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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대전근현대사전시관

대전시립박물관의 분관으로 옛 충남도청사 본관(등록문화재 제18호)에 자리한

「대전근현대사전시관」은 20세기 초부터 최근까지 약 100년에 이르는 대전의 역사와 발전상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역사는 물론 도시 · 건축, 디자인 · 대중문화사 등 여러 분야의 특별기획전을 열고 있으며

옛 충남도청사 건물을 활용한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하는 대전시민을 위한 열린 문화공간이다

 

 

옛 충청남도청 본관 / 등록문화재 제18호

1932년에 지어진 근대건축물이다

충청남도청이 충남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사하면서 도청사로 1932년에 지은 건물이다

1930년대 모더니즘 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 한국전쟁 중에는 임시 중앙청 건물로 사용되면서 육군본부와 미군 전방지휘사령부가 입주하기도 했다

이후 다시 도청사로 사용되다가 2012년 12월 충남도청이 내포 신도시로 이전하면서 현재는 대전의 근현대사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전 근현대사 展

근대도시, 그 100년의 역사

 

 

 

 

전통에서 근대로의 이행 · 대전역

근대도시 대전의 탄생은 철도와 함께 했다

경부선과 함께 이곳에 정착한 일본인 이주자들에 의해 대전은 도시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고

1905년 경부철도 개통과 1914년 호남선철도 개통이 이어지면서 일약 내륙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대전연표

1914년 대전군이 신설되었고 1917년 대전면이 지정면(指定面)이 되면서 신흥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으며

이후 대전은 1931년 대전읍을 거쳐 1935년 지금의 광역시에 해당하는 대전부로 승격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근대도시로 자리매김했다

*

189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안내되어 있다

 

 

 

 

1890~1900 대전연표

1895년 충청남도 신설 · 1905년 경부선 철도 완전 개통 · 1906년 회덕군 대아학교 개교

 

 

 

 

근대도시대전 · 그 100년의 역사

대전이 철도부설과 함께 새로운 근대도시로 거듭나는 과정과 그 안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소개한다

 

 

 

 

대전, 지리적 공간의 탄생

대전은 조선시대 회덕현(懷德縣) · 진잠현(鎭岑縣) · 공주목(公州牧) 일부가 합쳐진 곳으로 지금처럼 하나의 공간적 질서를 가진 곳이 아니었다

대전이 공식적인 지명으로 본격 등장한 것은

갑오개혁기인 1895년(고종 32) 경 회덕군 아래 대전리라는 말단 행정구역으로 정식화된 것이 최초라 할 수 있다

대전리는 현재 중동 · 정동 · 원동 일원으로 추정된다

과거 이곳은 대전천 주변의 너른 벌판이었으나 20세기 초

경부선 철도부설과 함께 이곳에 정착한 일본인 이주자들에 의해 대전은 도시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1910년 일본의 식민통치가 시작되자, 회덕에 있던 군청이 대전역 근처로 옮겨졌다

그리고 1914년 일제에 의한 지방행정구역 개편이 단행되면서 회덕군과 진잠현 일부

그리고 공주군 현내면이 합쳐진 대전군이라는 새로운 행정구역이 만들어졌다

대전군의 중심인 대전면은 1917년 면제(面制)의 실시와 함께 지정면(指定面)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으면서, 신흥도시 대전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대전군은 1935년 지금의 광역시에 해당하는 대전부(大田府)로 승격되었다

 

 

 

 

대전시가지도

 

 

 

 

철도, 대전을 달리다

철도는 근대의 상징이었다

식민과 수탈의 도구였다는 면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철도가 가져온 세상의 변화는 매혹적인 것이었다

철도는 단지 하나의 교통수단이 아니라, 시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풍속까지를 바꿔놓은 신세계의 문명이었다

근대도시 대전의 탄생 역시 철도와 함께 시작되었다

1898년 경부선철도부설권을 따낸 일제는 1901년 8월 서울 영등포와 부산 초량에서 각각 기공식을 갖고 역사적인 경부선철도 공사를 시작했다

당초 노선에는 대전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충청지역에는 공주나 청주 혹은 충주에 중심이 되는 역을 두고자 했으나, 결국 대전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노선이 최종 확정되었다

