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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국립중앙박물관 대한제국

국립중앙박물관 대한제국실이다

 

 

대한제국(大韓帝國) 1897 - 1910

고종(高宗)은 1897년 10월 13일 독자적으로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제정하고,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바꾸어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국가임을 선포했다

대한제국은 1899년 근대 헌법의 성격을 띤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반포하여 황제권을 강화하고,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하였다

전차 · 통신 · 철도 등 서양의 문물이 속속 도입되면서 한성은 근대적인 도시로 변하게 된다

암울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도 근대의 문물이 놀라운 속도로 생활 곳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대한제국은 일제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1910년 결국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한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국망(國亡)」이란 결론에만 매달려 평가할 것이 아니라 당시 대한제국이 놓여 있었던 시대적인 특수성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대한제국이 반봉건 · 반외세 · 근대화라는 역사적인 과제를 안고 있었고 이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대한제국 연표

 

 

 

 

조선왕조의궤, 그 이후

1897년 10월 12일,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은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500여 년 동안 왕이 통치하는 나라였던 조선은 이제 황제의 나라로 변모했다

국가체제는 바뀌었지만 의궤 제작은 계속되었다

이제는 황제의 상징인 황색 비단으로 표지를 삼고, 황태자에게 올리는 의궤는 붉은 비단으로 표지를 만들었다

겉모습은 달라졌지만 예법에 맞게 의례를 해하고, 그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다는 의궤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대례의궤(大禮儀軌) / 1897년(광무 1)

1897년(광무 1) 10월 12일 조선의 국왕이었던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즉위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9부를 제작하여 주요 관청과 지방의 네 사고(史庫) · 규장각 · 고종이 황제로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던 환구단(圜丘壇)에 하나씩 올렸는데

그중 정족산사고에 봉안하였던 분상용의궤이다

권말에 황제를 상징하는 색인 황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황제국으로 국체가 바뀌면서 나타난 변화 중의 하나이다

 

 

 

 

대한제국 황제의 인장 / 대한제국 1897년(광무 1)

황제의 자리에 오른 고종(재위 1863-1907)은 황제국의 위상에 어울리는 인장(국새 · 國璽)을 새로 만들었다

상황에 따라 달리 쓸 수 있도록 여러 개를 만들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칙명지보(勅命之寶)〉이다

「칙명」은 황제의 명령이라는 뜻이다

황제가 3품-6품의 관료를 임명하거나, 명령을 반포할 때 사용한 인장이다

 

 

 

 

고종황제 어진(高宗皇帝 御眞) / 대한제국 20세기 초 · 전 채용신(傳 蔡龍臣 1850~1941)

황색 곤룡포를 입은 고종황제의 초상화

전통 초상화에 바탕을 두면서도 서양화법과 근대 사진술의 영향을 받아 사실적이며 입체적이다

이전 시기 초상화에 비해 다소 왜소해진 몸의 표현과 사실적인 비율의 체구 · 과장되지 않은 옷 주름 · 관복 윤곽의 표현은 20세기 이후 초상화의 특징이다

이 작품 외에도 현재 고종 어진은 두 점이 더 알려져 있다

 

 

 

 

궁내부(宮內府) 현판

황제 직속 기구였던 궁내부의 현판

궁내부는 갑오개혁 때 입헌군주제를 실현하고자 만들었으나 대한제국 들어서는 전제 군주권을 강화하는 황제 직속기구가 되었다

대한제국은 궁배부를 중심으로 근대화사업을 추진하였다

궁내부 산하에는 통신사(通信司) · 철도원(鐵道院) · 서북철도국(西北鐵道局) · 예식원(禮式院) · 박문원(博文院)

수륜원(水輪院) 등을 두어 1903년 정원 520여 명의 거대한 관부가 되었다

특히 궁내부 내장원은 역둔토 · 광산 · 홍삼 · 잡세 등 막대한 황실의 재원을 관리하면서 개혁 자금을 지원하였다

궁내부의 확대 · 강화는 황제의 측근 세력이 정치적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중요 기반이 되었다

