문자 유물은 고구려가 4세기~5세기, 백제와 신라는 6세기부터이다

다호리 붓과 손칼은 그 이전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도 문자가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세종대왕 어보(世宗大王 御寶)

세종이 승하한 1450년, 존시(尊諡)를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으로 하고, 묘호(廟號)를 「세종(世宗)」으로 올리면서 만든 어보이다

영문(英文)은 학문의 덕이 빼어남을, 예무(睿武)는 무예에 통달함을, 인성(仁聖)은 어질고 덕망이 있음을, 명효(明孝)는 명철하고 효성스러움을 의미한다

이 어보는 곧 세종을 상징한다
1450년 2월 17일, 세종은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당뇨와 눈병 등으로 일찍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단 하루도 정치와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세종은 어진 정치를 몸소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세종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며, 그 내용은 한결같이 이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세종 시대의 태평성대를 중국의 요임금과 순임금이 다스리던 태평한 시대에 빗대어 이야기하였고

세종을 「해동요순(海東堯舜 우리나라의 요임금 · 순임금)」으로 칭송하였다

세종은 지금까지도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위대한 임금으로 기억되고 있다

 

 

 

 

월인석보
세조(世祖 재위 1455~1468)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합하여
1459년에 처음 간행한 책이다

월인석보 권1·2의 첫머리에 훈민정음 언해본이 실려서 전한다.
훈민정음 언해본은 『훈민정음 해례본 가운데 세종이 지은

어제서문(御製序文)과 새 문자 28자를 소개한 예의(例義) 부분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한글로 기록한 책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엾게 여긴 세종이 누구나 쉽고 편하게 쓸 수 있도록 직접 한글을 창제했음을 15세기의 우리말로 분명히 서술하고 있다
훈민정음 언해본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없는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우리말의 치음(齒音) 'ㅅ, ㅈ, ㅊ'을 약간 변형시켜서

우리말에 없는 중국어의 정치음(正齒音 ᄾᅠ/ᅐᅠ/ᅕᅠ)과 치두음(齒頭音 ᄼᅠ/ᅎᅠ/ᅔᅠ)을 구별하여 표기하도록 제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외국어의 말소리를 적는 데에도 한글을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용비어천가
조선의 건국과 번영을 기원하는 노래와 그 주석을 실은 책이다

한국어 문장을 한글로 기록한 최초의 문헌으로, 한국어 문장을 먼저 쓰고 한문으로 번역문과 주석을 붙였다
《용비어천가》는 1445년 권제(權踶) · 정인지(鄭麟趾) · 안지(安止)가 지은 후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 정인지(鄭麟趾) 등이 주석을 달고 서문을 작성하여 1447년에 10권 5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목조(穆祖)로부터 태종(太宗)까지 6대의 사적과 이에 대응하는 중국 역대의 사적을 짝을 맞춰 기술하였다

대체로 각 사적의 기술에 앞서 125장으로 된 우리말 노래를 먼저 싣고 그에 대한 한역시(漢譯詩)를 붙였다

주석은 서사시와 사적 등의 내용을 한문으로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한문으로 된 주석 내용 가운데 고유어나 외국어로 된 지명 · 인명 등의 고유명사, 일부 보통명사는 한자 표기 뒤에 한글 표기가 병기되었다

제4장의 「赤島(블·근:셤)」은 고유어 지명이고 「東良北(도ᇰ랴ᇰ:뒤)」는 한자어+고유어 지명이다

또한 한글 창제 직후에 이미 외국어 발음을 적는 데 한글이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兀良哈(오라ᇰ·캐)兀狄哈(우디·거)」 · 豆漫(투·먼)童巾(투ᇰ·컨)은 각각 여진의 부족 이름과 여진어 지명을 적은 사례이다

제51장에서는 여진어 인명인 甫亦莫兀兒住(ᅗᅬ·모월·쥬)奧屯完者(ᅌᅡᇢ·툰원·져)

초성의 순경음 피읖(ㆄ)과 종성의 순경음 미음(ㅱ)이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용비어천가 외에 다른 문헌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ᅗᅬ, ᅌᅡᇢ' 같은 음절이 사용되었다

 여진어 지명인 紉出活失(닌ᅒᅯ·시)에도 『용비어천가』에서만 나타나는 자음군 표기 'ᅒᅠ'가 사용되었다
용비어천가는 새 문자 훈민정음(한글)이 우리말을 온전히 적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가장 먼저 지은 한글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또한 지금은 사라진 옛 고유어 및 외국어 지명 · 한글 창제 초기의 우리말 표기법 등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사리영응기
세종의 명을 받아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펴낸 책이다

세종이 열성조(列聖朝)의 명복을 빌기 위해 궁궐 안에 불당을 짓고 낙성식을 열었을 때 불전에서 빛이 나고 부처의 사리가 나타났다는 내용이다

책의 끝에는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이 중 47명의 이름은 한글로 적혔다
한글로 적힌 이름은 〈막동 · 타내 · 올마대 · 오마디 · 오마대 · 오망디 · 오미디 · 쟈가둥 · 마딘 · 도티 · 고소미 · 매뇌 · 가리대

올미 · 더믈 · 샹재 · 검불 · 망오지 · 똥구디 · 수새 · 쇳디 · 랑관 · 터대 · 흰둥 · 우루미 · 어리딩 · 돌히 · 눅대 · 아가지 · 실구디

검둥 · 거매 · 쟈근대 · 북쇠 · 은뫼 · 망쇠 · 모리쇠 · 강쇠 · 곰쇠〉 등으로 모두 우리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고유어 이름의 경우, 한자로는 소리값 그대로 적을 수 없지만, 한글로는 소리값 그대로 적을 수 있었다

한글이 있었기 때문에 한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제대로 이름을 쓰고 부를 수 있었다

 

 

 

 

청구영언(靑丘永言)

조선 후기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580수의 노랫말을 모아서 김천택(金天澤 ?~?)이 펴낸 우리나라 최초의 노래집이다

고려 말기부터 1728년 편찬 당시까지 임금 · 사대부 · 기녀 · 중인 · 무명씨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노랫말이 한글로 기록되어 실려 있다

김천택은 이 책을 펴내기 위해 10년 넘게 우리 노랫말을 수집하였고

당시까지 전해 내려온 가곡을 작가의 신분이나 지위보다 노랫말의 가치를 고려해서 정리하였다

또한 당대인들이 선곡한 곡을 중심으로 전체 틀을 짜고, 작가가 분명한 작품은 작가별로, 작자미상의 작품은 주제별로 분류하여 체계적인 구성을 갖추었다

작가는 신분에 따라 구분하고, 시대순으로 수록함으로써 노랫말 전승의 역사까지 분명히 하였다

이와 같은 체제는 이후 가곡집 편찬의 기준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청구영언의 편찬을 계기로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노랫말이 비로소 문자 기록으로 전해질 수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우리말 노래를 쉽게 익히고 전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한글 노랫말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전환점을 갖게 되었다

 

 

 

 

한글소지

9세기 장씨 성을 가진 평민 여성이 전답 소유권 분쟁으로 관청에 올린 소지(所志)이다

소지는 조선 시대 개인 사이의 분쟁이 발생했을 때 관청에 제출하는 소송 · 청원 문서를 가리킨다
소송 사건의 주인공은 장소사(張召史)로 불리는 평민 여성이다

그녀의 남편은 김유복으로 시골에서 농사짓던 사람이다

장소사는 출가 후 고향을 떠나 살았기 때문에 친정 식구들과는 소식을 자주 주고받지 못했다

어느 날 홀로 살던 장소사의 부친 장봉손이 세상을 떠났다. 장봉손에게는 농사짓던 전답이 있었다

이 전답의 소유권을 진외육촌 고희득이 주장하였다. 힘들고 힘든 장소사의 소송은 여기부터 시작하였다
조선 시대 여성은 소송을 할 수 있도록 법률상 보장되었다. 다만, 관청에 올리는 소장은 반드시 일정한 격식을 갖춰서 글로 작성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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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배운 양반들은 어렵지 않게 소장을 쓸 수 있었지만, 글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

특히 평민 여성들에게 소장을 쓰는 것은 여간 고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444년 2월 20일 최만리 등이 올린 갑자(甲子) 상소에서 한글과 관련된 송사에 대한 논의가 있다