러시아와 전쟁을 준비 중이던 일본은 속성으로 공사를 마치려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유리성과 함께 보수성과 지방색이 적은 지역을 고르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대전의 문, 대전역

대전역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904년 6월로 위치는 현재의 자리에서 지금의 대동 · 인동 방향으로 조금 더 떨어진 곳이었다

정식 역사(驛舍)라기 보단, 목조로 된 허름한 간이역이었다

그러나 1914년 호남선 개통 후, 늘어난 승객과 화물을 처리하기 위해 새로운 역사가 필요해졌고

1918년 한 차례의 증 · 개축을 거쳐, 1928년 현재의 자리에 신역사가 건축되었다

두 개의 둥근 돔과 중앙에 커다란 원형 시계가 설치된 서양 중세풍의 건물이었다

이 역사는 한국전쟁 때 폭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뒤 1958년 미국의 전쟁복구기금으로 다시 역사가 지어졌다

설계는 26살의 젊은 건축가 이상순이 맡았다. 그는 평지붕으로 된 3층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설계했는데 당시로서는 파괴적인 시도였다

이 역사는 지금까지도 대전시민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으며, 기본 모듈과 입면의 구성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전부루-스

한자(漢字)와 영어가 많이 쓰여 있다

 

 

 

 

구한말 대전의 구국운동

구한말 대전에서는 다양한 구국운동이 전개되었다

최초의 을미의병으로 평가받는 유성의병과 위정척사론의 선두에 섰던 연재 송병선과 그를 따르는 연재학파 등 대전은 위정척사운동의 중심지였다

 

 

 

 

최초의 을미의병 유성의병 · 연재 송병선의 위정척사론과 순국

구한말 의병은 1894년 갑오변란(甲午變亂) 이후 등장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은 을미사변(乙未事變) 직후 시작되었다

1895년 9월 18일, 공주부(公州附) 무관이었던 문석봉이 약 300명의 병사를 모아 유성에서 거병했는데

이 유성의병(儒城義兵)은 최초의 을미의병으로 평가받고 있다

회덕을 중심으로 위정척사의 분위기가 강했던 대전에서는 많은 의병장과 의병들이 배출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전라도에서 활동한 김동신 · 강원도의 박영묵 · 충북의 김정필 · 홍주의 박윤식 등이 있다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연재 선생 61세 진상(淵齋 先生 六一歲 眞像)이라 왼쪽 위에 써있다

 

 

 

 

의산유고(義山遺稿 · 1934)

문석봉의 큰 아들 영정(永井)이 부친의 글을 모아 간행한 문석봉 의병장 문집이다

 

 

 

 

대전의 애국계몽운동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전후해 경제 · 문화적 힘을 키워 국권을 회복하자는 애국계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대전에서도 이를 위한 국채보상운동과 사립학교 설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된 만큼, 경상도가 가장 활발했다

그러나 충청도 역시 이에 못지 않았는데, 실제 모금소의 수는 경상도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였다

구체적으로는 현재 서구 용촌동인 진잠현 하남면 미림리에서 박시양 · 박제봉 · 오신근 등이 운동을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의식을 가진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들도 설립되었다

1906년 대전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로 추정되는 대아학교(大雅學校)가 지금의 대동에 설립되었는데

설립자는 감찰을 지낸 송헌범이었다

그 외 회덕에 봉성측량학교, 진잠의 동명학교 등 지역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사립학교들이 문을 열었다

 

 

 

 

대아학교 졸업장 / 1909년

 

 

 

 

대한매일신보 / 국한문판 · 1906. 11. 16

 

 

 

 

근대도시 대전 탄생과 성장 근대사진엽서 / 일제시대 · 소제동 및 소제호 전경

20세기 초, 작은 한촌에 불과했던 대전은 철도부설과 함께 근대도시로 성장한다

식민통치 이전부터 이주해온 일본인에 의해 시가지가 개발되고, 각종 도시 기반 시설들이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소제동 같은 전통마을들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1932년 충청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되면서 한층 도시의 모습을 갖춘 대전은 1935년 지금의 광역시에 해당하는 대전부로 승격했다