 

 

 

 

관인(官印) / 조선 1894년(고종 31) 이후

대한제국기 관부에서 사용한 도장

갑오개혁 때 국가 행정과 왕실행정을 분리하여 의정부와 궁내부로 나누고

1895년 의정부를 내각으로, 각 아문(衙門)을 부(部)로 개칭하여 외부 · 내부 · 탁지부 · 군부 · 법부 · 학부 · 농상공부의 7부를 두었다

아관파천으로 의정부가 한때 부활되기도 하였으나 갑오개혁 이후 관제 개편이 대한제국기에도 기본 골격을 이루었다

관인은 이러한 근대 관제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근대 관인은 공문서 양식의 변화에 따라 조선시대에 비해 크기가 더 작아졌다

 

 

 

 

훈장 / 대한제국 1900년 이후 · 예검 / 대한제국

대한제국은 서양을 모방한 훈장제도를 정하여 공로가 있는 사람을 표창하고자 하였다

1900년 4월 칙령 제13호로 「훈장조례」를 반포하여 훈위(勳位)와 훈등(勳等)을 정하고 그에 맞는 훈장을 내렸다

훈등은 대훈위(大勳位) · 훈(勳) · 공(功) 등 세 종류로 구분하고, 훈과 공은 각기 8등급으로 나누었다

훈장은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 · 서성대훈장(瑞星大勳章) · 이화대훈장(李花大勳章) · 태극장(太極章) · 팔괘장(八卦章) · 자응장(紫鷹章)으로 구분하였다

1907년에는 내외명부(內外命婦) 가운데 덕행과 훈공이 있는 자에게 서봉장(瑞鳳章)을 수여하였다

*

대한제국의 문관이 착용한 의례용 칼이다

일반적으로 대례복에 국가 상징 문양을 넣어 자주국가임을 나타내었으며, 대한제국은 상징 문양으로 무궁화 문양을 채택하였다

1900년 「문관복장규칙」 · 「문관대례복제식」을 발표하며, 연미복 · 모자 · 예검 · 훈장 등으로 구성된 서구식 대례복이 문관의 공식 복장이 되었다

이때 백피(白皮)로 만든 손잡이와 무궁화문을 새진 의례용 칼을 착용하였다

1906년 궁내부 본부와 예식원의 친임관 및 칙임관의 예복 규정을 마련하며, 새로운 대례복을 만들고 이화문을 새긴 예검을 착용하게 하였다

예식원은 궁내의 대외교섭 · 외교문서 · 예식친서 · 국서를 번역하는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고종황제 옥보(高宗皇帝 玉寶) / 대한제국 1902년(광무 6)

고종황제의 51세 생일과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며 「건행곤정영의홍휴(乾行坤定英毅弘休)」라는 존호를 더 올리면서 제작한 옥보이다

옥보는 옥을 깎아 사각형을 만들고 손잡이를 용모양으로 장식하였다

글자를 새진 인면(印面)에는 총 52자를 새겼는데, 고종의 덕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대원수보(大元帥寶) / 대한제국 1899년(광무 3)

고종황제는 대한국 국제를 반포해 자강(自强)을 꾀하는 동시에 1899년 6월에 원수부를 설치하여 육해군을 통솔하는 군통수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황제가 군부 위에서 직접 군령(軍令)을 장악하고 육군과 해군을 하나로 통솔하였다

대원수보는 대원수로서 군령을 낼 때 사용한 국새이다

 

 

 

 

기념장(記念章)

