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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경복궁역~석파정 서울미술관

석파정(石坡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서로 사용되었던 조선 말기 근대 유적으로

아름다운 경관과 건축을 자랑하며 조상들의 풍류와 예술적 정서를 느낄 수 있다

*

석파문화원이 운영하는 서울미술관은 미술을 중심으로 국내외의 다양한 문화예술적 가치들을 발굴하여 연구 · 전시 · 교육하는 기관이다

창조적인 문화예술의 향유가 가능하도록 이끌고 새로운 예술 담론을 생성하여, 동시대의 문화예술을 선도하는 역동적인 공간이다

*

비 아니면 눈이라는 일기예보로 지난 주에 이어 미술관 걷기다

 

 

통의동 백송길 안내판

시점인 경복궁역 3번출구에서 약 100m 앞 골목 입구에 있다

 

 

 

 

통의동 백송 터

「통의동 백송」은 우리나라 백송 중에서 가장 크고(높이 16m · 흉고둘레 5m) 아름다워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으나

1990년 7월 17일 태풍으로 넘어져 고사됨으로써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어 지금은 고사된 나무 밑둥만 남아 있다

그 후 여러 그루의 어린 백송을 주위에 심어 가꾸고 있다

 

 

 

 

경복궁 영추문(景福宮 迎秋門)

경복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의 반대편인 서쪽 문으로 「가을을 반긴다」는 의미다

 1926년 일제에 의해 문 앞에 전차 종점이 만들어지면서 주변 담장과 함께 사라졌다

1975년 복원된 이후 43년 만인 지난 해 12월 6일 개방됐다

 

 

 

 

대한국적십자병원 터

정부 서울청사 창성동별관 앞에 있다

 

 

 

 

예전 진명여자고등학교 터다

 

 

 

 

청와대 사랑채

본래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1968년 1 · 21사태 이후 경호를 위해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1996년 2월 청와대 앞길을 개방하며 국민의 편의를 제공하는 시설로 개조하여 효자동 사랑방으로 개관하였고

 2010년 1월 기존의 효자동 사랑방을 지상 2층 · 지하 1층 규모로 개축하여 청와대 사랑채로 개관하였다
1층에는 대한민국관 · 하이서울관 · 기념품점이 있고,  2층에는 대통령관 · 대통령체험관 · 국정홍보관 · G20휴게실이 있다

 

 

 

 

 

4 · 19 최초 발포 현장 동판

청와대 영빈관 앞 분수광장에 4 · 19 혁명 당시 시민을 향한 첫 발포가 있었던 곳에 설치됐다


 

 

4 · 19 최초 발포 현장 동판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오후 1시 40분,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 몰려든 시민들을 향해 국가 권력이 처음으로 발포했던 곳으로

이날 이승만 전 대통령이 머물던 경무대로 가기 위해 중 · 고 · 대학생들이 경찰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무차별 총격이 시작됐다

발포로 인해 시민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다쳤다

 

 

 

 

주한교황청대사관으로 가는 창의문로다

김영삼대통령 때 만든 무궁화동산이 왼편에 있다

 

 

 

 

경복고등학교 기념관

 

 

 

 

화성 겸재 정선의 집터 빗돌

독서여가(讀書餘暇)는 정선의 사인풍속화로 선비가 툇마루에 앉아 마당의 화분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종로구 아름다운 나무 안내판

지정번호 종로구 2013-79 · 나무 이름 반송(약 90년) · 나무 크기 둘레 95cm · 높이 12m · 소재지 경기상업고등학교

 

 

 

 

백악장학회 초대 이사장 화정 이상덕 상

경기상업고등학교 7회 졸업생으로 한국은행 이사 · 부산은행장 · 한국주택은행장을 역임했다

 

 

 

 

4 · 19학생혁명 순국 학도기념비

 

 

 

 

청송당 터(聽松堂址)

조선시대 조광조의 제자로 대학자인 청송 성수침이 두문불출하면서 공부했던 독서당 터다

본관동 뒷쪽 후관동 옆에 있다

 

 

 

 

