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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종로5가역~김마리아 길~창경궁~창덕궁~을지4가역

김마리아 길과 경모궁지를 가기 위한 걷기로

종로5가역에서 김마리아길 · 경모궁지를 찾아보고 창경궁 · 창덕궁을 거쳐 을지4가역에서 마감했다

 

 

종로5가역 3번출구

시점이다

 

 

 

 

효제초등학교 연혁

1895년 11월 15일 양사동 소학교로 설립되었다

 

 

 

 

연동교회

김마리아가 세례 받고 학생시절 신앙생활 한 장소다

대한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김마리아는 연동여학교(1909년부터 정신여학교) 시절

연동교회에서 부목사격으로 사역하던 선교사 밀의두(E.H.Miller)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김마리아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연동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사랑 · 나랑 사랑 · 이웃 사랑을 실천해갔다

연동교회는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는데, 그중 정신여학교 출신으로 김마리아 · 신의경 · 김영순 · 이혜경 · 장선희 · 김필례 · 오현관 등이 있다

*

연동교회 첫 번째 예배처소 자리(초가 1894~1896) 빗돌이 있다

 

 

 

 

세브란스관(옛 정신여자중 · 고등학교 본관)

김마리아를 포함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김마리아는 1910년 정신여고를 졸업하고 1913년 모교에서 교사로 전임해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곳은 3 · 1운동 당시 항일 여성독립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으로 활동한 김마리아 열사가 교사 시절 두 차례에 걸쳐 체포 · 연행된 곳이다

당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비밀문서 등 독립운동 자료들을 마룻바닥을 뚫고 숨겨놓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순국열사 김마리아 / 1892~1944

대한의 독립과 결혼한 김마리아는 일본유학 중 2 · 8독립선언에 참여 후 독립선언서를 국내로 밀반입하여  3 · 1운동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전국조직 활동으로 두 번의 옥고를 겪다

가혹한 고문으로 인한 발병으로 병보석 치료중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황해도 대의원에 선출되다

국민대표회의(1923년 1~6월)에 참석, 임시정부의 개조 존치를 강력 주장하다

1923년 미국으로 재망명하여 교포 사회를 향해 실력양성으로 자주독립을 이루자는 연설을 하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다

1924년~32년에 걸쳐 파크대학 · 시카고대학원 · 콜롬비아대학원 · 뉴욕신학교에서 수학하고 뉴욕에서 근화회를 조직하여 여성독립운동을 계속하다

형시 만료로 귀국 후, 일제의 거주제한 등으로 원산의 마르타윌슨여자신학교 교수로서 성경을 통한 애국정신 진작에 힘쓰다

장로교전국여전도회 회장으로 활동, 신사참배를 거절하다

1944년 순국한 선생은 대한독립의 진정한 영웅이다

*

2019년 5월 3 · 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회화나무 근처에 김마리아 흉상을 세웠다

 

 

 

 

융합의학기술원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초등학교

1895년 4월 한성사범대학부속소학교로 설립되었다

해방 후 을지로에 있었으나 1975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었던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교문의 기둥 4개는 본래 탑골공원에 세워졌던 대문 기둥이었다

1969년 3 · 1절 5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특별시가 독립선언기념탑을 세우면서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높여주기 위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문 기둥으로 기증하였다

 

 

 

 

흥덕동천

북악산 남서쪽에서 흘러 내려와 대학로를지나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현재는 완전히 복개되었으나 2009년 10월 「대학로 실개천 조성사업」을 통하여 부활했다

 

 

 

 

종로구 아름다운 나무

 

 

 

 

구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청사 / 사적 제279호

대한제국 시기에 지은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청사의 본관 건물로 현재 국립공업연구소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원래 이곳은 화폐를 인쇄하던 전환국 기계시험소 터였는데 1906년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청사가 만들어지면서 이곳에 본관과 기숙사 · 식당을 지었다

중세 유럽에서 유행하던 방식으로 지어졌으며 건물 벽은 독일식 비늘판으로 되어 있다

대한제국 때의 목조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다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향나무 기념식수

1907년(고종 44년) 3월 공업전습소 본관 준공 기념 빗돌이 있다

 

 

 

 

방송대학TV(OUN)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배움을 원하는 이들을 향해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는 국내 유일의 평생교육 채널이다

 

 

 

 

방송대인의 꿈과 비전

2021년 1월 12일 90만 방송대인의 오랜 염원이자 꿈이었던 방송통신대법이 제정되었다

90만 방송대인의 응집된 노력은 봉들의 집약으로 표현하고, 전국적 네트워크 및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은 5면의 기단부로 표현하였다

