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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지평면~용문면

지평역을 시점으로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 · 지평향교 · 송현리 효자정문 등을 거쳐

용문면 광탄리유원지 옆에 있는 택승정 · 봉황정 등을 둘러보는 걷기다

 

 

지평역

시점이다

 

 

 

 

지평리 프랑스군 전적지

한국전쟁 당시 이곳 지평리에서 미 제2보병사단 23연대에 배속된 유엔군 프랑스대대 병사들이 보여준

나폴레옹 후예다운 용맹성과 숭고한 희생은 대한민국 국토수호의 초석이 되었으며

그들의 고귀한 영혼은 아직도 이곳에 살아 숨쉬고 있다

 

 

 

 

지평면둘레길 안내판

양평군은 1,000년 동안 양근군과 지평현으로 나뉘어져 있다가 1908년에 비로서 하나가 되어 지금의 양평이 되었다

지평면은 옛 지평현의 중심이며 예로부터 국왕이 선호하는 사냥터이자 강무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높은 학식과 인품을 겸비한 선비들을 무수히 배출한 지역으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촉발된 최초의 항일의병인 을미의병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높은 산은 없지만 해발 500m 남짓한 준령들이 잘 발달해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

지평역 옆에 있다

 

 

 

 

지평양조장 갈림길

 

 

 

 

지공지평

지평중고등학교 사회적협동조합이다

 

 

 

 

양평 지평양조장(국가등록문화재 제594호)

일제강점기에 설립하여 해방 이후 운영자가 바뀐 뒤 현재 3대에 걸쳐 이어가고 있다

1925년 무렵에 세워진 양조장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 중 하나이다

한옥 건물에 일본의 건축 기술이 더해졌고, 당시 술 생산 공장의 기능적 특성을 건축적으로 잘 보여 준다

환기를 위해 높은 창을 두고,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천장에 왕겨를 채웠다

양조장 안쪽에 있는 30m 깊이의 우물은 술을 만드는 물로 사용하였다

*

지평주조 옆에 지평리전투 사령부 석비가 있다

현재 지평주조는 춘천으로 이전했다

 

 

 

 

양평 지평양조장

지평양조장은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지휘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51년 2월 양평 지평리 일대에서 유엔군은 중공군과 4일간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지평리전투로 당시 지평리 일대는 폐허가 되었다

지평양조장은 당시 유엔군지휘소였기 때문에 유일하게 건물이 남아 있다

 

 

 

 

양평 지평양조장

공장 설립과 함께 만들어진 30m 깊이의 우물을 길어 술을 만드는 물로 사용하였는데

옛부터 물맛 좋기로 유명하며 공장설립시 심어진 공장 앞 버드나무 뿌리들이

우물 주위를 수십 년간 촘촘히 둘러싸 우물을 자연 정화시켜 주는 작용까지 해주고 있다

 

 

 

 

지평중고등학교

지평리전투 참전비가 있다

 

 

 

 

지평리전투 참전비

1951년 2월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지평리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미합중국 제2보병사단 제23전투단 장병에게 바치다

*

지평중고등학교 안에 있다

 

 

 

 

지평1리마을회관

 

 

 

 

지평면사무소

 

 

 

 

 

을미의병 발원지 지평 안내판

 

 

 

 

국맥 지평의병 발상지 빗돌

지평현은 을미의병 최초의 발상지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분노한 지평 출신 이춘영, 안승우, 김백선 등이

4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처음으로 의병의 창의를 선포하였다

지평의병의 일부는 간도와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으로 활약하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광복군으로 편입되었으며, 광복군은 해방 후 국군으로 이어진다

*

매년 6월 초 양평의병의 날 기념행사에서는 전야제로 지평의병 출정식이 재현된다

 

 

 

 

지평 공이막국수

이곳에서 이른 점심을 했다

 

 

 

 

지평초등학교

양평 지평리 삼층석탑이 학교 안에 있다

 

 

 

 

양평 지평리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0호)

석탑은 부처의 사리를 모신 축조물로 실제 사리가 없는 경우에도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곳으로 여겨진다

지역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양평 지평리 삼층석탑은 인근 탑사니골 길가에 있었다고 한다

1936년 큰 비가 내려 탑이 무너져 탑 부재 일부를 지평초등학교로 옮겨 왔다

이후 나머지 부재도 발견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2001년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양평 지평리 삼층석탑

