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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SeMA 벙커

SeMA 벙커는 서울시립미술관의 분관으로서 여의도에 특화된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

이 공간은 1970년대 군사정권 시절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벙커는 2005년 여의도 환승센터 건립을 위한 현지조사 중 발견되었고

SeMA 벙커는 현재 150여 평의 전시장과 20여 평의 역사갤러리로 탈바꿈했다

 

 

서울시립미술관 SeMA 벙커

엘리베이터가 있는 출입문이다

 

 

 

 

SeMA 벙커 역사갤러리

 

 

 

 

대한뉴스 동영상

건군 23돌, 1971년 848호, 23회 국군의 날 기념

건설의 메아리, 1968 678호, 여의도 윤중제 축조공사 완공 기념식

건설의 메아리, 1968년 662호, 밤섬 해체 작업 및 밤섬 주민들 생활 전경

이런 일, 1971년 817호, 민족광장 건설공사 착공

1977년 1155호, 제29회 국군의 날 기념식

1983년 1449호, 피맺힌 사연들 및 여의도 이산가족 상봉

 

 

 

 

SeMA 벙커 VIP실

여의도 지하 벙커를 발견했을 당시 이 공간에 있었던 소파이다

무릎까지 차오른 물에 공간 전체가 잠겨있던 탓에 소파의 천이 모두 삭아서

복원 불가능하여 프레임만 유지하고 천은 새로 제작했다

 

 

 

 

여의도의 역사

홍수 때마다 잠기던 모래벌판 / 대한민국 정치 · 금융 중심지로 변모

여의도는 조선시대 잉화도(仍火島) · 라의주(羅衣州)라 불리던 섬으로, 홍수에 잠길 때조차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에 있던 양말산이 머리를 내밀고 있어

사람들이 나의섬 · 너의섬이라고 부르던 것이 오늘날 여의도(汝矣島)로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모래땅으로 이루어진 불모의 벌판이었으나, 1916년 일제강점기에 간이비행장이 건설되면서 비행기지로서 여의도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1922년 12월, 이곳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의 모국방문 비행이 이루어졌으며,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이곳으로 입국했다

이후 여의도 비행장은 미군 공군기지로 활용되다가 1955년 우리 공군에 인수되어 1971년 성남시로 이전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공군본부로 사용됐다

1968년 서울시는 여의도 개발을 위한 윤중제(輪中堤) 축조 등 도시계발사업에 착수했다

윤중제는 착공 반년 만에 완공됐으며, 1970년 5월, 여의도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6차선의 마포대교가 개통되면서 신시가지 발전이 가속화됐다

1971년 9월 29일, 여의도 한복판에 5 · 16광장(現 여의도공원)이 조성되어 국군의 날 행사를 비롯한 대규모 행사 개최지로 활용됐다

1981년 10월, 4차선의 원효대교가 개통되면서 여의도와 용산구 원효로 4가를 연결했으며

현재는 국회의사당 · 각종 언론사 및 금융관계사 · 서울국제금융센터(SIFC) · 아파트단지 등이 들어서며 정치 · 금융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1955년 여의도 비행장 모습

 

 

 

 

1958년 여의도 비행장 전경과 샛강

 

 

 

 

1968년 개발 당시 여의도 전경

 

 

 

 

1968년 여의도 제방 공사

 

 

 

 

1968년 여의도 개발 공사 기공식

 

 

 

 

1968년 국군의 날 행사에 대한 국방부 요구사항 문서

1968년 여의도 개발 ~ 1971년 여의도 시범아파트 준공식 사진

 

 

 

 

1968년 국군의 날 행사에 대한 국방부 요구사항

1968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시 대통령 각하의 지시에 따라

매년 국군의 날 행사를 여의도에서 실시하게 되어 행사장소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함

 

 

 

 

1969년 국군의 날 행사에 대한 국방부 요구사항과 서울시의 답변

여의도 도시개발 기본계획이 실현되려면 장구한 시일이 소요되므로 상당한 개발시기까지는 행사에 임할 수 있으며

귀의에 대해서는 계속 연구 검토하겠음을 알려 드리니 이점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1968년 여의도 개발 당시 공사 현장