세종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 언문(한글)을 배워서 바로 읽고 쓸 줄 안다면, 송사로 심리를 받으면서 억울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반면 최만리는 이를 반박하며, 송사의 공평함과 공평하지 못함은 송사를 담당하는 관리의 판결에 있는 것이지

백성들이 글을 알고 쓰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하였다

최만리는 조선 시대 소송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애시당초 소장을 관청에 제출하지도 못했고

대필을 부탁해서 겨우 소장을 접수했어도 심리 과정에서 기록된 진술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세종은 문자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기존 지식 체계가 정체될 수 있을지라도 꼭 한글이 역할을 해야한다는 생각이었다

세종은 이를 편민(便民)이나 위민(爲民)이라고 하였다

한자 중심의 문자 생활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던 일반 백성들에게, 특히 평민 여성들에게 한글은 유일하면서 완벽한 소통 수단이었다

비록 더디더라도 세종이 어제 서문에서 밝힌 민본 정신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일상이 되고 있었다

 

 

 

 

훈맹정훈 · 훈맹정음 유래 · 한글점자 원고

박두성은 당시 훈민정음 반포일로 추정된 1926년 11월 4일에 훈맹정음을 발표했다

훈맹정음은 자음과 모음 · 숫자도 다 들어가 있는 서로 다른 63개의 한글점자다

배우기 쉽고 · 점의 개수가 적고 · 서로 헷갈리지 않아야 한다는 세 가지 원칙에 기초하여 만들어졌다
자음 첫소리는 기본점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자음의 받침은 자음의 첫소리를 좌우 또는 상하로 이동시켜 만들었는데, 좌우 이동이 어려운 경우는 아래로 1점씩 이동시켜 글자를 만들었다

모음은 대칭성을 이용해 글자를 만들었다

그가 쓴 《맹사일지》에는 「점자는 어려운 것이 아니니 배우고 알기는 5분이면 족하고 읽기는 반나절에 지나지 않으며

4 · 5일만 연습하면 능숙하게 쓰고 유창하게 읽을 수 있소

어서 바삐 점자를 배워야 원하는 대로 글을 읽게 되는 것이요」라고 기록하며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점자임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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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성이 1946년 3월에 쓴 「훈맹정음의 유래」의 육필 원고 정본이다

원고는 낱장 25장으로 종이 상단에 2개의 구멍을 뚫어 실로 묶어놓았다

〈맹인과 문자〉 · 우선 32점식(三二點式) · 점자연구회와 고찰들의 내용이 실려 있다

 

 

 

 

경원 여진자비

경원 여진자비는 함경북도 경원(慶源) 동원면(東原面) 화동(禾洞)의 옛 절터에 있던 여진문자 비석이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위촉한 고적 조사위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1870~1953)가 비석을 발견하였고

1918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겼다. 현재 이 비석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비석은 사면 모두에 여진문자가 새겨져 있어서 관련 자료의 유형으로는 유일하다

해독 가능한 비문의 여진문자는 대략 575자 정도이며, 전체 비문은 아직 완벽하게 해독되지 않았다

비문의 전반적인 내용은 사찰을 건립하는 과정과 그 건립에 공덕을 베푼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글자와 인명 · 지명 · 관직명 · 어휘 등이 비문을 통해 새롭게 소개되었다.
이 비석의 건립 연대는 연구자들에 따라 1138년 · 1141년 · 1156년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비석에 사용된 여진문자도 연구자들에 따라 여진 대자 · 여진 소자 · 여진 대자와 소자의 합용으로 보고 있으며

이 부분은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6세기 중반, 영토를 확장한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신하들과 두루 살피고 북한산 비봉에 세운 기념비이다

비석을 세운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555년(진흥왕 16) 진흥왕이 북한산을 다녀갔다는 기록에 근거해 그 무렵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석은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상단부가 마멸되어 새겨진 내용을 완벽하게 복원하기는 어렵다

비신(碑身 비몸돌) 상단부에 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개석(蓋石 덮개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덮개돌은 발견되지 않았다. 비신은 북한산 비봉 자연 암반을 파내고 받침돌 위에 설치되었다

비석은 일제강점기에 두 동강 난 채 비봉 서쪽 30km밖에 방치되어 있었으며, 비석 뒷면의 여러 구멍은 한국전쟁 때 총탄 흔적이다

현재 비석은 보존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관리되고 있으며, 원래 자리에는 복제품이 설치되었다
비석 오른쪽 측면에는 조선 시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두 번에 걸쳐 비석을 실사하고 새긴 명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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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신라 진흥대왕의 순수비이다. 병자년(1816년) 7월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보다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金敬淵來讀.
(2) 정축년(1817년) 6월 8일 김정희와 조인영이 함께 와서 남겨진 68자를 해독하다
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同來, 審定殘字六十八字
비록 마멸이 심하지만, 비석의 내용은 비슷한 성격의 다른 순수비와 남아있는 글자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비문은 제목, 순수하게 된 경위, 왕을 수행한 관리들의 명단 등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6세기 신라 영토 팽창 시기인 진흥왕 시대 정치 상황과 당시 신라의 문자 생활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지주중류비

지주(砥柱)는 황하(黃河)의 중류에 기둥처럼 솟아 있는 작은 바위산을 가리킨다

지주산은 도도하게 흐르는 황하의 격류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우뚝하게 솟아나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예로부터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였다
지주중류비는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이 인동 현감으로 부임한 후,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길재는 고려 말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였다

조선이 건국되고 이방원(李芳遠)이 벼슬을 내려 중히 쓰려고 하였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글을 올리고 사퇴한 후 고향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마침 길재의 묘소에 참배하러 왔던 류운룡이 지주중류(砥柱中流)의 비석을 세움으로써 그 절개를 크게 현양하였다
비석의 앞면에는 중국 사람 양청천(楊晴川)이 썼다고 하는 「砥柱中流(지주중류)」가 큰 글씨로 새겨져 있어 주변을 압도한다

또한 비석의 뒷면에는 명재상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지은 「야은선생지주비음기(冶隱先生砥柱碑陰記)」가 새겨져 있어 길재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비석은 1587년에 처음 세웠고, 1789년에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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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

성주사(聖住寺)에 주석했던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 801~888)이 입적하자 이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석 전체 높이가 486.6㎝에 달하는 신라에서 가장 큰 비석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최고의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 857~?)이 비문을 지었고, 최인연(崔仁兗 ?~?)이 썼다

낭혜화상이 입적하고 2년이 지난 890년(진성여왕 4)에 비문을 지으라는 왕명이 있었지만, 비석 건립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대체적으로 924년에 세워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비문을 지은 최치원은 868년 12세의 나이로 중국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 7년 만에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하였다. 특히 황소의 난 때 지은 「격황소서(擊黃巢書)」는 명문으로 알려졌다

29세 때 신라에 돌아와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골품제에 기반한 신분 체제의 한계와 문란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결국 은둔의 길을 택하였고, 908년 이후 세상을 떠났다

최치원이 지은 대표적인 비문을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한다

4개의 비석은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 쌍계사(雙磎寺) 진감선사탑비(眞鑑禪師塔碑)

초월산(初月山)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 봉암사(鳳巖寺) 지증대사탑비(智證大師塔碑)이다

이 중 진감선사탑비와 대숭복사비는 최치원이 글씨도 썼다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는 화려하게 만들어진 신라 석비의 전형을 보여줄 뿐 아니라,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에서 가장 긴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의 한자가 유입된 이후, 우리 땅에서 완벽하게 체화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고에쓰 우타이본-도조사

〈도조사〉는 16세기 말~17세기 초 일본 교토(京都)의 사가(嵯峨) 지역에서 목활자로 인쇄된 고에쓰 우타이본의 여러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책은 표지와 본문의 모든 지면(紙面)에 식물 쇠뜨기 문양이 운모인쇄(雲母刷り)되어 있는 특제본(特製本)이다

운모인쇄는 판목(版木)에 화강암의 일종인 운모(雲母)나 조개껍데기를 곱게 간 가루를 흩뿌려 반짝거림이 종이 혹은 특정 문양에 묻어나게 하는 기법이다

 

 

 

 

한자간화방안(漢語簡化方案) · 한어병음방안(漢語拼音方案)

중국은 문자 개혁의 일환으로 한자의 형태를 간소화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1956년에 한자간화방안(漢字簡化方案)이 시행되면서 예술 분야와 같이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 번체자(繁體字) 사용이 금지되었다
한자간화방안이 시행된 후에 표의문자인 한자의 본질적인 속성과 아름다움이 훼손되었다는 부정 평가와 함께