겸재 정선의 청송당(聽松堂)

겸재 정선이 백악산과 인왕산 일대의 명소 8곳을 선정하여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 실려 있다

경기상업고등학교 앞 안내판에 있는 사진이다

 

 

 

 

윤동주문학관과 자하문터널 갈림길이다

일기예보대로 갑자기 바람이 불며 눈이 온다

눈, 비 오실 때 미술관에 있으려 했는데 조금 늦었다

 

 

 

 

고 최규식 경무관 상

종로서장 재직 중이던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일행이 청와대 바로 옆에 이르렀을 때 최규식 서장이 그들을 검문하며 막아섰고

검문을 통과할 수 없었던 공비들이 외투 속에 감추고 있던 기관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되었다

당시 최규식 서장은 가슴과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서도 '청와대를 사수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 현장에서 순직했다

 

 

 

 

청계천 발원지 빗돌

이곳에서 북동쪽 북악산 정상 쪽으로 약 150m 지점에 항상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약수터가 있으므로 이를 청계천 발원지로 정하였다

*

북악산과 인왕산 고갯마루를 경계로 북서쪽 물은 홍제천 · 남동쪽은 청계천으로 흘러든다

 

 

 

 

창의문(彰義門)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문으로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 17년(1741) 다시 세운 것이다

 

 

 

 

인조반정 공신 현판

영조가 창의문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을 통해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어 놓았다

 

 

 

 

천진포자

눈을 피할 겸 중국 만두집에서 훈툰탕으로 점심을 했다

 

 

 

 

석파정 서울미술관

 

 

 

 

서울미술관 구관(M1) 제1관

「안봐도 사는데 지장없는 전시」 준비 중이다

 

 

 

 

구관(M1) 3층 낭만다방

이중섭의 엽서가 전시되어 있다

 

 

 

 

이중섭 사진

구관(M1) 3층 매표소 앞에 있다

 

 

 

 

황소 / 이중섭 1953년 경 레플리카

 

 

 

 

피리부는소년 / 에두아르 마네 1886년 레플리카

 

 

 

 

소수운렴암 각자(巢水雲簾菴 刻字)

김흥근이 당시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 불리웠던 별서를 조영하기 이전에 이 자리에 무었이 있었는지 알여져 있지 않다

다만 별서 초입 사랑채 맞은편에 커다란 암반이 있고

거기에 "소수운렴암 한수옹서증 우인정이시 신축세야(巢水雲簾菴 寒水翁書贈 友人定而時 辛丑歲也)"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김흥근이 별서 조영 시기 이전의 모습에 대해 추정하게 한다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으로, 한수옹(寒水翁  · 權尙夏 권상하, 1641~1721)이

벗 정이(定而  · 趙正萬 조정만 1656~1739)에게 신축(辛丑 · 1721 경종 1년)에 글을 써주다"라는 뜻의 이 글귀는

매우 운치 있는 시적표현으로 자연을 대하고 노래하는 조선시대 선비의 심성을 느끼게 해준다

조선 숙종 때 문신인 오재(寤齎) 조정만의 별서 조성에 관한 기록은 따로 전해지지 않으므로 더 이상 고증된 자료는 없지만

이 암각을 통해 현재의 위치에 18세기 초 또는 그 이전부터 별서가 조성되어 경영되고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

바위 윗쪽에 신라시대 삼층석탑이 있다

 

 

 

 

천세송 · 사랑채 · 안채

석파정은 본디 8채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 · 사랑채 · 별채 그리고 석파정만이 남아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바깥주인이 주로 머물며 외부 손님들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별서의 중심부가 되었던 공간이라 볼 수 있다

 

 

 

 

삼계동(三溪洞) 바위

 

 

 

 

삼계동 각자(三溪洞 刻字)

