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당 이세화(雙栢堂 李世華 · 1630~1701) 선생은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이자 청백리의 한 사람이었다
효종 8년(1657)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도 · 황해도 ·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숙종 15년(1689)에 인현왕후를 폐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소를 올려 반대를 하다가 정주로 유배되었다
뒤에 인현왕후의 복위 문제를 맡으며 다시 조정에 올라왔다
이후 공조 · 형조 · 병조 · 예조 · 이조판서를 두루 거쳐 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충신의 상징인 정문(旌門)을 고향에 세우고 영의정의 관직을 내렸다
묘는 부인과 합장하여 2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묘 앞에는 묘비를 세웠으며, 그 아래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한 쌍씩 놓여 있다
이세화 선생 묘 · 부평이씨 숭모단으로 가는 길이다
이세화 선생 묘 0.9km 안내판이 있다
이세화 선생 묘 · 부평이씨 숭모단 홍살문
부평이씨 선영 제실(富平李氏先塋祭室)
부평이씨 숭모단(富平李氏崇慕壇)
계양백 장숙공 이위(桂陽伯 莊肅公 李瑋) · 부평이씨 시조 충민공 이희목(富平李氏 始祖 忠敏公 李希穆) · 부평백 문충공 이정공(富平伯 文忠公 李靖恭)
부평이씨 시조 충민공 이희목 유사비(富平李氏 始祖 忠敏公 李希穆 遺事碑)
高麗開國壁上功臣 三重大匡太師 諡忠敏始祖富平李公希穆之遺事碑
(고려개국벽상공신 삼중대광태사 시충민시조부평이공희목지유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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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말 부평지방의 호족(豪族)으로 부평이씨의 시조이다
고려가 건국하자 태조 왕건은 부평고을에 와서 주권을 잡고 고을을 다스리고 있는 이희목을 달래 높은 벼슬을 내려 부평고을을 무혈로 점령하였다
그 후 태조는 삼한통합에 공을 세운 이희목에게 고려개국벽상공신에 훈록하고 벼슬이 삼중대광태사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을 기인(其人)으로 삼아 개경으로 데려갔다
그 후에도 그의 자손에게 벼슬을 내려 요직에 등용하였는데 시호는 충민(充敏)이며
그의 증손인 문충공 이정공은 시어사문하시랑(侍御史門下侍郞)을 지내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러 부평백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부평을 본관으로 세계(世系)를 계승해 왔다고 전한다
부평백 이정공 유사비(富平伯 李靖恭 遺事碑)
高麗國門下侍中 太傳富平伯 諡文忠富平李公靖恭之遺事碑
(고려국문하시중 태전부평백 시문충부평이공정공지유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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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이씨 시조 고려통합 삼한개국벽상공신 이희목(李希穆)의 증손이며 지금도 그 후손들이 작전동에 살고 있다
그는 고려 문종 때의 문신으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문종 13년(1059)에는 예부외랑을 지냈으며 이어 남원부사가 되었다
재직 중 삼예도(三禮圖) 5천 부와 손유자서(孫柳子書) 92부를 신조하여 문종왕에게 바쳤는데 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상으로 의상을 내렸다
그리고 내직에 임용되어 한림학사 · 예부상서 · 병부상서 · 태사빈객 · 참지정사 · 수국사 등의 요직을 지냈다
문종 37년(1083)에는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고 선종 때는 문하판상서이부사 (門下判尙書吏部事)를 지냈다
숙종 2년(1097)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숙종 4년(1099) 5월에 그가 죽으니 왕은 애석하게 여겨 조위교서를 내려 부평백(富平伯)에 봉직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그리고 순종묘정에 배향하였다
계양백 장숙공 이위 유사비(桂陽伯 莊肅公 李瑋 遺事碑)
高麗國門下侍中太傳 中書令桂陽伯 諡莊肅富平李公瑋之遺事碑
