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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진리벽화마을

홍천 「이애기 둘레길」은 구 홍천군청(홍천미술관)을 시점으로

홍천성당 · 진리벽화마을 · 홍천우체국 · 신장대리 여관거리 · 당간지주로 이어지는 길이다

시간의 창이라는 기록의 틀과 연결된 둘레길은 각각의 공간을 통해

홍천군이 오랜 시간 쌓아온 역사 · 문화 · 예술의 이야기들을 만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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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벽화마을은 홍천군민의 생활문화와 역사문화가 밀접하게 자리잡은 곳으로

홍천미술관에서 큰 길을 따라 내려가면 가정집 담벼락에 역사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애기 둘레길 · 진리벽화마을 안내판

 

 

 

 

진리세탁소

그 시절 유행한 밀리터리룩과 리폼

전국의 사정이 모두 그러했듯이 한국전쟁 이후 형편도 넉넉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물자를 미군부대에서 나누어 주거나 버리는 것을 주워서 재활용했다

식수와 난방, 먹거리 등은 어찌어찌 해결이 가능했다. 의복은 거의 군대에서 흘러나온 물자에 의존해야 했다

덕분에 1960년대 진리마을의 세탁소 업무는 남달랐다. 수선과 세탁을 위한 세탁소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주워온 미군 군복의 구멍을 메우거나 원단을 자르거나 붙여 입을 수 있도록 군복을 검은색으로 염색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세탁소를 거친 군복은 사람들의 작업복이자 평상복으로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교복으로 재탄생했다

 

 

 

 

마지기천의 추억

잡은 물고기를 마당 대야에 풀어놓고 들여다보며 키우기도 했다

물고기잡이는 어른들에게도 인기였다

지인들과 함께 모여 낚은 물고기를 구워 먹거나 탕을 끓여 술안주로 즐기며 친목을 다졌다

하지만 하수도 시설이 마땅치 않았던 시절, 생활 쓰레기가 흘러드는 문제점도 있었다

결국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7년 무렵, 마지기천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마지기천을 직선으로 펴면서 복개하여 그 흔적은 마을 이면도로에 남아 있을 뿐이다

 

 

 

 

 

마지기천의 추억

도심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라지는 것들이 존재한다. 진리를 관통하던 마지기천도 그중 하나다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여가를 즐기던 터였다

장마철이 되면 봉화산 줄기에서 마지기천으로 엄청난 물이 흘러들어왔다

이로 인해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는 불상사를 겪었지만, 물이 어느 정도 빠지면 상황은 달라졌다

홍천강과 계곡에서 유입된 각종 물고기들이 물보다 많을 정도였다

신이 난 아이들은 물고기 잡이에 정신이 없었다. 물놀이는 집으로도 이어졌다

 

 

 

 

금송여관

1970년대 초반, 홍천 어느 한 가정의 아버지는 고민이 깊어졌다

저녁만 되면 방금 전 있었던 어린 아이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밖에 나간 아이들이 늦게 귀가하고 어떤 날은 분명히 집에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었다

원인을 알고보니 당시 아이들에게 인기가 최고였던 만화영화 '우주소년 아톰'과

당시 프로그램 시청율 70%를 달성할 정도로 사랑을 받은 드라마 '여로'를 보기 위해 집을 탈출했던 것이다

1970년대만 해도 진리마을에 텔레비전은 있는 집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귀하디 귀한 가전이었다

 

 

 

 

KBS 일일드라마 여로

아들이 매일 제일건재철물 자리에 있던 금송여관을 찾아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아버지 마음을 움직였다

남의 집 마루에 걸쳐 앉아 눈치를 보면서도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연신 즐거운 미소를 짓는 아들의 표정을 보고 슬그머니 나와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후 집에는 금성 텔레비전이 놓였다

 

 

 

 

1976년도 TV프로

별당아씨 · 엄마의 얼굴 등이 있다

 

 

 

 

그 시절의 기구, 작살

물고기를 찔러 잡는 도구이며, 나무 작대기 끝에 삼지창 비슷한 뾰족한 포크를 박아 만든 것이다

신이 난 아이들은 물고기 잡기에 정신이 없었다. 물놀이는 집으로도 이어졌다

잡은 물고기를 마당 대야에 풀어놓고 매일 들여다보며 키우기도 했다

물고기잡이는 어른들에게도 인기였다

지인들과 함께 모여 낚은 물고기를 구워 먹거나 탕을 끓여 술안주로 즐기며 친목을 다졌다

 

 

 

 

세계속의 한국, 경부고속도로 개통

1970년 6월 30일에 완공하여 7월 7일에 개통 ·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1970년 7월 7일 개통됐다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약 2년 5개월만에 완공된 국내 최초의 고속도로로 전장 428km의 4차선이다

