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산(修理山 469m)은 암릉과 계곡의 경관이 뛰어난 안양 · 군포 · 안산의 진산이다
또 수암봉은 수리산의 연봉으로 산봉우리가 흡사 독수리 부리와 같다하여 취암(鷲巖)으로 불리었으나
조선 말엽에 이르러 산세가 수려하다 하여 수암봉(秀巖峰)으로 개칭되었다
수암봉
수암동 들머리에서 봤다
수암동 방향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 조남IC 방향
소나무쉼터(339m)
태풍으로 많은 나무들이 쓰러져 있다
태을봉 · 관모봉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가 두 산 사이를 지난다
수암봉(398m) 정상 빗돌
Bravo 안산의 진산이다
태양산 방향
정상 전망데크
데크 위로 튀어나온 바위를 이용해 중앙에 화단을 꾸며 놓았다
소나무쉼터 마루금
정상 전망데크에서 봤다
수리산 슬기봉(469m)
군부대가 있어 오르진 못한다
부대 펜스를 끼고 올라간다
수암봉 가는 길 1.25km 아치
계속되는 비로 산은 개스 천지고 군부대 옆에서 보니 산 아래는 구름바다다
비를 피할 겸 지붕 있는 데크에서 이동식을 했다
슬기봉 정상
슬기봉 정상 안내판
슬기봉에서 칼바위로 가는 길이다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들이 많다
칼바위 입구
병풍바위
태을봉(太乙峰) 정상 빗돌
"군포1경 태을일출"이라 써 있다
비가 많이와 렌즈를 닦아도 소용 없다
관모봉
비와 개스로 관모봉 가는 길을 잘 못 들어 입산금지인 험한 바위길로 내려오니 제2전망대 앞이다
사진 왼쪽 봉으로 가야하는데 오른쪽 봉 희끗희끗한 바위를 타고 내려 왔다
수암봉
제2전망대에서 보니 비로 희미하지만 독수리 부리 같은 봉이다
수리산 출렁다리
제3전망대로 가는 길이다
수암봉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도 아래로 보인다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지
일명 영환(永煥) · 영눌(永訥) · 치운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두 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의 아버지이다
충청도 홍주(洪州) 땅 누곡(樓谷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부친 최인주(崔仁住)와 모친 경주이씨(慶州李氏)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 창설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성장해서 「내포(內浦)지방의 사도 이존창(李尊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와 혼인한 뒤
가족들과 상의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의 벙거지골(笠洞) 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박해와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星)
경기도 부평(富平)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현재의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수리산)에 정착하였다
여기에서 회장으로 신자들과 교우촌을 돌보며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토마스)를 모방(Maubant 羅)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1839년에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불안해 하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마을 교우와 일가 등 40여 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하루 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하며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모진 형벌로 전신이 헤어진 프란치스코는 말하기를 "내 평생 소원이 칼 아래서 주를 증거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죽는 것이 주님의 명이니
뜻을 이루지는 못하게 되었다" 하고는 거룩한 영혼을 천주께 바쳤다
9월11일에 최후로 곤장 25도를 맞고 그 이튿날인 9월 12일 포청옥에서 장렬히 순교하였다
1925년에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에 성인 (聖人)의 반열에 올랐다
산천계곡
수리산 성지 성당
최경환(프란치스코) 순교성당
수리산 성지순례자성당
안양으로 걸어가다 뒤를 보니 슬기봉 옆 군부대가 보인다
수리산 종주 계획은 관모봉을 놓쳐 아쉽지만
오히려 그 덕에 수리산성지에서 태양이를 위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수리산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