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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한양도성박물관 상설전시실 1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를 위해 자연지세를 따라

태조 5년(1396) 축조된 한양도성은 600여 년 동안 서울을 지켜온 수도의 성곽이었다

평균 높이 약 5~8m · 전체 길이 18.627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일부 훼철되기도 하였지만

오늘날까지 그 원형이 잘 남아 있어 도시와 공존하는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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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공원에 위치한 한양도성박물관은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양도성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박물관으로

상설전시실 · 기획전시실 · 한양도성 자료실과 학습실을 갖춘 문화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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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전시장 1

한양도성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축소 모형과 영상을 통해

오늘날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재조명되고 있는 한양도성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디지털 순성 체험 코너에서는 곡면 영상을 통해 18.627km의 한양도성을 둘러보는 동시에, 순성할 때 유용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상설전시장 1

 

 

 

 

수선전도(首善全圖)

종묘(宗廟)는 조종(祖宗)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고

궁궐(宮闕)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政令)을 내는 것이며

성곽(城郭)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켜내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다

「태조실록」 1394년(태조 3) 11월 3일

 

 

 

 

서울, 한양도성

1396년 조선의 수도 서울(한양)에 건설된 한양도성은 도시의 경계이자 도성민의 삶을 지키던 울타리였다

근대화 과정에서 도성의 기능은 없어지고 망각 속에서 제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채 우리 곁에서 멀어졌지만

한양도성은 여전히 서울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발굴과 복원을 통해 현대에 되살아나고 있는 한양도성은 사계절과 밤낮의 변화를 거듭하며 지금도 도성 안 서울 사람들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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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성의 동영상 · 모형이 있다

 

 

 

 

내사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을 보여준다

 

 

 

 

태조대 · 세종대 · 숙종대 · 순조대 성벽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은 태조대 성벽 · 옥수수알 모양의 세종대 성벽 · 견고한 방형의 숙종대 성벽 · 정교하게 다듬은 정방형의 순조대 성벽

 

 

 

 

서울도성의 모형

 

 

 

 

한양도성의 과거와 현재 연대표

 

 

 

 

한양도성의 연대표

 

 

 

 

도성이 서울이다 · 한양도성의 가치

한양도성의 사진이 있다

 

 

 

 

도성이 서울이다

자본주의 산업화 이전의 도시들은 대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인류가 수천 년 전부터 지표상 특정 공간을 성벽으로 둘러싼 것은

성벽 안쪽이 특별한 기능과 상징성을 가진 영역임을 표시하고, 그 영역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맥락에서 한양도성을 처음 축성할 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도

"성곽은 안팎의 경계를 엄격히 하고 나라를 굳건히 지키기 위한 것(城郭所以嚴內外而固邦國)"이라고 했다

도성이란 왕이 거처하는 성으로서 여러 성 중에서 으뜸가는 성 · 곧 모든 국가 기능이 집중된 수도를 의미한다

순 우리말 「서울」은 수도라는 뜻이니, 도성이 곧 서울이었다

서울은 도성 안의 국가 중추 기능을 보존한 채 성벽을 넘어 현대 도시로 팽창했다

현재 한양도성은 국제도시 서울의 역사를 증언하는 문화유산이다

 

 

 

 

한양도성의 가치

한국인들은 고대부터 산의 능선에 성을 쌓는 축성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한양도성은 이를 계승하여 자연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면서도 위엄과 효율을 극대화했다

도시의 외곽선이 자연의 선형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에, 내부의 가로 체계와 도시 구조도 자연의 형상과 조화를 이루었다

이는 대로를 중심으로 인위적이며 기하학적인 도로망을 형성한 동시대 아시아 도시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한양도성은 다양한 지형과 지질에 따라 서로 다른 축성 기법을 사용했으며

무너진 구간을 보수할 때마다 진전된 기술을 도입했으니 한국 축성 기술의 발전 과정을 아로새긴 문화유산이다

또 출입 · 보수 · 관리 · 순찰 등과 관련한 노동 · 놀이 · 예술의 배경이자 무대이기도 했다

서울이 팽창하기 시작한 뒤 성벽 주변에 생긴 마을들은 오래된 문화유산이자 공존하는 현대적 생활양식임을 보여준다

 

 

 

 

한양도성 순성길, 여섯 구간

1 백악구간 / 창의문에서 혜화문까지

창의문에서 백악산(白岳山)을 넘어 혜화문에 이르는 구간이다

백악산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산이라 하여 백악산이라 불렀다. 북악산(北岳山) · 면악산(面岳山) · 공극산(拱極山)이라고도 한다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내사산(內四山) 중 342.5m로 가장 높으며, 산세가 '반쯤 핀 모란꽃'에 비유될 만큼 아름답다

한양도성은 백악산을 기점으로 축조되었다

1968년 1 · 21사태 이후 40년 가까이 출입이 제한되다가 2007년부터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2 낙산구간 / 혜화문에서 흥인지문까지

