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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여주

명성황후생가 · 김원준 묘 · 여주향교를 만나기 위해 여주시를 찾았다

 

 

명성황후 생가유적지기념관으로 가는 길이다

 

 

 

 

연못

명성황후 생가유적지 기념관 앞이다

 

 

 

 

명성황후 생가유적지 기념관

명성황후 친필 · 고종 황제의 편액 등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조선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여덟 살 때까지 살 던 생가 옆에 있다

 

 

 

 

명성황후 추모비

명성황후의 애국에 대한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제작되었다

두 개의 직사각형은 과거와 현대를 상징하는 기둥이며 역사의 중심에 서있는 명성황후의 모습을 비문으로 표현하였고

조각 상층부에는 빛의 표현으로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날 명성황후의 상징으로 표현하였다

 

 

 

 

명성황후순국숭모비(明成皇后 殉國崇慕碑)

명성황후는 개화기에 개혁을 추진하던 중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 있는 건청궁 내 옥호루에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 당하였다

1981년 경복궁내의 건청궁 동쪽 구릉지에 건립하였던 이 숭모비는 건청궁의 복원과 개방으로 인하여

이전 대상지를 물색하던 중 명성황후 시해 112주기를 맞아 2007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명성황후 · 고종황제

 

 

 

 

명성황후간찰첩(明成皇后簡札帖) / 여주박물관 소장 · 19세기 · 복제품

명성황후는 한글편지를 통해 자신의 안부를 나누며 여러 질병과 아픔에 시달리는 괴로움에 대해 토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명성황후의 모습은 급변하는 시대에 맞선 강인한 여성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한글편지 속 명성황후는

담체(담이 뭉쳐서 생긴 병) · 소화불량 · 불면증 · 두통 등에 시달리는 병약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머니의 귀한 외동딸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19세기 · 복제품

명성황후는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명성황후는 4명의 남매가 있었지만 명성황후를 제외하고 모두 사망하여 외동딸로 성장했으며, 9세 때는 아버지 민치록마저 사망했다

가장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없이 외롭게 자란 명성황후에게 어머니는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안부를 살뜰히 챙기며 지난 밤에 뵙지 못해 서운한 마음을 털어 놓는 한글편지를 통해

한 나라의 황후이기 전에 어머니의 귀한 딸로서의 명성황후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명성왕후 연표

1851 (철종 2) 9월 25일(양력 11월 17일) 명성황후 출생

1859 명성황후 아버지 민치록(여성부원군)사망

1863 조선 제26대 고종 즉위 · 흥선대원군 집권

1866 명성황후 왕비 간택 · 1871 원자 출산(11월 8일 사망)

1873 공주 출산(9월 28일 사망) · 고종 친정 선포(대원군 실각)

1874 대군 출산 (조선 제27대 순종) · 어머니 한산이씨(한창부부인)사망

1882 왕세자 혼례(세자빈 민태호의 딸) · 명성황후 사망 발표 · 명성황후 환궁

1886 명성황후 이화학당 교명 하사

1888 명성황후 전속의로 미국인 여의사 홀튼 등용

1895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1897 명성황후 국장 거행 · 대한민국 수립 황제 즉위 (명성왕후에서 명성황후로 개칭)

 

 

 

 

여흥민씨족보(驪興閔氏族譜) 권1~39 · 민정중 서간(閔鼎重 書簡) · 민시중 서간(閔蓍重 書簡) · 민유중 서간(閔維重 書簡)

 

 

 

 

고종황제 사진(高宗皇帝寫眞)

서양식 정장 차림의 고종황제를 촬영한 흑백 초상 사진이다

사진은 두껍고 빳빳한 종이판지에 부착되어 있으며 사진 바깥쪽을 따라 요철선으로 사각형 테두리가 둘러져 있다

사진 위쪽 여백에 이화문이 큼직하게 금박되어 있다. 당초 실내에 모셔 두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 속의 고종황제는 등받이가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 있다

약간 오른쪽을 향한 얼굴에 턱수염이 길게 자라 있는데 수염이 모두 흰색인 것으로 보아 노년에 찍은 사진으로 판단된다

오른손에 장갑을 쥐고 있으며 왼쪽 가슴에 훈장을 달았다

고종황제의 뒤에 일본식 산수화가 그려진 병풍이 둘러쳐져 있으며 실내 바닥에는 사방연속무늬가 있는 카펫이 깔려 있다

사진이 부착된 종이 아래 가장자리 중앙부에 ‘京城(경성)’이라는 글자가 돌출되게 찍혀 있고 그 아래에는 판독이 어려운 다섯 글자가 같은 형태로 찍혀 있다

