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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여주 영릉 · 신륵사

여주 관광순환버스를 이용해 어제는 명성황후 생가를

오늘은 세종대왕릉과 신륵사를 즐기기로 했다

*

여주 관광순환버스는 여주역에서 9시 30분부터 오후 4시까지 거의 매시간 출발한다

왕복 요금 / 성인 5,000원 · 장애인, 군인, 경로, 어린이 3,000원

편도 요금 성인 3,000원 · 장애인, 군인, 경로, 어린이 2,000원으로 비교적 싸다

평일 · 공휴일 · 일요일 구분 없음 · 월요일 휴무

 

 

숙소에서 여주역으로 가는 여강길이다

 

 

 

 

버스터미널 사거리

 

 

 

 

세종대왕상

 

 

 

 

소양천

 

 

 

 

여주역

여주시관광안내소 · 여주시 스마트도서관이 앞에 있다

관광순환버스 등의 관광 안내책자가 있다. 관광순환버스는 왼쪽 앞에서 출발한다

 

 

 

 

세종대왕상

여주역에서 9시 30분 출발하는 첫차로 왔다. 소요시간 10분이다

이곳에서 10시 40분 · 11시 40분 · 12시 40분 출발하는 버스 중 11시 40분 출발하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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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英陵) · 영릉(寧陵)을 2시간 동안 돌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빠듯했다

 

 

 

 

영릉 재실(英陵 齋室)

재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參奉 · 종9품)과 령(令 · 종5품) 등이 지내던 곳이다

제향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재실에 머물면서 제향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였다

재실은 집무실인 재실 · 제향을 준비하는 전사청 ·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향대청 ·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부속공간인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건물은 2006년 · 2017년 발굴조사 결과와 조선 후기의 문헌인 「영릉보토소등록」과 「춘관통고」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영릉 구 재실(英陵 舊 齋室) · 세종대왕릉 작은 책방

재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종9품)과 령(종5품) 등이 지내던 곳이다

제향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재실에 머물면서 제향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였다

재실은 집무실인 재실 · 제향을 준비하는 전사청 ·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향대청 · 제기를 보관하는 제지고와 부속공간인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재실이 소실되어 1970년대 성역화사업 때 현 위치에 삼문(三門)과 행랑 · 재방 · 안채만 복원되었다

현재 원래의 재실이 본래 위치에 복원되었다

 

 

 

 

홍살문 / 향 · 어로(香御路)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로 박석을 깔아 놓았다

왼쪽에 약간 높은 길은 제향 때 향을 들고 가는 길이라 하여 향로(香路)라고 하며 오른쪽 약간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로(御路)라고 한다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넘어지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걸으며 선왕의 대한 존경을 표하라는 의미다

 

 

 

 

영릉 비각(碑閣)

비석이나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를 세워둔 곳이다

 

 

 

 

영릉 신도비(英陵 神道碑)

구 영릉(舊 英陵)의 신도비는 이곳 천릉시(遷陵時) 영릉지(英陵址)에 묻었으며

신비(新碑)는 영조(英祖) 21년(1745년)에 세운 것으로서

비면(碑面)에 전서(篆書)로 조선국 세종대왕영릉 소헌왕후 부좌(朝鮮國 世宗大王英陵 昭憲王后 祔左)라 쓰여 있다

 

 

 

 

영릉(英陵)
하나의 봉분 아래 왕과 왕비 두 분의 현궁(광)을 마련한 동봉이실의 합장릉(合葬陵)이다
능 앞에 혼유석 2좌를 놓아 양위(兩位)임을 표시했을 뿐 상설제도는 단릉(單陵)과 같다

능침(陵寢)에 병석(屛石)을 세우지 아니하였으며 현궁(玄宮)의 석실제도(石室制度)는 회격(灰隔)으로 바뀌었으니

개천 영릉(改遷 英陵)의 조영년대(造營年代)가 예종 원년(睿宗 元年)으로서 예종(睿宗)의 부왕 세조(父王 世祖)의 광릉 조영시(光陵 造營時 · 1468년)

세조(世祖)의 유명(遺命)으로 병석(屛石)을 세우지 아니하고 석실(石室)을 회격(灰隔)으로 바꾼 뒤여서 이를 따랐다

 

 

 

 

영릉(英陵) · 영릉(寧陵) 안내도

세종대왕릉에서 효종대왕릉으로 가는 길은 왕의 숲길과 영릉길 두 개가 있다

왕의 숲길은 약 0.7km로 걸어서 약 15분 걸린다

이용 시기는 5월~10월, 9시부터 17시 30분까지다

*

산불 예방이 필요하거나 일몰 시기가 변하면 이용 시기 및 시간이 바뀔 수 있다

 

 

 

 

영릉길

효종대왕릉으로 가는 숲이다

 

 

 

 