문자 사용이 쉬워져서 문맹 퇴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긍정 평가가 공존하였다

현재 중국은 간화자를 공식적인 한자의 표준 규범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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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어병음방안은 현대 중국어의 발음을 라틴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방식이다

1951년 "문자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하며, 반드시 세계 문자와 함께 표음문자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라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지시에 따라 문자개혁위원회가 출범하였고, 1958년에 표준중국어의 보급을 목적으로 '한어병음방안'이 시행되었다

1982년에는 중국어를 표기하는 국제적 표준 표기법으로 채택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둔황석굴 육자진언비 탁본

육자진언(六字眞言)이 여섯 종류의 문자로 기재된 둔황석굴(敦煌石窟) 비문(碑文)의 탁본이다

육자진언은 「옴마니밧메훔」의 여섯 글자로 된 불교의 주문을 가리킨다

이 주문을 외우면 모든 죄악이 사라짐과 동시에 공덕이 생겨난다고 한다

주문은 티베트와 몽골의 라마교도가 하였던 관세음보살의 진언으로, 「아, 연화(蓮華) 속의 보주(寶珠)여」라는 의미이다
비석은 중앙에 위치한 보살상을 중심으로 상단과 좌우측에 각각 두 종류씩 모두 여섯 종류의 문자로 구성되었다

상단의 첫째 행은 란차문자(Lantsa script) · 둘째 행은 티베트문자이다

우측의 오른쪽 행은 한자 · 왼쪽 행은 서하문자이다. 좌측의 오른쪽 행은 파스파문자 · 왼쪽 행은 위구르문자이다
여섯 종류의 문자는 서사(書寫) 방향에 의해 정리되었다. 상단은 인도계 문자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쓰기를 하였다

우측은 한자계 문자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로쓰기를 하였다. 좌측은 소그드계 문자 및 그 영향을 받은 문자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로쓰기를 하였다
중국 서부의 둔황은 예로부터 실크로드로 대표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비석에 기재된 여섯 문자는 각각 아랍지역 · 인도지역 · 동아시아지역에서 비롯된 문자이다

따라서 다민족 문화가 교차되는 지역적 특색을 잘 반영하는 대표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나라 야쿠시사 불족적가비 탁본

불족적가비는 일본 나라시(奈良市) 야쿠시사에 있는 노래비로, 부처의 족적(足跡 발자국)을 기리는 시가 새겨졌다

이 노래는 부처의 발자국을 돌에 새긴 불족석(佛足石) 주위를 돌면서 기도를 드릴 때 읊조리던 노래로 추정된다
부처 열반 이후 무불상(無佛像) 시대에 부처의 족형(足形)을 돌에 새긴 불족석을 숭배하였다

불족석이 일본에 전래된 경위와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일본에 현존하는 불족석은 약 107개가 확인되고 있으며, 야쿠시사의 불족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에도시대에 제작되었다
불족적가비는 불족석과 함께 야쿠시사 경내 대강당(大講堂)에 안치되어 있다

불족석은 측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753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불족적가비의 성립 시기는 노래의 내용과 문자의 특징 등을 근거로 761년에서 770년경으로 추정한다

 

 

 

 

대금황제도통경략 낭군행기 탁본

〈대금황제도통경략낭군행기〉는 금나라 황제의 동생인 도통경략 낭군의 여행기록이라는 뜻이며, 보통은 「낭군행기」로 줄여서 부른다
이 비석은 원래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의 비석으로, 글자가 없는 무자비(無字碑)였다

금나라 시대에 와서 거란문자와 한자가 비석에 나란히 새겨졌다

비액(碑額)은 3행 4자씩 「大金皇弟 / 都統經略 / 郎君行記」가 전서체(篆書體)로 쓰였다

비문의 앞부분은 먼저 5행 16~26자씩 96자가 크게 새겨졌고, 이어서 약간 작게 12자가 더 새겨져 모두 108자의 거란 소자가 새겨졌다

비문의 뒷부분에는 한자 해서체(楷書體)로 6행의 번역문이 있다.
청나라 금석학자 전대흔(錢大昕)은 그의 저서 〈잠연당금석문발미(潜研堂金石文跋尾)〉에서

금나라 태종 황제의 동생인 완안살리갈(完颜撒离喝)이라고 고증하였다

근래에 와서 이 비문과 같은 내용을 새긴 비석 파편이 주위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지인들은 금나라 김올출(金兀朮)의 비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예기비 탁본

예기비는 노나라 재상인 한칙(韓勅)이 공자묘(孔子廟)를 수리하고 예기(禮器)를 정리한 공적을 칭송한 비이다

비석의 뒷면과 좌우 양면에는 비석을 세울 당시 기부한 관리의 이름과 금액이 새겨져 있다
후한시대 후기는 예서(隸書)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는 팔분예(八分隷)의 최고 전성기이다

예서는 물결 모양의 파책(波磔)이 있고 없고에 따라 고예(古隷)와 팔분예로 구분한다

당나라 때 장회관(張懷瓘)과 이양빙(李陽氷)은 글자의 형태가 팔자(八字)와 같아서 팔분(八分)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하였다

당시 팔분예 비석 중에서 예기비는 그 전형적인 형태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명 · 청 시대의 여러 학자도 예기비를 예서의 최고봉으로 논평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탁본은 예기비의 우측면으로, 조선시대 역관이었던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이 소장하던 것이다

탁본의 아래에는 오경석이 쓴 글이 있다

 

 

 

 

석고문 탁본(石鼓文 拓本)

석고문은 돌에 새겨서 전하는 한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석고는 돌(石)로 만든 북(鼓)이라는 뜻으로, 그 모양이 북을 닮아서 붙여졌다

또한 사냥에 관한 내용이어서 엽갈(獵碣)이라 부르기도 한다

석고문 원석은 7세기에 기주(岐州) 옹성(雍城 오늘날 산시성(陝西省) 바오지시(寶鷄市( 펑샹구(鳳翔區)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며

현재는 북경 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석고문 원석은 모두 10점으로, 주로 국왕이 사냥하는 모습을 읊은 시가 새겨졌다

발견 당시에는 700자 정도를 확인할 수 있었으나, 현재는 마모 등으로 270자 정도만 확인할 수 있다

석고문의 서체는 대전(大篆)으로 진나라 시황제가 제정한 전서의 표준 서체인 소전(小篆)의 모체로 여겨진다

 

 

 

 

조전비 탁본

조전비는 조전(曹全)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의 비이다

조전은 돈황의 명문가 출신으로, 한나라 합양(郃陽)의 현령(縣令) 벼슬을 지냈다

그래서 본래 명칭은 「한합양령조전비(漢郃陽令曹全碑)」이다

조전의 자(字)가 경완(景完)이어서 「조경완비(曹景完碑)」라고도 한다

명나라(明 1368~1644) 때 섬서성(陝西省) 합양현(郃陽縣, 오늘날 허양현(合陽縣))에서 출토되었고, 현재 서안 비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전비는 한나라 비석 중 보존 상태가 제일 완벽하다

비문의 자간과 행간이 균형감 있게 배치되고 글꼴이 수려하여 역대 서예가들이 예기비와 함께 대표적인 예서(隸書) 글씨본으로 삼는다
청나라의 만경(萬經)은 조전비에 대해서

"수려한 아름다움과 날아오를 듯한 생동감이 있어 속박되지 않으며 분방하지도 않아 진실로 신품(神品)의 경지이다

(秀美飛動, 不束縛, 不馳驟, 洵神品也.)"라고 극찬하였다

 

 

 

 

쿠텐베르크 인쇄기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뿐만 아니라 활자 인쇄에 적합한 인쇄기를 개발했다

그것은 포도주나 기름 압착기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인쇄기에 달린 손잡이를 당기면 연결된 나사가 돌면서 아래로 움직이는데, 그때 생기는 압력이 수평 상태의 나무판자로 전달되었다

