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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영릉(세종대왕릉)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1446)의 능이다

하나의 봉분 아래 석실 2개를 붙여 왕과 왕비를 함께 안치한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다

영릉은 1469년(예종 1)에 이곳으로 옮겨올 때 봉분 내부를 석실에서 회격으로 바꾸어 조성하였고

석물 중 망주석 · 장명등 · 석수 · 석인은 단릉처럼 배치하였으나 혼유석만 2개를 설치하여 합장릉임을 나타내었다

영릉은 조선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제도를 따랐다

봉분 둘레에는 난간석을 두르고 횡석주를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능의 위치를 살펴보면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으로 청룡 ·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세조 이후 영릉의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서거정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다

 

 

세종대왕역사문화관

사적 제195호인 조선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대왕의 영릉(寧陵)이 있는 여주에 위치하고 있다

2017년 5월 15일 개관하여 3개의 상설전시실 · 영상실 · 카페 · 수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여주 영릉과 영릉(麗州 英陵 · 寧陵) 안내판

조선왕릉은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조선을 통치한 왕과 비의 무덤이다

2009년 6월, 조선 왕릉 42기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 능)과 후릉(정종과 정인왕후 능)을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들이 거의 훼손없이 온전히 남아 있는 사례는 세계적으로 조선왕릉이 유일하다

 

 

 

 

조선왕릉 세계유산

조선왕릉(영릉 · 영릉)은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세계유산 조선왕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40기)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공간이며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제례가 이어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등재일 2009년 6월 30일

 

 

 

 

영릉(英陵) 안내판

조선 제4대 세종(世宗 · 1397~1450 ·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 1395~1446)의 능이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종 8년(1408)에 충녕대군으로 봉해졌고

1418년 큰형 양녕대군이 왕세자에서 폐위되자 왕세자로 책봉된 후 두 달 뒤에 왕위에 올랐다

 

 

 

 

세종대왕상

 

 

 

 

세종의 업적

32년간 재위하면서 훈민정음 창제 · 해시계 · 혼천의 · 측우기 등의 과학기구 발명 · 집현전 설치 · 아악 정비

4군 6진 개척 · 대마도 정벌 · 활자 제조 및 농업 장려 등 정치 · 경제 · 문화 · 과학 · 군사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천평일구(天平日晷)

세종 19년에 만든 휴대용 해시계이다

용기둥에서 남쪽 못까지 연결된 실이 하늘의 적도면과 나란하게 놓여 있는 시반면(시각과 절기가 그려진 받침대) 중앙을 수직으로 통과하며

햇빛에 의해 시반면 위에 나타난 그림자로 시각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문헌을 바탕으로 실제 크기를 7배로 확대하여 2003년 5월에 복원했다

 

 

 

 

영릉 재실(英陵 齋室)

재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參奉 · 종9품)과 령(令 · 종5품) 등이 지내던 곳이다

제향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재실에 머물면서 제향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였다

재실은 집무실인 재실(제방), 제향을 준비하는 전사청 ·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향대청 ·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부속공간인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건물은 2006년, 2017년 발굴조사 결과와 조선 후기의 문헌인 「영릉보토소등록」과 「춘관통고」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향대청(香大廳)

제향에 쓰일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곳이다

 

 

 

 

헌관(獻官)의 능제향 복식 / 오사모 · 천담복 · 오각대 · 백피화

헌관이란 제향 시 제관을 대표해 잔을 올리는 제관을 말한다

「주례」와 「가례」에 제사는 필히 삼헌(三獻 / 술잔을 세 번 올림)을 하도록 되어 있어

술잔을 올리는 순서에 따라 초헌관(初獻官) · 아헌관(亞獻官) · 종헌관(終獻官)으로 나눠지며 초헌관은 제례에서 대표가 되는 제관이 맡는다

국가에서 행하는 제사에 임금이 친제(親祭)하는 경우에는 왕이 초헌관이 된다

 

 

 

 

제기고(祭器庫)

제향에 쓰이는 제기를 보관하는 곳이다

 

 

 

 

제수실설도 · 제기류 · 기신제 안내도

 

 

 

 

제기고 제기류

 

 

 

 

재방(齋房)

능 관리자(참봉과 령)가 집무를 보는 곳이다

제기고가 뒤쪽에 있다

 

 

 

 

부속채

재실 부속 공간이다

 

 

 

 

곳간채

곡물 등을 보관하는 창고다

 

 

 

 

전사청 문

 

 

 

 

전사청(典祀廳)

제향을 올릴 때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향을 준비하는 곳이다

 

 

 

 

영릉 구 재실(英陵 舊 齋室) · 세종대왕릉 작은 책방

재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종9품)과 령(종5품) 등이 지내던 곳이다

제향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재실에 머물면서 제향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였다

재실은 집무실인 재실(제방) · 제향을 준비하는 전사청 ·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향대청 · 제기를 보관하는 제지고 · 부속공간인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재실이 소실되어 1970년대 성역화사업 때 현 위치에 삼문(三門)과 행랑 · 재방 안채만 복원되었다

