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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고양누리길 3코스

고양누리길 3코스(서삼릉누리길)은 삼송역을 시점으로

솔개약수터 · 서삼릉 · 수역이마을을 거쳐 원당역에 이르는 길로 거리 8.28km, 소요시간 2시간 15분이다

 

 

삼송역 5번출구

시점이다

 

 

 

 

서삼릉누리길 종합안내

삼송역 앞에 있다

 

 

 

 

북한산

삼송역 앞에서 봤다

 

 

 

 

하학수의 명장이발관

특급호텔에서 10년 근무했고 KBS 1 TV 그림을 그리는 가위손에 출연했다고 써있다

 

 

 

 

아이엠삼송아파트 · 삼송2차아이파크아파트

고양고등학교을 지나 산을 오르다 돌아 봤다

 

 

 

 

숫돌고개로 가는 길이다

 

 

 

 

숫돌고개

조선조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 1월, 이곳 삼송동과 오금동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숫돌고개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을 돕기 위해 출정한 명나라 대군과 일본군이 벽제관의 첫 전투를 벌이게 된다

명나라의 총 사령관은 이여송 장군, 그는 벽제관 전투를 승리하고 서울에서 편안하게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창릉천 방향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매복에 걸려 숫돌고개에서 선봉대가 큰 피해를 보았고

자신이 직접 지휘한 본대도 패하여 개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일본군을 무시했다가 당한 패배였다

후퇴하면서 이여송이 훗날 복수를 다짐하며 이 고개의 큰 바위에서 칼을 갈았다고 하여 고개 이름이 숫돌고개, 즉 여석령(礪石嶺)이 되었다고 한다

개성으로 후퇴했던 명나라군은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후 일본군이 서울에서 물러나자 전투없이 이곳 숫돌고개를 넘게 된다

 

 

 

 

염흥보 묘(廉興輔 墓)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염공휘흥보지묘 정부인 밀양박씨부좌 병향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廉公諱興輔之墓 貞夫人 密陽朴氏 祔左 丙向)

 

 

 

 

행주누리길 리본

 

 

 

 

용도폐기된 벙커

 

 

 

 

행주누리길 · 한북누리길 방향안내판

 

 

 

 

벤치쉼터

용도 폐기된 벙커 위에 있다

 

 

 

 

돌탑

 

 

 

 

거북바위(龜岩)

북한산에서 서삼릉 방향으로 이어진 한북정맥 서삼릉 누리길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화강암계의 바위로 일부는 자연적인 현상에 따라 땅에 묻혀 있다

거북은 서쪽에 몸이 있고 동쪽으로는 머리를 들어 오른쪽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오래전, 북한산에서 살다가 창릉천을 따라 내려왔다가 돌아가지 못한 거북이라 알려져 있으며

묻혀진 다리가 땅위로 들어나면 창릉천 개울이 마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돌탑

서삼릉 2.23km · 삼송역 1.52km 방향안내판이 있다

 

 

 

 

권율대로 터널 위

서삼릉 2.05km · 삼송역 1.7km 방향안내판을 지난 곳이다

 

 

 

 

고양 서삼릉누리길 방향안내판

 

 

 

 

천일약수터로 내려가는 길이다

권율대로 터널 위를 지나 언덕 삼거리에서 왼쪽 길이다

 

 

 

 

천일(솔개)약수터 삼거리

이곳에서 오른쪽 길로 간다

 

 

 

 

천일약수터

 

 

 

 

서삼릉과 삼송, 세수리, 솔개 마을 이야기 안내판

조선시대에는 봄과 가을에 왕이 왕릉 제사를 위해 자주 고양 땅에 행차하였다

도성과 가까운 서오릉을 지나 서삼릉으로 행렬이 왕래하였는데 소나무 세 그루가 유난히 눈에 띄고 멋진 곳이 있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삼송리(三松里)가 되었고, 세 그루의 나무가 있으니 세수리(樹里)가 되었다

솔개마을은 서삼릉 입구에 해당하는 곳으로 원흥동에 속한 자연촌락 이름이다

한문으로 송현(松峴)이며, 소나무가 무성한 큰 고개가 있어 솔고개라 했는데 후대에 솔개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솔개마을 입구와 서삼릉 부근에는 키가 크고 오래된 조선 소나무가 일부 남아 있다