 

 

 

 

예술가의 집

 

 

 

 

마로니에 공원 아르코예술극장

서울시민들을 위한 문화예술의 터전으로 옛 서울대학교 문리대 · 법대 자리에 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본관 길 건너에 있다

 

 

 

 

김상옥(金相玉) 열사 상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철물점을 운영하며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젖살도 안빠진 여학생을 칼로 내려치는 왜경을 본 후 가진 것을 처분하고 의열단이 있는 상해로 망명했다

그리고 2년 뒤 그는 목표 하나를 가지고 서울로 잠입했다

그의 목표는 총독 사이토 암살, 하지만 밀고에 의해 총독 폭살에 실패한 그는

독립투사들의 한이 서린 왜경의 본거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해 폭파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20여 명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

당시 유도사범이자 악명 높은 형사부장, 독립투사의 숙적인 다무라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이후 계속해서 서울에 머물며 거사를 계획하던 그는 모진 고문에 자백한 동료에 의해

효제동 은신처가 밝혀지고 안타깝게도 그를 잡기 위해 출동한 400여 명의 왜경에게 포위된다

400대 1의 상황에서 그는 총탄이 다 떨어질 때까지 약 3시간 반을 홀로 싸웠다

구리다 경부를 비롯한 10여 명을 살해했으나 중과부족이었다

탄환마져 다하여 마지막 총알 한 방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자신에게 쏘았다

온몸에 열한 발의 총상을 입은 그의 주검은 생전에 직접 그린 태극기를 품고 있었다

이는 일본군 보고서에 기록된 일이지만 불과 수십 년전 이곳과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실화다

 

 

 

 

고산 윤선도 생가 터(孤山尹善道五友歌碑)

 

 

 

 

소나무길

대학로부터 성균관대 입구 사거리까지 280m 구간이다

이 길은 조선시대 임금이 박석고개(창경궁로 26길)를 넘어 성균관으로 행차하실 때 지나던 길이며

주변 지역은 성균관 종사자들이 많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격동의 시기였던 1970년대에는 유신철폐운동을 비롯한 학생운동이 일어났던 장소이며

1980년대에는 군사정권에 맞선 민주화 투쟁의 역사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이후 절개의 표상인 소나무가 가로수로 조성되면서 자연스럽게 소나무길로 불려 왔으며

주변은 젊음과 문화의 상징인 소극장과 공연장 등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예술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여행을 다니며 배우고 그림으로 나누는 지야입니다

 

 

 

 

백기완기념관

이곳 통일문제연구소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다

군사정권에 저항하며 수서 비리 사건 농성장이었고, 재야 민주인사들과 시국회의 · 선언문을 작성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며

노동자 농민들과 연대투쟁을 논의했던 민중운동의 거점이었다

이제 이곳은 백기완기념관으로 조성되어 시민에게 개방될 예정이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본관

 

 

 

 

경모궁지 안내판

 

 

 

 

경모궁

1920년 사진이다

 

 

 

 

함춘문(含春門)

궁궐 밖 동산인 함춘원 터에 세운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이 있었던 곳이다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를 함춘원으로 옮겨와 경모궁이라 높여 불렀다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증하고 신위를 종묘로 옮기면서 경모궁은 사실상의 기능은 다한다

후에 태조 · 세조 · 성종 · 숙종 · 영조 · 순조 6성조의 어진을 모시던 영희전을 옮겨 세웠다

경성제국대학이 들어서면서 건물의 원형은 대부분 사라지고 남은 건물마저 한국전쟁 때 불타버려 현재는 함춘문과 정당 터만 남아있다

 

 

 

 

서울 경모궁지 / 사적 제237호

창덕궁과 경희궁 밖에도 함춘원이 있었지만 창경궁에 딸린 이곳 함춘원만 세 개의 신문 중 한 문과 정당 터만 남아있다

 

 

 

 

실험동물봉양탑(實驗動物供養塔)

실험실에서 죽은 동물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뒷면에는 '大正 十一年 七月 五日 建之'라 새겨져 있다

1922년 7월 5일이다. 대한의원 뒷편에 있다

 

 

 

 

대한의원(大韓醫院)

1907년(융희 1) 3월, 당시 국립 의료기관에 해당하었던 광제원(廣濟院)

국립 의학교육기관이었던 의학교(醫學校)와 그 부속병원 · 대한국적십자병원이 통합되어 설립되었다

1910년 일제 강점으로 인해 조선총독부의원이 되었고 1926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개설되자 1928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재편되었다