고려 전기에 세운 탑으로 1층 탑신석 네 면에 불상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탑에 불상을 조각한 석탑은 전국적으로 그 수가 많지 않으며, 현재 경기도에서는 양평 지평리 삼층석탑뿐이다

 

 

 

 

모라치산

지평교에서 봤다

 

 

 

 

지평관아 터 안내판

지평면 지평리는 조선시대 지평현의 읍치지역이다

읍치는 군 · 현을 다스렸던 관아를 비롯하여 객사, 향청, 작청 등의 관공서가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다

1872년 지평현여지도를 보면 봉미산 아래쪽과 학교(鶴橋)가 놓인 하천 위쪽으로 관청 건물이 밀집해 있었다

현재 면사무소가 있는 중심지보다 조금 위쪽에 관공서들이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평이 양근과 병합되어 양평군이 된 후에는 읍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관아와 객사도 일찌감치 사라져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여지도서나 지평군읍지여지도에는 향교가 고을로부터 서쪽으로 2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행히도 향교는 제자리에 남아 있으니 기록과는 반대로 향교에서 동쪽으로 2리 떨어진 곳을 탐색하여 보니

결론은 지평교회 부근인 관교길 33-6에 관아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주민 제보와도 일치할 뿐더러 이 일대에서는

조선 후기 건물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 자기 등이 많이 발견되어 신빙성이 더 커졌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지평면에서는 관아터를 조사하였고 주춧돌과 말구유 등 상당수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평의병 지평리전투기념관 전시공간 1

민족의 암흑기에 횃불처럼 타올랐던 항일의병의 효시

일제에 의한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와 그 해 11월의 단발령 공포 후

지평출신 이춘영과 김백선이 이끄는 포수 400여 명이 국가의 위기를 인식하고 전국 최초로 의병을 창의(唱義)하였다

지평의병은 최초의 을미의병으로 인근 강원지방과 충북지방의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된 대표적인 척사의병이다

 

 

 

 

지평의병 지평리전투기념관 전시공간 2

지평리전투는 중국군의 대규모 공격에 맞선 유엔군의 첫 승전보로

미 제2사단 제23연대(프랑스대대 배속)가 1951년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지평면 일대에서

중국군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막아낸 방어전투이다

중국군이 참전한 이후 유엔군이 중국군과 싸워 얻은 최초의 전술적 · 작전적 승리다

지평리전투 이후 유엔군은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과감한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다

 

 

 

 

지평리 전투참전국 전쟁영웅 미국 육군 대령 폴 프리먼(Paul L. Freeman 1907~1988)

6 · 25전쟁 역사 중에 커다란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는 지평리전투에서

미국의 폴 프리먼 대령은 우리 군보다 10배나 많은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에게 "한국은 지금까지 미군이 파견된 전쟁 지역 중에서 가장 험난한 곳이 될 것 같소

나는 연대장으로서 어떤 상항에서도 프로다운 모습을 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소"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전장의 프로답게 직접 총검을 들고 중공군에 대항했고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후송도 거부한 채 병사들과 끝까지 싸웠다

절대 물러서지 않았던 폴 프리먼 대령의 굳은 신념은 당시 지쳐가는 병사들의 가슴속에 희망이 되었다

 

 

 

 

지평리 전투참전국 전쟁영웅 프랑스 육군 중령 몽클라르(Ralph Monclar)

몽클라르 장군은 세계 제1차대전과 2차대전을 모두 참전했던 프랑스 육군 3성 장군으로 전쟁영웅이었다

6 · 25전쟁의 소식을 들은 그는 이 땅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직접 600여 명의 병력을 모아 부대를 창설하였다

대대급 규모의 부대는 중령만이 지휘할 수 있어 그는 중장에서 중령으로 스스로 내려 참전하였다

"저는 육군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험난한 지형과 추위를 뚫고 적의 대공세를 물리친 그는 우리 군의 사기를 드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지평리지구전투전적비

지평리전투는 1951년 중공군 2월 공세 당시에 미 제2사단 23연대가 배속된 프랑스군 대대와 함께

북방의 지평리에 중공군 제39군 예하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막아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미 제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좌우 인접부대가 중공군에 밀려 철수하게 됨에 따라

중공 제39군의 사면포위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중부전선 교통 요충지인 지평리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병력을 전면 방어태세로 배치하여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고립상태에서 4일 동안이나 막아내었으며