 

 

 

 

큰 홍익교회 안내판

솔개약수터를 지나 200m 정도 걸으면 오른쪽에 언덕이 있다

 

 

 

 

큰 홍익교회 안내판

교회 언덕을 내려와 돌아 봤다

 

 

 

 

농협대학교

 

 

 

 

고양 서삼릉 · 한국마사회 원당목장 안내판

 

 

 

 

보경루(寶慶樓)

제18회 광개토 호태왕 추모제 펼침막이 있다

광개토대왕비가 마당에 있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이 비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陵) 비석으로 일명 호태왕비(好太王碑)라 부른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고주몽 · 동명성왕)의 17대 세손으로, 374년에 태어나 18세에 왕위에 오른 뒤 20여 년간 고구려를 다스렸다

재위기간 대왕은 나라를 막강하게 이끌면서 '막비왕토(莫非王土 ·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을 정도로 영토가 넓다는 뜻)의 시대를 개척했다

이 비는 광개토대왕이 돌아가시고 2년이 지난 414년에 아들 장수왕이 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적비이자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 금석문으로 유명하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제1부는 고구려 추모왕의 건국신화를 비롯하여 왕들의 세계(世系), 광개토대왕의 생애와 비의 건립경위가 적혀 있다

제2부는 대왕의 즉위 당시 일어났던 대외 정복활동과 업적이 연대에 따라 기록되어 있다

제3부는 묘를 지키고 관리하는 수묘인연호(守墓人煙戶)의 명단과 숫자 · 뽑는 방법 · 매매금지 · 능의 관리규정 등이 서술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 한국과 일본 역사학계의 중요한 쟁점 부분은 신묘년 고구려의 출정과 왜 · 백제 · 신라와의 관계를기술한

"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 나이이위신(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羅以以爲臣)"이란 구절로 한 · 일 양측의 입장이 상반되고 있다

일본은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破)하고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라고 풀이했다

이를 근거로 일제의 학자들은 4세기경 우리나라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이것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라일본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972년 일본군 참모본부가 이 비문의 사건에 비밀리에 개입한 전말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밝혀지면서, 비문의 조작과 왜곡이 드러났다

또 재일 사학자 이진희씨 등에 의해 비문이 일부 파괴되거나 석회로 훼손된 점도 알려졌다

우리나라도 1980년대 이후 비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결과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왔는데

신묘년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 · 왜구 ·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내용이 문맥상 타당하다는 입장이다

이 해석이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 남조선 경영론은 터무니없는 억측으로 그 근거를 잃게 되는 것이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 분쟁과 관련하여 광개토대왕비의 가치는 더욱 높게 평가되고 있다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시점으로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대왕 본 비석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터에

이곳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는 훌륭하고 위대한 고구려인들의 기상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모쪼록 광개토대왕이 품었던 원대한 웅지(雄志)와 고구려 선조들의 피내림(혈통과 정신의 계승)을 통해

오늘 우리 민족의 간절한 염원성취로 이어지길 겨레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

원명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소재지 / 고구려 국내성(중국 길림성 집안시(集安市)에 위치

자 수 / 비석 4면에 새겨진 글자 수는 총 1,802자

규모 / 높이 6.39m · 각 면 너비 1.5m · 무게 47톤 · 재질 오석(烏石)

 

 

 

 

고양 서삼릉 · 한국마사회 원당목장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

길을 넓히면서 예전 은사시나무가 없어진 것이 아쉽다

 

 

 

 

2010년 서삼릉으로 들어가는 길은 은사시나무 가로수가 멋진 길이었다 

 

 

 

 

한국마사회 원당목장

 

 

 

 

한국마사회 원당목장

 

 

 

 

고양 서삼릉 입구 · 매표소

 

 

 

 

희릉(禧陵)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 1491~1515)는 파원부원군 윤여필의 딸로 중종반정의 주역이었던 박원종의 조카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중종의 후궁 숙의에 봉해졌다가 단경왕후 신씨의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사사되고

역적의 딸인 단경왕후도 1506년(중종 1)  폐위되자 이듬해 왕비로 책봉된 행운의 주인공이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인종과 효혜공주를 낳았다. 1515년(중종 10)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홍살문 · 배위 · 정자각 · 비각 등이 배치되어 있다

 

 