이 건물은 대한의원 본관으로 1908년 10월 완공되었다

 

 

 

 

대한의원(大韓醫院) / 사적 제248호

1907년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설립된 근대식 국립병원이다

2층은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송촌 지석영(松村 池錫永 · 1855~1935)선생 상

조선왕조 말에 처음으로 종두법을 도입 보급한 근대의학의 개척자이며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최초로 설립된 근대 의학교육기관인 관립 의학교 초대 교장으로 이 땅에 의학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다

한글맞춤법통일안의 문법체계를 확립한 국어학자이기도 하다

 

 

 

 

박명진 박사 상(朴明鎭 博士 像)

일제강점기에 경성치과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 교수로 있다가 광복을 맞고 초대 교장이 되었다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가 창설되자, 경성치과전문학교를 치과대학에 편입시켜

1 · 2 · 3대에 걸쳐 학장을 역임하면서 치과대학의 발판을 굳히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25년에 창립된 한국인 치과의사들의 모임인 한성치과의사회 임원과 회장을 지냈다

광복 후 조선치과의사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서울과 경성의 두 갈래로 갈라진 치과의사회를 통합하는 데 힘썼으며

대한치과의학회 회장을 초대부터 연임하는 한편

초창기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해마다 종합학술대회를 열고 1954년 학술지를 창간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선인문(宣仁門)

홍화문에서 이어진 궁장 동남쪽에 설치된 문으로 창경궁 건립 당시 초창된 곳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8년에 중건하고 철종 8년(1857년)에 다시 소실, 고종 14년(1877)에 문을 복구하였다

역사적 사건으로 환경전에서 급사한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은 남편이 영문도 잘 모른 채 죽은 것도 모자라

인조가 자신의 수라에 독을 넣어 죽이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폐출시켜 선인문을 통해 궐밖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또 인현왕후를 주술로 저주해서 중전 복위를 노렸던 희빈 장씨의 시신이 선인문으로 나갔고

문정전 앞에서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도 선인문 뒤로 옮겨진 뒤 8일 동안 굶주림과 한여름 더위에 신음하다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이 밖에도 선인문은 많은 역사적 사건과 연관이 있다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평교자를 탄 채 창경궁을 나간 문이다

 

 

 

 

창경궁 백송

 

 

 

 

소춘당지(小春塘池)

조선 왕조 때부터 있었던 본래의 춘당지로 앞쪽 대춘당지는 원래 왕이 몸소 농사를 행하던 11개의 논이었다

그곳에 물을 대던 연못이었다

 

 

 

 

팔각칠층석탑 / 보물 제1119호

높이 6.5m · 조성연대는 1470년(성종 원년)이다

일제강점기 초기 창경궁에 이왕가박물관을 만들 때, 만주에서 온 상인으로부터 매입하여 세운 것으로

한국에 있는 유일한 중국 석탑이어서 가치가 크다

 

 

 

 

대춘당지(大春塘池)

원래 왕이 몸소 농사를 행하던 11개의 논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왕이 친히 쟁기를 잡고 소를 몰며 논을 가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풍년을 기원하였다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파괴할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보트를 타고 놀이를 즐기는 유원지로 만들었다

섬은 1986년에 조성하였다

 

 

 

 

환경전(歡慶殿)

환경전은 왕이나 세자가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풍기대(風旗臺) / 보물 제846호

풍기대 윗 구멍에 깃대를 꽂고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재던 것으로 방향은 24방향으로 측정하였다

영조 8년(173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성종대왕 태실비 · 태실

한국에서는 태여나자마자 한 살이 된다

뱃속의 아이도 온전한 존재로 보아 나이를 계산하기 때문이다

궁궐에서 아이가 태여나면 3~7일 사이 길한 날을 잡아 태와 태반을 깨끗이 씻고 술로 갈무리해 태항아리에 넣었다

여러 단계를 거쳐 밀봉된 태항아리는 수개월 내에 태실을 선정해 봉안했다

성종태실이 창경궁에 있는 이유는 일제강점기 설립된 이왕가박물관 진열품으로 사용하기 위해 옮겨왔기 때문이다

 

 

 

 

집복헌(集福軒) · 영춘헌(迎春軒)

양화당 동쪽에 자리한 영춘헌 일원에는 주로 후궁들이 거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이 건물들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830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 재건되었다

이때 영춘헌은 창덕궁 중희당 부근에 있던 장남궁을 헐어 재건했다

 

 

 

 

