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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한양도성박물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를 위해 자연지세를 따라

태조 5년(1396) 축조된 한양도성은 600여 년 동안 서울을 지켜온 수도의 성곽이었다

평균 높이 약 5~8m · 전체 길이 18.627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일부 훼철되기도 하였지만

오늘날까지 그 원형이 잘 남아 있어 도시와 공존하는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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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공원에 위치한 한양도성박물관은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양도성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박물관으로

상설전시실 · 기획전시실 · 한양도성 자료실과 학습실을 갖춘 문화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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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근처에서 친구 모임이 있어 가까운 한양도성박물관을 찾았다

 

 

흥인지문(興仁之門 · 동대문)

동대문역 1번출구가 시점이다

 

 

 

 

동인교회

동대문에서 낙산구간 들머리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漢陽都城 刻子城石)

숙종 32년(1706) 4월에 훈련도감의 관리인 한필영이 공사를 총괄하고, 1구간 성세각 · 2구간 전수선 · 3구간 유제한이 공사를 이끌었고

석수 우두머리는 오유선 · 1구간 석수 양육오 · 2구간 황승선 · 3구간 김정립이 참여하여 고쳐쌓았다는 기록이다

석재의 운반을 담당한 관리들의 명단은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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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한양도성에 남아 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 ·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현재 288개 남아 있고, 이중 41%에 해당하는 118개의 각자성석은 세종 때 만들어 진 것이다

 

 

 

 

훈국 책응겸독역장십인 사 한필영(訓局 策應兼督役長十人 史 韓弼榮) · 일패장 절충 성세각(一牌長 折衝 成世珏)

 

 

 

 

이패장 절충 전수선(二牌長 折衝 全守善) · 삼패장 사과 유제한(三牌長 司果 劉濟漢)

 

 

 

 

석수 도편수 오유선(石手 都邊首 吳有善) · 일패 편수 양육오(一牌邊首 梁六吳) · 이패 편수 황승선(二牌邊首 黃承善)

 

 

 

 

삼패 편수 김정립(三牌邊首 金廷立) 강희 사십오년 사월 일 개축(康熙 四十五年 四月 日 改築)

 

 

 

 

일월오봉도 / 김종임 作

 

 

 

 

흥인지문공원

 

 

 

 

흥인지문(興仁之門 · 동대문)

한양도성박물관으로 오르며 봤다

 

 

 

 

한양도성박물관 · 서울디자인재단

 

 

 

 

이화여자대학교 동대문병원(1887~2008) 바닥 동판

1886년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한 미국의 선교사 메리 F. 스크랜튼 여사는

그 이듬해인 1887년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을 설립했고, 보구여관은 1892년 볼드윈 진료소라는 동대문 분원을 개설했다

볼드윈 진료소는 그후 근대식 건물로 신축 확장되어 릴리언해리스 기념병원 · 동대문 부인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45년 이화여대가 의학부를 설립하면서 의과대학 부속병원이 되어 우리나라의 현대 의료 및 의학교육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흥인지문(興仁之門 · 동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 · 동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 · 동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 · 동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 · 동대문)

 

 

 

 

창신숭인채석장

 

 

 

 

롯데캐슬천지인아파트 · 동인교회

 

 

 

 

남산

 

 

 

 

남산

 

 

 

 

남산 회현자락(중앙광장) 출토 성돌

2013~2015년 남산 회현자락의 중앙광장을 발굴조사하면서 발견한 성돌들이다

성벽은 크게 몸체 부분을 이루는 체성(體性)과 그 위에 올려져 있는 낮은 담장인 여장(女墻)으로 구분된다

이 성돌들은 체성의 면석으로, 시기별로 다른 돌들의 모양을 통해 축성시기와 축성방식의 발달과정을 알 수 있다

면석의 뒤에는 흙과 잡석으로 뒷채움하여 성벽의 붕괴를 방지하였다

남산 회현자락은 조선신궁(1925)과 남산 국회의사당 신축계획(1959) 등으로 한양도성 성벽이 대규모로 철거된 지역이다

 

 

 

 

처음으로 도성을 쌓게 했다

이미 성터를 측량하여 자호(字號)를 나누어 정하였는데

백악의 동쪽에서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백악의 서쪽으로 조자(弔字)에서 그치게 하였다

