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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서삼릉

서삼릉은 서쪽에 있는 3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희릉(禧陵) · 예릉(睿陵) · 효릉(孝陵)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1537년(중종 32) 헌릉(태종과 원경왕후) 서쪽에 있던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시작이다

1545년 중종의 능을 희릉 서쪽 언덕(지금의 예릉 자리)에 조성하고 중종과 장경왕후의 능을 합쳐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이듬해 인종의 효릉이 조성되었고, 1562년(명종 17) 중종의 능만 현 서울 강남으로 옮겨지면서 장경왕후의 능은 다시 희릉이 되었다

이후 소현세자의 소경원 · 철종의 예릉이 경내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전국에 있던 왕실가족의 태실과 왕자 · 왕녀 · 후궁들의 무덤을 서삼릉 경내로 옮겨와

집단 태실과 분묘군을 조성하였고, 문효세자의 효창원도 옮겨왔다

광복 후에는 의소세손의 의령원과 왕실 후궁들의 묘 · 폐비 윤씨의 희묘가 이곳으로 옮겨져 지금의 서삼릉이 되었다

 

 

고양 서삼릉 입구 · 매표소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빗돌 · 서삼릉 종합안내도

 

 

 

 

서삼릉 종합안내도

 

 

 

 

희릉으로 가는 길

 

 

 

 

희릉(禧陵)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 1491~1515)는 파원부원군 윤여필의 딸로 중종반정의 주역이었던 박원종의 조카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중종의 후궁 숙의에 봉해졌다가 단경왕후 신씨의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사사되고

역적의 딸인 단경왕후도 1506년(중종 1)  폐위되자 이듬해 왕비로 책봉된 행운의 주인공이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인종과 효혜공주를 낳았다. 1515년(중종 10)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홍살문 · 배위 · 정자각 · 비각 등이 배치되어 있다

 

 

 

 

희릉(禧陵 · 중종비 장경왕후) 안내판

 

 

 

 

향로(香路) · 어로(御路)

향로는 제향시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 · 어로는 제향을 드리러 온 왕이 걷는 길

 

 

 

 

희릉 정자각(禧陵 丁字閣)

 

 

 

 

희릉 비각(禧陵 碑閣)

 

 

 

 

희릉 표석(禧陵 表石) / 비문 앞면

조선국 장경왕후 희릉(朝鮮國 章敬王后 禧陵) / 비문 뒷면 역문

선소의숙장경왕후 윤씨 · 중종대왕 계비 · 홍치 4년(1491) 신해 7월 6일 탄생

정덕원년(1506) 병인에 숙의(淑儀)에 책봉되고, 정묘(1507)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을해(1537) 3월 2일에 승하하여 윤 4월에 광주(廣州) 헌릉(獻陵) 오른쪽에 장사지냈다

가정 16년(1537) 정유 9월 6일에 숭정 기원 후 126년(1753) 세움. 숭정 기원 후 1년(1628)

 

 

 

 

희릉(禧陵)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둘렀지만 조선 전기의 능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왕릉의 격에 맞게 조성되었으며 석물의 규모도 매우 크고 석양과 석호가 호휘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과 망주석 · 장명등 · 문인석 · 무인석 · 석양 · 석호 · 석마 등이 배치되어 있다

 

 

 

 

희릉 예감(禧陵 瘞坎)

제사를 지낸 뒤에 축문과 폐백 따위를 묻거나 태우는 곳이다

 

 

 

 

희릉(禧陵)

정자각(丁字閣) · 비각(碑閣)

 

 

 

 

예릉 금천교(睿陵 禁川橋)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활을 하는 다리다

 

 

 

 

예릉(睿陵)

홍살문 · 정자각(丁字閣) · 비각(碑閣) 등이 배치되어 있다

 

 

 

 

예릉(睿陵)

철종(哲宗 · 1831~1863 / 재위 1849~1863)은 장조(사도세자)의 손자 전계대원군의 아들로 경행방(지금의 서울 종로2가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복형이 역모에 연루되어 강화도 유배지에서 살던 중 1849년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동안 계속된 세도정치로 나라의 정책이 문란하였고, 지방에서 농민봉기와 민란이 일어나 이를 수습하고자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 황제로 추존되었다

철인황후 김씨(哲人皇后 金氏 · 1837~1878)는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로 1851년(철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858년(철종 9)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황후로 추존되었다

 

 

 

 

예릉(睿陵 · 철종과 철인왕후) 안내판 · 상설도

 

 

 

 

수복방 터(守僕房址)

능을 지키는 수복들이 머무르는 건물이 있던 터로 기초석만 남아 있다

 

 

 

 

정자각(丁字閣)

 

 

 

 

예릉 비각(睿陵碑閣)

 

 

 

 

예릉 표석(睿陵 表石) / 비문 앞면

대한 철종장황제 예릉 철인장황후 부좌(大韓 哲宗章皇帝 睿陵 哲人章皇后 祔左) / 비문 뒷면

철종희윤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장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

순조 신묘(1831) 6월 17일 탄생 · 기유(1849)6월 8일 덕완군으로 책봉 · 9일 즉위 · 계해(1863) 12월 8일 승하하였다

재위 14년. 수는 33세. 갑자(1864) 4월 7일 고양 희릉 오른쪽 자좌(子坐)에 장사지냈다

융희 2년(1908) 칠월에 추존하여 황제로 되었다

후명순휘성정원수년경헌장목철인장황후 김씨 · 헌종 정유(1837) 3월 23일 탄생 · 신해(1851)에 왕비로 책봉됨

계해(1863) 태황제가 자리를 물려받자 대비로 추존되었다. 무인(1878) 5월 12일 승하하였다

수는 42세. 이해 9월 18일 동원이봉(同原異封)으로 장사지냈다

융희 2년(1908) 무신 7월에 장황후로 추존되었다

 

 

 

 

예릉(睿陵)

영조 대에 편찬한 「국조상례보편」의 예에 따라 조성된 조선왕릉의 마지막 능으로, 이후에 조성된 고종과 순종의 능은 모두 황제릉으로 조성되었다

문인석과 무인석, 석마, 장명등 등 일부 석물은 땅에 묻혀있던 중종의 옛 정릉(靖陵)의 석물을 다시 꺼내 다듬어서 사용하였다

 

 

 

 

예릉(睿陵)

정자각(丁字閣) · 비각( 碑閣)

 

 

 

 

서삼릉 관리사무소

 

 

 

 

의령원(懿寧園 · 의소세손) / 효창원(孝昌園 · 문효세자) 제각(祭閣)

 

 

 

 

문효세자 신도비(文孝世子 神道碑)

문효세자(1782~1786)는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로 1784년(정조 8)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5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효창원은 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조성한 후 효창묘(孝昌墓)로 불리다가 1870년(고종 7) 효창원으로 높여졌다

1944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정조가 직접 글을 지은 신도비다

 

 

 

 

원침(園寢)

의소세손 · 문효세자의 무덤으로 봉분(封墳)이라고도 한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한다

 

 

 

 

의령원(懿寧園 · 의소세손)

의소세손(懿昭世孫 · 1750~1752)은 추존 장조(사도세자)와 헌경황후(혜경궁 홍씨)의 아들로

태어난 이듬해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3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의령원은 현 서울 서대문구에 조성되어 의소묘(懿昭墓)라 불리다가 1870년(고종 7) 의령원으로 높여졌다

194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의령원(懿寧園 · 의소세손) / 효창원(孝昌園 · 문효세자) 안내판 ·  상설도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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