자경전 터(慈慶殿址)

높은 지대에 자리잡아 전망이 좋은 이 터는 대비의 침전인 자경전이 있던 곳이다

1877년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앞쪽으로 멀리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을 향하도록 지었다

한중록의 산실이기도 한 이 건물은 19세기 후반에 철거되었다

그후 일제 강점기에는 근대적 왕실 도서관인 「장서각」이 들어섰다가 1992년에 철거되었다

 

 

 

 

성정각(誠正閣)

세자의 교육장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내의원으로 쓰기도 했다

성정각은 단층이지만 동쪽에 직각으로 꺾인 2층의 누(樓)가 붙어 있어 독특한 모습이다

누각에는 희우루(喜雨樓) · 보춘정(報春亭)이라는 편액들이 걸려 있다

보춘정의 편액이 걸려 있는 방향이다

*

창경궁에서 창덕궁으로 왔다

 

 

 

 

선정문(宣政門) · 희정당( 熙政堂) / 보물 제815호

 

 

 

 

인정문(仁政門) / 보물 제813호

태종 5년(1405) 창덕궁의 창건 때 지어진 정전(正殿)에 이르는 출입문으로

효종 · 현종 · 숙종 · 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 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창덕궁 회화나무 군 / 천연기념물 제472호

돈화문 안마당 좌우에 자라는 회화나무가 모두 천연기념물이다

나무는 높이 15~16m · 가슴 높이 줄기 둘레 2~3m · 나이는 약 300~400년에 이른다

이곳의 회화나무는 1830년 무렵의 창덕궁 그림(동궐도 · 東闕圖)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린 창덕궁을 다시 지을 때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돈화문 주변은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공간으로 이곳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궁궐 정문 안쪽에 괴목(회화나무와 느티나무)을 심고 그 아래에서 삼공(三公)이 나랏일을 논했다」는 중국 고사에 의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궁궐 이외에 학덕 높은 선비들이 사는 마을에 흔히 심었다

그래서 학자나무라고도 한다

 

 

 

 

창덕궁 회화나무 군 / 천연기념물 제472호

 

 

 

 

월남 이상재 선생 상(月南 李商在先生像)

1850년 10월 26일, 충청도 한산군 북부면 종지리(현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조지리)에서 

가난한 선비였던 아버지 이희택(李羲宅)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7년 과거 시험에 낙방한 후 개화파 박정양의 식객(食客)이 됐다

1896년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YMCA교육부장으로 활동하면서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24년에는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을 통한 민족교육운동을 펴고

1927년에는 신간회 회장에 취임 민족지도자로 활동하다 3월 29일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외대문(外大門)

종묘엔 조선 태조부터 순종에 이르기까지 27대 519년을 이끌었던 왕과 왕비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데

그 중 묘호를 받지 못한 연산군과 광해군 두 명의 왕은 신주가 없다

종묘의 정문이다

 

 

 

 

세운상가

왼편은 재개발 중이다

 

 

 

 

종묘 하마비(宗廟 下馬碑)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놓아 누구나 이곳을 지날 때 내리라는 명이 적힌 비석이다

기록에 의하면, 태종 13년(1413) 2월에 처음으로 예조의 건의에 의하여 종묘와 궐문 앞에 설치하였던 것이 하마비의 시원이 되었다

처음에는 나무로 제작되었으나, 현종 4년(1663) 종묘 전교를 개수하면서 석비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하마비의 전면에 새긴 내용이 至此大小人員下馬碑(지차대소인원하마비) 또는 下馬碑(하마비)라고 한 것이 하마비의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하마비는 종묘 및 궁궐 외에도 문묘 · 성현 · 고관의 출생지 등 여러 곳에 세워졌는데

이는 선열(先烈)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종로성당

서울의 중심가이며 조선시대 육주비전에 의한 상거래의 중심인 종로는 명동 관할구역이었다

이러한 지역의 특수성을 감안해 지역 사목의 거점을 마련하고자

당시 서울대교구장인 원형근 라비보 아드리아노 주교는 1944년 6월 12일 일제 말엽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현재의 본당 부지 77평을 사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성당이 설립되지는 않았으며 1951년 당시 명동성당 주임인 장금구 신부가 공소로 꾸며 방문미사를 봉헌하였다

1955년 4월 10일 종로지역에 본당이 신설되고 초대 본당 주임으로 이계중(요한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부임하였다

 

 

 

 

청계천

 

 

 

 

우래옥

이곳에서 저녁을 했다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5.59km, 소요시간 8시간 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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