 

 

 

 

1970년 5 · 16광장 조성 공사 당시 여의도 모습

 

 

 

 

1970년 5 · 16광장 완공 모습

 

 

 

 

1971년 여의도 시범아파트 준공식

 

 

 

 

1972년 5 · 16광장 반공궐기대회 ~ 1984년 교황 교황 요한바오로 2세 방한

 

 

 

 

1972년 5 · 16광장 반공궐기대회

 

 

 

 

1973년 신축 중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전경

 

 

 

 

1975년 5 · 16광장에서 열린 학도호국단 발대식

 

 

 

 

1975년 여의도아파트 단지 전경

 

 

 

 

1981년 여의도 국풍 81

 

 

 

 

1984년 교황 교황 요한바오로 2세 방한

 

 

 

 

발견에서 개관까지

여의도 지하벙커,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 2017년 SeMA 벙커로 개관하여 시민의 품으로

여의도 벙커는 2005년 5월, 여의도 환승센터 건립 도중 발견됐다

서울시는 발견 이듬해인 2006년 하반기에 이를 간이화장실 · 매점 · 휴게실 등을 갖춘 시민 편의 시설로 바꿔 개방할 계획이었다

동시에 인근에 들어설 서울국제금융센터와 벙커를 지하로 연결하는 방안도 검토했다

그러나 벙커가 지하인데다 유동인구가 적어 사업성이 약하다는 평가가 내려지면서 폐쇄 조치됐고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2013년 여의도 벙커는 그 역사적 상징성을 인정받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2015년에 서울시는 벙커를 발견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일반에 공개하는 시민 체험 행사를 개최했으며

이때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문화시설로의 활용계획을 수립했다

이후 2016년부터 설계 및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2017년 10월 19일, 서울시립미술관이 운영하는 SeMA 벙커로 개관했다

 

 

 

 

2015년 3월 현지조사를 위한 출입구 진입 현장

 

 

 

 

2015년 3월 발견 당시의 수행원 대기실 현장

 

 

 

 

2015년 3월 발견 당시의 VIP실 현장

 

 

 

 

각 실별 열쇠를 보관한 상자

 

 

 

 

벙커의 역사

 

 

 

 

1978년 국군의 날 행사 단상 하부에 위치한 지하 벙커

여의도 벙커 위치는 군군의 날 사열식 때 단상이 있는 곳과 일치하며

위급시 단상이 지하로 가라앉도록 설계된 것으로 알려졌다

 

 

 

 

1976년 / 1977년 여의도 벙커지역 공사 흔적 비교

1976년 7월 위성사진에는 공사 흔적이 없으나

1977년 11월 위성사진에는 벙커의 출입구가 보이므로 공사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여의도 벙커는 차지철 작품 / 시사저널

육영수 피격 직후 건축 · · · 청와대 경호실이 운용 · 관리

서울 여의도에서 발견된 지하 벙커는 의문투성이다

도심 한복판에 180평이나 되는 지하시설이 지금껏 비밀리에 존재해 왔다는 자체부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철문 · 소파 · 화장실 · 전화 200여 대를 동시에 연결할 수 있는 단자함, 여기에 지휘대 시설까지, 온갖 영화적인 상상력까지 자극한다

버스환승센터를 만들기 위해 공사하던 인부들이 우연히 발견한 이 시설을 서울시는 앞으로 시민 편의시설로 개방할 계획이다

여의도 벙커가 발견된 직후 군 비밀시설이 아니냐는 추측이 일자

윤광웅 국방부장관은 "군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군이 관리한 시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신현돈 국방부 대변인도 "수도방위사령부에 문의한 결과 이와 관련한 어떤 기록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취재 결과 이 벙커는 1970년대 청와대 경호실이 운용했던 극비시설로 밝혀졌다

여의도광장(처음에는 5 · 16광장)이 만들어진 것은 1972년이지만 당시에는 벙커가 없었다

1970년대에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여의도 벙커는 1975~1976년 청와대 경호실 주도로 만들었다"라고 밝혔다

