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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청계천~중량천~한강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이다
조선 초, 도성 건립과 배수 물길을 위해 개천 정비 작업을 했다
태종 때 자연천 정비를 하면서 둑을 쌓아 하천의 모습을 만들고
세종 때 지천과 세천에 대한 추가 정비를 했으며 청계천을 처음으로 생활하천으로 규정하였다
오늘날의 청계천의 모습은 영조 때 이르러 완성되었다

 

 

청계천 발원지
경복궁 뒤 백악산과 인왕산의 안부 창의문 부근이다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
북악산을 사진에 만들려고 경복궁을 방문하니 수문장 교대식을 한다

 

 

 

 

광화문(光化門)
1395년에 세워진 경복궁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광화문(光化門) 현판
현판이 몇 달만에 갈라져 문제가 되자 관계자 왈 "나무는 원래 비틀리고 갈라지는 거란다"
제길~ 그러니깐 자연 건조된 나무를 비싸게 사서 다시 인공 건조하고 또 장인의 손으로 다듬어 안 갈라지게 하려는 거 아닌가
몇 달만에 갈라지게 할거면 아무 나무로 아무 놈한테 시키지... 그걸 말이라고...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비각
광화문 네거리 교보빌딩 앞이다

 

 

 

 

서울 도로원표
도로 거리에 기준이 되는 도로원표가 기념비각 안에 있다

 

 

 

 

청계천 소라광장
촛불집회 등 민주광장으로 자주 사용되는 곳이다

 

 

 

 

모전교
청계천 발원지는 창의문 부근이지만 실제 청계천 물줄기의 시점이다
앞에 보이는 다리가 모전교다

 

 

 

 

청계천 2단폭포
청계천 물줄기의 시작이다
모전교에서 봤다

 

 

 

 

모전교
청계천 첫 번째 다리이자 가장 짧은 다리다
1412년(태종12) 돌다리로 만들고 「신화방동입구교」라 불렸다 하나
영조 때 나온 도성지도에는 과일을 팔던 모전이 있던 거리라 하여 모전교라 불렀다 한다

 

 

 

 

광통교
조선시대 광통방에 있던 다리였으므로 광통교라 불렸다
태조 이성계는 신덕황후를 몹씨 아껴 그의 아들 이방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이방원이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이방석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후
이미 죽은 신덕황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키고 묘를 지금의 정릉으로 옮기면서
버렸던 병풍석인 신장석(神將石)을 광통교 기초에 놓게하고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던 것이다
또 정월대보름이면 광통교에서 답교놀이를 하면 다리 병을 앓지않는다고 해 도성 안 남녀노소로 넘쳐났다 한다

 

 

 

 

광교
광통방에 있는 크고 넓은 다리라는 의미다
조선시대 궁궐에서 숭례문으로 연결되는 큰 길이였다

 

 

 

 

장통교
청계천은 이 다리를 지나면서 하천이 넓어지고 다리도 길어져 장교 · 장통교로 불렸다

 

 

 

 

삼일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한 뒤 전국에서 일제 탄압에 항거하는 시위운동을 벌렸기에
인근에 위치한 다리를 삼일교라 명명했다

 

 

 

 

청계천 상가

 

 

 

 

수표교
세종은 1441년, 이 다리 곁에 측우기와 청계천의 물 높이를 측정하기 위해 6각 방추형 돌로 만든 하천 수위계인 수표석을 세웠으며
그 후 영조는 1760년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庚 ··· 平이라는 글씨를 새겨 물높이를 4단계로 구분하였고 이때부터 수표교라 불렀다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다리는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고 수표교가 있던 자리엔 나무와 철제로 만든 임시 다리를 놓아
원래 수표교가 옮겨올 때 수월하게 뜯어낼 수 있게 하였으나 복원된 청계천의 폭과 수표교의 길이가 맞지 않아 옮기지는 못했다

 

 

 

 

청계천 공구상가
수표교 옆이다

 

 

 

 

관수교
1918년 3월에 놓인 다리로 이곳에는 청계천 준설사업을 위한 준천사가 설치되었는데
관수교란 이름은 준천사에서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세운교
'세계의 기운'이란 의미의 세운상가와 대림상가를 잇는 다리로 예전 「효경교」 터가 있던 자리다