대한제국기에는 국가와 황실 기념일에 행사를 열어 참가한 사람들에게 기념장을 나누어주었다

「고종황제 성수 50주년 기념장」은 1901년 고종의 50주년 생일을 축하하고자 황제가 쓰는 통천관(通天冠)을 새겼고

1902년 발행한 「고종황제 망육순과 등극 40주년 기념장」에는 기로소에 있던 영수각(靈壽閣)이란 누각을 새겼다

1907년에는 「황태자 가례 기념장」과 「순종황제 즉위 기념장」을 만들었고 1909년에는 「순종황제 남 · 서 순행 기념장」을 발행하였다

 

 

 

 

금책(金冊) / 대한제국 1897년(광무 1)

황태자를 책봉하면서 금으로 만든 책봉문이다

대한제국이 황제국 체제가 되면서 금책이 등장하였다

왕세자 척(坧)을 황태자로 책봉하면서 만든 금책이다

 

 

 

 

자주독립과 근대화

대한제국은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의례를 재정비하여 고종 어진(御眞)을 제작하고 황제의 인장인 칙명지보(勅命之寶) · 제고지보(制誥之寶)를 만들었다

부국강병의 나라를 만들고자 원수부(元帥府)를 창설하여 황제권을 더욱 강화하고 궁내부를 중심으로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한편, 국제사회에 대한제국을 알리고자 세계박람회에 참석하거나 국제기구에 가입하였다

또한 대한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한국을 소개하는 책자를 발간하여 한국을 알렸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 대한제국 1907년 9월 24일

일본의 침략 행위를 비판하고 민족 운동을 소개하다

당시 발간되던 신문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일본을 비판한 신문이다

일본은 언론을 감시하고 간섭했지만,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 베텔(E. T. Bethell · 裵說)이어서 함부로 하지 못했다

의병 항쟁을 자세히 보도하는 등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글을 매일 싣고, 대한제국의 관리들의 비리와 일본인들의 횡포를 고발했다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체보상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가뎡잡지(家庭雜誌) 제5호 / 대한제국 1908년(융희 2) 6월 25일

순 한글로 쓴 여성잡지로 가뎡잡지 제5호의 발간에 참여한 인사는 대부분 1907년 국권을 회복하려고 조직된 신민회의 주요 회원들이었다

이들은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신지식과 사상을 받아들여 새로운 가정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이 잡지를 발간하였다

 

 

 

 

국문정리(國文正理) / 이봉운 李鳳運 · 조선 1897년(고종 34)

갑오개혁 이후 처음으로 간행한 국어 종합 연구서

갑오개혁 때 조선 정부는 자주 독립을 주장하며 공식 문서에 한글을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당시 국어학자 이봉운은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국어교육과 문법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국어 종합 연구서를 간행했다

그는 일본어와 중국어를 참고하여 한글을 발음의 길이와 무성음과 유성음을 구별하여 적었다

권점[O]으로 뛰어쓰기를 표시했고, 고유명사는 인명은 한 줄 · 지명은 두 줄로 그어서 표시했다

 

 

 

 

신정산술(新訂算術) / 대한제국 1907년(융희 1)

초등학교용 근대 산수 교과서로 1907년 양재건(梁在謇)이 편집하여 발간한 책이다. 국한문혼용의 세로쓰기를 원칙으로 하였다

아라비아 숫자나 계산 과정 등은 가로쓰기를 하여 전통 수학과 서양 수학의 과도기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간단한 사칙연산과 수학 원리를 설명하고 관련된 연습문제와 해답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화폐(貨幣)

대한제국의 화폐 발행과 일제의 화폐 · 금융 장악

대한제국은 1901년 「화폐조례」를 반포하여 화폐 제조와 발행 권한이 대한제국 정부에 있음을 명시하였고

금본위제를 채택하였지만 이것은 법령상 규정에 그쳤다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 체결로 대한제국 경제를 일제에 예속시키는 일련의 정책이 추진되었다

대한제국의 전환국을 폐쇄하고 화폐 정리 사업을 시행하였다

일본 제일은행권을 태환권으로 보장하였고 제일은행이 우리나라 조세를 취금하는 금고 역할을 하였다

 