그후 미 제5기병연대가 후방으로부터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막아내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2월 공세에 실패하였으며

유엔군은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이후 최초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게 되어 재반격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 공적과 전몰장병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망미산 · 지평면사무소

 

 

 

 

을미의병기념비 · 지평리 선정비림(양평군 향토유적 제34호)

을미의병이 일어난 지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5년 양평문화원이 주축이 되어 건립한 비이다

을미의병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강제 시행에 반발하여

유생들이 주도하여 봉기한 한말 최초의 항일의병전쟁이다

1895년 11월(음) 이춘영(李春永)과 김백선(金伯先)이 지평에서 포군 4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안승우(安承禹)가 원주 안창에서 합류하여 창의를 선포하였다

지평의병은 원주, 단양, 충주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인근 강원, 충북 지역 의병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호좌의진(湖左義陣)으로 재출범한 지평의병의 구국정신은

이후 1907년 정미의병 및 일제강점기 3 · 1독립만세운동,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

조선시대에 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관리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지평면 곳곳에 세워진 것을 한데 모았다

관찰사 민태호, 순찰사 김연, 현감 이경택, 박환, 송지혼, 강위홍, 김하석

구후익, 박종염, 김학례, 이도식, 이승로, 김병이의 선정비이다

 

 

 

 

관찰사민태호영세불망비(觀察使閔公台鎬永世不忘碑)

 

 

 

 

행현감김학례영세불망비(行縣監金公學禮永世不忘碑)

 

 

 

 

행현감이도식애민선정비(行縣監李公道植愛民善政碑)

 

 

 

 

순찰사김연청덕애민선정비(巡察使金公演淸德愛民善政碑)

 

 

 

 

경주이씨 국당공파손 참전유공자 등 8명을 위한 탑

평재 이범우는 중령 출신으로 부부가 기념관과 탑을 세웠는데

탑은 비림 뒤쪽에 있고 그 위에 국당공파 선조의 묘지와 평재의 묘지도 있다

*

평재기념관(平財紀念館) 앞이다

 

 

 

 

지평향교(砥平鄕校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0호)

향교는 유학을 가르치고 인재를 길러 냈던 공립 지방교육기관으로 지금의 중 · 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시나 문장을 짓는 법,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가르쳤고, 중국과 조선의 성현에게 제사를 올렸다

건물 내력이 적힌 문서(상량문)가 명륜당에서 발견되어

지평향교가 조선전기에 세워져 조선 숙종 10년(1684)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건물의 전체 배치는 앞쪽에 교육공간, 뒤쪽에 제사공간이 자리한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앞쪽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이며, 동재 · 서재는 기숙사이다

뒤쪽 대성전과 동무 · 서무는 중국과 조선 성현의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내는 곳이지만

현재 동무 · 서무는 남아 있지 않다

지평향교는 현재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양평은 1908년 양근군과 지평군을 합친 이름이기 때문에

옛 양근군에 있었던 양근향교와 옛 지평군에 있었던 지평향교로 총 두 개의 향교가 양평에 자리 잡고 있다

 

 

 

 

명륜당(明倫堂)

 

 

 

 

대성전(大成殿)

 

 

 

 

빵집

더운 날씨로 빙수를 먹었다

 

 

 

 

지평오일뱅크 · 프로파크

 

 

 

 

지평역 방향

송현교에서 봤다

 

 

 

 

용문산 · 중원산

지평천을 따라 걸으며 봤다

 

 

 

 

용문산 · 중원산

송현1교 뒤로 보인다

 

 

 

 

지평천

 

 

 

 

숭선정사(崇先精舍) 빗돌

남원양씨 곡산공파 부총관공손 봉직랑손 세장지 빗돌이다

 

 

 

 

송현3리마을회관

 

 

 

 

송현리 효자정문(양평군 향토유적 제21호)

송현리 산현마을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 출신 효자 최광악과 최병배 부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문이다

조선 고종 19년(1882), 지평현의 유림 73명이 임금께 상소하여 지평현감이 직접 감독하여 그해 9월에 건립되었다

본래의 건물은 6 · 25전란 중에 소실되어 최씨 문중에서 1960년 경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2007년 전면 해체보수를 통해 기존 좌측 실의 마루를 없애고