태조실록 권9, 1396년(태조 5) 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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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 성돌 앞에 있는 글이다

 

 

 

 

도성의 역사(役事)를 마쳤다

성을 돌로 쌓았는데, 험지(險地)는 높이가 16척이요

그 다음으로 높은 곳이 20척이요, 평지는 높이가 23척이었다

세종실록 권15, 1422년(세종 4) 2월 23일

 

 

 

 

도성의 수축(修築)을 시작하기에 앞서 삼각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오군문(五軍門)에서 각각 장교를 보내어 노원과 주암 등지에서 돌을 뜨게 하였다

숙종실록 권39, 1704년((숙종 30) 3월 25일

 

 

 

 

윤익렬이 훈련도감의 말로써 아뢰기를

"본국에서 맡고 있는 도성 창의문 서쪽 제6성랑 근처 체성 7칸 가량 무너진 곳은 이미 쌓기를 마쳤습니다"

승정원일기 1841책, 1801년(순조 1) 9월 12일

 

 

 

 

훈련도감에서 아뢰기를

"도성의 여장 수축 공사를 3군문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도록 결정한 바 있습니다"

비변사등록 60책, 1710년(숙종 36) 2월 18일

 

 

 

 

한양도성박물관 · 서울디자인재단

 

 

 

 

상설전시실 1

1396년 조선의 수도 서울(한양)에 건설된 한양도성은 도시의 경계이자 도성민의 삶을 지키던 울타리였다

근대화 과정에서 도성의 기능은 없어지고 망각 속에서 제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채 우리 곁에서 멀어졌지만

한양도성은 여전히 서울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발굴과 복원을 통해 현대에 되살아나고 있는 한양도성은 사계절과 밤낮의 변화를 거듭하며 지금도 도성 안 서울 사람들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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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성의 동영상 · 모형이 있다

 

 

 

 

기획전시실

혜화문 사진엽서 / 일제강점기

1928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문루가 훼철되기 이전 혜화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상설전시실 2 / 도성의 안과 밖 · 《동국여도 도성도(東國與圖 都城圖)》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도성 안의 호수는 1만 7천 15호 · 성벽 바깥 10리 이내인 성저십리(城底十里)의 호수는 1천 7백 79호였다

성저십리의 면적이 도성 안보다 5배 이상 넓었으나 인구는 1/10에 불과했다

성저십리의 행정도 한성부가 담당했지만, 성벽은 그 안과 팎을 전혀 다른 세상으로 나누었다

도성 안은 왕실과 국가의 존립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도성 주민은 조세 · 공물 · 요역을 모두 면제받았다

대신 도성 안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국가의 지휘에 따라 일상생활을 조직할 의무를 졌다

성문이 닫히면 도성 안에서는 남자들의 통행이 금지되었고, 문루에서 화재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모두 불을 끄러 나와야 했다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 과거시험을 치르거나 군인  · 공장(工匠)으로 불려올 때, 혹은 도성 안 사람들의 생활용품을 공급할 때나 도성에 들어올 수 있었다

도성이 경계선의 기능을 잃어버린 뒤에도 오랫동안 「성안에 산다」는 말에는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상설전시실 3 / 변화의 시작

19세기 중후반부터 시작된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 속에서 조선 정부는 해안과 도성 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경복궁과 흥인지문을 새로 짓는 등 도성을 재정비하고 왕권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도성 안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면서 도성의 군사적 의미는 크게 손상되었다

또 정부의 군제 개혁으로 인해 삼군문이 해체됨으로써 일상적인 도성 관리도 허술해졌다

도성 안은 1882년 중국 상인들에게, 1885년부터는 통상조약을 체결한 모든 나라 상인들에게 개방되었다

남산 기슭에서 개천에 이르는 구간은 일본인과 청국인의 거류지가 되었다

도성 안에 외국 공관과 종교시설 · 교육시설들이 속속 들어섰는데, 이들 둥에는 성벽 바로 옆에 지은 것이 많았다

 

 

 

 

동대문종합시장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대학천상가

 

 

 

 

종로신진시장

 

 

 

 

원 할매 닭한마리

영화 히말라야 · 맛있는 녀석들 등에 나온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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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자주 가던 곳은 줄서서 기다리는 바람에 이곳에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