이를 전후로 인구가 급증했으며, 은행과 경찰서 · 병원 등 주요 관공서가 신설되면서 대전으로 이주했다

시가지 또한 한층 번화해져 지금의 대전 중앙로가 본격 개발되었다

*

우암 송시열이 거처를 삼았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했던 소제호 주변, 현 소제동의 변화는 매우 극적이었다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전통마을이었던 이곳에 일본거류민회가 1907년 신사를 세우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후 신사 보호 등의 목적으로 그 경내를 일본풍의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소제동의 경관은 크게 바뀌었다

1927년 소제호가 매립된 뒤 그 부지 위에 철도 관리자와 노동자들을 위한 대규모 관사촌이 형성되면서 전통적인 마을공동체는 완전히 깨지게 되었다

 

 

 

 

전통마을의 변화와 도시화

1910년 국권을 완전히 빼앗은 일제는 회덕에 있던 군청을 대전역 부근으로 옮겼다

식민통치를 펼치기에는 조선의 전통적 질서가 강하게 남아있던 회덕이 부담스러운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군청의 이전과 함께 대전역과 주변 시가지 일대는 도시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그 주변은 일본인이 들어오기 전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던 한촌(寒村)으로 전통의 파괴라 할 만한 것들은 크지 않았다

반면 우암 송시열이 거처를 삼았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했던 소제호 주변, 현 소제동의 변화는 매우 극적이었다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전통마을이었던 이곳에 일본거류민회가 1907년 신사를 세우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후 신사 보호 등의 목적으로 그 경내를 일본풍의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소제동의 경관은 크게 바뀌었다

1927년 소제호가 매립된 뒤 그 부지 위에 철도 관리자와 노동자들을 위한 대규모 관사촌이 형성되면서 전통적인 마을공동체는 완전히 깨지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대대적인 이주를 통해 자신들만의 도시를 건설하려 했던 당시의 대전

즉 지금의 인동, 중동, 원동 일원은 회덕이나 진잠과 달리 전통성이 강한 공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시의 팽창과 함께 과거의 지역공간들은 크게 파괴되거나 변질될 수맊에 없었다

 

 

 

 

대전의 도시계획과 건축

대전의 도시계획은 1910년대부터 시작되어 1930년대 말 거의 완성되었다

핵심은 하천정비에 있었는데, 대전면이 대전천과 그 주변 지류들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하천정비는 1912년 대전천을 시작으로 1914년 지금의 신안동 일대의 대동천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이 공사로 약 1만 8천여 평의 하천부지가 대지로 바뀌었으며

사업이 일단락된 1914년에는 옛 원동국민학교에서 중교와 목척교, 신도극장으로 이어지는 긴 제방이 만들어졌다

하천과 함께 도로망 또한 정비되었다

1912년 10월 대전역에서 공주를 잇는 도로가 개통되었고, 1916년 6월에는 대전역에서 금산을 잇는 도로의 개수공사가 완료되었다

1914년 도로의 시작을 알리는 원표(元標)가 전국 주요 도시에 설치되었는데, 대전은 본정통과 영정통이 갈리는 춘일정의 교차점에 세워졌다

일제강점기 대전의 주요 시기는 대전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인동 · 효동으로 이어지는 인효로를 본정통, 반대쪽 삼성동 방향 길을 영정통으로 불렀으며

다시 대전역에서 옛 충청남도청사로 이어지는 중앙로를 춘일정통이라 했다

이 세 도로가 근대 대전의 축으로 지금의 원도심을 이루었다

 

 

 

 

대전의 근대건축

대전의 도시 형성기, 시가의 확장과 함께 다양한 근대건축물들이 지어졌다

본정통 주변으로는 백화점과 은행 등 상업시설들이 주를 이루었고

충남도청 이전 이후로 춘일정통이 확장되면서부터는 그 일대 중심으로 은행과 상점은 물론 군청과 부청사 등 각종 관공서들이 들어섰다

 