팔작지붕을 맞배지붕으로 바꾸어 지금의 솟을삼문 형태를 갖추었다

전체적으로 정면 규모는 7.19m · 측면 2.43m이다

 

 

 

 

효자증조봉대부동몽교관최광악지문 고종십구년 임오구월일 명정

(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崔匡岳之門 高宗十九年壬午九月日 命禎)

최광악(崔匡岳 · 1756~1816)의 효행을 기린 현판으로 가운데 실에 걸려 있다

그는 8세 때 86세의 모친이 별세 직전에 닭고기를 먹고 싶다는 말을 듣고 동지섣달 엄동설한임에도

밤중에 4km 떨어진 월산리까지 가서 닭을 구해 모친의 소원을 풀어드렸다

 또 며칠 후 물고기가 먹고 싶다는 말을 듣고 독바위의 얼음을 깨고 붕어 3마리를 낚아 모친을 봉양했다고 한다

 

 

 

 

효자증조봉대부동몽교관최병배지문 고종십구년 임오구월일 명정

(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崔秉培之門 高宗十九年壬午九月 日 命旌)

최병배(崔秉培 · 1778~1856)의 효행을 기린 현판으로 오른쪽 실에 걸려 있다

그는 부친 최광악이 별세하자 집에서 약 2km 떨어진 묘소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했는데

호랑이도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식사 때마다 등에 업어 왕래케 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지극한 효자였다고 한다

 

 

 

 

 · 커피

소나기도 피할 겸 다시 시원한 곳에서 잠시 쉬었다

 

 

 

 

지평천

 

 

 

 

광탄삼거리

 

 

 

 

광탄만물슈퍼

 

 

 

 

용문산지구전투전적비(龍門山地區戰鬪戰績碑)

1951년 5월 용문산지구에서 전사한 국군 제6사단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1957년 7월 15일 제5사단에서 건립한 전적비이다

 

 

 

 

택승정(澤升亭 · 양평군 향토유적 제25호)

1830년(순조 30)에 광탄리의 남원양씨(南原梁氏)들이 대대로 사용하던 활쏘기 연습 장소에 세운 정자이다

택승(澤升)이란 연못가에서 활을 익히는 것은 임금의 법도이며

예절을 지켜 정자를 오르고 내리는 것은 군자의 도리라는 뜻이다

남원양씨 후손들은 봉황정에서 글을 읽고 택승정에서 활쏘기를 익히며 인재를 양성하였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양헌수(梁憲洙)가 프랑스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서 무술을 익힌 것에 힘입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의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에 타버린 정자의 옛 모습을 본떠 2007년 새롭게 세운 것이다

택승정에서 약 400m 떨어진 곳에 봉황정(鳳凰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봉황정(鳳凰亭 양평군 향토유적 제24호)

인조 2년(1624) 남원양씨 가문이 세운 정자로, 글을 읽고 학문을 익힌 곳이다

흑천(黑川)과 마주친 절벽 위에 있어서, 봉황이 춤추는 모습처럼 경치가 빼어나다

철종 1년(1850) 불에 타서 없어진 것을 1967년에 옛 모습대로 새로 지었다

정자에는 구성대(九成臺) · 남휘정(覽輝亭) 현판이 있다

「구성」은 태평성대를 아홉 번이나 이루니 봉황이 춤을 추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남휘」는 봉황이 천 길을 날다가 덕(德)이 빛나는 것을 보고 내려앉는다는 뜻이다

봉황정에서 양헌수를 비롯한 많은 인재들이 길러졌다

이식, 유희경, 김창흡 등 고장의 이름 있는 선비들이 시를 짓고 경치를 즐겼다

봉황정에서 약 400m 떨어진 곳에 택승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고장의 남원 양씨 후손들이 봉황정에서 글을 읽고 택승정에서 활쏘기를 익혔다고 한다

 

 

 

 

구성대(九成臺) 현판

 

 

 

 

남휘정(覽輝亭) 현판

 

 

 

 

광탄상교

벤치쉼터에서 잠시 쉬며 봤다

 

 

 

 

광탄유원지

 

 

 

 

광탄리(봉황정) 버스정류장

 

 

 

 

나해한정식

이곳에서 저녁을 했다

 

 

 

 

용문천년시장 안내지도

 

 

 

 

용문천년시장

 

 

 

 

에이스모텔

마침점이다

(2022. 0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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