외국차관 없이 우리의 세금으로 우리의 기술진이 세계에서 가장 빨리 완공시켰다는 찬사를 받은

이 도로에는 총 429억 7,300만원의 공사비가 투입되었고 공사 도중 77명의 희생자를 냈다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좁혀놓은 이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그후 영동 · 호남 · 남해고속도로 등 수많은 고속도로 및 고속화도로의 개통을 불러왔다

 

 

 

 

 

웃으면 복이 와요

TV 코미디 프로그램의 원조, MBC 웃으면 복이 와요 · MBC, 1970년~1980년

유랑극단의 막간 프로그램으로 명맥만 이어오던 코미디는 전파를 타기 시작하면서 전성시대가 열렸다

힘들었던 1970년대, 서민들은 매주 텔레비전 앞으로 몰려들었고 1주일의 피로를 달랬다

안방극장에 웃음을 안겨준 「웃으면 복이 와요」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청년문화를 처음 연 MBC 대학가요제 · 철완 아톰 · 장학퀴즈

박정희 독재시대인 지난 1970년대 정치에 짓눌린 대학생들의 해방구이자 건전한 음악생활 향유와 건전한 대중음악의 발전을 기치로 내걸고

지난 1977년 9월 3일 서울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처음으로 대학생을 위한 문화행사인 MBC 대학가요제가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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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소념 아톰은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일본 최초 TV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방영된 만화영화로

일본 방영 당시 30% 이상의 높은 시청율을 기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 9월 19일부터 약 2년 동안 방영되었으며, 국내 TV 만화영화의 시작을 알리며 많은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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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퀴즈는 국민의 건전한 교양을 일깨우고 청소년들의 향학열을 고취시키는 교양 프로그램으로

1996년 10월 MBC의 프로그램 개편에 의해 종영되었지만 청소년들의 많은 호응과 시청자들의 요청에 의해

이듬해 1977년 1월부터는 EBS 교육방송을 통해 청소년을 위한 방송을 지속하고 있다

 

 

 

 

홍천강의 겨울

홍천의 겨울은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손끝이 아릴 정도의 추위는 넓디넓은 홍천강을 통째로 얼려버렸다

아이들은 매일 꽁꽁 얼어버린 홍천강 위에서 썰매를 타고 구멍을 뚫어 낚시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그렇게 홍천강은 겨울이 되면 모두의 놀이터가 되어 끊임없이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홍천강의 얼음낚시에 사용된 천렵용구

 

 

 

 

홍천을 사로잡은 물만두

△□각은 50년 동안 홍천을 대표하는 중국요리점으로 지금은 대를 이어 맛을 이어가는 중이다

50년 전 △□각을 통해 홍천에 물만두가 처음 선보였다

 

 

 

 

진리마을 INFORMATION

진리 일대가 일찍이 도시의 구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오래전 관아를 중심으로 행정시설 및 상권 주거지역이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홍천의 행정시설은 홍천미술관 앞쪽으로 관아에 귀속된 관청들이 모여있었으며 현재 위치가 관아에 종사했던 사람들과 서민들이 사는 중심 거리였다

과거 홍천의 중심거리였던 이곳은 판잣집과 초가집이 1980년대 초까지도 남아있었다

일본식 목조 건물도 군데군데 있었으며 주택이 밀집되어 있는 진리 일대는 특히 화재에 취약했다

안전과 재산 손실 예방을 위해 1960년대부터 해마다 소방훈련을 진행했다고 한다

 

 

 

 

1962년 진리마을 소방훈련

진리마을 INFORMATION에 있는 사진이다

 

 

 

 

 

 

몽글몽글한 맛의 추억

올챙이국수 가난했던 시절, 식구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한 어머니의 정성

 

 

 

 

용돈을 모아 가는 태극당

터미널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태극당은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는 훌륭한 방앗간

 

 

 

 

마음은 따뜻 속은 든든

1500원이면 뜨끈하고 구수한 국밥으로 속을 달랠 수 있었던 삼오식당은 주민들의 오아시스로 자리잡았다

 

 

 

 

메밀국수 만들기

 

 

 

 

메밀국수의 반죽 만들기

막국수는 메밀국수를 김칫국물에 말아먹는 강원도 향토음식의 하나다

강원도는 고원지대로서 메밀의 생육조건에 적합하여 그 수확량도 많고 질이 좋아

이곳의 막국수도 다른 지방보다 맛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칼로 썰어서 만들던 것이 점차 기계화되어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1950년 당시 메밀 섞어내기

1960년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를 마무리할 정도로 홍천에서의 막국수 역사도 깊다

닭갈비만큼 홍천에서는 막국수 집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홍천의 막국수는 메밀 함량이 높아 깊은 메밀향을 자랑한다

슴슴하면서도 다양한 재료와 조화를 이루며 씹을수록 새로운 맛을 선사하고 있어 막국수 매니아들이 많이 찾아온다

 

 

 

 