 

 

 

우표(郵票) / 19세기 말~20세기 초

대한제국에서 발행한 보통우표

1895년 발행한 태극 보통우표, 대한제국기에 발행한 이화 보통우표와 독수리 보통우표 등 183개의 우표가 부착되어 있다

모두 실제 사용한 우표들이다

1895년 서울과 지방에 우체사(郵遞司)를 설치하였고, 1900년에는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여 외국과의 우편업무를 시작하였다

 

 

 

 

전보장정(電報章程) / 조선 1888년(고종 25)

우리나라 최초 전신 규정

1885년 한성 - 인천 사이에 처음으로 국내 전신이 개설된 이후 같은 해 서로전선(西路電線 · 인천 - 한성 - 의주)

1887년 남로전선(南路電線 · 한성 - 부산)이 개통되었다

서로전선이 청의 전신선로에, 남로전선이 부산 - 나가사키(長崎) 사이의 해저전신노선에 연결되면서 세계 각국과 통신이 가능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여권 / 대한제국 1904년(광무 8)

박기오의 여권

대한제국 외부(外部)에서 박기오(朴基五)에게 발행한 여권이다

외국으로 공무나 여행 · 이민을 원하는 사람의 신분과 국적을 증명하고 보호를 의뢰하는 내용이다

여권에는 이름과 주소 · 나이 · 여행지와 여행목적 등을 기록했으며, 대한제국의 상징인 태극기와 오얏꽃 무늬가 있다

영어 · 불어 · 한문으로 기록했으며, 유효기간은 1년이다

 

 

 

 

대조선보험회사보험증서 / 대한제국 1897년(광무 1)

우리나라 최초의 보험증서로 소를 보험 대상으로 하여 경제적 보상을 명시한 우리나라 최초의 보험증서이다

이 보험증서는 소가 죽었을 때 일정한 보험금 지급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사원들이 소 주인을 대상으로 보험을 든다는 핑계로 돈을 갈취하여 많은 원성을 샀다

 

 

 

 

근대 문물의 도입

대한제국 도심에 전등이 켜지고, 전차가 운행되며, 전화가 설치되면서 한성은 근대 도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사진기 · 축음기 · 자동차 등 문명의 이기(利器)가 보급되었다

근대적 문물과 제도가 도입되면서 사람들의 인식도 크게 변화하였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서양을 우리가 닮아야 하고 달성해야 할 문명화된 사회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세계 여러나라의 정보와 신지식을 담은 근대 교과서 · 신문 · 잡지 · 학보 · 신서적 등이 발간되어 일반인의 의식을 일깨우고 여론을 형성하였다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 / 프랑스 1900년 12월 16일

프랑스 일간지 《르 프티 주르날 Le Petit Journal》에 실린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당시 대한제국 전시관 모습이다

19세기 후반, 세계 여러 나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인 국기를 제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조선도 1882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으며 처음으로 국기를 사용했고, 1883년 태극기를 조선 국기로 선포하였다

외국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도 태극기는 우리나라의 상징이 되었다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는 경복궁 근정전을 본뜬 전시관을 세우고 태극기를 날리명 재한제국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전 세계에 알렸다

 

 

 

 

축음기 / 영국 1900년대 · 전화기 / 미국 1900년대 · 입체사진, 입체경 / 미국 1920년 경

영국 H.M.V사에서 1900년대 만든 보급형 축음기이다

원반을 통해 소리를 재생하고 나팔 모양의 혼(horn)이 소리를 크게 해준다

축음기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기계 안에 사람이 있거나, 귀신이 내는 소리라고 생각하여 가까이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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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미국 통신장비 제조회사인 스트롬버그 칼슨(STROMBERG CARLSON)에서 만든 자석식 전화기이다