영릉 재실(寧陵 齋室) / 보물 제1532호

재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參奉 · 종9품)과 령(令 · 종5품) 등이 지내던 곳이다

제향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재실에 머물면서 제향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였다

효종 영릉 재실은 원래 현종 즉위년(1659) 경기도 양주군(지금의 경기도 구리시)에 능을 만들 때 근처에 지었던 것을

현종 14년(1673) 이곳으로 옮기면서 함께 지었으며, 안향청, 제기고, 재방, 행랑채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없어져서 원형이 훼손되거나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영릉 재실은 조선시대 왕릉 재실의 기본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고

공간 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재실 건축으로 학술적 · 역사적 가치가 높다

이 재실은 2007년 11월 27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여주 효종대왕릉(영릉) 회양목 / 천연기념물 제459호

회양목은 두껍고 타원형이며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익은 사철 푸른 나무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인데 이와 같이 크게 자란 나무는 쉽게 찾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효종대왕 영릉 재실에서 300여 년 동안 자라 온 나무로 유래와 역사가 깊어 2005년 4월 30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제기고 · 제방

협문을 사이에 두고 있다

 

 

 

 

영릉(寧陵) 향 · 어로(香御路)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로 박석을 깔아 놓았다

왼쪽에 약간 높은 길은 제향 때 향을 들고 가는 길이라 하여 향로(香路)라고 하며 오른쪽 약간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로(御路)라고 한다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넘어지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걸으며 선왕의 대한 존경을 표하라는 의미다

 

 

 

 

영릉 표석(寧陵 表碑)

신도비는 태조 대부터 세종 대까지만 세웠고이후의 왕릉에는 세우지 않았다

현종 대부터 다시 세울 필요가 논의되어 숙종 8년(1682)에 조선 왕릉 중 처음으로 영릉에 표석(表石)을 세웠다

표석 앞면의 글은 이정영이 썼고, 뒷면의 글은 심익현이 썼다

 

 

 

 

영릉(寧陵)

조선 제17대 효종대왕(孝宗大王)과 인선왕후 장씨(同妃 仁宣王后 張氏)의 능(陵)이다

효종대왕은 인조(仁祖)의 제2자로서 광해군 11년(1619년) 5월 22일 한성부 중부 경행방(漢城府 中部 慶幸坊)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가 호(淏)이고 자(字)는 정연(靜淵) · 호(號)가 죽오(竹梧)이며 모후(母后)는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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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현종 15)에 효종대왕의 비인 인선왕후가 돌아가시자 왕후의 무덤을 같은 언덕의 아래 조성하여 조선왕릉 중 최초로 동원상하릉 형식이 되었다

영릉(英陵)은 왕의 무덤에만 곡장을 둘러 왕후의 무덤과 구별하였고 나머지 석물의 배치와 규모는 동일하게 갖추고 있다

봉분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고, 횡석주를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12지를 한자로 새겼다

 

 

 

 

신륵사 관광지

계획대로 세종대왕릉에서 11시 40분 출발하는 버스로 11시 55분 도착했다

이곳에서 12시 55분 · 14시 5분 · 15시 25분 · 16시 25분 출발하는 버스 중 15시 25분 버스를 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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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30분의 여유시간이 있어 이곳에서 식사를 했다

 

 

 

 

향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7m · 가슴높이 둘레 2m · 나이 120년 · 1982.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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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점을 찾다 만났다

 

 

 

 

여주도자기 판매전

 

 

 

 

여주낭만통기타 · 맑은소리색소폰 가을음악회

 

 

 

 

도자세상

여강나루장터 축제가 열리고 있다

 

 

 

 

여주 신접리 지석묘 / 향토유적 제14호

지석묘는 큰 돌을 몇 개 둘러 세우고 그 위에 넓적한 돌을 덮어 놓은 선사시대 무덤을 말하며,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만드는 방식에 따라 남방식과 북방식(탁자식)으로 구분되는데, 여주 신접리 지석묘는 북방식 지석묘로 보인다

이곳에는 낮은 산줄기가 펼쳐져 있고 야트막한 언덕지대가 있으며 남한강이 흐르는 금당천이 있어서 옛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석묘의 {고임돌 ·  굄돌}은 동쪽과 서쪽에 있으며, 덮개돌은 거정화강암 계통의 돌로 크기는 가로 195cm · 두께 35cm의 규모이다

원래 북내면 신접리 56번지 민가에 있었으나 2003년 세종대학교 박물관이 지표조사를 실시한 후 이곳으로 옮겼다

 

 

 

 

원호장군 전승비(元豪將軍戰勝碑)

원호 장군(1533~1592)은 원주 원씨로 여주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고 있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분연히 일어나 패주하는 관병과 민병 등 300여 명을 규합하여