이 판에는 인쇄될 종이를 장착할 수 있었고, 판 밑에는 조판이 끝난 활자가 놓이게 되었다

한 장씩 인쇄할 때마다 활자에 잉크를 칠해서 인쇄했다
15세기 종이는 깨끗하게 인쇄하기에는 너무 딱딱하고 미끈거렸다

이 때문에 인쇄공들은 작업하기 4~5일 전에 종이에 물을 뿌려 축축하게 했다. 인쇄물의 품질이 여기서 결정되었다

적절한 잉크를 만드는 것도 복잡했다. 그때까지 목판 인쇄에 사용하던 잉크는 매끈한 금속활자에 칠하기에 너무 묽었다

더구나 축축한 상태의 종이에 흡수되면 뒷면까지 배어들었다

이 때문에 구텐베르크는 걸쭉하면서도 빨리 마르는 잉크가 필요했고 여러 원료를 혼합해서 실험을 거듭하여 최적의 잉크를 만들었다

또한 식자판에 놓인 활자에 잉크를 균등하게 칠하기 위해 잉크 방망이도 제작했다

 

 

 

 

월인천강지곡 금속활자 인판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이 수양대군이 편찬한 부처의 일대기 「석보상절(釋譜詳節)」을 보고 부처의 생애를 칭송하며 한글로 지은 노래이다

한글 창제 이후 최초로 만든 한글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이다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가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아들 수양대군에게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부처의 행적을 편찬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수양대군은 부처의 전기를 모아 석보상절을 편찬하고, 한글로 번역해 이듬해에 세종에게 올렸다

세종이 이를 보고 부처의 일대기를 한글 노래로 짓고, 책 이름을 월인천강지곡이라 하였다

「달빛이 천 개의 강에 비추듯 부처의 자비가 모든 중생을 비춘다」는 뜻이다

상 · 중 · 하 3권에 500여 수의 노래가 수록되었고, 한 수는 두 구절로 이루어졌다

현재 1~194수로 이루어진 상권 1책과 『석보상절』에 섞여 있는 중권 일부의 노래만 전한다
이 책은 한글 위주로 표기하고, 한자어의 경우 한글 오른쪽 아래 작은 활자로 음을 단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 한글로 한자음을 먼저 쓰고 한자를 나중에 쓰는 한글-한자 병기 방식의 시초이다

석보상절과 월인석보(月印釋譜)에서 한자를 큰 글자로 먼저 쓰고, 그 아래 작은 글자로 한글 음을 단 것과 대조된다

그렇지만, 이후 조선 시대에 간행된 대부분의 언해본은 석보상절과 월인석보의 체제를 따랐다
또한 이 책을 찍는 데 사용한 한글 금속활자는 가로획과 세로획이 직선인 돋움체 계통이다

한글 돋움체의 큰 활자는 지면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작은 글자의 한자와 대비되는 큰 글자의 한글을 사용한 인쇄 방식에서 한글에 대한 세종의 애착과 존중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의 한글 표기 방식은 한글 창제 당시의 자모음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다만 ㆍ(아래아)가 단독으로 쓰일 때 원으로 표기되지만, 'ㅣ'나 'ㅡ'와 결합할 때 직선으로 표기되는 것이 다른 점이다

같이 간행된 『석보상절』의 한글 표기 방식과 다른 점이 있어, 한글 표기 방식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직지 권하 금속활자 인판

 

 

 

 

울프 죌터(구텐베르크박물관장) 인터뷰 영상

 

 

 

 

구텐베르크 42행 성서 인판

 

 

 

 

구텐베르크 성서의 여호수아서

구텐베르크 성서」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1468)가 발명한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한 성서이다

본 성서는 1,282쪽 분량의 완본 성서에서「여호수아서」만을 담고 있다

한 면이 42행으로 이루어져 42행 성서라고도 불린다. 별이 달린 막대를 머리에 이고 있는 황소 모양의 워터마크가 표시된 종이로 인쇄하였다
구텐베르크 성서」는 1454년경 마인츠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공방에서 제작되었다

구텐베르크는 동료인 페터 쇠퍼(Peter Schoeffer) · 투자자인 푸스트(Fust) 그리고 20여 명의 인쇄공의 도움으로 약 180부의 성서를 제작하였다

150부는 종이에, 30부는 양피지에 인쇄하였다. 이 중에서 현재 49부가 전한다

동시대에 많이 사용된 서체인 텍스투라(Textura)를 모방하여 활자를 제작하였다

문장 시작 부분의 두문자(頭文字)는 인쇄하지 않은 채 판매되었다

구매자가 두문자를 포함하여 표제와 장식 등을 했기 때문에 같은 인쇄본이라도 모양이 달랐다

값비싼 책일수록 장식이 화려하였으며, 이런 방식 역시 필사본의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구텐베르크 성서의 텍스트는 1270년 파리 대학의 신학자들에 의해 제작된 개정판 「불가타(Vulgata)」를 원전으로 하였다

그 이후 제작된 성서의 모든 인쇄본은 더 이상 필사본 성서를 원본으로 하지 않고, 구텐베르크 성서를 사용했다

구텐베르크 성서는 1462년 푸스트와 쇠퍼에 의해 인쇄된 성서 · 1471년 로마에서 아르놀트 파나르츠(Arnold Pannartz)에 의해 인쇄된 성서

1476년 베니스의 프란츠 레너 인쇄소에서 제작된 성서 · 1491년 바젤의 프로벤(Froben)에 의해 인쇄된 성서 등의 원본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신학자들은 구텐베르크 성서를 성서 편찬의 전환점이자 전승의 종착지로 여긴다
구텐베르크 성서는 필사본에 비해 제작 속도가 빨랐지만, 수공으로 활자를 만들고 인쇄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많이 제작할 수 없었고 값도 비쌌다

그러나 이로부터 일반인들은 가질 수 없었던 성서가 인쇄되었고

본격적인 상업 출판이 시작되었으며, 궁극에 지식 정보의 대중화에 이르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재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再雕本 大般若波羅蜜多經) 권534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은 두 번째로 목판에 새겨 만든 대장경이라는 뜻으로, 고려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때 만들어진 목판본 대장경이다

현재까지도 목판이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으로 알려져 있다
몽골군의 침략으로 수도 개성이 함락되자, 고려 왕실은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강화 천도 이후 백성들이 위기감과 상실감이 커지자, 강화 천도에 큰 공을 세운 최이(崔怡 1166~1249)는

왕실의 안녕과 국난 극복을 위해 새로운 대장경 제작이 필요하다고 고종에게 청하였다
고종은 최이의 청을 받아들여, 초조재장경과 제종교장이 몽골군에 의해 전소되고 4년 후인 1236년 대장경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때 만든 대장경을 재조대장경(혹은 재조장)이라고 하며, 강화도 용장사지(龍藏寺址)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제작하였다

강화도 대장도감 본사(本司)에 이어 1243년을 전후하여 진주(晉州) · 해인사(海印寺) 등에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을 설치하였고

1251년까지 15년에 걸쳐 제작되었다
재조대장경은 북송촉판대장경 · 초조대장경 · 거란판대장경 · 고려 사간본(寺刊本) 등을 저본으로 하였다

재조대장경은 판각이 완료된 이후 강화도에 보관하다가

조선 태종(太宗) 때에 왜구(倭寇)의 잦은 침탈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내륙 지역인 합천 해인사로 봉안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재조대장경은 총 81,258판 1,541종 6,844권이다

대장경판과 이를 보관하는 판전은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판전은 1995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목판으로 제작된 고려대장경에는 당시 고려인들의 사상 · 종교 · 역사 · 문화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따라서 고려대장경은 고려 시대 문화의 결집체이고, 우리 민족의 염원이 담긴 문화유산이며, 찬란한 우리 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莊烈王后國葬都監儀軌)

1688년(숙종 14)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의 상례(喪禮)와 장례(葬禮)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의궤는 조선 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나 편찬사업 등이 있을 때 그 행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뒷날 참고할 수 있도록 사안의 시작 · 전개 · 참여 인원 · 논의 · 결과에 대해 문서와 그림으로 정리한 책을 말한다

국가 행사를 기록한 의궤는 조선이 건국된 직후부터 편찬되었는데, 1395년(태조 4)에 작성된 「경복궁조성의궤(景福宮造成儀軌)」

1408년에 태조가 승하하자 국장(國葬)을 진행한 후 태조강헌대왕상장의궤(太祖康獻大王喪葬儀軌)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제작된 의궤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모두 소실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행사를 주관하던 관청에서 의궤를 꾸준히 작성하였다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작성된 의궤는 총 608종이 남아있다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상하 2책이며, 상책은 반차도(班次圖)이다. 장렬왕후는 1688년 8월 26일 향년 65세로 창경궁 내반원(內班院)에서 세상을 떴다