경호실이 당시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 · 수도방위사령부 전신) 공병대를 동원해 비밀리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극히 일부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공사를 한 병사들도 이 시설이 어떤 시설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벙커를 만들었다고 한다

*

전두환 정권 이후 보안사가 인수

1973년 2월부터 1975년 6월까지 수경사 참모장을 지냈고, 1979년에 사령관을 지낸 장태완 전 재향군인회장도 비슷한 시각을 보였다

그는 "차지철 경호실장이 벙커를 주도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씨에 이어 수경사 참모장을 지낸 전주식씨도 "최근에야 벙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앞서 언급한 전 청와대 경호실 관계자는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이 벙커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보안사 경호과가 이 시설을 관리했다"라고 말했다

육여사 피격 직후인 1974년 8월 22일 대통령 경호실장이 되면서 2인자로 떠오른 차지철은

"각하를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라는 표어를 자기 방에 붙여놓고 박정희 대통령의 안전을 국정의 최우선 순위에 두었던 인물이다

여의도 벙커 위치는 국군의 날 사열식 때 단상이 있었던 곳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단상이 그대로 지하로 가라앉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말을 공사에 참여했던 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전한다

지하 벙커에 전화시설을 설치해 놓은 이유도 위기 상황에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대통령을 염두에 둔 시설이어서 소파 등도 당시로서는 최고급품이었다고 한다

여의도 벙커가 언제부터 무용지물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단 1980년대 중반부터 여의도 광장에서 국군의 날 행진을 하는 일이 사라진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여의도 벙커, 최근까지 관리됐다 / 한겨레21

1980년대 후반부터 쓴 건축자재 발견 · · · 창덕궁 지하에도 벙커를 만들었던 불행한 역사의 흉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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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에 버스환승센터를 지으려던 서울시 건설안전본부 직원들은 고민에 빠졌다

서울 굿모닝신한은행 본점에서 찻길 하나 건너 마주한 화단 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녹색 철제문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철거 여부를 놓고 고민하다 철제문 안에 내시경을 넣어보기로 했다

이동근 현장 감리단장은 "(화면을 보고) 너무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며 처음에는 소설책에서만 읽던 지하 비밀기지를 찾아낸 줄로 오해했다"고 말했다

지하에는 화장실 2개 · 대형 대피실 · 비상용 탈출구 3개가 설치된 180평 크기의 지하 벙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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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취재팀의 답사 결과, 현장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쓰기 시작한 건축자재들이 발견돼

벙커가 서울시의 추정보다 훨씬 최근에 만들어졌거나 적어도 최근까지 관리돼온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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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21일 북한의 124군 특공대원 31명이 청와대 앞산까지 침입한 이른바 「김신조 사건」이 터지고

이틀 뒤인 1월 23일에는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군에 납치됐고

같은 해 11월 2일에는 울진 · 삼척에 무장공비 100여 명이 나타났다

이에 맞서 박 정권은 그해 2월 6일 지금은 서울경찰청으로 바뀐 서울시 경찰국에 전투경찰대를 만들었고

4월 1일에는(대한민국 성인 남자들을 웃고 울리는) 250만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박대통령은 그래도 불안했는지 이듬해인 1969년 1월 1일 "올해를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로 한다"는 신년사를 냈다

이로부터 엿새 뒤 「원조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은 「서울시 요새화 계획」이라는 걸 내놓는다

여기서 요새란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요새가 아닌 말 그대로의 요새를 뜻한다

이를 토대로 평소에는 교통수단으로 쓰고 전쟁이 터졌을 때는 30만~40만명을 수용하는 대피소로 활용되는

남산 1 · 2호 터널과, 1970년 7월 7일 개통된 경부고속도로 2곳에 군용비행장을 만들었다

*

1971년 3월 미7사단이 철수했고, 베트남을 거쳐 라오스 · 캄보디아 등으로 공산화 도미노 현상이 벌어졌다

여의도광장은 그 때 태어났다. "이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군사용 비행장으로 쓰기 위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서울 요새화 계획의 일부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이때부터 「문화재 요새화」도 시작됐다