혜화문에서 낙산(駱山)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아 낙산이라 하며 낙타산(駱駝山) 혹은 타락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서울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는 산으로 내사산 중 124.4m로 가장 낮다

가톨릭대학교를 따라 이어진 성벽길을 걸으면 시기별로 달라진 축성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장수마을 · 이화마을 등 옛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성곽마을도 둘러볼 수 있다

 

 

 

 

3 흥인지문 구간 / 흥인지문에서 장충체육관까지

흥인지문 구간은 흥인지문에서 광희문을 지나 장충체육관에 이르는 구간이다

한양도성 전 구간 가운데 가장 지대가 낮다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는 오간수문 터와 2009년 발굴 · 복원된 이간수문이 자리하고 있다

광희문 성벽을 따라 장충동 주택가로 들어서면 한양도성의 흔적이 사라지는데, 1930년대 주택단지 조성으로 성벽이 파괴된 지역이다

현재 성돌은 주택의 담장이나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

 

 

 

 

4 남산(목멱산) 구간 / 장충체육관에서 백범광장까지

남산 구간은 장충체육관 뒷길에서 남산공원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남산(270.9m)의 또 다른 이름인 목멱산(木覓山)은 남산을 뜻하는 「마뫼」의 이두식 표현에서 유래한다

서울의 안산(案山)에 해당하여 조선 초기부터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국사당을 이 산에 두었다

또 정상에는 변방의 변란을 알리는 봉수대를 설치하여 궁궐에서 직접 살필 수 있게 하였다

남산의 동쪽 능선을 따라 조성된 나무계단길 옆에는 태조 때부터 성벽이 초축 당시의 모습을 유지한 채 상당 부분 남아 있다

 

 

 

 

5 숭례문 구간 / 백범광장에서 돈의문 터까지

숭례문 구간은 남산의 백범광장에서 돈의문 터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한양도성의 평지 구간으로 성벽이 가장 많이 훼손되어 있다

한양도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는데, 대한상공회의소에서 퍼시픽타워까지 이어지는 곳에 성벽의 일부가 담장처럼 남아 있고

창덕여자중학교 담장 아랫부분에서 50m 정도 네모반듯한 성벽의 일부를 볼 수 있다

 

 

 

 

6 인왕산 구간 / 돈의문 터에서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인왕산 구간은 돈의문 터에서 시작해 인왕산(仁王山)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인왕산(339.9m)은 산기슭에 인왕사(仁王寺)라는 사찰이 있어 유래된 이름으로 조선 초에는 서산(西山)아러고도 불렸다

서울의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거대한 바위들이 노출되어 있는 바위산으로 치마바위 · 선바위 · 기차바위 등 기암괴석이 많다

1968년 1 · 21사태 이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다가 1993년 개방되었다

인왕산 정상에서 치마바위를 지나 탕춘대성(蕩春大城) 갈림길에서 성 바깥길을 걸으면 시기별 축성 방법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구간이 나온다

 

 

 

 

디지털 순성 체험 코너

곡면 영상을 통해 18.627km의 한양도성을 둘러보는 동시에, 순성할 때 유용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성벽에 기록된 도성의 역사

각자성석(刻字城石)은 글자를 새긴 성돌로 요즘 말로 공사 실명제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각자성석은 삼국시대 고구려 평양성에서 발견된 것이다

한양도성의 전 구간에 걸쳐 300여 개가 발견되었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은 시대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태조대에는 천자문 자호(字號)와 소구간을 표시하는 숫자를, 세종대에는 군(郡) · 현(縣)의 이름을

조선 후기에는 공사시기 · 담당 군영명 · 공사책임자 · 공사 감독자 등을 새겼다

각자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 군영등록 등 국가기록문헌의 내용과 일치하므로 한양도성의 구간별 축성시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조선시대 도성 관리의 철저함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기록과 유물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한양도성의 역사적 가치를 증명해 준다

 

 

 

 

감역판관 최유원 일백오십 척(監役判官 崔有遠 一百五十尺)

경상 · 전라 · 강원도와 서북면의 안주(安州) 이남과 동북면의 함주(咸州) 이남의 민정(民丁) 11만 8천 70여 명을 징발하여 처음으로 도성을 쌓게 했다

이미 성터를 측량하여 자호(字號)를 나누어 정하였는데, 백악(白岳)의 동쪽에서 천(天) 자로 시작하여 백악의 서쪽으로 조(弔) 자에서 그치게 하였다

서쪽 산 돌재(石嶺)까지 합해서 땅의 척수가 무릇 5만 9천 5백 척(尺)이요, 6백 척마다 한 자호(字號)를 붙였으니, 모두 97자(字)이며

한 글자마다 6호(號)로 나누고, 두 자(字) 마다 감역(監役)을 두고

판사(判事) · 부판사(副判事)는 각 1원(員)을 두고, 사(使) · 부사(副使) · 판관(判官)은 12원(員)을 두었다

 

「태조실록」 태조 5년(1396) 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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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성석탁본(刻字城石拓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