왕후의 빈전은 9월 1일 환경전(歡慶殿)에 차려졌고, 12월 15일 발인하여 16일 동구릉(東九陵)에 안장되었다.
반차도에는 빈전에 모셔두었던 장렬왕후의 발인 행렬이 그려져 있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행렬의 기본 구성은 인경왕후(仁敬王后)의 발인반차도와 같지만

15세에 인조의 계비가 되어 효종(孝宗) · 현종(顯宗) · 숙종(肅宗) 대를 거치면서

왕대비 · 대왕대비로서 지내 온 장렬왕후의 이력이 발인 행렬에 드러나 있다고 한다

인조의 두 아들인 숭선군(崇善君)과 낙선군(樂善君)이 대여(大轝) 뒤 호종 행렬에 섰다

이 반차도는 어람용 의궤에 수록된 유일본 반차도이다

이 시기 어람용 의궤 반차도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인물과 가마 · 각종 기물을 유형화하여 일일이 그리고 세밀하게 채색하여 완성하였다

각 상은 크기나 자세에서 편차가 없이 균일하여 매우 정연한 화면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인천 강화 정족산(鼎足山)에 보존되었던 실록을 말한다

실록은 조선 시대 춘추관 실록청에서 사관(史官)들의 사초(史草)를 비롯한 『승정원일기』 등을 자료로 삼아 왕대별로 편찬한 역사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실록(太祖實錄)」부터 철종실록(哲宗實錄)까지 472년간 25대 왕대의 기록으로 모두 28종이 있다 정족산본 1,187책 · 태백산본 848책 · 오대산본 75책 등 2,219책이 남한에 남아있고, 북한의 사회과학원에 있는 적상산본 실록은 서지사항이 명확하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은 대부분 목활자로 인쇄한 간본(刊本)이지만, 정족산본(鼎足山本)의 초기 실록 및 광해군일기」 중초본 · 정초본은 필사본으로 전한다
편찬된 역사서를 보관하던 곳을 사고(史庫)라고 부른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 사고가 있었으나 경복궁을 지어 한양으로 천도한 뒤에는 초기부터 충주와 한양의 춘추관에 사고를 두었다

이어 1439년(세종 21)에 경상도의 성주 · 전라도의 전주에 새로 사고를 지었다. 이렇게 해서 실록은 필사본 4부가 4곳 사고에 나뉘어 보관되었다.
그러나 한양에 있던 춘추관을 비롯하여 읍내에 있던 사고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유일하게 남은 사고가 전주 사고였다

임진왜란 이후 전주사고의 실록을 기초로 1603년 7월부터 2년 9개월간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804권의 실록을 활자로 출판했다

이렇게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 원본과 간행하면서 만들어진 교정본을 합하여 5부의 실록이 생겼다

1부는 서울 춘추관에 두고 다른 4부는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 경상북도 봉화군 태백산(太白山) ·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妙香山)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五臺山)과 같이 병화를 피할 수 있는 심산유곡과 섬을 택하여 사고를 설치하고 1부씩 보관했다
그러나 춘추관 실록은 이괄의 난에 의해 소실되었고, 묘향산 실록은 후금과의 외교관계가 악화되어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산(赤常山)으로 이전했으며

마니산 실록은 병자호란 때 크게 파괴되었다

마니산 실록은 현종조에 보수를 하여 1678년(숙종 4)에 같은 강화도 내의 정족산(鼎足山)에 새로운 사고를 건축하고 그곳으로 이전했다

즉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은 바로 전주에서 살아남아 전주→정읍→마니산→정족산으로 이사 다닌 가장 오랜 실록이다
4곳 사고에 보관되었던 실록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난을 겪었다

일제강점기에 정족산 및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었고

적상산 사고의 실록은 장서각으로 이관되었으며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도쿄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

오대산 사고 실록은 1923년 일본의 간토대지진 때 거의 다 불에 탔으며, 최근 화마를 피한 일부가 반환되었다

조선총독부에 이관되었던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1930년에 규장각 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에 옮겨졌다

장서각 소장 적상산본은 해방 직후 관리 소홀로 도난사건이 발생하여 낙권이 많이 생겼는데 지금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완전히 남아있는 것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된 정족산본과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태백산본이다

 

 

 

 

에라스뮈스의 신약성경 주해서 · 홍재전서(弘齋全書)

서양에서도 코덱스의 등장과 함께 이를 묶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중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 커스버트 복음서(St. Cuthbert Gospel)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장정으로 코덱스 제본의 등장 이후 발전한 중세의 책 제작 기술을 보여준다

겉에서 보면 당대 잉글랜드 기독교 미술의 표현 양식을 잘 보여주는 두 줄의 돋을새김 문양과 오목한 새김선이

중앙을 장식한 진홍색 염소 가죽 표지가 고급 양피지로 만든 90여 장의 속지를 단단히 감싸고 있다

한편, 책을 펼치면 속지를 몇 장씩 모아 소그룹을 만든 뒤

이러한 소그룹의 속지 모음을 나란히 놓은 옆의 속지 모음 및 표지와 꿰매 연결한 콥트식 제본(Coptic binding)의 모습을 보여준다

뻣뻣한 파피루스에서 양피지로 속지의 재질이 변하면서 각각의 속지 모음을 개별적으로 묶는 제본이 가능해진 것으로

이를 통해 각 바늘땀이 경첩 역할을 하며 다른 페이지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도 책이 180도로 펼쳐질 수 있었다
책을 묶는 방법이 개선되고 안정적으로 활용되자 미적인 측면, 특히 표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중세의 책은 고가의 귀한 상품이었다. 수작업으로 일일이 만들어야 했던 책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므로 맞춤 작업을 통해 값비싼 장식이 표지에 곁들여졌다.
15세기 구텐베르크 인쇄술 발명 이후 책의 생산이 증가하며 제본에도 새로운 과제가 등장했다

제본의 작업 속도를 높이면서도 비용을 낮추고 품질을 유지해야 했다

책의 생산 증가로 경제적인 여유가 부족해도 책의 새로운 소비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표지의 장정에 나무판 대신 종이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인쇄가 증가하며 늘어난 파지로 인해 종이판의 생산이 쉬웠기 때문이다

표지 포장에는 일반적으로 가죽을 사용했는데, 가격의 절감을 위해 흠집이 있는 가죽을 사용하거나

가죽 대신 양피지를 활용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무늬가 들어간 종이를 활용하는 등 점차 저렴한 선택지가 증가했다
한편 고급 장정 역시 고급스러움을 유지하면서도 책의 제본에 점차 가까워졌다

부드럽게 가공되어 다양한 작업을 소화할 수 있었던 모로코가죽(Morocco Leather)이 16세기에 유럽 시장으로 들어왔다 비슷한 시기에 금박으로 문양을 찍어내는 기법이 전파되며 중세의 책과는 다른 화려함이 책의 표지에 자리 잡았다

장서 문화가 점차 발전하며 다양한 문양과 장식이 표지 장정에 활용되었다

롤러 방식으로 반복된 패턴을 입히는 기술적 발전이 수반되며, 저가의 제본에도 점차 장식이 가미되기 시작했다
19세기 산업혁명의 물결은 책의 제작에도 어김없이 밀려왔다

1837년 영국의 윌리엄 핸콕(William Hancock)이 속지를 꿰매지 않고 고무에 붙여 책을 만드는 「접착식 제본」의 특허를 출원했다

꿰매는 전통적인 제본에도 기계화가 도입되었고, 두 가지 제본 방식은 소프트커버(paperback)와 하드커버(hardback)로 오늘날 도서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

홍재전서는 조선 국왕 정조(正祖)의 시문 등을 모아서 엮은 문집으로, 동양 고서의 선장 형태를 잘 보여준다

장정(裝幀)은 책을 열람하기 편하면서 보호할 수 있는 형태로 꾸미는 것을 이른다

책을 만든 시기 · 지역 · 용도 · 재료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장정을 하였다