 

 

 

쓰지 만타로 후지츄간장공장 · 대전거류민회 · 일제의 침략과 대전의 일본인

본격적인 일제의 침략과 함께 일본인들이 대전에 처음 들어온 건 1904년 전후로 대부분 철도와 관련된 기술자들과 인부들이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완전 개통되고 그해 9월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을 잇는 관부연락선이 연결되자 일본인들의 대전 이주는 더욱 급증했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1910년 대전면 인구는 총 4,219명으로 이중 한국인이 1,740명 · 일본인은 2,479명이었다

이후 일본인 이주자들의 수는 꾸준히 늘어 1917년 대전면의 일본인 수는 한국인의 거의 3배 가까이 육박하게 된다

이들은 주로 지금의 원동 · 중동 · 정동 일대에 모여 살았는데, 그 중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원동 주변은 혼마치(本町)라 불렀다

 

 

 

 

나카오주조장 술독 / 일제강점기

 

 

 

 

대전의 독립운동과 사회운동

식민지의 모순이 심화되는 1920년대 전부터 대전에서는 치열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 이르러 노동운동 또한 폭발하기 시작했다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던 군시제사대전공장 파업은 당시 대전의 지역사회와 그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또한 주로 장기형을 선고받은 정치범을 수용했던 대전형무소는 식민지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대전 3 · 1만세운동

1919년 대전의 첫 3 · 1만세운동은 3월 3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대규모 집회로 이어진 것은 3월 하순 인동장터에서였다

지금의 인동시장이 된 인동장은 5일장으로, 그날도 많은 사람이 모인 장날이었다

초기 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김창규와 김정철이라는 인물이었는데

이들은 장터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일장연설을 하고 모인 이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운동을 독려하였다

이에 김완수, 김완봉, 조상련 등 군중 수백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거세게 항거하였다

그 뒤 인동에서는 시장 상인들의 주도로 4월 초까지 간헐적인 만세운동이 계속되었고, 유성장터와 유천면, 기성면 등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같은 대전의 3 · 1운동은 총 19회에 걸쳐, 연인원 약 3천 명이 참여하였다

일제의 탄압은 무자비했다

경찰과 헌병은 물론, 지금의 서대전역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80연대 3대대까지 출동, 가담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애국자들이 순국하였으며 수십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110여 명이 체포되어 그 중 13명이 재판에서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전감옥소

3 · 1만세운동으로 수감자가 폭증했던 1919년 5월, 총독부령 제36호에 의해 중구 중촌동에 대전감옥소가 신설되었다

완전히 공사가 끝난 것은 1924년으로, 당시 규모는 대지 34,000평 · 연면적 14,000평으로 주로 장기형을 받은 정치범들을 수용했다

대전감옥소는 1923년 대전형무소로 개칭되어, 해방 후인 1984년까지 중촌동에 있었다

대전감옥소에는 일제에 항거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수감되었는데

그 중에는 도산 안창호, 몽양 여운형, 심산 김창숙 같은 한국독립운동사를 대표하는 인물들도 있었다

해방 이후에는 조영래 변호사 등 수많은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대전교도소를 거쳐 갔다

그리고 비전향장기수로 43년 10개월간 복역한 뒤 북송된 김선명씨가 있었던 곳도 대전교도소였다

 

 

 

 

대전감옥소 건축도면

 

 

 

 

군시제사 대전공장 노동자파업

1926년 동구 효동에 군시제사대전공장(郡是製絲大田工場)이 문을 열었다

대주주는 일본의 3대 재벌에 하나였던 미쓰이(三井)였다

미쓰이사의 군시제사(주)는 대전은 물론, 대구와 청주 · 대만에까지 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대전공장의 부지면적은 26,750평 · 건물은 5,085평 · 제사기가 400대 · 종업원 약 600명 · 연간 조업일수는 344일이었다

