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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남한산성 행궁

남한산성 행궁(사적 제480호)
행궁이란 도성 안의 궁궐이 아니라 임금이 거동할 때 머무는 별궁 또는 이궁을 말하며 남한산성의 행궁은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이라 하였다
행궁은 상궐 · 하궐로 구분되고 좌전(종묘)과 우실(사직단)이 후에 설치되었다
또 19세기 말엔 일제에 항전한 연합 의병부대의 거점이 되면서 이를 경계한 일본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돼 1세기동안 방치돼오다
1999년부터 2010년까지 복원되었다

 

 

한남루(漢南樓)
인조 2년(1624) 산성을 축성할 때, 지어진 상궐 73칸 · 하궐 154칸 · 총 227칸의 남한산성 행궁의 정문이다
한양 남쪽에 있다고 붙인 이름이다
앞에 돌받침 두 개는 산성초등학교에서 갖다 쓰는 걸 복원시 가져왔다

 

 

 

 

사각형 연못
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이 반영됐다
앞쪽으론 물이 솟고 흘러 물이 얼지 않는다

 

 

 

 

건물지(建物址)
이 곳은 백제 토성을 바탕으로 고구려를 거쳐 신라시대의 축성이 있었고
행궁 복원발굴조사 과정에선 길이 53m · 너비 18m에 달하고
지붕에는 한 장의 무게가 20kg에 달하는 무거운 기와가 사용된 통일신라시대 초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신라 문무왕 때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만든 건물로 추정된다

 

 

 

 

광주유수 서고
특이하게 짝수인  4칸으로 되어있다

 

 

 

 

좌승당(坐勝堂)
상궐 내행전 북쪽에 세워진 광주유수의 집무용 건물로서 순조 17년(1817년) 광주유수 심산수가 건립하였다
좌승당이란 명칭의 의미는 이길만한 계책만 있다면 편안히 앉아서도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뜻이다

 

 

 

 

재덕당(在德堂)
당은 전보다는 규모나 격식면에서 한 등급 낮은 건물로 숙종 14년(1688)에 유수 이세백이 건립하였다
명칭과 내부 시설로 볼 때 좌전이 건립되기 전까지 왕의 수신 공간 내지는 제사 공간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위정(以威亭)
후원의 정자로 왕이 활쏘기를 한 곳이다

 

 

 

 

내행전(內行殿)
임금의 처소 및 정전인 내행전엔 자객이 숨어 있을 경우를 대비해 가구가 없었다
인조와 집권층들의 국제정세 감각 부족으로 세자와 척화신들 그리고 인구 600만 명의 조선에서 60만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한다
화냥년(환향녀)란 말도 이 때 생긴 말이다

 

 

 

 

외행전(外行殿)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집행한 곳이다

 

 

 

 

남행각(南行閣)
남쪽에 세워진 행각으로 왕의 행차시 수행원이 기거하던 곳이다

 

 

 

 

느티나무 보호수
행궁에서 오른쪽 문으로 나오니 속이 텅빈 느티나무가 서있다
산성일기에 까치가 둥지 틀었다는 느티나무가 아닐까?
*
나무 높이 25m · 둘레 6m · 나이 410년 · 지정일자 1983. 3. 10

 

 

 

 

기와

한 장의 무게가 20kg에 달하는 무거운 기와도 있다

 

 

 

 

한남루(漢南樓) · 외삼문(外三門)

 

 

 

 

행궁터 비 · 영세불망비
행궁을 나와 좌전쪽으로 오르면 있다

 

 

 

 

왼쪽 북행각 · 가운데 외행전 · 내행전

 

 

 

 

좌전 정전(左殿 正殿) · 영령전(永寧殿)
영령전은 왕의 5대 이상의 조상을 모신 곳이다
원칙적으로는 정전에는 왕의 선친부터 고조까지의 4대와 건국시조만을 모시고 나머지는 모두 영령전에서 모신다
영령전이란 뜻은 조상과 자손들이 모두 영원토록 평안하자는 뜻이다

 

 

 

 

용두(龍頭) · 잡상(雜像)
「어처구니」란 궁궐이나 지체 높은 집의 지붕을 올릴 때 지붕 위나 처마 끝에 올리는 흙으로 만든 익살맞게 생긴 동물들의 조형물이다
이 어처구니들을 갖가지 다른 형태의 상(像)이 모여 있다하여 잡상이라고도 부른다

 

 

 

 

행궁(行宮)
왼쪽 영령전 · 오른쪽 정전 너머에 있다

 

 

 

 

영월정(迎月亭)
좌전 뒤로 돌아오르면 소나무 숲 사이 오솔길에 남한산성 내 달맞이 명소로 알려진 영월정이 있다
1957년 경기도지사 이익홍이 서장대로 오르는 중간 지점에 처음 세웠으며 최근에 복원되었다
정자의 편액은 원곡 김기승(原谷 金基昇)이 썼다

 

 

 

 

침괘정(枕戈亭)
영월정에서 행궁 입구쪽으로 잠시 내려가면 침괘정이 있다
침괘정은 무기제작소라 알려져 왔으나 온돌과 마루방 · 회랑처럼된 툇마루 등 건물 구조로 보아 집무실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건립 시기는 명확치 않으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융무고」라 이름 지었단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 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751년(영조 27) 광주유수 이기진(李箕鎭)이 중수하고 침과정이라 이름 지었는데 침과(枕戈)란 창을 베개 삼는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침과정을 침괘정이라 부르는 까닭은 명확치 않다
또 무기제작소와 무기창고는 침괘정 부근에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주민들간엔 백제 온조왕의 왕궁지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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