선장(線裝)은 서책의 몸체 앞뒤에 각각 한 장의 표지를 대고 오른편에 구멍을 뚫어 실로 묶는 장정이다

선장은 중국 송나라에서 시작되어 청나라 말 서양 장정이 들어올 때까지 사용된 장정이다

현재 전하는 동양의 옛 책은 대부분 장정 발달의 마지막 단계인 선장으로 남아있다

중국과 일본의 선장본(線裝本)은 보통 네 개의 구멍을 뚫어 묶었는데, 조선의 선장본은 이와 다르게 다섯 구멍을 뚫어 묶었다

이 특징을 들어 일본에서는 오침안(五針眼)으로 장정한 선장본을 「조선철(朝鮮綴)」이라고 부른다

선장본의 책에서 앞뒤의 표지를 조선 시대에는 「책의(冊衣)」라고 했다

 사람이 인체를 보호하기 위해 옷을 입듯이 책의 몸체를 보호하기 위해 입힌 옷이기 때문이다

 

 

 

 

 

경률이상(經律異相) 권25

 

 

 

 

루터성서

이 성서는 1523년과 1524년에 인쇄된 루터의 독일어 성서 중 구약의 일부 「창세기」~「시편」이다

고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된 구약을 루터와 그의 동료들이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로마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는 루터의 글은 인쇄술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독일 전역에 퍼졌다

이 때문에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루터는 1521년 보름스 제국 회의에 불려왔으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후 루터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시골 귀족으로 변장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이때 루터는 11주 만에 그리스어 신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루터가 번역한 신약은 비텐베르크에서 3천 부 인쇄되었다. 이 책은 1522년 9월에 나왔기 때문에 『9월 성서』라고 불린다

「9월 성서」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3개월 만에 모두 팔려 12월에 재판을 인쇄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에 고무된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가 구약 번역에 착수했으며, 12년에 걸쳐 완역하였다
루터의 독일어 신약이 출간된 1522년부터 그가 사망한 1546년까지 50만 부가 넘는 『루터 성서』가 인쇄되었다

1546년 신성로마제국의 2.5가구 당 1가구는 루터 성서를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한다

이와 같은 루터 성서의 확산은 독서 혁명을 의미했다

민중이 독서층으로 처음 형성되었고, 이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루터 성서로 인해 유럽 전역에서 자국어 번역 성서가 연이어 출간되었다

루터 성서 이후 100여 년 동안 성서는 영어를 비롯하여 프랑스어 · 네덜란드어 · 이탈리아어 · 스페인어 · 포르투갈어 ·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 스웨덴어 · 아이슬란드어 · 헝가리어 · 보헤미아어 · 폴란드어 · 러시아어 · 근대 그리스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금강반야바라밀경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은 두 번째로 목판에 새겨 만든 대장경이라는 뜻으로, 고려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때 만들어진 목판본 대장경이다

현재까지도 목판이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으로 알려져 있다
몽골군의 침략으로 수도 개성이 함락되자, 고려 왕실은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강화 천도 이후 백성들이 위기감과 상실감이 커지자, 강화 천도에 큰 공을 세운 최이(崔怡 1166~1249)는

왕실의 안녕과 국난 극복을 위해 새로운 대장경 제작이 필요하다고 고종에게 청하였다
고종은 최이의 청을 받아들여, 초조재장경과 제종교장이 몽골군에 의해 전소되고 4년 후인 1236년 대장경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때 만든 대장경을 재조대장경(혹은 재조장)이라고 하며, 강화도 용장사지(龍藏寺址)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제작하였다

강화도 대장도감 본사(本司)에 이어 1243년을 전후하여 진주(晉州) · 해인사(海印寺) 등에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을 설치하였고

1251년까지 15년에 걸쳐 제작되었다
재조대장경은 북송촉판대장경 · 초조대장경 · 거란판대장경 · 고려 사간본(寺刊本) 등을 저본으로 하였다

재조대장경은 판각이 완료된 이후 강화도에 보관하다가

조선 태종(太宗) 때에 왜구(倭寇)의 잦은 침탈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내륙 지역인 합천 해인사로 봉안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재조대장경은 총 81,258판 1,541종 6,844권이다

대장경판과 이를 보관하는 판전은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판전은 1995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목판으로 제작된 고려대장경에는 당시 고려인들의 사상 · 종교 · 역사 · 문화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따라서 고려대장경은 고려 시대 문화의 결집체이고, 우리 민족의 염원이 담긴 문화유산이며, 찬란한 우리 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향기로운 봄(춘향전)

「고대 현자의 사례집」은 고대 인도의 문학작품인 판차탄트라(Pancatantra)의 라틴어 번역본을

안토니우스 폰 포르(Antonius von Pforr  ?~1483)가 15세기 후반에 독일어로 번역하여 간행한 것이다

 

 

 

 

예수성교성서 마태복음

「예수성교성서 마태복음은 존 로스(John Ross 1842~1915) 목사 등이 우리말로 번역해서 순한글로 간행한 복음서이다

중국 선양의 문광서원에서 1892년 간행하였다

존 로스 목사는 조선에 복음 전파를 위해 이응찬(李應贊) · 서상륜(徐相崙) · 백홍준(白鴻俊) · 이성하(李成夏) 등과 함께 복음서 번역을 하였다
복음서의 간행은 1882년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예수성교 요한복음전서를 각각 3,000부씩 인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예수성교성서 마가복음예수성교성서 마태복음이 간행되었고

1887년에는 그간 간행되었던 복음서를 예수성교전서로 묶여서 5,000부가 간행되었다
로스가 번역한 성서는 최초의 우리말 신약전서라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당시 번역은 서북 지방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서북 지방 방언이 곳곳에 발견되고 있으며

일반 평천민과 여성 등을 독자층으로 상정하여 순한글로 간행한 것이 특징적이다

 

 

 

 

아미타경해

중국의 구마라집이 한문으로 번역한 아미타경」을 조선의 제7대 임금인 세조(재위 1455~1468)가 한글로 토를 달고 번역한 것이다

처음으로 간행된 아미타경언해는 1461년경 을해자(乙亥字)로 간행한 금속활자본과 1464년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한 목판본이 있다

목판본은 이후 1558년 나주 쌍계사 · 1564년 괴산 선암(禪庵) · 1702년 고성 운흥사

1727년 묘향산 보현사 · 1753년 대구 동화사에서 다시 새겨 간행하였다

이 언해본은 간행 기록이 있는 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溪寺開刊(…계사개간)」이라는 기록이 남아서 1558년 나주 쌍계사에 다시 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글 창제 이후 15세기 말까지 편찬된 「초기 한글 문헌」 중에서 우리말로 번역한 불교 경전은 전체 60% 정도 차지한다 한문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구결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구결 작업은 원전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역량으로는 불경 언해를 선행할 수밖에 없었다

번역 사업을 주도한 것은 1461년 설치된 간경도감이었고, 그 중심에 세조(世祖)와 신미(信眉 ?~?)가 있었다

간경도감에서 번역한 불경은 능엄경 · 법화경 · 금강경 · 원각경 · 아미타경 · 반야심경 · 선종영가집 · 목우자수심결 · 몽산법어 · 사법어의 10종에 이른다
불경 번역 사업을 통해 일반 사람들도 어려운 불교 사상을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언해된 불경이 전국 각지에서 다시 간행됨으로써 한글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대 현자의 사례집

고대 현자의 사례집은 고대 인도의 문학작품인 『판차탄트라(Pancatantra)』의 라틴어 번역본을

안토니우스 폰 포르(Antonius von Pforr ?~1483)가 15세기 후반에 독일어로 번역하여 간행한 것이다
책의 내용은 현자들로 이루어진 한 그룹이 인간의 공생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을 17장으로 나누어 동물 우화로 풀어나간다

17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두려움과 불의에 관한 고찰 (2) 기만적 유혹 (3) 시기와 타인의 고통을 기뻐하는 것 (4) 신의 있는 이웃 (5) 적이었던 자에 대한 신뢰

(6) 친구를 잃는 것 (7) 과격한 행동 (8) 적과의 부득이한 협력 (9) 은밀한 시기와 그에 대한 대처법 (10) 화를 다스리며 악덕을 이기는 것

(11) 악을 겪기 때문에 악을 멀리하는 것 (12) 타고난 권리가 아니라서 일을 포기하는 것 (13) 왕이 가져야 할 선한 기쁨

(14) 긍휼함 (15) 신의 섭리 (16) 자신과 남을 속이는 자의 모습, (17) 남에게 충고는 하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는 자
『판차탄트라』는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인도 동물우화집으로, '다섯 편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작가는 확실하지 않고, 작품은 기원전에 집필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6세기에 페르시아 왕의 주치의였던 부르주야(Burzuya)가 팔라비어로

