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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도원역~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신포역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을 가기 위한 걷기다

 

 

도원역

시점이다

 

 

 

 

서해대로

송림산에 터널을 뚫고 길을 낸다고 집들을 철거했으나

그 후 공사가 중단되어 그 자리에 농사를 지었는데 다시 공사를 한다

 

 

 

 

배다리 옛 손만두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

1883년 개항 이후 개항장에서 밀려난 조선인들의 터전인 배다리는 인천 금곡동과 창영동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를 포함하는 지명이다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되고 배다리에는 조선인을 위한 학교와 시장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냥공장을 비롯하여 간장과 술 · 고무 등을 만드는 산업시설이 번성했다

성냥은 사람들에게 편리한 생활을 가져다준 발명품이다

성냥이 보급되기 전, 불을 얻기 힘들었던 옛 사람들은 한 번의 마찰로 불이 일어나는 모습이 「도깨비불」처럼 보여 인촌(燐寸)으로도 불렀다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이 위치한 이곳은 1917년 문을 연 조선인촌주식회사 자리이다

조선인촌은 멀리 신의주와 평양에 지점을 내고 전국으로 판로를 개척한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성냥공장이었다

1930년대 후반에 공장 직공이 800명 · 부업 종사자가 2,800명에 달해 그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6 · 25전쟁 이후 조선인촌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기술이 인천에 퍼져 인근에 많은 성냥공장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대한성냥 · 고려성냥 · 인천성냥 등이 이 시기에 생겨났다

2019년 인천 민속문화의 해를 맞이하여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이 개관하였다

공장 폐업 이후 오랫동안 배다리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한 동인천우체국과 같이 마을을 위한 공간으로 함께하겠다

 

 

 

 

성냥의 역사

1827년 영국에서 처음 개발된 성냥은 범어사 출신 개화승이었던 이동인(李東仁 ?~1881)이 1880년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것으로 알려졌으며

1886년 독일 마이어(Meyer)상사가 제물포에 세창양행무역상사를 설립하면서 성냥을 수입하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성냥공장이 만들어진 것은 1917년 10월 4일로 이 자리에 조선인촌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당시 만들던 성냥은 황린(黃燐) 성냥으로 독성이 있고, 인화점이 낮아 실온에서도 발화되는 등 매우 위험했다

그래서 1921년 황린성냥제조금지법에 의해 생산이 중단되고 이후 인화점이 높은 적린(赤燐) 성냥을 주로 만들게 되었다

성냥의 역사를 이야기하다에서는 성냥을 처음 접했을 때의 문화적 충격과 전국으로 확대된 성냥에서부터 성냥공장이 사라지는 과정을 담았다

 

 

 

 

조선인촌주식회사

1827 영국 J. 워커 마찰성냥 발명

1845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성냥팔이 소녀」 발표

1880 개화승 이동인 성냥을 들여옴

1886년 외국인이 인천에 성냥공장을 세움

1917 조선인촌주식회사 설립

1947 석냥(성냥) 제조에 허가제 실시

 

 

 

 

성냥제조 공정도

원목집하 / 축목 1단계 / 축목 2단계 / 두약 제작 / 두약 찍기 / 포장작업으로 되어 있다

 

 

 

 

배다리 여인숙골목(現 배다리 아트스테이 1930) / 1930년대~현재

배다리 골목에 위치한 여인숙(진도 · 성진 · 길조)들은 1930년대 이후 건축된 건물로

이중 적산가옥 형태를 가진 진도여인숙은 인천시 건축자산으로 지정되었다

과거 일용직 노동자들을 위한 숙박 용도와 음식점으로 사용되다 2015년 경에 폐업되었다

2020년 동구청에서 매입 · 리모델링을 통해 현재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중이다

 

 

 

 

빨래터 카페

 

 

 

 

빨래터 카페

예전 여인숙 골목이다

 

 

 

 

배다리 여인숙골목(現 배다리 아트스테이 1930) / 1930년대~현재

배다리 골목에 위치한 여인숙(진도 · 성진 · 길조)들은 1930년대 이후 건축된 건물로

이중 적산가옥 형태를 가진 진도여인숙은 인천시 건축자산으로 지정되었다

*

(2016. 6. 18)