생상량으로는 1930년대 기준 전국 생산량의 5% · 대전 · 충남의 65% 가량을 차지했다

조업원은 대부분 18세 이하의 미혼 여성들로 대전 · 충남은 물론 멀리는 개성에서까지 전국적으로 모집했다

1930년대 들어와 군시제사대전공장에서는 5번의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첫 파업은 1932년 11월 7일로 남자직공들이 일본인 관리자를 구타한데서 발단하여 순식간에 여직공 600여 명이 가담하는 대규모 동맹파업으로 발전했다

당시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은 노동시간 단축 · 임금인상 · 식사개선 · 인종차별 반대 · 조선인 해고 반대

일본인 교육계장과 인사계장의 면직 등 모두 6가지였다

파업 7일째 경성 본사에서 파견된 간부가 적극적인 중재에 나서면서 쟁의는 일단락되었다

요구조건이 대부분 수용된 노동자들의 승리였다. 이후 파업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매년 일어났다

모두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일재강점기의 대표적인 노동운동이었다

 

 

 

 

목척교(木尺橋)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난민들이 헤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영도다리」를 서성거렸다면 대전의 피난민들은 목척교를 만남을 기약하는 장소로 택했다

1962년 발표된 안다성의 노래 「대전의 못잊을 밤」에도 등장할 만큼 목척교는 오랜 세월 동안 대전을 생각할 때마다 아련히 떠오르는 풍경이자 상징이었다

*

목척교가 처음 가설된 것은 1912년 대전 주둔 일본수비대의 병기를 수송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다리의 길이는 70m · 폭은 5m · 총 공사비는 4천6백원이었다

다리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징검다리가 있었는데

이 다리를 오가던 새우젓 장수가 세워놓은 지게가 마치 한자 「자 척(尺)」 자(字)의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목척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 외 다리의 모양이 나무자(木尺)를 닮아서 목척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1917년 한 차례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1924년 대전~공주 간 도로확장과 함께 목척교 또한 길이와 폭이 약 3m 정도 늘어났다

목척교가 콘크리트 다리로 바뀐 것은 1929년으로 도청 이전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오랜 세월 대전의 동과 서를 이어주었던 목척교는 해방 후인 1973년 대전천 복개공사로 모습을 갖췄으나

2009년 대전천 복원사업으로 다시 새로운 모습을 찾았다

 

 

 

 

제15회 충청남도 통상평의회 기념촬영 도지사 이하 참여관도평의원 / 1932년 2월

 

 

 

 

대전, 근대를 걷다

1930년~1940년대 근대도시 대전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각 부분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모던 대전의 활력과 경쾌함을 노래한 대전의 노래들과 극장 · 호텔 · 온천 등 대중문화와 레저

그리고 학교와 공장 · 신문 등 당시 대전이라는 공간이 어떤 모습으로 실제했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또한 대전 근대 100년을 보여주는 다큐멘타리 영상과 각 시기별 지도를 통해 대전의 지형과 시기가 어떤 변천을 겪었는지 체험할 수 있는 코너도 있다

 

 

 

 

대전의 문화

경인(耕人)은 조선 최초의 일본 문인 시동인지로 1922년 창간되어 1925년까지 총 45호가 발간되었다

경인의 발행인은 대전중학교 교사였던 우치노 겐지(內野健兒)였다

 

 

 

 

대전의 학교

대전소학교가 일본인들의 학교였다면, 한국인들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은 1911년 9월에 개교한 회덕공립보통학교였다

1914년 대전군이 만들어지면서 교명이 대전공립보통학교로 바뀌었는데

신흥동에 대전제2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지면서 다시 명칭이 대전제1공립보통학교로 바뀌었다

 

 

 

 

대전의 신문 호남일보

대전 최초의 신문은 1909년에 창간된 대전신문이었다

대전신문은 1910년 삼남신보로 제호가 바뀌었고 계속 사세를 확장해갔다

삼남일보는 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에 팔렸는데 이때 바뀐 제호가 호남일보이다

 

 

 

 