 

 

예릉(睿陵)

철종(哲宗 · 1831~1863 / 재위 1849~1863)은 장조(사도세자)의 손자 전계대원군의 아들로 경행방(지금의 서울 종로2가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복형이 역모에 연루되어 강화도 유배지에서 살던 중 1849년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동안 계속된 세도정치로 나라의 정책이 문란하였고, 지방에서 농민봉기와 민란이 일어나 이를 수습하고자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 황제로 추존되었다

철인황후 김씨(哲人皇后 金氏 · 1837~1878)는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로 1851년(철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858년(철종 9)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황후로 추존되었다

*

(2010. 5. 8)

 

 

 

 

의령원(懿寧園 · 의소세손) · 효창원(孝昌園 · 문효세자) 제각(祭閣) · 문효세자 신도비(文孝世子 神道碑)

문효세자(1782~1786)는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로 1784년(정조 8)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5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효창원은 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조성한 후 효창묘(孝昌墓)로 불리다가 1870년(고종 7) 효창원으로 높여졌다

1944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정조가 직접 글을 지은 신도비다

 

 

 

 

원침(園寢)

의소세손 · 문효세자의 무덤으로 봉분(封墳)이라고도 한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한다

 

 

 

 

하얀 눈이 내린 밭에 새떼들이 모여 있다

 

 

 

 

원당천 다리

 

 

 

 

서삼릉보리밥집

이곳에서 코다리구이와 보리밥으로 식사했다

 

 

 

 

서삼릉 태실권역

 

 

 

 

서삼릉 태실권역 관람안내판

예전 비공개지역이었는데 예약 관람지역으로 바뀌었다

 

 

 

 

원당천

 

 

 

 

카페 안녕 정원

 

 

 

 

고양누리길 리본

수역이길 언덕을 넘는다

 

 

 

 

한식당 마실

서울문산고속도로 밑을 지나며 봤다

 

 

 

 

고양남 TG

 

 

 

 

수역이마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에 속한 자연촌락 마을이다

원당역과 서삼릉 사이에 위치한 가장 큰 마을로 「쇄기」로 불리기도 한다

본래 이 마을의 정식 명칭은 수역(水域)이 마을이다. 수역은 물이 많은 지역을 부르는 이름인데 옛 기록에도 수역으로 표기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수역이가 오늘날 쇄기로 불리게 된 것이다

마을 앞에 넓은 들판이 있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 식당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지금은 덕양지역에서 유명한 먹거리촌이 되었다

*

성사1동 행정게시판이 있다

 

 

 

 

원당역 · 서삼릉길 안내판

 

 

 

 

배다리박물관으로 넘어가는 수역이길이다

 

 

 

 

전철3호선 철교 밑에 예전 철도가 있다

 

 

 

 

행주기씨도선산(幸州寄氏都先山)

행주기씨의 연원은 약 3,000여 년전인 기자조선을 개국한 문성대왕 기자(文聖大王 箕子)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자의 47대손 마한왕 기훈(馬韓王 箕勳)에게는 우성 · 우량 · 우평 등 아들 3형제가 있었는데

왕조가 기울자 그들은 부왕으로부터 각각 기(奇) · 한(韓) · 선우(鮮于)라는 성씨를 하사받고 백제 · 신라 · 고구려 등으로 떠났다

기우성(奇友誠)은 백제 온조왕에게로 가서 시중(侍中)의 자리에 올랐고, 행주산성 및 고양시 덕양구 일대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이곳은 오늘날까지 2000여 년 동안 행주기씨의 세거지가 되었으며, 이로써 기우성은 행주기씨의 득성시조가 되었다

기우성의 후손들은 신라 · 고구려에도 널리 퍼지고 고려에 이르러서도 크게 번성하였다

고려 인종(1122~1146) 시대에 이르러 문하평장사를 지낸 기우성의 65대손 기순우(奇純祐)가 행주기씨의 중시조(족보 1세조)로 기록되었으며

오늘날 행주산성 내성리에서 태여난 그의 6대손 손녀가 바로 원순제의 황후인 「기황후」이다

 

 

 

 

연지(蓮池)

 

 

 

 

통의문(通義門)

덕양재(德陽齋) 삼문이다

 

 

 

 

고양누리길 안내판

마침점인 원당역 바로 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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