 

 

 

 

대인상회(大仁商會) · 現대인상회 건물 · 토시살집 / 일제강점기~현재

일제강점기 시대 지어진 목조건물로 1953년 무렵에는 대인상회라는 미곡상으로 운영되었다

한 때 소유주가 변경되어 유명한 냉면집(인천식당)으로 운영되었다가 1974년부터 현재의 주인이 토시살 숯불구이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토시살 숯불구이집

영업시간 11~19시 · 당일 예약 필수 음식점이다

 

 

 

 

배다리전통거리

 

 

 

 

깜상네

보신탕으로 유명한 음식점이다

 

 

 

 

중앙시장 그릇상점

혼수 그릇을 마련할 때 많이 찾았던 곳이다

 

 

 

 

구 동인천 지하상가

 

 

 

 

구 동인천 지하상가

문닫은 상점이 많다

 

 

 

 

신포동 지하상가

이곳도 문닫은 상점이 많다

 

 

 

 

다복집

1960년대 중반 안주 스지탕을 내놓기 시작하면서 술꾼들의 호평과 함께 알려지기 시작한 곳이다

신포동역사가 묻어 있는 대폿집으로 2020년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이어가게로 선정되었다

 

 

 

 

다복집

시인 원정 최승렬(園丁 崔承烈 1921~2003) 석고상이 있다

 

 

 

 

 

다복집 한복수 사장님 · 원정 최승렬 시인

 

 

 

 

추억 / 최승렬

 

 

 

 

다래횟집

민어회 · 보리굴비 · 대방어 전문점이다

 

 

 

 

신포주점

오래된 주점이다

 

 

 

 

신포동 토박이

신포주점 등 신포동 이야기를 들었다

 

 

 

 

신포동 이야기를 들으시다

 

 

 

 

신포동 이야기를 보태신다

 

 

 

 

신포시장 안내판 /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

제물포에는 다른 지역처럼 5일장 같은 전통적인 정기 시장이 없었다

개항 이후 근대적 상설시장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이 1895년 서울 청파동 출신 어물 객주 정흥택이 차린 붙박이 생선전이었다

"생선전에는 새벽부터 가정부인이 손 광주리를 들고 나와 골라서 샀다

그러면 머리와 꼬리를 잘 드는 식칼을 번쩍거리면서 자르고 뼈를 바르고 비늘을 떼고

껍질과 살 토막 · 알 · 이리 · 배래기를 각각 뜨고 저며서 따로 따로 골라 나누어 손님이 그 중에 좋아하는 부분만을 저울에 달아

대패밥 포장지에 싸서 준다"는 기록을 통해 생선전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정흥택의 동생 순택 · 세택 등과 함께 중구 내동 · 터진개 선창가였던 옛 신포슈퍼마켓 자리에 한옥 건물을 짓고 생성전을 개설했는데

이것이 중국인들이 차지했던 푸성귀전과 더불어 신포시장의 시초로서 인천 시장(市場) 발전사의 한 장을 기록하는 것이다

 

 

 

 

신포시장

늦은 시간이라 상점들이 거의 문을 닫었다

 

 

 

 

화선횟집

tv N 수요미식회에 방영된 민어회 맛집이다

 

 

 

 

신포동 푸성귀 전(廛)

19세기 말엽 신포동에 푸성귀 전이 생겨났다

중국 산동성 출신 강 씨 · 왕 씨에 의해 처음으로 재배된 서양의 푸성귀는 당시 인천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과 서양인들이 즐겨 찾는 야채들이었다

양파 · 양배추 · 당근 · 토마토 · 피망 · 시금치 · 우엉 · 완두콩 · 부추 등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낯설게 불려지던 이름이었다

신포동 푸성귀 전의 탄생은 우리 지역에서 야채를 전문적으로 내어 파는 근대시장의 기틀을 최초로 마련했다는 데에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신포동 닭강정

늦은 시간인데 줄을 서있다

 

 

 

 

떡볶기

 

 

 

 

답동성당

 

 

 

 

우현로39번길

 

 

 

 

신포역

마침점이다

 

 

 

 

걸은 거리 3.9km · 소요시간 3시간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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