 

 

 

 

금래서실(琴來書室) 편액

금래 민영소(琴來 閔泳韶 1852~1917) 서실에 내린 고종황제 어필 편액(高宗 御筆 扁額)이다

*

민승호 · 민규호 · 민치록 · 민영익 서간이 아래에 있다

 

 

 

 

명성황후 시해 기록화 영인본 · 명성황후 시해도

1895년 10월 8일 새벽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두 번째로 칼을 휘둘러 명성황후를 절명케 한 칼로서

길이 120cm로 성인이 한 손으로 휘두르기 힘겨울 정도로 무겁고 아직도 날이 시퍼런 살상용 칼이다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는 섬뜩한 글이 적혀 있으며

작전명을 「여우사냥」이라고 붙였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 칼은 일본의 시해 당사자인, 토우 카츠아키가 「민비를 베었을 때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와서는 않된다」라며 시해 13년 뒤인 1908년부터 지금까지 일본 쿠시다신사 금고 속에 보관되어 있다

*

이 칼은 일본에서 사진 촬영해온 것을 토대로 복제한 것이다

 

 

 

 

문예관

명성황후와 관련된 공연 · 행사등을 개최하는 문예관이다

 

 

 

 

명성황후추모비 · 명성황후순국숭모비(明成皇后 殉國崇慕碑)

 

 

 

 

명성황후 생가(明成皇后生家)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

 

 

 

 

명성황후 생가

출입금지구역이다

 

 

 

 

민유증신도비(閔維重神道碑)

머리는 용의 형상이고 거북이 모양의 기단석 몸통을 가지고 있다

용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틀어져 묘소를 향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150m 지점에 민유증 묘가 있다

 

 

 

 

명성황후생가(明成皇后生家)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 ·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1호

오른쪽의 작은 문이 민유증 묘로 가는 문이다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1호

명성황후 탄강구리비는 명성황후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고종 41년(1904)에 명성황후의 고향 집에 세운 비다

이 비가 있는 곳은 명성황후가 어린 시절에 공부한 별당이 있던 자리라 한다

명성황후는 조선 철종 2년(1851)에 태여나 고종 3년(1866)에 왕비로 책정되었다

어지러운 격동기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고종 32년(1895)에 일본 자객에 시해되었다

고종 34년(1897)에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선포하면서 명성황후로 추봉되었다

반듯한 사각 받침돌 위에 비석의 몸체를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명성황후가 태여난 마을」이라는 뜻으로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1904년 5월(光武 八年 甲辰五月 · 광무 8년 갑진 5월) 어느날 두 손을 맞잡고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라는 뜻으로

《광무팔년갑진오월일배수음체경서(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手飮涕敬書)》라고 새겨져 있다

글씨는 명성황후의 아들이자 조선 제27대 임금인 순종황제의 친필이라 전한다

비각은 1970년에 새로 보수한 것이다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1호 뒷면

「1904년 5월(光武 八年 甲辰五月 · 광무 8년 갑진 5월) 어느날 두 손을 맞잡고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라는 뜻으로

《광무팔년갑진오월일배수음체경서(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手飮涕敬書)》라고 새겨져 있다

글씨는 명성황후의 아들이자 조선 제27대 임금인 순종황제의 친필이라 전한다

 

 

 

 

민유증 묘(閔維重墓) / 향토유적 제5호

인현왕후의 아버지로 조선 19대 임금인 숙종의 장인이며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이다

민유증은 1650년(효종 1) 딸이 숙종의 왕비가 되자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돈녕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다

노론(老論)의 중진으로 경서에 밝아 명망이 높았다

좌참찬 민진후와 좌의정 민진원이 아들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민유증 비석

국구여양부원군익문정민합유증지묘(國舅驪陽府院君謚文貞閔合維重之墓)

증해풍부부인이씨부우(贈 海豐府夫人李氏祔右)

증식성부부인송씨부좌(贈 恩城府夫人宋氏祔左)

 

 

 

 

망주석(望柱石) · 문인석(文人石)

묘소 오른쪽 석물이다

 

 

 

 

임견 묘(任肩墓) · 임견신도비(任肩神道碑)

임견(任肩)과 부인 태인송씨(泰仁宋氏) 묘다

임견은 임원준의 아버지 · 임사홍의 할아버지이다

태인송씨는 예조좌랑 송호(宋瑚)의 딸이다

*

임견신도비(任肩神道碑)