(고려국문하시중태전 중서령계양백 시장숙부평이공위지유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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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백 장숙공 이위(桂陽伯 莊肅公 李瑋 · 1049년(문종3)∼1133년(인종11)
부평이씨 문충공 이정공(李靖恭)의 둘째 아들로 자(字)는 직청(直淸)이며 인종비이자 의종의 어머니 공예태후(恭睿太后)의 외조부이다
성종조에 그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호부외랑(戶部外郞)을 지냈다
숙종 원년(1096) 영주목부사(營州牧副使)가 되고 동4년(1099)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동9년(1104) 직문하(直門下)로 서북면 해영병마사를 제수받아 임간(林幹)과 함께 여진정벌에 큰 공을 세워서 그 해 12월 좌리공신(佐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1105년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윤관(尹瓘) · 오연용 (吳延龍) · 임언(林彦) 등의 패전한 죄를 극론한 바 있다
예종 4년(1110) 10월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접반신(接伴臣)으로 송나라에 다녀온 후 형부상서(形部尙書)가 되었고
이어서 그 이듬해 11월 호부사 겸 서경유수사(戶部事兼西京留守使)가 되었다
동7년(1112)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오르고 그 이듬해 11월 상주국(上柱國)이 되었다
동11월(1116) 6월 이부상서수태보문하시중(吏部尙書守太保 門下侍中)이 되었고 이어서 그 이듬해 수태복계양부개국백(守太僕桂陽府開國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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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5년(1127) 중서령진정공신(中書令鎭定功臣)의 호를 내리고 식읍(食邑) 3천호에 식실봉(食實捧) 3백호를 받았다
인종 11년(1133) 85세로 장수하고 세상을 떠나서 장숙공(莊肅公)의 시호를 내렸다
또한 그는 일찍이 사위되는 임원후(任元厚)의 처인 딸이 공예태후(恭睿太后)를 잉태했을 때 꿈을 꾸고 훗날 왕비가 될 것을 예언했는데
그 예언이 적중되어 인종왕비가 되었으니 인주(仁州) 이씨가 역신으로 몰려 망하고 부평 이씨의 세상으로 변하였다
*
그 당시 부평고을의 지명 변동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평의 칭호가 고려 현종 9년(1018) 장제(長堤)가 수주(樹州)로 됐고, 의종 4년(1150) 수주가 안남(安南)으로 개칭되었으며
그 후 고종 2년(1215) 안남(安南)이 계양(桂陽)으로 변경되었으며
충렬왕 24년(1308) 계양이 길주(吉州)로 목사 고을로 되더니 충선왕 2년(1310) 부평(富平)으로 되기 시작하였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때 인물록 내용의 부평백(富平伯) 계양백(桂陽伯) 부평군(富平君)이라 함은 수주백(樹州伯)이라 했어야 맞을 것 같다
그는 윤징고(尹徵古) 손변(孫抃)과 함께 부평출신의 위인으로 계양삼호걸(桂陽三豪傑) 중 한 사람이다
이세화 신도비(李世華神道碑)
남구만이 글을 짓고 오태주가 글씨를 썼다
이세화 선생 묘(李世華先生墓) / 경기도 기념물 60호 안내문
이세화 선생 묘(李世華先生墓) / 경기도 기념물 60호
묘는 부인과 합장하여 2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묘 앞에는 묘비를 세웠으며 그 아래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한 쌍씩 놓여 있다
이세화 선생 묘
이세화 선생 묘
이세화 선생 묘비(李世華先生墓碑)
增領議政忠肅李公世華之墓(증영의정충숙공이공세화지묘)
有明朝鮮國忠信行吏曹判書(유명조선국충신이조판서)
增貞敬夫人淳昌韓氏祔左(증정경부인순창한씨부좌)
문인석 · 망주석
이세화 신도비(李世華神道碑) · 부평이씨 선영 제실(富平李氏先塋祭室)
이세화 신도비(李世華神道碑) · 부평이씨 숭모단(富平李氏崇慕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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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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