현재 원래의 재실이 본래 위치에 복원되었다

 

 

 

 

세종대왕릉 작은 책방

원래의 재실이 본래 위치에 복원되어 예전 재실은 작은 책방으로 사용된다

책방(冊房)은 조선시대에 책을 찍어내는 일을 맡아 보던 곳으로

세종 때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위하여 두엇던 특별관청인 정음청에도 임시로 두었다

 

 

 

 

세종대왕릉 작은 책방

영릉 관람객은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방형 연지(方形 蓮池)

 

 

 

 

금천교(禁川橋)

궁궐이나 능의 내부로 들어가고자 할 때, 그 경계의 의미로 만든 개울에 놓은 다리다

 

 

 

 

홍살문 / 향 · 어로(香御路)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로 박석을 깔아 놓았다

왼쪽에 약간 높은 길은 제향 때 향을 들고 가는 길이라 하여 향로(香路)라고 하며 오른쪽 약간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로(御路)라고 한다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넘어지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걸으며 선왕의 대한 존경을 표하라는 의미다

 

 

 

 

영릉 점자 안내문 · 모형도

시각장애인을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수라간(水刺間) · 정자각(丁字閣)

제사를 모시는 건물로 제향공간의 중심적 건축물이다

정청과 배위청으로 나뉘어지며 두 개가 합쳐진 모양이 정(丁)자 모양이라 하여 정자각이라 한다

 

 

 

 

정자각(丁字閣) 내부

제상(祭床) · 향상(香床) · 축상(祝床)이 있다

 

 

 

 

제수실설도 · 제기류 · 기신제 안내도

 

 

 

 

영릉 비각(碑閣)

비석이나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를 세워둔 곳이다

 

 

 

 

영릉 신도비(英陵 神道碑)

구 영릉(舊 英陵)의 신도비는 이곳 천릉시(遷陵時) 영릉지(英陵址)에 묻었으며

신비(新碑)는 영조(英祖) 21년(1745년)에 세운 것으로서

비면(碑面)에 전서(篆書)로 조선국 세종대왕영릉 소헌왕후 부좌(朝鮮國 世宗大王英陵 昭憲王后 祔左)라 쓰여 있다

 

 

 

 

수복방(守僕房)

 

 

 

 

영릉(英陵)
하나의 봉분 아래 왕과 왕비 두 분의 현궁(광)을 마련한 동봉이실의 합장릉(合葬陵)이다
능 앞에 혼유석 2좌를 놓아 양위(兩位)임을 표시했을 뿐 상설제도는 단릉(單陵)과 같다

능침(陵寢)에 병석(屛石)을 세우지 아니하였으며 현궁(玄宮)의 석실제도(石室制度)는 회격(灰隔)으로 바뀌었으니

개천 영릉(改遷 英陵)의 조영년대(造營年代)가 예종 원년(睿宗 元年)으로서 예종(睿宗)의 부왕 세조(父王 世祖)의 광릉 조영시(光陵 造營時 · 1468년)

세조(世祖)의 유명(遺命)으로 병석(屛石)을 세우지 아니하고 석실(石室)을 회격(灰隔)으로 바꾼 뒤여서 이를 따랐다

 

 

 

 

영릉

여주로 옮긴 이후, 그 능지가 천하의 명당이라 조선의 국운이 100년이나 더 연장되었다며 '영릉가백년'이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영릉은 장헌대왕(세종)이 묻힌 곳인데

용이 몸을 돌려 자룡으로 입수하고, 신방에서 물을 얻어 진방으로 빠지니 모든 능 중에서 으뜸이다라고 적혀 있다

*

명당이라는 영릉에서 봤다

 

 

 

 

수라간(水刺間)

수라는 원래 몽고어로서 탕미(湯味)를 뜻하며 수라를 짓는 주방을 의미한다

 

 

 

 

위토답(位土畓)

위토(位土)는 제사나 관리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조성한 토지를 말하며, 논은 위토답(位土畓)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과 왕릉에 관한 전방적인 사항과 관리 이력을 기록한 「능지 · 陵誌」 등에는 각 능 · 원 · 묘에 위토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대왕 영릉의 우토답은 능제 복원을 위한 영 · 영릉 유적 정비사업(2014~2020)으로 조성되었으며, 규모는 1,300㎡ 정도이다

 

 

 

 

돌다리

 

 

 

 

영릉(英陵) · 영릉(寧陵) 안내도

세종대왕릉에서 효종대왕릉으로 가는 길은 왕의 숲길과 영릉길 두 개가 있다

왕의 숲길은 약 0.7km로 걸어서 약 15분 걸린다

이용 시기는 5월~10월, 9시부터 17시 30분까지다

*

산불 예방이 필요하거나 일몰 시기가 변하면 이용 시기 및 시간이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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