같은 민족인 북한군이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문화재를 향해 함부로 총과 대포를 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린 조치였다

문화재 요새화의 흔적은 아직 곳곳에 남아 있다

2004년 문화관광위원회의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천영세 민주노동당 위원은

"창덕궁 안에 방공진지 등 전국 문화재구역 안에 설치된 군사시설이 8곳 12만3천평이나 된다"고 지적했다

한국방송도 1976년 당시 문화공보부의 총무 계획에 따라 창덕궁 · 조선 선릉 · 서오릉 · 영휘원 등에 50평 안팎의 방송용 벙커 4개를 만들기도 했다

(이들 벙커는 2003년께 모두 철거됐다)

나라 전체가 미쳐 돌아가고 있던 시절, 여의도에 벙커 하나 만드는 것 등은 일도 아니던 시절이었다

*

우리도 벙커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지만, 벙커의 추억의 원조는 일제의 조선총독부다

서울시 역사박물관 뒤를 돌아 경희궁 뒷쪽으로 향하는 길에 입을 쩍 벌리고 서 있는 우악스런 벙커가 대변한다

벙커 주변에는 청계천 복원공사 때 뜯어온 광통교 등 조선시대 돌다리 부재들이 널부러져 있다

일제는 서울 창덕궁에도 벙커를 만들었지만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등의 지적에 따라 2003년 철거됐다

주변 곳곳에 남아 있는 지하 벙커들은 우리가 버텨온 엄혹함을 증언하는 삶의 흉터다

흉터는 감추고 외면하기보다는 똑바로 응시할 때 치유할 수 있다

1970년대 사람들은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콘크리트를 부어 벙커를 만들고 땅속으로 기어들어가려 했을까

당시 사정을 귀로 전해 듣고 책을 읽어 알 뿐인 후세 사람들이 그렇게라도 해 불안감을 떨치려 했던 당시 사람들의 당혹감을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박 대통령은 전쟁터가 아닌, 술자리에서 심복의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역사는 느린 듯 보이지만, 그렇게 끈질지게 조금씩 앞으로 진보해가는 것인가 보다

 

 

 

 

화장실

화장실 변기 점검표에 9월 30일이라는 점검 날짜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서울시는 여의도 벙커가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때 국군의 날 행사에 대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럴듯해 보이는 추정이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도 있다

*

한겨레21의 현장 답사 결과 벙커는 적어도 198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확실해 보였다

현장에서 발견된 「아남」 상표의 형광등 스위치 · 예비용 백열등 · 화장실 변기 등은 1970년대가 아닌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쓰이는 것들이다

내부 전기장치 안에서 발견된 사용 점검표의 점검번호가 1989년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89'로 시작되는 점도 이런 추정에 설득력을 더한다

 

 

 

 

열쇠보관함 / 발견 당시 나온 열쇠 보관함

각 실별 열쇠를 보관한 상자로 출입구 · 집수정 및 각종 맨홀 등

벙커 곳곳에 진입할 수 있는 열쇠들이 보관되어 있던 것을 복원했다

 

 

 

 

코어 조각

벙커의 콘크리트 두께를 확인해 볼수 있는 조각이다

지표면에서 2.2m 아래 위치한 벙커는 천장과 바닥 · 벽 모두 50cm 두께로 이뤄져 있다

콘크리트 단면을 잘라 보았을 때 공극(空隙)을 찾아볼 수 없어 매우 강도 높은 재료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이 장소가 외부의 폭격을 피하기 위한 용도로 설계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SeMA 벙커

화장실 앞에서 봤다

 

 

 

 

전시실

「방으로 간 도시들」이 전시 중이다

 

 

 

 

코메디아 / 정재경

동영상이다

 

 

 

 

메셔 / 김희천

동영상이다

 

 

 

 

출입문

계단을 이용하는 문이다

 

 

 

 

SeMA 벙커 출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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