대전의 노래

대전소패(大田小唄)와 대전행진곡은 모두 1930년대 초 일제하에 만들어진 노래이다

모던대전, 신흥의 도시 등과 같은 노랫말로 시작되는 이 두 곡은 서로 비슷한 정서를 담고 있는데

모두 철도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진 현대적이고 쾌적한 신도시의 정취와 그 안에서 평쳐지는 낭만적이고 경쾌한 도시생활을 노래하고 있다

 

 

 

 

대전의 지도 / 대전부약도 / 1940년 · 대전지형도 / 1918년

 

 

 

 

한국전쟁기의 대전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가 된 대전과 이 시기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인 대전전투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대전형무소 민간인 학살 등의 비극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대전형무소와 산내 곤령골학살은 남한과 북한, 우익과 좌익 모두에 의한 전쟁범죄로 지금까지도 뜨거운 논쟁과 아픔으로 남아있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임시수도 대전과 대전전투

한국전쟁 개전 이틀만인 1950년 6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떠나 대전으로 내려왔다

대통령의 피난과 함께 정부의 각료들도 속속 대전으로 모여, 대전에는 전시내각이 구성되었다

급기야는 6월 28일 서울이 북한 인민군에게 함락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의 대전 이전을 공식 발표했다

이로써 7월 16일 내각이 다시 대구로 옮겨지기까지 대전은 짧은 기간이나마 임시수도가 되었다

당시 충남도청사는 임시 중앙청사로 사용되었고 충남도지사 공관은 일명 대전경무대로 불리며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 바뀌었다

 

 

 

 

한국전쟁기 최대의 민간인 학살

한국전쟁기 대전에서 겪은 최대의 비극은 대전형무소와 동구 산내 곤룡골에서 자행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들과 대전 인근 지역에서 예비 검속된 국민보도연맹원 등을 대상으로

6월 28일과 7월 17일 사이에 이루어진 학살은 아직까지 누구의 명령에 의한 것인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때 국군의 헌병과 경찰에 의해 산내면 낭월리 곤룡골에서 희생된 민간인의 수는 최소 1,800여 명, 많게는 7,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 미군병사에 비친 대전

토마스 휴튼(Thomas B. Hutton) 상사는 1910년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출생하여 1934년 육군이 입대했다

그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중국과 미얀마 · 인도 등 주로 아시아에서 복무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8군의 91차량 정비중대에 소속되어 한반도로 왔다

그의 부대는 서울과 대구 · 대전 · 군산 등을 옮겨다니며 병기와 각종 군수물품의 보급을 책임졌는데

당시 그는 주둔지였던 도시들의 모습들을 35mm 필름에 담았다

그가 가장 많은 사진을 찍었던 곳은 다름 아닌 대전이었다

그의 카메라가 포착한 것들은 함께 생활했던 전우들과 낯선 이국의 산하

그리고 폐허 속에서도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았던 강인한 대전사람들의 모습이었다

 

 

 

 

LIFE가 찍은 1951년의 대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1951년 6월 미국의 사진잡지 「라이프(LIFE)」 소속의 3명의 사진작가

월터 샌더스(Waiter Sanders) · 조 스케르첼(Joe Scherschel) · N. R 파브만(Farbman)은 폐허가 된 대전을 찾았다

이 세 사람은 라이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사진작가들로 오늘날 그들이 남긴 사진들은 20세기 세계사를 기록한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는다

그들은 폭격으로 앙상한 골조만 남은 대전시가와 파괴된 T-35전차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대전역

 

 

 

 

폐허에서 일어나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대전의 재건을 보여주는 사진들과 1960년 4 · 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전의 3 · 8민주의거와 관련된 전시이다

1960년대 경제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고, 동시에 민주사회 건설을 위해 노력한 대전시민들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신 중심도시, 대전

오늘날 대한민국의 신 중심도시로 성장한 대전의 모습

특히 1980년대 이후의 조요 도시사업과 93 재전엑스포와 같은 중요 행사들을 짚어본다

*

경부고속도로 · 대덕연구단지 · 대전엑스포 · 정부대전청사 · 둔산 시청사 · 대전도시철도 1호선 · 대전도시철도 2호선 등을 안내한다

 

 

 

 

대전근현대사전시관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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