1950년 당시 시용되었던 맷돌

홍천의 맛집을 꿰차고 있는 택시기사들이 추천하는 막국수 가게가 있다

부모님이 하시던 것을 가업으로 잇고 있는 곳이다

오랫동안 만드는 방식을 지키고 있는 진리에 있는 막국수 가게이다

미리 뽑아놓은 면이 아니라 주문과 동시에 면을 눌러서 뽑아 메밀 향이 진하다

홍천의 옛날 막국수 맛을 지키기 위해 부모님의 비법에 손대지 않는다고 한다

 

 

 

 

전통 메밀국수의 압면방식

압면은 국수 반죽을 구멍이 뚫린 틀에 넣고 밀어 끓는 물에 삶아 만든 국수로써

끈기가 적은 메밀이나 쌀, 옥수수 등을 이용한 국수에 많이 사용한다

압면은 삶는 과정 중에 호화(糊化)에 의해 강한 점성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홍천막국수의 매력 포인트

막국수를 주문 시 물이냐 비빔이냐를 두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비빔국수 형태로 나오는데 동치미 육수 항아리가 옆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비빔으로 즐기고 싶으면 바로 먹으면 되고 물막국수가 당기면 동치미 육수를 양껏 덜어 담으면 된다

 

 

 

 

홍천막국수

 

 

 

 

물이 돈이 되던 시기

지금처럼 상수도가 발달하지 않은 시절, 아낙들에게 식수와 생활수는 더없이 귀했을 것이다

물이 많이 필요한 빨래를 하기 위해 어머니들은 바구니 가득 빨래거리를 담아 머리에 이고 진리서 홍천강까지 약 400m를 걸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방망이를 두드려가며 빨래하는 모습은 고단한 풍경의 상징이었다

 

 

 

 

우물의 시대

마을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은 현재 삼천리자전거(홍천로 437) 위치인 비행장 옆이었다

식수와 생활수로 이용하기 위해 매일 우물 앞은 물을 길어가는 사람들이 모였다

비행장 옆이라는 지리적 요인으로 두 가지의 불편함을 초래했다

비행기가 자주 뜨면서 우물에 먼지가 쌓이는 것, 이것은 뚜껑을 설치해 해결했다

두번째 불편함은 마을에서 다소 거리가 있었다는 점, 이를 이용해 장사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매일 물을 이고 오가는 사람들의 불편함을 돈으로 환산한 것이다

몇몇 사람이 군부대에서 나온 드럼통을 입수해 물을 담아 손수레로 옮기며 물을 팔았다

주 타킷은 물을 많이 사용하는 번화가의 식당들이었다

가격은 한 드럼이 500원, 1970년대 물가를 보면 자장면 한 그릇이 150~350원 하던 시절이니 결코 가벼운 금액은 아니었다

우물의 시대는 1971년 홍천에 상수도가 들어오면서 끝났다

1970년대 중반 무렵부터 집집마다 펌프를 설치해 편리하게 물을 사용하게 되면서다

 

 

 

 

물지게 양철물통

물지게는 부엌에서 사용되는 물을 집 밖 샘이나 우물에서 퍼 담은 물통을 져 나르는 운반기구로 농가의 지게와는 형태와 기능이 다르다

다만 지게처럼 등으로 져 나르기 때문에 물지게라 불렸다

물지게의 양쪽 갈고리에는 크기가 같은 양철 물통을 한 개씩 걸어 사용했다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홍천강

한국전쟁은 홍천읍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나룻배와 섶다리만 있던 홍천강에 비행장이 생긴 것이다

미군은 홍천에 비행장이 필요했지만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이때, 비행장으로 눈에 들어온 장소는 홍천 강변에 있는 둑이었다

홍수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쌓은 둑을 따라 활주로가 조성되고 홍천강에 비행기가 뜨고 내리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비가 내리면 범람하는 강이었다

비가 내린 뒤에는 활주로가 사라지니 공병대, 운전교육대 수고는 끝이 없었다

계속 흙을 쌓아 올리며 비행장 보수에 매달렸는데 이는 휴전 후에도 이어졌다

장마가 되면 비행기를 신작로로 올리고 길을 통제할 정도로 보수작업을 대규모로 진행했다

비행기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 비행기가 신작로로 옮겨지면 마을 행사처럼 구경꾼들이 잔뜩 몰려들었다고 한다

 

 

 

 

달려라 홍1호

홍천에 처음으로 신형 소방차가 생긴 건 1958년이다

홍1호는 미군에게 받은 G.M.C사(社) CCKW모델을 한국 정부가 개조해 2대를 만들었다

전국 통틀어 2대뿐인 소방차 중 1대가 홍천으로 배치되었고 '홍1호'라는 이름을 가진 최초의 소방차로 탄생하게 된다

그런데 신형 소방차(홍1호)는 처음 서울 종로소방서에 배치되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춘천을 거쳐 다시 홍천읍의용소방대로 오게 됐다

여기에는 홍천 출신 국회의운 이재학 의원이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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