신륵사의 팔대숲 일대에서 도강을 기도하는 왜병을 섬멸하고, 구미포(龜尾浦)에 집결한 왜적을 새벽에 기습하여 몰살시키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이같은 여강 일대에서의 전투는 무인지경으로 북진하던 왜적을 육전에서 격파한 최초의 대승이었으며

국위를 선양하고 실추된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후 그는 여주목사 겸 경기 · 강원 양도방어사로 임명되었고 강원도로 전임하여 금화에서 분전하다 전사하였다

후에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경기둘레길 33 · 34코스 안내판

 

 

 

 

신륵사와 여주 8경

신라 진평왕 시절, 원효대사의 꿈에 한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 한 장소를 보여주며 그곳에 절을 세우면 대대로 흥할 것이라 일러주었다

꿈에서 일러준 곳은 마을의 연못이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말하길 그곳엔 용이 살고 있어서 쉽사리 절을 짓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사람의 말대로 연못을 메우는 일이 어려워지자 원효대사는 그 앞에서 기도와 정성을 드리기 시작했다

기도를 드린지 칠 일째가 되자 연못에서 아홉 마리 용이 하늘로 승천하였고

그 후 연못을 메워 세운 사찰이 지금까지 1400여 년을 이어온 신륵사라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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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의 이야기도 전설처럼 전해지지만 그 이름의 유래에도 신비한 이야기가 서려있다

어느날 마암에서 재앙을 끼치는 여마가 나타나 인근 마을엔 난리가 났다

그때 나옹선사가 나타나 신기한(神) 굴레(勒)로 그 여마를 다스리고 물리쳤다

이 일화로 신륵(神勒)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이야기와 건넛마을에 나타난 사나운 여마를 인당대사가 고삐를 잡아 순하게 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진다

다른 절 등은 산속에 있는데 반해 신륵사는 남한강을 옆에 끼고 봉미산 기슭에 자리하니 그 풍광이 예로부터 자자하였다

조선시대 학자 김수온은 "여주는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라 불리는데 신륵사가 이 낙토 한복판에 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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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8경은 이외에도

제2경 / 마암어등 · 마암 앞 강가에 고기잡이배의 등불

제3경 / 학동모연 · 학동의 저녁밥 짓는 연기

제4경 / 연탄귀범 · 강에서 귀가하는 돛단배의 모습

제5경 / 양도낙안 · 양섬에 기러기떼 내리는 모습

제6경 / 팔수장림 · 오학리 강변의 숲이 강에 비치는 전경

제7경 / 이릉두견 · 세종 영릉과 효종 영릉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

제8경 / 파사과우 · 파사성의 내리는 소나기

*

지금에 와서는 여주8경 중에 볼 수 없는 모습들도 많다

하지만 신륵사의 저녁 풍경만은 전설과 역사를 간직한 채 1400여 년을 한결같이 이어져오고 있다

 

 

 

 

여강길 종합안내도

 

 

 

 

봉미산 신륵사 일주문(鳳尾山神勒寺一柱門)

 

 

 

 

강월헌(江月軒)

달이 밝게 차올랐을 때 달빛에 물든 강과 건너편 은빛 백사장이 한 폭의 그림을 이뤘다고 한다

1972년 홍수로 옛 건물이 떠내려간 이후 지금의 자리에 철근과 콘크리트로 1974년 재건축한 것이다

나옹의 당호를 따서 지었다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驪州 神勒寺 三層石塔)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은 화강암을 깎아 만든 삼층탑으로 신륵사 다층전탑 근처 강변의 암반에 세워져 있다

불교에서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무덤 양식에서 기원한 것이다

탑을 지탱하고 있는 아랫부분인 기단부는 넓적한 한 장의 돌로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는 사각형의 상대중석과 갑석을 올려 놓았다

상대중석의 각 면에는 기둥 모양의 우주(隅柱)와 탱주를 새겼고, 그 위를 덮는 갑석에는 연꽃무늬가 아래로 향하게 새겨져 있다

기단부 위 탑신부는 3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과 2층 탑신에 해당하는 돌의 네 모퉁이에는 기둥 모양의 우주가 조각되어 있으나 심하게 닳은 편이다

그 위에는 건축물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이 있는데, 기울기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고, 그 아랫부분에 새겨진 받침은 3단이나 4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3층 탑신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맨 꼭대기를 장식하는 구조물인 상륜부도 모두 없어졌다

고려 말 나옹 화상을 화장한 장소에 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조각이 부드럽고 탑신부의 짜임새가 간결하여 고려 후기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의 기록을 볼 때 나옹 스님을 다비한 장소가 바로 전탑과 석탑이 있는 지역이고

당시 수습된 사리로 부도를 조성하고, 화장한 장소에 나옹의 자취를 기념하고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일종의 기념탑이다

 

 

 

 

신륵사 다층석탑(驪州 神勒寺 多層塼塔) / 보물 제226호

한강이 아래로 보이고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전탑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 몇 기가 남아 있다