증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 서하부원군임공휘견지묘 배증정경부인태인송씨부좌

(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 西河府院君任公諱肩之墓 配贈貞敬夫人泰仁宋氏袝左)

 

 

 

 

임원준신도비(任元濬肩神道碑)

묘역 아래에 건립된 신도비는 장대석의 이중기단 위에 화강석 비좌를 설치했고, 이수대를 갖추었다

이수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을 세밀하게 조각하였으며 그 중앙 하단에 제액(題額)을 마련하였다

백대리석 비신에 새겨진 비문은 「호문공묘비명(胡文公墓碑銘)」만 보일 뿐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멸이 심하지만

일본 천리대(天理大)에 소장되어 있는 『여주목고적병록성책(驪州牧古蹟並錄成冊)』에 의하면

비문은 의정부좌참찬 홍귀달(議政府左參贊 洪貴達 · 1438~1504)이 찬(撰)하고

통선랑 신은윤(通善郞 辛殷尹)이 전(篆)을, 손자 임희재(任熙載 · 1472~1504)가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건립연대는 1500년(연산군 6)이다

이수는 높이 46cm · 폭 74cm · 두께 20cm이고 백대리석 비신은 높이 121cm · 폭 64cm · 두께 15cm로 신도비의 총 높이 약 237cm이다 

 

 

 

 

김원준 묘 / 향토유적 제13호

호석이 둘러쳐져 있는 봉분 앞에 상석(床石)과 묘비가 있다

고석(鼓石)이 설치되어 있는 상석(床石) 앞면에 운문(雲紋)이 장식되어 있다

상석은 길이 184cm · 폭 111cm · 두께 31cm이다

 

 

 

 

무인석(武人石)

묘역의 좌우에 있는 육중한 몸집의 무인석(높이 263cm · 폭 107cm · 두께 85cm)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양손을 갑옷의 소매 속에 넣고 있다

얼굴의 윤곽선이 뚜렷하고 카이젤 수염을 기르고 있어 호인(胡人)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초기의 무인석을 대표할만한 우수한 작품이나 피장자의 신원을 밝혀주는 묘표는 세우지 않았다

*

묘 왼쪽 무인석이다

 

 

 

 

임원준 묘역

전후분(前後墳)으로 조성되어 있다

 

 

 

 

 

민가마을

음식점과 기념품점이 있다

 

 

 

 

기념품점

 

 

 

 

명성황후 생가 소원바위

여주는 여흥민씨의 본관, 관향(貫鄉)이다

시조(始祖) 민칭도(閔稱道)가 여주에 정착한 이후 고려 공민왕 때 부터 이름 있는 관료들을 배출하면서 여흥민씨는 명문거족으로 성장했다

20세손인 강원도 관찰사 민광훈(民光勳)에게는 시중(蓍重) · 정중(鼎重) · 유중(維重) 등

덕망 높은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여주에 살면서 삼방파를 형성했고 가문이 번창했다

민유중은 인형황후(숙종의 비)의 아버지로 이어지는데 민유중의 5대손인 민치록이 명성황후의 아버지다

민치록은 스승 오희상의 딸과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

오씨와 사별한 후 얻은 부인이 나중에 한창부부인이 되는 한산 이씨다. 이들 부부는 슬하에 1남2녀를 뒀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집안의 큰아들로서 자식이 없어 근심하던 민치록은 부인과 함께 바위 아래서 정성으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기도에 효험이 있었던지 민치록이 53세 되던 해에 얻은 딸이 명성황후다

명성황후가 태어나던 1851년 11월 17일 새벽, 붉은빛이 비치고 기이한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는데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나라의 번영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명성황후의 예사롭지 않은 탄생을 알리는 하늘의 전조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일이 있은뒤부터 이 바위를 「소원바위」라고 부른다

 

 

 

 

명성황후 생가 소원바위

바위 갈라진 틈에 동전이 끼워져 있다

 

 

 

 

감고당(感古堂)

조선 왕조의 두 왕비가 기거했던 건물이다

숙종의 계비(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1667-1701)가 장희빈과의 갈등 속에서 물러났다가 복위될 때까지 5년여 동안 살았다

명성황후(1851~1895)가 8살 때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후 1866(고종 3) 왕비로 간택 · 책봉되기 전까지 머물렀다

감고당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761년 영조가 효성이 지극했던 인현왕후를 기려 「감고당(感古堂)」이란 편액을 하사한 후부터다