 

 

 

 

배오개다리
배나무가 많은 고개라 하여 배나무고개라 부르다 음이 변해 배오개로 굳어졌다는 것과
숲이 울창해 산적과 산짐승들이 많아 대낮에도 백 명이 모여야 겨우 넘을만 했다 하여 백고개 · 백재라 불렀다
이 백고개가 세월이 지나면서 배고개가 되었고 오늘날 배오개가 되었다 한다

 

 

 

 

새벽다리
1905년 일제 침략으로 무너진 국권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서울 중심에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시장인 광장시장이며
그 광장시장과 방산시장을 연결하는 다리로
새벽이면 밤을 잊은 사람들의 분주함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 새벽다리라 하였다

 

 

 

 

마전교
영조 때 다리 부근에 말과 소를 팔고 사는 마전(馬廛)이 있어 마전교라 불렀다
마전은 처음 수표교 근처에 있었는데 도시가 발달하면서 냄새가 나고 지저분하다 하여 이곳으로 옮겼다

 

 

 

 

나래교
동대문 의류상권이 나비처럼 날개를 펴고 세계 패션 1번지로 비상하라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다

 

 

 

 

전태일 다리(버들다리)
과거 오간수문 상류에 왕버들이 많았다는 데서 버들다리라 하였다
2010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 40주기가 되던 날
또 다른 이름인 전태일다리 현판식을 갖고 두 개의 이름을 공동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반신 상
평화시장 입구 전태일다리에 있다
시민들의 자발적 추모의 뜻을 새긴 벽돌 모양 동판이 바닥에 박혀 있다

 

 

 

 

오간수다리
서울에 성곽을 쌓으면서 흥인지문 남쪽 성벽 아래 개천물이 도성 밖으로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다섯 개의 아치형 수문을 설치했다
오간수문은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을 설치해 두었지만 망을 뚫고 도성을 몰래 드나드는 통로로 사용되기도 했다
임꺽정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도 이 오간수문을 이용했다

 

 

 

 

맑은내다리
과거 청계천 주변 판자촌에 살던 아낙들이 빨래를 했던 곳이다

 

 

 

 

수표교 / 1890년대
빨래하는 아낙네 사진이다

 

 

 

 

청계천 판자촌 / 1961년

 

 

 

 

청계천 고가도로 / 2003년

 

 

 

 

다산교
인접 도로인 다산로처럼 실학자인 정약용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다산교라 하였다
청계천의 물살이 조금 빨라지기 시작한다

 

 

 

 

영도교
성종 때 영도사 비구를 동원해 돌다리를 놓은 후 영도교라는 어필을 내렸다 한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
그의 비인 정순황후 송씨가 이곳까지 나와 서로 영영 이별하였다고 해서 영이별다리 · 영영건넌다리라고도 불렀다

 

 

 

 

황학교
옛날 이곳 논밭에 황학이 날라와 새끼를 치고 살았다 하여 황학교라 하였다
청계천 폭이 넓어진다

 

 

 

 

소망의 벽
가로 세로 10cm 자기 타일에 시민들이 직접 그린 그림과 글씨를 부착하여 만든 조형물이다
길조로 여기던 황학이 날라 오던 옛 터에 오늘의 소망과 염원을 담은 타일을 부착했다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 있다

 

 

 

 

비우당교
세종 때 청백리인 하정 유관 선생의 집인 비우당이 이 다리 근처였는데
비우당은 비를 피할만한 집이란 뜻으로 그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비우당교라 하였다
기록엔 유관 선생은 비우당에서 왕이 하사한 일산을 쓰고 비를 피하시며 이런 일산도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지낼까 걱정하셨다 전한다

 

 

 

 

정릉천
청계천과 합류하는 곳으로 공사중이다

 

 

 

 

삼일고가도로 존치교각(存置橋脚)
비우당교를 지나면 예전 삼일고가도로에 사용되었던 교각 3개가 철거되지 않고

예전의 모습을 알리기 위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란히 서있다

 

 

 

 

징검다리
양쪽으로 있던 길이 이젠 한 쪽만 있어 물길을 건너야 한다
청계천 폭이 넓어졌다

 

 

 

 

무학교
태조 이성계를 따라 지상(地相)을 보러다니던 고승 무학대사의 이름을 딴 다리다

 