이후 이븐 알무카파(Ibn al-Muqaffa)가『칼릴라와 딤나(Kalila wa Dimna)』라는 책 이름의 아랍어로 번역하였다

이븐 알무카파는 아랍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문에 얽매이지 않고 이슬람 사상과 더불어 자신의 철학과 정치사상 · 사회 개혁 의지를 투영시켰다

덕분에 이 작품은 아랍의 수사학과 페르시아의 과장법 · 그리스의 논리 · 인도의 지혜를 모두 수용하고 있다

이븐 알무카파는 형식보다는 의미 전달에 중점을 두어 쉽고 간략한 문체를 사용했다

 

 

 

 

사기(史記)
한(漢)나라 때 사관(史官)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기원전 86?)이 편찬한 역사서로, 고대 황제(黃帝 재위. ?~?)부터

한무제(漢武帝 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 연간의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가 포괄되어있는 기전체(紀傳體) 통사(通史)이다

모두 130권 · 52만 6천 5백 자의 역사서이다

본기(本紀) 12편 · 표(表) 10편 · 서(書)8편 · 세가(世家) 30편 · 열전(列傳) 70편이다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을 이어 사마천은 이 역사서를 죽간(竹簡)이라고 불리는 매체에 기록했다

『사기』는 24사(史)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대개 기원전 108~기원전 91년 사이에 편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마천은 사관의 기록 · 자신의 답사 및 구술 채록을 통해서 『사기』의 원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는 가문(家門)의 전통인 사관의 사명 의식에 따라 궁형(宮刑)이라는 치욕을 넘어서 불후의 역사를 남기겠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기라는 명칭은 원래 사마천의 『사기』이전에 역사를 뜻하던 이름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의 본래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로, 후한 말에 「태사공기(太史公記)」로 바뀌었다가 이후 『사기』라고 줄여 불렀다

사기는 편찬 원칙 · 시대의 포괄성 · 높은 문학성으로 일찍부터 동아시아 역사서의 모범으로 칭송되어 왔다

 

 

 

 

역사

이 책은 1502년 9월에 간행된 헤로도토스의 「역사」 초판본으로, 르네상스 시대 베니스에서

고전서 출판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던 알두스 마누티우스(Aldus Manutius 1449~1515)의 인쇄소에서 출판된 그리스 고전서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의 겉면과 마지막 장에는 알두스 인쇄소의 독특한 도안이 찍혀있다

돌고래가 닻을 휘감고 있는 이 도안은 고대 그리스의 격언인 「천천히 서둘러라(σπεῦδε βραδέως)」와

이에 대한 라틴어 번역문인 「Festina Lente」를 나타낸 것이다

바다를 누비는 돌고래는 「서두름」을, 배를 정착시키는 닻은 「천천히」를 뜻한다

알두스의 인쇄소는 이 격언에 따라 그리스 고전을 유럽 사회 곳곳에 전파하여 많은 이들이 고전을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다
저자인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85년경에 소아시아의 할리카르나소스(Halikarnassos)에서 태어나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있었던 전쟁(이하 페르시아전쟁 · 기원전 490~기원전 479)의 원인과 경과에 관하여 탐구하여 『역사』를 집필하였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그리스 최초의 역사기록으로 평가된다

그는 구술 문화에서 벗어나 기록 문화가 확산하던 고전기에 자신의 기록을 통해서 선대와 당대의 역사가 후대에 망각 되지 않고 전해지기를 원했다

그 의지가 서언에 잘 드러난다

 

 

 

 

박물지(博物誌)

박물지는 고대 로마의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던 대(大)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 Gaius Plinius Secundus 23~79)의 저작으로

오늘날 현존하는 서양 고대의 저작 중 천문학에서 광물학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서양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볼 수 있다

이 인쇄본은 플리니우스의 저작을 15세기의 인문주의자인 크리스토포로 란디노(Christoforo Landino)가

당대 이탈리아의 속어로 번역하고 베네치아에서 활동한 출판인 니콜라 장송(Nicolas Jenson)이 1476년 출판한 것이다

애서가이자 저술가인 플리니우스의 일생은 조카인 소(小)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 61~113)의 편지 등을 통해 일부 알려져 있다

그는 밀라노 북부 코모 출신으로 라인강 주둔군의 기병대장 등으로 근무하며 기마전술 및 여러 주제의 책을 썼다고 전해지지만

그의 마지막 저작인 박물지를 제외하면 그의 저작은 오늘날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책의 제목인 「Naturalis Historia' 는 'Natural History」를 거쳐 한국에서는 박물지라고 번역해왔는데

이는 자연물을 분류 중심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근대의 자연관 · 과학관이 반영된 번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플리니우스는 분류를 넘어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인간의 삶과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를 더욱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그는 관찰의 주체인 인간의 시각에서 자연을 분류하고 설명하는 것을 삶을 위한 행위라고 인식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개별 항목을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오늘날의 백과사전과는 달리

안내자의 시선을 따라 개별 항목을 객관적 관점에서부터 인간의 삶과 관련된 점까지 설명하고

이를 통해 그 전체의 모습을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뉘른베르크 연대기

뉘른베르크 연대기 혹은 「셰델 세계연대기」는 고대부터 전해 온 여러 가지 많은 문헌을 바탕으로

세계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백과사전처럼 담고 있는 책이다

독일의 역사학자 하르트만 셰델(HartmannSchedel 1440~1514)의 대표작으로, 독일어본과 라틴어본 두 가지로 뉘른베르크에서 1493년에 제작되었다

뉘른베르크 연대기에서는 초상화가 여러 번에 걸쳐 반복해서 사용되었고, 도시 전경이 양면 크기
로 담긴 삽화도 31점에 이른다

이 중 몇 점은 최초로 나오는 도시 파노라마이다. 모든 판본에는 세계지도와 유럽지도가 양면 크기로 나온다

세계지도에는 아메리카가 아직 그려져 있지 않다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가 남아메리카 탐험을 보고한 시기가 1501년이기에 신대륙은 아직 유
럽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뉘른베르크 연대기는 역사적 사건들과 유명한 도시들을 여섯 시기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천공개물(天工開物)

명말 청초, 즉 16세기~17세기에 이르러 중국도 자연과학의 저술이 시작되어

송 · 명을 거쳐 오면서 이론에만 치우쳤던 성리학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던 때였다

이 시기에는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과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가 대표적이며

이의 뒤를 따른 것이 바로 송응성의 「천공개물」이다
「천공개물은 동양의 과학 · 화학 · 공학 · 제조 · 제작 · 건축 · 수리 · 물리학 · 생물학 · 식물학 · 광물학 · 농학 등

일체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물건들은 어떻게 만들어냈으며

어떤 과정 · 어떤 원리를 적용한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림을 곁들여 기록한 책이다
먼저 「천공(天工)」이란 「하늘의 공교한 원리를 사람이 대신하다」라는 뜻이며

「개물(開物)」이란 「만물을 개발하여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 만드는 임무를 성취하다」라는 뜻이다

즉 「자연 원리 속에 숨겨진 오묘한 이치를 이용하여 이를 인공과 배합, 사람의 실생활에 필요한 많은 물건을 개발하고 제조해내다」의 뜻이다

저자 송응성(宋應星 1587~1666?)은 "이렇게 하여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냄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극복하고 있으니 사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라 하여

인간의 지혜로 만들어내는 많은 물건에 대하여 감탄과 함께 이을 체계적 기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문자를 담는 그릇, 매체

매체(媒體)는 문자를 기록하기 위한 물체나 그 수단을 가리킨다

매체로 활용하기 위한 재료는 해당 문명이 자리 잡았던 환경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리고 재료들은 기록하기 쉽고,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으며, 일정한 수준의 내구성과 편리성을 갖춰야 했다

인류가 문자 기록을 위해 사용했던 주요한 재료로는 진흙 ·  · 금속 ·  · 식물 · 나무 · 가죽 등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사용된 재료는 식물을 활용해서 만든 종이이다

종이는 지식의 저장 · 보존 · 전달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매체였다

특히 책을 인쇄하는 데는 종이만 한 매체가 없었다. 책의 역사는 곧 매체의 역사와 같았다
오늘날 종이책은 컴퓨터 · 스마트폰 · 전자책으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새롭게 등장한 디지털 매체는 기존의 문자뿐만 아니라, 음성과 영상까지도 동시에 담아내기 시작하였다

이제 지식의 양은 책의 두께가 아니라 데이터의 용량으로 좌우될 것이다

 