원래는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위치했으나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쌍문고등학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2006년 명성황후생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던 여주시가 현재 위치로 이전 · 건축했다

여러 차례 수리하고 이전하면서 감고당의 본래 모습이 변형됐지만 조선시대 중부지방 사대부 집안의 전형적인 건축구조 형태를 보여준다

 

 

 

 

감고당 방 영조 어필(感古堂 倣 英祖御筆) 편액 

1761년 영조가 효성이 지극했던 인현왕후를 기려 「감고당(感古堂)」이란 편액을 하사했다

*

서예가 전기중 작가가 영조의 글씨체로 휘호했다

영조가 직접 감고당의 편액을 휘호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이 분명하기에

영조의 글씨인 「사조어제무안왕묘비(四朝御製武安王廟碑)」를 참조하여 수백 번 임서한 후에 글씨를 썼다

 

 

 

 

사랑채

사랑채는 남자 주인과 손님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행랑채와 중문채 사이에 자리하고 대청 · 사랑방 · 누마루로 구성됐다

사랑채는 손님들에게 숙식을 대접하거나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자녀들에게 학문을 교육하는 장소였다

또한 사대부 남자들이 사랑채에 모여 학문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시를 짓고, 거문고 등 악기를 연주하며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했던 장소다

이렇듯 유학을 장려하고 문필문학을 존중하고 경전을 연구하는 풍조가 만연했던 조선시대에는 사랑방 문화가 발달했다

 

 

 

 

지재곤도순(至哉坤道順)

지극하도다! 왕비의 법도가 잘 이루어졌구나!

사랑채 주련이다

*

사랑채 주련의 글은 장지연이 쓴 「명성황후국장만장」을 참고했다

감고당은 비록 개인의 집이지만 어필 편액이 걸려있었고 인현왕후와 명성황후의 정환과 애환이 서린 집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에 서예가 전기중 작가는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받는 당나라 시대의 안진경 서체를 바탕으로

여주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의 간결한 서체를 섞어 오랜 시간을 연습한 후 휘호했다

 

 

 

 

안채

안채는 몸채 · 내당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안방 · 대청 · 건너방 · 윗방 · 다락 · 부엌 등으로 구성된다

집안의 주인 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으로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에 있다

안채의 안방은 조선시대 상류 주택 실내공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에 있으며 출산과 임종이 이뤄지던 여성들의 주된 생활공간이다

안채는 위치상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인 북쪽에 있는데 이는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제한하던 조선시대 사회상을 반영하는 공간배치라고 볼 수 있다

 

 

 

 

여주역

여주관광안내소가 앞에 있다

 

 

 

 

사랑으로 가는 길, 행복으로 가는 길

경강선을 이용하여 방문하는 여주역 이용객들의 가족 · 친구 · 연인을 맞이하는 모습과 보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주를 찾는 방문객에게 세종대왕의 꿈과 희망 · 업적을 연상할 수 있는 한글 자음의 벤치조형물과

바닥 포장그리드는 해시계를 모티프로 경강선의 11개 역을 나타낸다

스크류 형태의 조형물은 희망과 미래로 성장 발전하는 철도를 상징하며

작품주변의 인체 조형물은 경성선기차를 통해 그리운 사람들을 기다리고 만나는 반가운 모습을 조형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여주역세권3블록 행복주택아파트

 

 

 

 

여주향교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호

향교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지방에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여기에 공자를 비롯해 정몽주 · 이황 · 이이 등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현(儒賢)을 모시는 제향 기능도 겸했다

향교는 제향 공간과 교육을 위한 강학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여주향교는 고려말 이곡이 여러 곳에 향교를 세우면서 상동 마암 근처에 세웠다가 임진왜란 때에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숙종 11년(1685)에 홍문의 잣나무 고개 부근에 다시 지었으나

그 이후 공교롭게도 마을 주민들이 자주 질병에 걸리게 되자 풍수지리를 따져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1918년 · 1976년 · 1980년 · 1985년에 고쳐 지었다

이 향교는 앞쪽 낮은 곳에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뒤쪽 높은 곳에 제향을 지내는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 옆면 3칸으로 되어 있다. 그밖에도 동무 · 서무, 내삼문 등의 건물이 있다

여주향교는 전형적인 배치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그 규모도 크지 않다. 향교의 부속 재료 형태와 모양새가 지역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주향교 명륜당(明倫堂)

 

 

 

 

은행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20m · 둘레 270cm · 나이 200년 · 지정일자 1982. 10. 15