 

 

 

두물다리
다리 위치가 과거 청계천과 중량천 지류가 합류하던 지점으로 두 개의 물길이 만난다는 의미로 두물다리라 하였다
두물다리 아래엔 두 시냇물이 만나듯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청혼의 벽이 있다
하트 모양의 「언약의 동판존(zone)」과 철탑 모양의 「자물쇠 존(zone)」이 그것이다

 

 

 

 

두물다리
두 개의 물길이 만나는 형상의 다리다

 

 

 

 

언약의 동판존
청혼무대와 워터스크린을 이용해 사랑을 고백하면 청혼 받는 대상이 승락 혹은 거절 버튼을 누를 수 있다
서울시설공단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에 신청해야 된다

 

 

 

 

언약의 동판존
승락 버튼을 누르면 축하 영상 메시지가 스크린에 뜨고 두 사람의 사랑을 축하하는 조명분수가 낭만적인 춤을 춘다

 

 

 

 

자물쇠 존(zone)

 

 

 

 

청계천 판자집
내부순환도로가 보이는 앞쪽에 예전 청계천 판자집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공사중인 것 같다

 

 

 

 

내부순환도로
청계천 위로 지난다

 

 

 

 

고산자교
청계천의 마지막 다리로 하류엔 버들습지가 있다
버들습지는 다양한 생물들의 서식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버드나무 · 매자기 · 꽃창포 등 수생식물을 심어 습지로 조성한 곳이다
청계천 가운데 가장 생태적인 공간으로 조류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버들습지에는 청둥오리 · 황조롱이와 같은 조류와 피라미 · 송사리 · 메기 · 미꾸라지 같은 어류 등을 만날 수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2006년 건설교통부가 인터넷 공모를 통하여 접수하였으며
도로 · 예술 · 사진 분야 등 전문가로 구성된 선정 위원회에서 예술성 · 미관성 · 역사성 · 기능성 · 친근성 5가지 주제로 3차에 걸친 심사를 통해 선정하였다

 

 

 

 

도시 · 농촌 상생 풀사료 이용 협약 성공기념 조형물
이 시설물은 서울특별시 시설관리공단에서 고양시 한우농가에 서울도시녹지와 청계천에서 자라는 녹색풀 사료를 공급해줌으로
고품질 한우를 생산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회원 농가의 뜻을 모아 이 조형물을 제작 설치하였다

 

 

 

 

물가 데크길

 

 

 

 

신답철교
이젠 하천도, 하천변도 넓다

 

 

 

 

올해 최고 추위로 꽁꽁얼었다

 

 

 

 

제2마장교
서울메트로빌딩이 보인다

 

 

 

 

전철 용답역으로 가는 다리다

 

 

 

 

다리 건너 왼쪽 청계천 · 오른쪽 중량천 길이다
군자교 2.7km 표지판이 있다

 

 

 

 

언제부턴진 잘 모르겠으나 성동구민 누군가가 시작한 남매 옷 갈아 입히기는 한양여대 패션동아리 패크레(FACRE)에서 그 감동을 이어가고 있다
남매에게 옷을 입히고자 하시는 분은 문화공보체육과로 연락하란다

 

 

 

 

살곶이다리
태조가 함흥에 머물다가 한양에 돌아오던 길에 자신을 마중 나온 태종에게 활을 쏘았는데
태종이 차일을 치기 위해 세워두었던 큰 기둥 뒤로 몸을 피하는 바람에 화살이 그 기둥에 꽂혔다
그때부터 이곳을 살곶이라 불렀다 한다
다리는 세종 2년(1420)에 공사를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공됐다
조선시대 제일 긴 돌다리다

 

 

 

 

응봉교
확장 공사중이다

 

 

 

 

용비교
서울의 숲으로 가는 다리 위로 동부간선도로가 지난다

 

 

 

 

관악산
강변도로와 동호대교 사이로 보인다

 

 

 

 

서울의 숲
중량천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이다
뒤로 성수대교가 있다

 

 

 

 

동호대교
청계천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까지 걷다보니 전철 3호선 옥수역까지 왔다
뉴스에선 올해 최고의 추위라 하고 강바람도 물보라를 일으키며 세차게 불었지만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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