 

 

 

예서, 광개토대왕비 탁본

예서의 발생은 진나라 말엽으로 올라가지만, 일반적으로는 진을 무너뜨린 한나라의 글씨체를 예서라고 한다

이 서체의 명칭은 신분이 낮은 하인, 즉, 예인(隸人)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붙여졌다고도 하며, 전서에 예속된 서체라는 뜻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이 밖에도 명칭에 대한 여러 설이 있는데, 대체로 전서보다는 격이 아래라는 의미를 띠고 있다
예서는 그 형태와 시기에 따라 고예(古隷)와 팔분(八分)으로 나뉜다

고예는 전한(前漢 기원전 202~기원전 208)때의 글씨이다

형태는 세로로 긴 소전의 형태에서 벗어나 정사각형(正方形)으로 변해가지만

여전히 전서의 특징이 남아있기 때문에 획의 굵기가 일정하고 곧은 편이며 간혹 세로획을 길게 빼기도 한다

팔분은 후한(後漢 25~220) 때의 글씨로 특유의 필세(筆勢 필치의 세기와 움직임)가 강하게 보이는 서체이다

넓은 네모꼴(방광형 方廣形)의 형태로 가로획 끝을 오른쪽으로 길게 빼는 획(파책 波磔)이 특징이다

팔분에 보이는 붓의 속도와 획의 굵기 변화는 서체에서 필획을 통해 기교와 멋, 그리고 예술성을 갖추게끔 하는 시작 지점에 해당한다
예서는 글씨를 간편하게 쓰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결과는 글자의 형태와 짜임은 물론 붓의 운용에 있어 전서와 전혀 다른 길을 갔다

그래서 서예상의 혁명이라고도 한다

 

 

 

 

오륜행실도

정조(正祖)의 명으로 간행한 오륜행실도에서, 한자는 정리자(整理字)로 한글은 목활자로 찍었다

이 책에 찍은 한글 활자를 오륜행실도 목활자라고 한다

이 활자는 한자 해서와 같이 가지런하고 똑바르게 쓴 글자체이다

글자 구조는 네모 틀 안에서 상하좌우의 대칭을 이루며, 무게 중심은 글자 가운데에 있다

글자가 네모 틀 공간 안에 넉넉하게 채워져 있으며, 글자의 높이와 너비가 비교적 고르다

글자들이 비슷한 크기의 방형 안에서 높이와 너비의 비율을 유지하다 보니

획 수에 따라 글자의 조밀함이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단단한 짜임새를 유지한다

이 서체의 획은 도드라진 획 머리와 왼쪽으로 뽑은 기둥의 맺음 등이 궁체와 비슷하다

이러한 한글 활자 서체는 현대 활자 중에서 기능성과 심미성 모두 완벽하다고 평가받는 최정호 명조체의 출발점으로 언급된다

 

 

 

 

프락투어체, 토이어당크

프락투어체는 중세 유럽 필사본에서 널리 사용된 서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 서체는 12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한 고딕체(Gothic Script)에 속하며, 문자 간의 간격이 좁은 것이 특징이다

세로획들은 중간 부분에서 한 번 꺽이는 형태(❬)이며, 이 특성으로 「꺽인(fraktur) 서체」라 불리기도 한다

프락투어체는 예리한 꺾임과 사각형 형태를 갖춘 소문자 형태를 지니고 있다

프락투어체는 16세기 초반 독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글꼴로 발전하였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프락투어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에서 사용되었다

 

 

 

 

초서, 김정희가 쓴 서간

초서는 점과 획이 많은 한자를 편리하게 쓰기 위한 실용 목적이 강한 서체이다

행서를 빠르게 쓴 서체로 오해하지만 정확하게는 행서와 마찬가지로 예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초서는 진나라 말에서 한나라 초에 나타나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정비되었다

이 과정 중에 나타난 초서를 장초(章草)와 금초(今草)로 구분하며,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광초(狂草)가 출현하였다
장초는 예서의 점획을 줄이거나 이어서 간략하게 만들고 붓의 움직임을 좀 더 빠르게 한 초기의 초서이다

이 서체는 실용적인 목적이 강하였기에 동한시대에 민간에서 속사체로 널리 사용하였다
금초는 일반적으로 오늘날 초서로 일컬어지는 서체이다

이 서체는 장초에서 비롯되어 동한 말이나 삼국시대에 걸쳐 정비되었고 왕희지(王羲之 307~365) 등에 의해 정형화되었다

글자가 서로 연결되고, 획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원래 글자와는 전혀 다른 글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글자를 잇기 위해서는 붓을 순간적으로 빠르고 혹은 유순하게 움직이기를 감각적으로 해야 한다

글자의 짜임이나 간격도 제각각이며 변화가 풍부하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금초는 즉흥적이고 생동감이 넘쳐나는 예술적인 서체가 되었다

 

 

 

 

김정희가 쓴 봉은사 판전 탁본

서울 봉은사(奉恩寺)에서 경판을 봉안하는 전각인 판전(版殿)에 걸린 현판의 탁본이다

김정희는 교학 부흥이라는 자신의 소망을 판전의 현판을 쓰면서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래서 판전 글씨는 더더욱 의미가 있다. 판전의 완공은 1856년 음력 8월 하순이므로 김정희는 이 시기 즈음에 현판 글씨를 썼을 것이다

그는 1856년 10월 10일에 서거하였으므로 최소한 3개월 이전 글씨가 된다

그러므로 이 현판은 김정희의 말년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며

안진경(顔眞卿)의 굳건한 서풍에 기초하면서도 어떠한 기교조차 제거한 명작으로 꼽을 수 있다

 

 

 

 

아랍문자가 장식된 그릇

그릇 안쪽 테두리에는 「그 주인에게 영원한 영광 ·  · 행복 · 안녕 · 관용 · 축복  그리고 장수를 기원한다」라는 내용이 동쿠파체로 새겨져 있다

 

 

 

 

알파에서. 히웋까지

유라시아.동쪽.끝에서.크디큰땅.가로질러.서쪽.끝까지.. 대서양을.만나는.포르투갈.포르토까지.rl차여행을 .떠났다..
인천에서.베이징은.비행기로... 베이징에서.밤기차를.탔다.. 만주.하얼빈을.돌아.시베리아를.횡단하고.우랄산맥을.넘었다..
벨라루스.비자를.얻지못해.우크라이나로.우회하고.. 
폴란드.독일.프랑스.
그리고.피레네.산맥을.넘어.. 스페인을.가로질러.
마침내.포르투갈.항구도시.포르토에.닿아.푸르른.바다를.만났다.. 
히읗나라에서.알파벳.나라들.끝까지.온.것이었다..
마침.국제회의.발표에.맞춘.일정이라서.. "내.기차로.여기까지.왔노라"했다..
모두들.박수로.환대했다..
난생처음.빈약한.콧수염이.자라있었다..
그리고.다시.역순으로.기차로."알파에서.히읗"으로.되돌아왔다.. 
2010년.8월.말에.떠나.11월.말에.돌아왔으니..모두.석달이.꼬박.걸렸다.. 
몸으로.겪은.글자여행이었다.. 

'알파요.오메가'..
성경에.나오는.이.말은.전체를.뜻하는.말이다..
그리스.글자.첫.자인.알파와.마지막.글자.오메가를.말함이요..
알파벳.첫.자와.마지막.글자를.이르는.것이니..
이.말은.통상.. 모두를.뜻하는.말로.통용되고.있다..

문화란.글자.소산이기에..
이.말은.서구문명적.시각에서.라틴.알파벳.세계에서.통용되는.
전체.개념이라고.생각한다..
그러나.우리가.사는.이.지구에는.
라틴.알파벳만을.쓰는.나라들만이.있는.것이.아니다..

글자로.봐서는.
우리.한글이.그.확장.선상에.상징적인.존재로.우뚝.서.있다..
해서.당대.문화.문명의.'모두'.또는.전체를.가리키는.표현은.
'알파에서.히읗까지'라고.하는.생각이.옳다..

알파는.가장.오래된.글자인.알파벳의.첫.글자이며..
히읗은.가장.어리고.당돌한.미래글자.한글의.끝.글자이다..
알파가.세로로.서.히읗이.되었다.
수천년.시간과.수만리.공간을.지나.
글자는.마침내.한글에.이르렀다..
한글의.상상력은.시공을.뛰어넘어.확대된다..
〔안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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