흥선대원군 별서의 사랑채 서측 후면 암반에 새겨져 남아 있는 삼계동(三溪洞)이라는 각자는

김흥근이 별서를 지어 이를 경영할 당시 이곳이 삼계동 정사(三溪洞精舍) · 삼계정 · 삼계동 산정 등으로 불렸을 것을 추정하게 한다

이는 소치(小癡) 허련(許鍊)이 집필한 「소치실록(小癡實錄)」과 양의영의 유북한기 등 일부 문헌들에서도 드러나는데

부근에 세 갈래의 내가 합쳐져 흘러 삼계동이라 불렀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흥선대원군이 이곳을 소유한 후 별서의 앞산이 모두 바위이므로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로 바꾸고 정자의 이름도 석파정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석파정 별채

고종이 방문하였을 때 이곳에서 잠을 청했다고 전해진다

사랑채 위쪽에 위치하여 아래로 내려다 보았을 때 주변 일대가 한눈에 보인다

당시에는 높은 건물이 없었으므로 더욱 빼어난 장관을 연출했을 것이다

*

전시를 보기 전 먼저 '구름길'로 올라 석파정을 돌아보기로 했다

 

 

 

 

석파정 별채 협문으로 나오면 구름길의 붉은 벤치가 있다

 

 

 

 

이중섭과 운보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담장을 끼고 언덕을 오른다

 

 

 

 

너럭바위

너럭바위는 코끼리 형상을 닮아 코끼리바위라고도 하는데 바위산으로서 인왕산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는 수려한 자연석조물이다

그 비범한 생김새와 영험한 기운으로 인해 소원을 이뤄주는 바위로 알려져 바위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들이 구전되어 온다

아이가 없던 노부부가 이 바위 앞에서 득남을 빌어 소원을 이루었고

아들의 시험 합격을 기원한 한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결국 아들이 출세의 길에 들어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소원바위 혹은 행운바위로 불리게 되었다

*

이곳부터는 '물을 품은 길'이다

 

 

 

 

석파정(石坡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

흥선대원군 별서에 자리 잡은 정자로, 대원군의 호를 따 석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석파정은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중국(당시 청나라)의 건축양식이 적절히 조합되어 있는 정자로

김흥근이 청나라 장인을 직접 불러와 조영했다는 설이 있지만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정자에 남아 있는 청나라풍의 문살 모양과 평석교의 형태 등을 통해 건축 당시 이국 취향의 정자가 주었던 독특한 아름다움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바닥을 나무로 마감하는 한국의 전통 정자와는 달리 화강암으로 바닥을 마감한 점은 건축적으로 매우 특이하다 하겠다

 

 

 

 

비포 선라이즈 / 1995

사진 찍는 거야. 널 영원히 기억하려고

'물을 품은 길'에 이런 글이 여러 개 있다

 

 

 

 

석파정 안채와 신라시대 삼층석탑이 살짝 보인다

 

 

 

 

신라시대 삼층석탑

이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올리고

그 정상에 머리장식(상륜,相輪)을 장식한 3층 석탑으로 화강암 재질의 높이 4.5m 석탑이다

4장의 돌로 잔 기단부 중 아래층 기단의 각 면마다 모서리기둥(우주,隅柱)과 가운데기둥(탱주, 撐柱) 2개가 새겨져 있고

윗층 기단 윗면의 탑신 받침이 2단으로 구성되어 신라석탑의 특징을 보인다

탑의 중심부분인 탑신부는 몸돌(탑신석, 塔身石)과 지붕돌(옥개석, 屋蓋石)이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층마다 기둥 모양이 조각되었을 분 다른 장식은 찾아볼 수 없다

각 층의 지붕돌은 크기가 줄어든 정도가 적당하고,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지붕돌 윗면에 완만한 경사가 흐르다가 양끝에서 부드럽게 살짝 들려 경쾌함을 더한다

현재 3층 지붕돌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노반석, 露盤石)만이 남아 있는 모습이지만

전체적인 형태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건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근처의 개인 소유 경작지에서 수습해 현재의 모습으로 조립하였고, 2012년 6월 경 현 위치로 이전 설치되었다

 

 

 

 

삼층석탑에서 내려서면 소수운렴암 각자 앞 물길이다

 

 

 

 