 

 

 

 

한국SGI

 

 

 

 

여주한글시장

여주장의 역사는 수로 교통 중심이었던 조선시대부터 시작된다

조선시대에는 수운을 통한 물류가 크게 발달하였는데 여주 또한 남한강을 끼고 있어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는 물자들이 모두 여주의 나루를 거쳤다

조선시대 4대 나루는 마포나루 · 광나루 · 이포나루 · 조포나루가 꼽히는데 이 가운데 이포나루와 조포나루가 여주에 속한 나루였다

이를 통해 물류와 왕실에 진상하던 여주 자채쌀과 물 맑은 남한강의 민물고기 등 특산물을 중심으로 여주에서는 일찍부터 시장이 개설되었다

현재는 상설시장 중 하나인 여주한글시장과 정기시장인 여주5일장이 남아있다

여주한글시장 중앙통에서 열리는 여주5일장은 전국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정기 시장으로 과거 번영했던 여주장의 명맥을 잇고 있다

 

 

 

 

여주 평화의 소녀상

이용녀 할머니는 1926년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에서 태여났다

2차세계대전 중인 1942년 16세에 타이완과 싱가포르를 거쳐 미얀마까지,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중 최장거리를 끌려다니며 희생당했다

해방 후 미얀마 랭군의 수용소를 거쳐 부산항으로 귀국했으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렸다

2000년 여성 국제전범법정에서 피해 사실을 증언했고, 국내외 일본의 전쟁 범죄를 고발하며 공식사과를 요구하는 투쟁을 해왔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지 못한 채 2013년 8월 11일 8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남한강

여주시청 근처에서 봤다

 

 

 

 

여주시민과 함께하는 강빛음악회

 

 

 

 

여주시민과 함께하는 강빛음악회

 

 

 

 

여주스웨첸아파트

여주에서 가장 높은 49층 아파트다

 

 

 

 

여흥민씨관향비(驪興閔氏貫鄕碑)

여주시 상동 영월공원 민씨 시조 출산지에 여흥민씨관향비를 세웠다

영월루가 언덕 위에 있다

 

 

 

 

여주 마암(麗州 馬巖) / 여주시 향토유적

마암은 여주 지명의 유래가 되는 황마(黃馬)와 여마(麗馬)가 이곳에서 솟아났다 하여 마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고려시대 여주의 지명이 황려(黃麗)라 불렀다고 한다

즉 여주의 지명은 골내근현 - 황효 - 황려 - 여흥 - 여주로 변천되었는데, 황려 지명은 이 마암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주 출신 대문호인 이규보의 한 시 중에

"두 마리의 말이 기이하게 물가에서 나왔다 하여, 이 때문에 고을 이름이 황려라네"라고 적은 내용이 있어 그 역사성이 매우 높은 유적이다

그리고 이규보 · 이색 · 서거정 · 최숙정 · 김상현 · 정약용 · 김창협 등 당내의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시와 풍류를 즐기던 명소였다

현재 마암이 시작되는 평평한 바위면에 「馬巖(마암)」이라 큰 글씨가

위쪽에 여주목사를 역임한 이인응(李寅應)과 시월(十月) 일각(日刻)이, 오른쪽에 여주군수를 지낸 신현태(申鉉泰)라는 글씨가 있다

 

 

 

 

영월루(迎月樓)

원래는 군청 정문이였으나, 1925년 당시 군수 신현태가 군청사를 옮기면서 마암으로 옮겼는데 여강과 함께 여주의 절경으로 손꼽힌다

이곳 영월루 아래에는 깎아 세운듯한 절벽이 있고 그 절벽 끝나는 곳에 마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그곳이 여흥민씨 시조가 태여난 곳이라 한다

 

 

 

 

여주 창리삼층석탑(驪州 倉里 三層石塔) / 보물 91호 · 여주 하리삼층석탑(驪州 下里 三層石塔) / 보물 92호

본래 여주읍 내 과수원 안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현재의 터로 옮긴 것이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일반적인 형태이나 그 느낌이 독특하다

고려 중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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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여주읍 하리지역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창리의 3층석탑과 함께 현재의 터로 옮겼다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은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돌을 짜서 올리는 수법이 규칙성을 보이고 온화한 비율감이 느껴져 고려전기보다는 중기의 것으로 보인다

탑을 옮겨올 당시, 1층 몸돌에서 독특한 사리홈이 발견되어 흥미를 끌고 있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3.91km, 소요시간 3시간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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