최초의 전화 통화는 1896년 궁내부에서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3월에 한성과 인천 사이의 공중용 시외전화가 개통되었고, 6월에 한성 시내에 교환전화가 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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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사진과 그것을 입체감 있게 볼 수 있는 장치인 입체경이다

입체감이 생기는 이유는 사람의 좌우 두 눈의 망막에 비치는 영상이 일반적으로 대상의 거리에 따라 좌우로 밀리기 때문이다

1850 - 1920년 사이 수백만 장의 입체사진과 다양한 스테레오 카메라 · 입체경이 발매되었다

 

 

 

 

철도 부설의 의미 · 한성 도심의 전차 운행

대한제국은 외국인에게 철도부설권을 양여하기 보다는 자력으로 철도부설을 추진하고자 궁내부 산하에 철도원(鐵道院)과 서북철도국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이 철도 부설권을 사들였다

1899년 9월 18일 제물포와 노량진을 잇는 경인선이 처음으로 개통된 후 경부선과 경의선도 연결되었다

철도는 사람 · 물자 · 정보의 유통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며 국가 산업의 근간이 되었지만

일본의 식민지 수탈과 대륙침략이라는 목적으로 부설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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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의 전차 노선이 처음으로 개통되었다. 한성 도심을 운행하는 전차는 도시 문화를 크게 변화시켰다

전차는 상등칸과 하등칸에 따라 요금에 차이가 있었지만 돈만 있으면 누구든 상등칸을 탈 수 있었다

전차는 정해진 시간과 노선을 운행하였기 때문에 전차를 타려면 규칙을 준수해야 했고

전통시대 신분 · 남녀 · 성 안과 밖 · 밤낮에 따라 구분지었던 것을 타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오락거리 · 여흥의 기회를 재공하였다

 

 

 

 

근대 문명의 상징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철도가 개통되어 우리나라는 세계의 시간대 속에 들어갔고, 이는 시공간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켰다

 

 

 

 

그림엽서(대한제국)

대한제국 엽서는 1900년 농상공부 인쇄국에서 처음으로 발행했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어 교사 알레베크는 그가 촬영한 40여 장의 궁궐과 풍속 사진을 프랑스에 보내어 사진엽서를 제작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 엽서가 본격적으로 유통되었다

철로 가설 및 완공된 철로 · 순종과 황태자 이은(李垠), 대한의원 등 당시의 시기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엽서들이다

한국과 일본의 국기를 나란히 배열하여 한국이 일본과 함께 문명국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암시를 주는, 일본의 한국 침략의 전조를 보여주는 내용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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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당 사진관에서 풍경 · 풍속 그림엽서를 발매하고 있으며, 그림엽서는 연말연시의 선물로 적당하다

 

 

 

 

전차와 승객

남녀노소 구분없이 전차를 이용했기 때문에, 사람 사이의 물리적 · 심리적 · 문화적 거리가 줄어들었다

 

 

 

 

근대 서양의학의 수용

19세기 후반부터 조선은 의학 교육 · 병원 · 종두 및 방역 등 다방면에 걸친 의료 개혁을 추진하며 공공의료의 전통을 이어갔다

1885년 미국 선교사 알렌(H. N Allen)의 건의로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의료기관인 광혜원(廣惠院 · 후에 제중원(濟衆院)을 설립하고 알렌에게 진료를 맡겼다

1899년(광무 3) 대한제국 정부는 정규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교(醫學校)와 국립병원인 광제원(廣濟院)을 세워 근대식 의학 교육과 진료를 강화했다

1907년(융희 1) 국립병원인 대한의원을 개원하고, 1909년(융희 3)에는 전주 · 청주 · 함흥에 서양식 병원인 자혜의원을 세웠다

 

 

 

 

태극기 / 대한제국 1900년 이후 · 조선 1890년 이후

윌리엄 아서 노블은 1892년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와서 1934년까지 활동하였다