좌측 삼층석탑 · 소수운렴암 각자

오른쪽 천세송 · 안채 · 사랑채 그리고 인왕산 하얀 너럭바위가 보인다

축대를 쌓기 전에는 안채 앞까지 물길이 닿았을 것 같다

*

서울미술관 M2(신관)으로 가다 돌아 봤다

 

 

 

 

서울미술관 M2(신관) 앞 정원

350여 년된 산수유 고목이 멋지다

*

이제 미술관으로 들어간다

 

 

 

 

다색조선 / 폴 자쿨레

프랑스 태생 폴 자쿨레는 20세기 초 한국 · 일본 · 중국 등 아시아를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한 판화가이다

그는 부모님을 따라 일본에 정착하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서부터 일본의 학교가 아닌 개인교습으로 프랑스 문화와 서양화 · 판화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

서울미술관 M2(신관) 1층

 

 

 

 

폴 자쿨레 연보

이러한 교육의 영향은 1930년대 이후 발표된 폴 자쿨레의 작품에 반영된다

폴 자쿨레는 아시아인들의 문화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이를 주제 삼아 유럽적 감수성의 조화와 균형 속에서 동양의 전통기법의 방식으로 다색판화를 제작하였다

특히 폴 자쿨레는 우리나라에 관심이 많았다

서울에서 지내는 어머니를 뵙기 위해 한국에 자주 방문하였으며 당시 한국의 모습을 다색판화에 옮겼다

그는 한국인 '나영환'을 작업 조수로 맞았으며, 나성순 또한 양녀로 삼을 만큼 한국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겨울 준비 / 1951

어느 두 여인이 이불의 겉감에 바느질을 하는 모습을 담았다

여인들의 의복을 보아 다가올 추위에 대비하여 월동을 준비하는 듯하다

열려진 창을 통해 비가 내리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하단에 'Pouh-zan'이라고 표기한 것을 보아 부산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빨개진 손끝과 다소 지친 표정으로 보아 긴 시간의 바느질의 고됨이 느껴진다

화면 오른쪽 하단에 쪽가위가 있지만 이로 실을 끊는 모습에서 숙련된 여인들의 바느질 솜씨를 느껴볼 수 있는데

자쿨레에게는 재미난 장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관 (M2) 2층

바쁜 일상 가운데서도 한가로움을 즐길 수 있는 도심 속의 왕가 정원들을 소개하며 석파정의 지나온 역사를 살펴본다

경복궁의 경회루 · 창덕궁의 부용정 등 역사와 유구한 세월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공간을 함께 소개한다

뿐만 아니라 화폭으로 담아낸 석파정의 모습을 이한철의 〈석파정 병풍도〉에서 만나볼 수 있다

 

 

 

 

왕이 사랑한 정원 · 석파정

 

 

 

 

거인(去人) Walking Man

서울미술관 신관 M2의 개관 기념 전시 거인(去人)은 서울미술관 설립자인 안병관 회장이 직접 기획하였으며

서울미술관을 대표하는 소장품들 중 서울미술관 신관의 설립이념과 비전을 보여주는 최고의 작품만을 엄선하여 소개한다

전시 제목인 거인(去人)은 묵묵히 꿈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의 뜻으로

전통과 현재 · 미래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서울미술관을 착실하고 굳건한 걸음으로 지켜내고자 하는 안병광 회장의 의지가 오롯이 담겨있다

*

서울미술관 M2(신관) 지하 1층이다

 

 

 

 

거인(去人) Walking Man

이번 전시는 끝없는 고뇌와 자기 수양의 과정을 거쳐 한국 특유의 서정적 영감이 내재된 미술 양식을 확립한 김환기 · 서세옥 · 정상화 등

한국 근현대 회화 대가들의 회화 작품과 전통의 명맥을 이어가는 도예 명장 권영달의 달항아리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김환기의 최고 걸작 〈십만 개의 점 04 Ⅳ 73 #316〉이 개관 이래 처음으로 공개된다

 

 

 

 

삼계동(三溪洞)

석파정 서울미술관 후문이다

삼계동은 부근에 세 갈래의 내가 합쳐져 흘러 삼계동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