이 탑은 2단으로 기단을 쌓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탑이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몸돌 하나가 더 올라가 있어 7층으로 보이기도 한다

지붕돌 밑면 받침은 1~3층이 2단 · 4층 이상은 1단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다

꼭대기에 있는 머리 장식은 얇다

지금 탑의 형태를 원래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렵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 오는데, 그 비에 1726년(영조 2)에 고쳐지었다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 탑이 세워진 연대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벽돌의 문양 등을 근거로 고려시대로 보는 견해가 많다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각(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閣) / 보물 제230호

여주 신륵사 대장각비는 고려 말 신륵사에 대장각을 만든 후 그 내력을 새긴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보제존자 나옹 화상의 제자들과 함께 발원하여

「고려대장경」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이곳에 2층의 대장각을 지었다

비문은 예문관 제학이었던 이숭인이 짓고, 글씨는 진현관 제학이었던 권주가 썼다

뒷면에는 대장경 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했던 승려와 신도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 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의 몸체를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형태로 되어 있으며

몸체의 양옆에 있는 돌기둥이 몸체를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다

이렇게 몸체 양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나타나는 양식이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1383년(고려 우왕 9)이다

통일신라시대 이래 유행했던 거북 모양의 비받침과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는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었는데

이 비가 그러한 변화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고려 말 비석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神勒寺 普濟尊者石鐘) / 보물 제228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높이 190cm)은 신륵사 뒤편에 모셔져 있는 보제존자 나옹의 승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 위에 받침 2단을 쌓은 후 종 모양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되어 있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어져 있으며, 계단 양 옆에는 계단이 있다

탑신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불꽃 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가 솟아 있다

이 탑은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신륵사에서 1376년(고려 우왕 2)에 입적하게 되면서 우왕 5년(1379)에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세운 것이다

이 작품은 고려 후기 석종 형태의 승탑 양식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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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 보물 제231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은 보제존자 나옹의 사리탑을 밝히기 위해 세운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 볼 때 팔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불을 맑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이 있고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이 있다

받침의 표면 전체에는 꽃무늬가 가득 새겨져 있다

화사석 각 면에는 무지개 모양의 창이 나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과 이무기가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가 경쾌하게 추켜 올라가 있어 무거운 느낌이 덜하다

이 석등은 1379년(고려 우왕 5)에 보제존자 석종 및 석종비와 함께 세워진 것으로 세워진 연대가 확실하며

고려 후기 석등의 대표적 양식을 갖춘 귀중한 작품이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神勒寺 普濟尊者石鐘碑) / 보물 제229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는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의 석종형 승탑 옆에 세워진 비석이다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승려로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절 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모신 석종을 세웠고 그 옆에 석비도 세웠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석의 몸체를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되어 있으며 받침 부분의 윗면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몸체의 양옆에는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이 비는 1379년(고려 우왕 5) 세워진 비로, 비문의 내용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李穡)이 짓고

비문의 글씨는 당대의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韓脩)가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한편, 글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을 글의 맨 앞이 아닌 끝부분에 적은 것은 드문 예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비의 형식이 잘 드러난다

 

 

 

 

여주 신륵사 삼화상진영(驪州神勒寺 三和尙眞影) /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67호

신륵사 조사당에 보존되어 있는 세 폭의 초상화로 지공화상(?~1363) · 나옹화상(1320~1376) · 무학대사(1327~1405)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가운데는 지공화상을, 그 오른쪽에 나옹화상을, 왼쪽에는 무학대사를 그렸는데, 모두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 화상이다

이 삼화상진영은 신륵사의 중요한 인물인 나옹 화상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작품이다

현재 전국 사찰에 전하는 1,000여 점의 진영 가운데 심화상을 그린 진영은 매우 드물어 희귀한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신륵사 극락보전(極樂寶殿)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 측면 2칸의 다포양식으로 된 조선 후기 건물로 아미타 부처님을 주존으로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정토의 주불이자 모든 중생들에게 안락과 수명장수를 서원하시는 대자대비 부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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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다층석탑(驪州神勒寺多層石塔) / 보물 제225호

조선 성종 3년(1472)에 건립된 높이 300cm의 이 석탑은 2층의 기단부 위에 다층의 탑신부가 있어

기본적인 구조는 신라나 고려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각 부재의 세부조형은 전혀 다르다

탑의 몸면 4면에는 구름무늬와 용무늬가 조각되어 하얀 대리석의 질감으로 인해 탑의 우아함이 더욱 돋보인다

 

 

 

 

여주야 놀장

여강나루 장터 축제다

 

 

 

 

여주시종합관광안내소

 

 

 

 

신륵장 · 에이스모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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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시 25분 버스를 쉼터에서 기다리며 만들었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5.7km, 소요시간 2시간 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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