부인 매티 윌콕스 노블과 함께 배재학당 교사로 활동하다가 1896년 평양으로 가서 기독교 정착에 공헌하였다

이 태극기들은 노블의 손녀가 기증하였다

 

 

 

 

한국실업지도(韓國實業地圖) / 일본 1905년

일본 도쿄 소재 박문관(博文館)에서 발간한 「실업세계태평양(實業世界太平洋)이라는 잡지 제4권 제1호(1905년 1월 발간) 부록으로 실린 한국실업지도이다

한반도의 지도 위에 각 도에서 생산되는 농축수산물과 광산물의 종류를 붉은 색 글씨로 기재하였다

아울러 철도와 항로 · 해저 전선 · 항구 · 일본영사관 소재지 · 한국전신국 소재지 · 일본 우체국 소재지 · 광산 · 일본인 거주지 등을 각종 기호로 표시하였다

지도의 오른쪽 여백 상단에는 대한제국의 1903년 수출과 수입 품목의 매역을 막대그래프로 제시하였고

그 하단에는 수출과 수입 등 무역 금액과 그 상대 국가를 파이도표로 정리하여 제시하였다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 / 프란츠 에케르트 작곡

애국가는 1890년대 말에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자인(Old lang syne)」의 곡조에

배재학당 학생들이 가사를 붙여 부른 애국가를 비롯해 여러 종류가 등장하였다

이런 가운데 1901년 9월 군악대장 독일인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가 고종 50세 생일에 처음 연주되었으며 1902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 / 프란츠 에케르트 작곡

 

 

 

 

조선비망록 / 윌리엄 프랭크린 샌즈 1896 - 1904 영국 1930년 ·  조선과 이웃 나라들 /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 - 1904) 미국 1898년(광무 2)

샌즈(山島)는 1898년 1월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한국 땅에 부임하였다

궁내부 찬의관(贊議官), 외부(外部) 고문관을 지냈다

그는 조선에 비교적 긍정적이었고 한국의 민속놀이와 제주도의 이재수의 난 · 조선 사람의 신뢰성과 친절

대한제국의 외교 정책과 서구 열강의 이권 외교 등을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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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비숍이 1894년부터 1897년 사이에 조선을 네 차례 방문한 뒤

현장 답사 · 자료 수집 · 문헌 연구를 통해 조선에서 경험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책이다

비숍은 이 책에서 한국의 부패한 관료를 비판하면서 한국인의 가난 · 여성들의 삶 ·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을 언급하였다

 

 

 

 

상투 튼 사람들과 함께한 15년 ·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여사 미국 1904년

제중원(濟衆院)의 부인과(婦人科) 의사이자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 - 1895)의 주치의였던 언더우드 여사가

대한제국에 들어와 보고 체험한 것을 기록한 여행 서적이다

우리나라의 첫인상부터 국민의 성격 · 습관 · 환경 · 국민적 신념과 미신 · 사회적 퇴보 · 대중의 가난과 만연된 무지

풍속과 당시 시대적 배경 · 생활 모습 등을 사진과 함께 생생하게 서술하였다

 

 

 

 

전환기의 조선 / 제임스 게일(1863~1937) 미국 1909년

게일은 캐나다인 선교사로, 한국명은 기일(奇一)이다

1888년(고종 25) 한국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하며 성서를 번역하였다

이 책은 게일이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면서 경험한 일을 기록한 것으로, 한국의 지리 · 역사와 문화 · 종교와 신앙

풍습 및 기독교 선교에 관한 내용과 한국인들의 의식을 심도 있게 기술하였다

또한 평양신학교 학생들 사진 등 한말의 사회 · 문화 · 종교 등을 살펴 볼 수 있는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러일전쟁 · 을사늑약 · 순종 즉위 · 경술국치 · 국권회복항쟁 동영상

러일전쟁 중 한성을 거쳐가는 일본군이다

 

 

 

 

김구 내가 원하는 나라 「백범일지」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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