석파정에서 경복궁역으로 돌아간다

 

 

 

 

붉은 대문

행하는 자 이루고 - 가는 자는 닿는다

소년에서 거장으로

*

'행하는 자' 에서 'ㅇ'이 떨어져 나가 뜻이 묘해졌다

하지만 집에 들며 나며 보기에 주술적 의미가 생길 듯하다 

 

 

 

 

무계원(武溪園)

무계원이 위치한 무계정사지는 안평대군이 꿈을 꾼 도원과 흡사해 화가 안견에게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했고

정자를 지어 시를 읊으며 활을 쏘았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장소이다

 

 

 

 

무계원(武溪園)

과거 종로구 익선동에 있었던 서울시 등록음식점 1호인 오진암 건물 자재를 사용하여 지어졌으며

무계원의 대문을 비롯해 기와 · 서까래 · 기둥 등에 쓰였다

 

 

 

 

무계원 안채 · 행랑채

조선 말기 서화가 이병직의 집이기도 했던 오진암은 1910년대 초 대표적인 상업용 도시한옥으로써 그 희소성과 함께 보존가치가 뛰어날 뿐 아니라

남북 냉전체제를 대화국면으로 이끈 7 · 4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 낸 역사적인 장소였다

그러나 2010년 10월 관광호텔 신축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종로구는 호텔사업자와 오진암의 건물을 이축 복원하기로 뜻을 모으고 무계정사지로 옮겨서 무계원으로 재탄생시켰다

안마당과 뒷마당 등 부대시설에서는 다양한 전통문화 행사를 진행할 수 있다

현재는 세미나 · 강연 · 회의실 등으로 사용 가능하며 안마당과 뒷마당 등 부대시설에서는 다양한 전통문화 행사를 진행할 수 있다

 

 

 

 

현진건 집터 빗돌

근대문학 초기 단편소설의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소설가이다

그의 작품은 자전적 소설과 민족적 현실 및 하층민에 대한 소설 · 역사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는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빈곤한 생활을 하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

예전 폐허지였던 곳에 대문과 담장이 들어섰다

담장 안을 들여다 본다

 

 

 

 

비해당 터 · 현진건 집 터

한옥이 들어서 있는 곳이 세종의 세째 아들 안평대군 용이 살았던 비해당 터고 비해당 터 축대 아래가 현진건 집 터다

 

 

 

 

통인시장 기름떡볶이

간판에 「SCINE 1956」이라 써있다

 

 

 

 

옛 대오서점 자리

"옛날 서촌에서 작은 책방을 운영하던 '조대식'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서촌에서 나고 자란 그 청년은 주변의 소개로 원당에 살던 '권오남'이라는 아가씨를 만나 1951년에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이름 없던 그 책방은 부부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대오서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손님들에게 기억과 옛 감성이 담긴 헌책방으로 소개되는 공간이지만 그들에게는 일터이자 사랑의 보금자리였습니다

뛰어난 손재주로 서점과 집안 내부를 직접 수리하신 할아버지(조대식)와 알뜰살뜰 살림을 꾸려오신 할머니(권오남)...

너무 사소해서 보잘 것 없지만 그들의 손때 묻은 공간이다"

*

서점으로는 운영이 어려워 2012년부터 따님이 카페로 바꿔 운영한다

 

 

 

 

이상의 집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가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1910~1937)이 세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살았던 집 터의 일부에 자리하고 있다

철거될 위기에 있던 이 곳을 2009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시민 모금과 기업후원으로 매입하여 보전 · 관리하고 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이곳이 천재 작가 이상을 기억하면서

그의 작품혼이 현대에 이어지고 꽃피워지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늘 열린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상 흉상

현재 남아 있는 가옥은 그가 실제 살았던 가옥은 아니지만

이상이 올려다 본 하늘 아래 그가 밟았던 땅이 있고 짧은 생애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머물렀던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이상의 집 기념품

사진 ·  · 그림 등의 엽서 등을 팔고 있다

 

 

 

 

김가진 집터

전철 경복궁역이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3.8km, 소요시간 6시간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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