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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만인의총

조선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항전하다 전사한 민 · 관 · 군 1만여 순절의사를 합장한 묘이다
왜군은 임진왜란 때 패배가 전라도 지방을 점령하지 못한데 있다고 보고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지역을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웠다
선조 30년(1597) 7월 말 이 계획에 따라 왜군 14만 명이 좌우군으로 나뉘어  좌군은 남원 · 우군은 황석산성을 공격하였다
남원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키는 전략상의 요충지로 나라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방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이곳에는 전라병사 이복남 · 구례현감 이원춘 · 조방장 김경로의 군사와 명의 부총병 양원의 3천 군사가 지키고 있었다
8월 13일부터 쳐들어오는 왜군과 맞서 침식도 잊은 채 협심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16일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접반사 정기원 · 방어사 오응정 · 별장 신호 · 부사 임현 · 판관 이덕회 등 민 · 관 · 군 1만여 명이 전사하였다

정문
1964년 구 남원역에 있던 만인의총을 현재의 향교동으로 이전하였다

 

 

순의탑 · 충의문 · 기념관
정문에서 봤다

 

 

기념관
연지와 매점이 있는 곳은 공사중이다

 

 

만인의사 순의탑
정유재란 당시 군사전략적 요충지인 남원성에서 민 · 관 · 군이 왜적과 맞서 싸우시다가
순절한 고귀한 희생정신을 3개의 수직 기둥과 상단부의 불꽃으로 형상화하였다

 

 

8충신 사적비 및 이건비 · 기념관
정유재란 때 남원성에서 왜군 5만6천 명과 혈전 분투하는 전황기록화 4폭(1600호)과 충신들의 실기행록 ·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
코로나19로 휴관이다

 

 

충의문 · 홍살문
만인의총 외삼문으로 정면 3칸 · 측면 2칸 한식 맞배지붕이며 평삼문으로 5량 굴도리 양식이다

 

 

충의문 현판

 

 

성인문
만인의총 내삼문으로 정면 3칸 · 측면 2칸 · 한식 맞배지붕이며 솟을삼문으로 3량 굴도리 양식이다

 

 

성인문 현판

 

 

충렬사 본전
광해군 4년(1612)에 사당 건립 후 효종 4년(1653) 충렬사 사액을 받았다
사당 내에는 이복남 전라병사 등 53위(位) 충신의 위패와 1만여 무명용사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충렬사 현판

 

 

충렬사 내부
남원부성 순절 만인지위(南原府城殉節萬人之位)가 가운데 있다

 

 

만인의총(萬人義塚)
정유년(1597) 8월 16일 남원성에서 왜장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가 이끄는
5만6천의 왜적과 맞서 최후의 1인까지 싸우다 순국하신 만여 명의 의사를 모신 묘이다

 

 

만인의총(萬人義塚) 비석

 

 

충렬사

 

 

만인의총 정화기념비
1979년 10월 만인의총 정화를 마치고 고 박정희 대통령이 내린 마지막 휘호이다

 

 

만인의총(萬人義塚) 본 무덤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가 종결된 날은 1597년 음력 8월 16일 밤이다
성 안에서는 1만여 명이 항전하고 있었고 몰살당하였다
성 주위를 돌아보니 길바닥에 사람의 시체가 모래알처럼 쌓여 있다(경념의 「조선일기」)
남원성에서 왜적이 철수한 것은 19일이었다
이미 부패하고 있을 그 무수한 시신들은 누가 언제 어떻게 했을까?
남원성 북벽 가까운 외진 이곳은 저지대였고 크고 깊은 웅덩이가 있었다고 한다
성안에는 무덤을 쓸수 없다는 관행을 무시하고 시신을 모아 넣고 흙을 덮어 작은 봉분 하나를 만들었다
이른바 만인의총이 만들어진 것이며 이곳이 그 자리다
뒤에 선조들께서 충렬사당을 짓고 예를 갖추어 오던 중 일제는 남원역을 만들고 이 무덤 자리를 증기기관차 석탄똥 배설장으로 만들었다
1964년 습지대인 이곳에서 왕산 기슭으로 이장하여 예를 갖추었으나
선열들의 체백은 진토인 채 이곳에 그대로 묻혀있고 혼령들 역시 이곳을 온전히 떠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이 오늘이소서 노래탑
오나리 오나리쇼셔 / 오늘이 오늘이소서
마일이 오나리쇼셔 / 매일이 오늘이소서
졈그디도 새디도 마라시고 / 저물지도 새지도 마시고
새라난(나난) 마양당직에 오나리쇼셔 / 새나마 주야장상에 오늘이 오늘이소서
*
일반 평민들이 평안한 날이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부르던 노래로 추정된다
남원 지역에서 채보(採譜)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거의 사라져가던 것을
1610년 양덕수(梁德壽)가 〈양금신보(梁琴新譜)〉를 만들면서 이 노래를 채보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
이 노래가 무엇보다도 관심을 모으게 된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수많은 사기장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망향의 한을 달래던 것이
그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져 4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의 후예들은 1673년 일본 땅에 조선의 건축양식으로 단군을 모시는 옥산궁(玉山宮)이라는 사당을 짓고
해마다 추석에 제례를 올리면서 매일의 평안을 비는 뜻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
1988년 7월 남원 광한루원(廣寒樓苑) 완월성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의 후예들이
귀향음악회를 열면서 이 노래를 원래 고향인 남원에 돌려주는 전수식을 가졌고
남원문화원에서는 이 노래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기 위해
1995년 만인의총(萬人義塚) 잔디광장에 「오늘이 오늘이소서 노래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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